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리의 탄생지, 시테 섬 ]
* 퐁 네프 다리, 이 다리는 시테 섬 앞부분을 두개의 다리로 가릅니다.
파리 한가운데 세느 강 위에 떠있는 오누이와 같은 모습의 시테 섬과 생 루이 섬은 지난 2천여년 동안 파리를 이끌어 오면서 프랑스와 유럽의 중심적인 기둥 역할을 해왔습니다.
켈트족 일부인 파리시족이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은 기원전 3세기,주로 세느 강 주변에서 물고기를 잡아 살다가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프랑스)를 정복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이후 이 지역을 파리라 불리우게 됩니다.
파리는 10세기경에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르면서 프랑스의 수도가 됩니다. 이후 시테 섬에는 프랑스 카페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궁전들이 세워졌고, 이후 13세기부터는 노트르담 성당을 비롯해서 생트 샤펠 성당, 콩시에르주리 등 오늘날 파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들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 세느 강 가운데 시테 섬과 생 루이 섬이 오누이처럼 떠있습니다
세느 강은 파리 남동쪽에서 시내로 흘러 들어와 생 루이 섬과 시테 섬을 감싸 안으면서 S자형으로 크게 굽이쳐 흐르며 대서양 방향으로 빠져 나갑니다. 유럽의 대부분의 강들과 마찬가지로 세느 강 역시 완만한 흐름과 안정된 유수량으로 옛날부터 수운이 발달했습니다.
시테 섬은 길이가 914미터, 폭이 183미터로서 생트 샤펠 성당 앞의 대로인 팔레 대로를 중심으로 서쪽은 파리 1구, 노트르담 대성당과 경찰청이 있는 지역은 파리 4구에 속합니다.
[ 시테 섬과 생 루이 섬의 명소 ]
< 파리의 전설, 노트르담 대성당 >
시테 섬이 파리의 탄생지라면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를 이끌어 온 정신적인 대부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죠.
노트르담(Notre Dame)은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합니다. 이래서 프랑스 각처에서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당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파리 노트르담의 정확한 명칭은 ‘파리의 성모 성당’이라는 의미의 ‘노트르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입니다.
기독교가 프랑스에 최초로 전해진 것은 서기 40년경이었습니다. 272년에는 파리 최초의 주교 생 드니가 순교하였으며 점차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이렇게 파리인들에게 기독교를 더욱 각인시키고자 파리의 상징 노트르담 대성당은 1163년 파리 주교 모리스 드 쉴리의 주도로 건설이 시작되고 2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1345년에 완공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고딕 건축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간련해서 파리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완공되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는 계기도 마련됩니다. 유럽 전역의 수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이 신학과 철학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소르본느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몰려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트르담 대성당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극심한 몸살을 앓게 됩니다. 파리의 다른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시민군들에 의해 교회 건물들이 크게 파괴되었고 성직자들도 상당수가 처형되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혁명의 와중인 1795년부터 1802년까지 7년 동안 폐쇄되거나 사료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 성당 뒷편에서...
심지어는 건축 자재상에게 경매로 넘어가 교회 건물 전체가 헐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발생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탈바꿈을 하게 되는데 나중에 자신이 이곳에서 성대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노트르담 대성당은 완전히 권위를 회복하게 됩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에는 3개의 커다란 출입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출입문 위에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새겨진 부조(浮彫)들이 있습니다. 주로 성서에 나타나 있는 성인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 성서를 읽을 줄 몰랐던 당시의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 그림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겁니다.
3개의 출입문 중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문을 ‘성모 마리아의 문’이라고 불리웁니다. 이 문 주위에 새겨진 부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목이 잘려진 부조가 보이는데 이가 바로 파리 최초의 주교인 생 드니입니다. 부조는 잘린 자기 목을 들고 서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 부조 중 생 드니 부조는 잘린 머리를 들고 있습니다
생 드니는 서기 270년경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파리에 왔는데,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몽마르트르는 이래서 순교자의 산(전편에서 설명)을 뜻하게 되는데 바로 이 생 드니가 순교한 이 사건에서 유래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생 드니는 자신의 목이 잘리자 벌떡 일어나 자기 목을 엎구리에 끼고 파리에서 북쪽으로 11킬로 떨어진 지금의 생 드니까지 걸어갔다고 해서 그 지역을 생 드니라고 부릅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근처 광장 바닥에는 동판으로 만든 ‘제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곳을 깃점으로 프랑스의 모든 지역과의 거리가 정해진다고 하니, 노트르담 대성당과 시테 섬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중요성을 재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성당을 정면으로 사진을 찍는데 바로 제로 포인트 주변은 대성당을 가장 안정된 비율로 보이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사진은 꼭 여기서).
노트르담 대성당은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으로 신화화 되었는데 이후 <노트르담의 꼽추>로 영화화되어 파리를 상징하는 세계적 명소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안소니 퀸이 꼽추 콰지모도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지나 롤로부리지다가 에스메랄다 역을 맡았던 것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노트르담 성당에서 생 루이 섬으로 들어가느 다리 왼쪽에 에스메랄다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습니다.
