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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했던 바다는 9월이면 차가워진 수온으로 다소 썰렁하다. 그러나 산은 바다와 달리 여전히 더위와의 전쟁이다. 이럴 때는 짧은 산행 후 계곡을 찾아 들어 탁족이나 등목으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영남알프스의 능동산과 쇠점골을 연계한 여유로운 산행 코스를 밟았다.
영남알프스에서 맹주봉인 가지산(1,240m)과 2위봉인 신불산(1,209m)을 남북으로 잇는 산릉 사이에는 능동산과 간월산이 있다. 이 중 능동산은 영남알프스를 굳이 남알프스와 북알프스로 나눈다면 그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서쪽으로는 천황산(1,189m)과 잇닿아 있어 영남알프스의 삼각지로서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산의 이름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산의 모양새가 마치 큰 왕릉과 같이 둥글넓적하고 펑퍼짐하여 붙여진 것이 아닌가 싶다. 능동산(陵洞山)을 한자대로 풀어 본다면 ‘큰 무덤’이라기보다는 ‘큰 언덕’처럼 산의 긴 능선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산 아래의 상북면 송대리에는 능골(陵谷)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는 고려시대 송대리 출신인 문하시랑평장사 위열공 김취려의 묘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능골 또는 능동(陵洞)이라 이른다. 더불어 이웃 향산리의 능산(陵山) 같은 의미이며 옛 이름(1910년 이전)은 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마을이란 뜻으로 능입(陵入)이라고도 했는데 능동산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나싶다. 김취려의 묘소는 이곳 언양과 강화도 진강산(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두 곳에 모두 묘와 묘비석이 있다. 그러다보니 두 지역의 후손과 향토사학자들의 진위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쨌든 영남알프스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능동산은 그저 지나치는 산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주변에 알려진 가지산, 천황산, 간월산 등의 틈 사이에 끼어 있는 탓도 있겠지만, 이 산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색이 없다는 것도 한 몫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이 산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갖는 편견이다. 그래서 이번 등로는 석남사 주차장에서 입석 능선을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쇠점골로 하산해 탁족으로 늦더위를 식히는 코스로 잡았다.
석남사 버스정류장에서 석남터널로 이어지는 옛 산업도로를 따른다. 지금이야 능동터널을 지나는 새로운 도로가 확·포장돼 자동차도 노선버스도 모두 새 도로를 이용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많은 교통량으로 북새통을 이루던 도로다. 그런 도로가 지금은 드라이브족들만 간간이 지나가는 한적한 도로로 변하고 말았으니 격세지감을 느낄 뿐이다. 10분 정도면 살티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다시 15분쯤 후면 ‘바르게 살자’라고 새겨진 빗돌을 지나쳐 오른편 작은 계곡 옆으로 오르는 지름길로 접어든다. 숲속의 된비알에 산길마저 희미해 한바탕 진땀을 흘리게 하지만 지름길의 짧은 능선으로 20분이면 다시 도로에 올라선다.
잠시 후면 도로변의 가지산 관광휴게소 입간판이 보이고, 도로 왼편에 등나무쉼터가 있다. 이 쉼터는 입석 능선으로 오르는 초입이다. 숨을 고르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질 무렵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능선까지는 5분이면 닿지만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비탈길에 산죽이 무성하다. 능선에 올라서면 시야가 툭 트이면서 조망도 시원하다. 정면에서 약간 오른편으로 가지산이 헌걸찬 위용을 드러내고, 동북으로 뻗은 능선상의 쌀바위며 상운산이 훤하다.
시계방향으로 돌면 고헌산이 솟아 있고 상북면 일대는 물론 언양읍과 멀리 울산시가지도 잡힌다. 다시 몸을 오른편으로 틀면 오두산이 배내봉과 능선으로 연결되고, 배내고개로 잇는 구불구불한 신작로가 뱀이 기어가듯 산자락을 휘감는다. 그 오른편으로 능동산이 둥글넓적한 언덕처럼 자리하고 있다.
발걸음을 옮기면 이제부터 줄곧 멋진 암릉 길의 연속이지만 생각과는 달리 우회로도 있어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 암릉 사이에 자리한 묘지 뒤로 빠져나오면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입석이 단연 돋보인다. 산등성이에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이 바위는 옛날 절집의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연상케 한다. 암릉 길을 벗어나면 날등의 경사는 수그러들고 진달래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길이다. 이 능선은 짧은 것이 단점이기는 하지만 시원한 조망에 기암괴석의 바위군들이 발길을 붙잡는 곳이다. 곧이어 능동산에서 가지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상의 813m봉에 이른다.
돌무더기가 자리한 이 봉우리 너머로 밀양시 남명리 골짜기가 열린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을 이루는 왼편의 천황산과 오른편의 백운산, 운문산 사이로 산내천이 골짜기를 헤집고 흘러간다. 영남알프스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불리는 이 골짜기는 결국 쇠점골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813m봉에서 오른편은 가지산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40분이면 닿을 수 있는 능동산은 가지산을 등지고 능선 왼편 길로 향한다.
15분이 지날 무렵 삼각점(언양 450, 1982 재설)을 만난다. 뒤이어 평탄하던 산길이 경사가 가팔라질 즈음 운치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 쉼터로 손색이 없다. 잠시 멈추고 땀을 식힌 후 발걸음을 옮기면 목재 계단길이다. 계단을 오르며 뒤돌아 본 가지산은 영남알프스의 맏형답게 넉넉한 산세를 자랑한다. 하지만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옛 산업도로의 생채기가 을씨년스럽게 다가온다. 산업도로를 만들면서 가지산 허리를 잘라 먹더니 이번에는 능동산마저 경제논리의 미명 아래 파괴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0분 정도 목재 계단길을 올라서면 능동산, 배내고개 갈림길. 오른편 숲속으로 곧장 나아가면 하늘이 열리면서 정상이다. 산정에는 케른과 1994년 부산 구덕산악회에서 세운 표석, 그리고 삼각점(언양 312, 1982 재설)이 있다. 산정에서 바라보이는 남쪽으로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을 이어가는 산릉이 스카이라인을 그린다. 남서쪽에는 천황산, 수미봉, 코끼리봉 등이 산릉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산군을 형성한다. 1,000m가 넘는 고봉준령의 이 두 산군들 사이로는 구절양장의 배내골이 깊숙이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