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85/200212]원목 도둑과 계곡 쓰레기투기
# 뒷산에 20여년 된 참나무를 잘라 표고버섯을 재배해 보기로 했다. 지난 일요일 논산에 사는 매제가 엔진톱을 들고 달려왔다. 이 친구는 중학교 교장선생님인데, 프로 농사꾼 못지 않은 농부農夫라 할 수 있다. 나같은 얼병아리는 근접도 못한다. 하여, 어머니와 아버지가 ‘똥도 아깝다’며 신봉을 하는 친구다. 큰아들로서 가까이 사시는 부모님 농삿일을 돕다 보니 자연히 그리 된 것일텐데, 워낙 ‘일머리’가 있고 바지런하다. 큰나무 자르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밑둥이에 톱을 들이댈 때, 어디로 넘어질 것인지를 먼저 가늠해야 한다. 나무에 깔려 죽는 사람이 일년에 수십 명이 넘는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아무튼, 대여섯 그루를 자르니 1m20정도로 토막을 낸 원목이 60여개. 입춘추위인데다 땀이 비오듯 흐른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시다바리’. 농사꾼 축에도 못드는 것은 ‘당연한’ 일. 오직 매제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집 뒷밭으로 옮기는 작업이 만만찮아 은근히 걱정하고 있는데, 친척 아재가 어제 트럭을 몰고오셨다. 기회는 찬스. 이웃마을 친구와 영차영차 옮기려는데, 잘라놓은 원목토막 10여개가 보이지 않는다. 그새 어느 누가 가져간 것이다. “이런 썅-” 이건 정말로 나쁜 도둑질이다. 뻔히 버섯 키우려 잘라놓은 원목토막을 왜 가져갔을까? 화목보일러 나무를 때려고? 자기도 버섯을 키워보려는데 ‘옳다. 잘 됐다’ 불로소득不勞所得 횡재橫材windfall의 마음으로? 하지만, 이건 아니다. 나무를 베면서 흘린 땀과 표고버섯을 키워보려는 농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재는 멀쩡한 나무도 파가는 마당에 도로변에 놓인 참나무 토막은 도둑놈에겐 횡재였을 거라며, 순진한 우리를 비웃으며, 베자마자 옮겼어야 했다고 한다.
그날 아버지의 염려도 한마디로 문질러버렸는데. “아이고, 그 힘든 작업을 누가 해서 가져간대요? 사람의 양심을 그렇게 못믿으면 어떻게 산대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했는데. 참, 무색한 일이다. 아버지께는 ‘흰 거짓말white lie’을 하는 수밖에 없다. 평소 농축임산물을 훔치는 놈은 양심良心에 털난 나쁜 놈이라고 생각해온 나로선 “설마?”했었다. 이때의 ‘좋을 량良’자는 ‘도둑놈심뽀 양상군자梁(樑)上君子의 양樑’자이리라. 같은 농사꾼이라면 해서는 안될 금기禁忌행위일 것이고, 우연히 트럭을 몰고 가던 행인이 그랬겠지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해도, 이것은 죄罪받을 일일 것이다. 도로변에 말리고 있는 고추를 몽땅 쓸어갔다거나, 멀쩡한 소를 몰고 갔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입에서 나도 모르게 쌍욕이 나오곤 했는데, 내가 막상 당하고 보니 씁쓸하기가 말도 못했다.
이제 집뒤 밭에 옮겨놓았으니, 이것이야 설마 못가져가겠지, 위로를 삼을 수밖에. 한동안 말렸다가 산림조합에서 종균種菌을 사오고, 토막마다 일일이 드릴로 구명을 뚫어 종균을 집어넣을 것이다. 일주일에 몇 차례 물을 홈톳히(충분히) 줘야 한다고 한다. 차양막을 씌워놓고, 언제나 버섯이 나오는지(올해 수확은 어려울터) 무한한 애정을 갖고 지켜보리라. 아아, 60여개 토막에 탐스런 표고버섯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솟아오른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황홀할까? 기다려진다, 그날이. 가슴이 설렌다, 지인들에게 그 버섯 나눠줄 그날이.