< 콩시에르주리와 마리 앙트와네트 >
세느 강의 북쪽 샤틀레 광장에서 시테 섬을 바라보면 중세의 요새처럼 4개의 둥글고 뾰족한 첨탑을 가진 건물 하나를 발견할 있습니다. 현재 프랑스 대법원으로 쓰이는 건물로 14세기의 고색 창연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콩시에르주리입니다.
* 콩시에르주리 건물
콩시에르주리는 카페 왕조의 11대 왕인 필리프 4세 때 오늘날과 같은 독특한 모습을 갖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법원 대기실 혹은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콩시에르주리가 역사의 주연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프랑스 혁명 때였는데, 4천여명의 정치범들이 이곳에서 수감되었던 겁니다.
이주 2천 5배여명이 지금 시청앞의 그레브 광장이나 콩코드 광장 등에 설치한 길로틴(단두대) 위에서 목이 댕강 댕강 잘려나갔습니다. 이곳에 수감되었다 참수를 당한 인물 중에 루이 16세의 아내인 마리 앙트와네트가 있는데 지금 콩시에르주리에는 당시의 앙트와네트가 수감되어 있던 장면을 재현하면서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그녀는 국고를 낭비하고 모국인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도모하였다는 죄명으로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 심성은 착한 편이었으나 도무지 집중력이 없고 놀기 좋아하고 사치스러워 프랑스 국민들한테 못된 오스트리아년이라고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습니다.
앙트와네트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11번째 막내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루이 16세한테 시집왔다가 38세의 나이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실제로 테레지아 여제는 이런 앙트와네트의 경박한 처신이 못내 걱정이 되어 살아있을 때 끊임없이 왕비로써 체통을 지키라고 충고를 해왔지만 어머니의 이런 진심어린 의견에 대하여 콧방귀만 뀌다가 이런 비극을 맞게 됩니다.
* 감옥 속의 마리 앙트와네트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다행히 어머니 테레지아 여제는 프랑스 혁명 이전에 죽어 딸의 이런 참혹한 꼴은 보지않게 됩니다. 앙트와네트도 감옥에 갇힌 후 많이 달라져 그제제야 왕비의 체통을 지키려고 애를 썼으나 이미 때는 늦어 버린 것이죠. 감옥에서 어머니 테레지아 여제의 말을 곰씹었을 것이 분명했을 겁니다.
< 생트 샤펠 성당 >
생트 샤펠 성당은 신앙심이 깊었던 루이 9세에 의하여 건립되었습니다. 루이 9세는 성왕(聖王)이라고 불리웠을 정도로 종교적으로 무척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시테 섬 중앙에 위치한 생트 샤펠 성당은 ‘시테 섬의 숨겨진 보석’이라 불릴 정도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생트 샤펠 성당은 대법원 안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당 내부는 상하 2층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아래층은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였고, 위층은 왕족이나 귀족들이 예배를 보았습니다. 2층은 특히 기둥 사이의 벽면을 모두 화려하기 짝이 없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했는데, 그 안에 들어서면 마치 영롱한 빛의 보석 상자 안에 들어온 것 같은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독특한 장소입니다.
< 세느 강의 명물, 퐁 뇌프 다리 >
오늘날 퐁 뇌프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밤의 퐁 뇌프는 잊지 못할 인상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뛰어난 조명기술의 뒷받침 때문인데, 사실 세느강의 모든 다리들이 아런 조명기술 덕분에 밤의 세느 강의 아름다움이 극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퐁 뇌프(Pont neuf)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지만 사실상 세느 강에 놓여진 36개의 다리 중에 가장 오래된 다리로서 유서깊은 다리이지요.
* 밤의 퐁 네프 다리
당시 유럽에서는 다리 위에 상점이나 가옥 등을 함께 짓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현재 피렌체의 아르노 강에 있는 베키오 다리가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퐁 뇌프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그와 같은 시설물들을 설치하지 않았고, 인도와 마차 길을 따로 분리하는 등 혁신적인 새로운 개념의 다리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개념의 다리가 완공되자 퐁 뇌프는 파리 시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됩니다. 건물들이 없어 툭 터진 전망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많은 상인들은 여기에서 좌판을 벌이고, 어릿광대들과 배우들도 온갖 재주를 부렸으며, 떠돌이 가수들과 악사들도 몰려와서 실력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프랑스를 상징하는 샹송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샹송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점 서민적인 색채를 띄게 되지요. 일반 민중들의 생활정서와 감정을 노래하기 시작했고, 형식과 소재도 한층 다양화되면서 오늘날의 샹송으로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샹송의 고향은 퐁 뇌프다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퐁 뇌프는 영화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소피 마르소가 앳된 소녀로 나오는 <라 붐>이라는 영화에서 이 다리가 나옵니다. 친구 집에서 밤새 파티를 벌이고 난 다음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데 그 버스가 바로 이 다리 위를 지나가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 퐁 뇌프는 파리에 살면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CD 재킷에도 나옵니다. 백건우가 퐁 뇌프 다리 가장자리의 돌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그가 입고 있는 바바리코트의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 산책하기 가장 좋은 곳, 생 루이 섬 >
시테 섬 동쪽 끝에 위치한 생 루이 다리를 건너면 생 루이 섬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생 루이 섬 안에는 오랜 연륜을 가진 저택과 카페,레스토랑,화랑,교회,상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생 루이 섬은 항상 차분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곳으로 들어가면 파리 한복판에서 뜻하지 않게 고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잘 몰라 발길이 드물기 때문인데, 이 섬도 세느 강을 끼고 있어 주위 경치가 뛰어남과 동시에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아 파리 시내에서도 집값이 비싼편이라고 합니다.