# 우리집 뒤 신작로新作路, S자가 47개라하여 붙여진 이름 ‘말티재’. 2∼3km가 될까, 거의 매일 나의 산책코스다. 어릴 적엔 오수∼임실길의 유일한 ‘지방국도’였다. 굽이굽이가 많다보니 차량 전복사고도 흔했다. 어디쯤에 트럭이 굴렀다고하면, 혹시 뭐라도 건질 게 없을까 달려가 구경을 하곤 했다. 그 길을 이제 50여년만에 6학년 4반이 되어 일삼아 걷고 있다. 당뇨엔 걷기와 등산이 최고라해서이다. 꼭 치유차원이 아니래도 이 길 걷는 걸 좋아했었다.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는 말할 것도 없이 환상이다. 동양화 한폭이 저리가라였는데. 올해는 어떻게 눈이 “딱” 한번도 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화딱지가 날대로 났고, 스트레스가 팍팍 쌓인 올 겨울, 제발 적선하고, 내년에는 그러지 말라고 비는 마음 간절하다. 지구온난화, 이상기후 때문이라는데 진짜로 걱정이다.
그런데, 이제 이 신작로를 산책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계곡 곳곳에 누군가 썩지도 않는 대형 쓰레기를 마구 버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때문이다. 대형 쓰레기라 함은 못쓰는 냉장고, 이불보따리, 베개, 세탁기, 책상 등 나무가구, 각종 플라스틱 제품 등을 말한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어느 누가 이런 후미진 신작로에 차를 받혀놓고 이런 것을 버렸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곳곳에 ‘CCTV 촬영 중이니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안내판이 전봇대에 붙여있는데도 말이다. 이건 외지인들이 그랬을지라도 우리 고향 임실군의 ‘대망신’이다. 이래놓고, 무슨 ‘열매의 고장’ 청정淸淨지역을 운운한단 말인가? 그나저나, 나는 늘 버리는 사람의 마음, 아니 그 심뽀가 궁금해도 너무 궁금하다. 혼자, 아니 두셋이 ‘그 짓’을 할 때, 그들은 눈을 마주치고 ‘공짜’라며 회심 懷心의 미소를 지었을까? 소소한 검정비닐봉지들은 백번 양보해, 지나가다 훌쩍 던질 수도 있다고치자. 그것도 말이 안되지만, 고속도로변에서도 많이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건 아니다. 그들은 그러고도 발 뻗고 잠을 잘 자리라. 십수 년전에는 계곡 아래로 분뇨를 통째로 버려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바로 밑의 마을주민들은 그 냄새까지 맡아가며 허덕거리며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오로지 돈을 아끼려는, 돈만을 생각하는, 천민賤民자본주의의 추잡한 양태樣態가 아니던가. 그것이야말로 ‘더러운 흑심黑心’이 아니던가.
이들도 환경보호, 자연보호라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어보았을 터, 어쩌면 부모로서 자녀들에게도 강조하며 교육을 시켰지 않았을까? 참으로 천벌天罰을 받아도 쌀 몹쓸 인간들이로다. 자연自然을, 환경環境을 그 옛적 요순堯舜시대 용어일 ‘하늘’로 대체해 보자.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획죄어천 무소도야獲罪於天 無所禱也)’라는 말도 있다. 왜, 그 ‘사지四知’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네가(자신이) 알고, 내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어떤 행위들. 버리는 그 순간, 양심에 눈곱만큼도 거리낌이 없으시던가? 그게 어찌 사소한 행위일 것인가? 자연과 환경을 망치고 하늘에 부끄러운 일이 천지에 가득하여, 눈 한번 내리지 않은 겨울을 맞이하였거늘. 에라이-. 똥물에 튀겨 죽일, 밴댕이속같은 인간들이여! 부디 뭣 잡고 반성들 하시라(대부분 남성들일 터이기에 하는 악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