생 루이 섬은 16세기까지 세느 강의 버려진 무인도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파리의 아낙네들이 가끔 찾아와 빨래를 하거나 소떼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던 곳이었는데, 루이 13세 때부터 주거지역으로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귀족들이 살면서 훌륭한 저택들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오늘날과 같은 아름다운 미관을 자랑하게 됩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곳에는 시인 보들레르,화가 에밀 베르네르,조각가 카미유 크로델 등의 예술가들이 살았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퐁피두 센터를 지은 퐁피두 대통령과 노벨상을 받은 퀴리 부인이 살았습니다.
앙주 강둑 17번지에는 1657년에 지은 로죙 저택이 화려한 발코니를 자랑하며 서 있는데, 여기서 보들레르, 고티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리하르트 바그너 등이 인생의 한 시절을 머무르기도 했던 거처였습니다.
* 보들레르,라이너 마리아 릴케,리하르트 바그너 등 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들이 거처했던
로죙 저택, 발코니도 보입니다
생 루이 다리를 건너 생 루이 섬을 우안과 이어주는 루이 필리프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부르봉 강변로가 나옵니다. 그 강변로 19번지 건물 외벽에는 보통 것보다 큰 형태의 대리석 현판이 하나 붙어 있는데, 이 현판이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울립니다.
* 카미유 크로델의 집 앞에서, 오른쪽에 석판이 걸려있습니다
바로 이 집에서 로댕의 연인이었다가 버림받았던 천재 여류 조각가 카미유 크로델이 고통을 겪으며 작업을 했던 곳입니다. 그녀는 1913년 불같은 젊음과 고통의 상처를 이곳에 남겨둔 채 남프랑스 아비뇽 근처의 정신병원에서 일생을 마감합니다. 조각가의 인생은 짧았고 정신병원에서의 기간은 길었습니다.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는 동안 그녀가 기다렸던 사람은 오직 그녀의 남동생 폴 클로델 뿐이었습니다. 남매는 어려서부터 무척 다정했고, 서로의 예술가적 기질도 비슷했습니다. 폴 클로델은 중국과 일본의 대사를 역임했는데 귀국할 때면 항상 누나 카미유를 먼저 찾았습니다.
집 앞 석판에는 그 오랜 암흑과 아픔의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이 집을 떠난 카미유 클로델의 사연이 짧게 적혀 있습니다.
카미유 클로텔
1864~1943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은 1899년에서 1913년 사이에 이 집의 정원 쪽으로 위치한 맨 아래층 아파트에서 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1913년은 그녀가 예술가로서의 짧은 경력을 마감하고 긴 입원생활을 시작한 해입니다. 대리석판의 맨 아래쪽에는 카니유 클로델이 로댕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항상 뭔가 빈 것이 있어 나를 괴롭힌다(Il y a toujours quelque chose d’sbsente qui me tourmente)
이 글을 읽는 순간 온 몸에 쫙 전율을 느껴지더군요. 누구라도 인간이라면 결코 채워지지 않을 존재의 근원적 허무감을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 안뜰, 밖에서 사진찍고 글을 읽고 뭐 그냥 서성되니까 어떤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들어와서
구경하라고 해서 잽싸게 들어가 한장 찰칵
여행을 하다 심신이 지치면 이 섬을 찾아와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은 방법으로 제안되기도 합니다. 시테 섬과 생 루이 섬을 연결하는 생 루이 다리를 건너면서 양쪽을 바라보면 벌써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다리 위에는 거의 언제나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고 그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 생 루이 섬으로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적막이 감돕니다.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밋 입구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비는 노트트담 대성당 앞과는 대조적입니다.
첫댓글 감사히 잘 읽었슴다.
파리 세느 강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네요...
권대감 오랫만입니다.찜통 더위에 잘 지내지요?
앞으로 콩코드 광장,팡테옹,개선문,에펠탑 등 많은 얘기가 진행됩니다. 우리 귀에 익었던
주옥같은 샹송도 함께요. 건투를 빕니다.
노트르탐 성단은 소생이 관광 갓을때 보수중 겉만 흩고 지나갓엇는데 상세하게 그려주어서 즐독!
근디 사진은 누가 찍어 주나요? 지나가는 이방인?
요즘은 뻔뻔해져서 아무나 붙들고 찍어 달라고 해요. 현지인이든 관광객이든 모두 하나같이
친절해요. 특히 여자들은 서로가 찍어준다고 난리들이예요. 흐흐흐
뒤 늦게 보는 생생한 기록이 마치내가 여행하는 듯 하네~~ 겉 모습만 보았던 것을 채워 주는 듯하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