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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8일(성령강림절 후 열여섯 번째 주일, 평신도 주일)
느헤미야 4:7~14
누구를 두려워 할 것인가?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저는 최근에 느헤미야 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서에는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습니다.
그는 황폐한 예루살렘 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이때가 주전 445년 경이였습니다. 유다 총독이었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대적들로부터 민족을 지키고, 신앙공동체를 회복하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큰 반대가 있었습니다. 7~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산발랏과 도비야가 주도한 반대 세력은 유다 사람들의 예루살렘 성 중수를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유다 사람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라며 비웃었습니다.
대적들의 위협에 유다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지만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빠졌기 때문에 성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과연 유다 사람들이 성벽을 건축하기 전에 가졌던 마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느헤미야 2장 18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자고 호소하자 유다 사람들은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선한 일에 힘쓰다가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겪게 되자, 낙심하여 더는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혹시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셨던 맨 처음의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지 못하고 중간에 낙심하여 포기하려고 했던 적은 없습니까?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끝까지 지켜나가지 못했던 적은 없나요?
어떤 분이 자신의 간증을 다음과 같이 「생명의 삶」에 나누었습니다.
작년부터 매일 아침 Q.T를 하고 카카오톡으로 그 내용을 지인들에게 보내는 일이 내 사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품게 하신 몇몇 대상에게 Q.T 내용을 카톡으로 보냈는데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읽는 모든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게 회신을 해 주는 사람에게는 Q.T 내용을 꼭 보내주고, 그러지 않은 사람에게는 잘 보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주셨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매일 Q.T 카톡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것 같은 사람은 명단에서 제외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어느 날 오후, 특별한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에 힘이 쪽 빠지면서 낙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이 시골구석에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나에게 정말 미래가 있는 걸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비참한 생각이 들더랍니다.
-출처: 황명환, 「깨어 기도할 수 없겠느냐」(두란노,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6월호), 103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분의 간증을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혀 낙심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11절에서, 유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들어 가서 살육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유다 사람들의 말에는 대적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습니다. 실제로 원수들의 근처에 살던 유다 사람들은 원수들의 위협 때문에 고통을 받고 열 번이나 느헤미야를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보면, 대적들의 방해가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만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 환경의 종으로 전락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느헤미야는 두려워하는 유다 사람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느헤미야는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해 대적과 맞서 싸우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대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누군가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낙심하게 만드는 재정적인 어려움입니까? 아니면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불안하게 만들고 초조하게 만드는 어떤 상황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 안에 두려움이 있다면 느헤미야의 외침을 기억하십시오.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여러분의 대적과 맞서 싸우십시오.
왜 우리가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큰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공사는 실제로 52일 만에 끝이 났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해서 많은 대적이 이 일을 반대했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그들이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6장 16절에서 느헤미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줄을 앎이니라.”
유다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들던 대적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신 일을 보고 오히려 크게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들던 대적들의 입에서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대적과 맞서 싸운다면 여러분도 느헤미야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합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대적과 맞서 싸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막 4:26~28). 사람은 씨를 땅에 뿌립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먹고 자고 깨며 일상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씨를 땅에 뿌린 사람이라도, 사람은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 과정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땅은 그것을 압니다. 땅은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 과정을 알고 있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는 처음에는 싹이 되고, 그다음에는 이삭이 되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이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땅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충실한 곡식으로 영글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곡식이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낙심하지 않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우리를 겸손의 자리로 이끕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꽤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난 주일은 우리교회가 설립된 지 13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교회설립 13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 성도님들이 자발적으로 꽃과 그림, 음료와 케이크를 가져와 교우들과 함께 나누며 기뻐했습니다.
13년이면 사람으로 따지면 13살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모습입니다. 우리교회는 마치 13살 된 초등학교 6학년 아이와 같습니다. 아직 어린 철부지 같은 나이이지만, 앞으로 키가 한참 자라날 것이고, 사춘기를 맞으면서 생각과 마음의 크기도 더 넓어지고 어른스러워질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일이 아닙니다. 목사로서 저의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일이 제가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입니다. 지금은 우리교회를 안 나오지만, 전에 우리교회를 나왔던 어떤 분이 어느 날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분은 나름대로 어려운 환경에서 목회하고 있는 제가 딱하게 여겨져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에 부르셨기 때문에 제가 부름을 받은 동안에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건물로 비유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예루살렘 성벽이 서로 연결되어 높이가 올라가듯이, 저와 여러분은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의 허물어진 틈이 메워져 가듯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예루살렘 성벽의 벽돌과 같이 꼭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부족하고 흠이 많아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워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아침마다 자신의 Q.T 내용을 사람들에게 카카오톡으로 보냈던 분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분은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에 순종하려고 이 일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일들이 복음 전파를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매일 Q.T를 하고 카톡으로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보내는 일이 쉽지는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이분은 Q.T 나누는 일이 자신이 쌓아야 할 믿음의 성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느헤미야처럼 상황도 사람도 보지 말고 엎드려 기도하며 믿음의 성벽을 계속 쌓으리라고 결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구원과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카톡으로 Q.T 나누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날 오후, 특별한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에 힘이 쪽 빠지면서 낙심에 사로잡혔던 한 목사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분은 ‘내가 지금 이 시골구석에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나에게 정말 미래가 있는 걸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비참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 이 분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왜 네가 설교한 대로 살지 않느냐?” 이 말을 듣고 이 분은 ‘내가 무슨 설교를 했지?’하고 지난주 설교 제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낙심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 순간 이 목사님은 자신이 영적인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낙심은 사탄이 주는 마음인데, 그럴 왜 받아들였을까 후회하며, 싸워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를 실망시키는 낙담의 영아,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하고 선포했다고 합니다.
또 이 분은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너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라!”하고 명령했습니다. 찬양하고 감사하자, 그 밤에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넘쳐 났는지, 참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내 상황은 조금도 변한 게 없는데 낙담의 영을 쫓아내기 전과 후는 너무 달랐습니다. 오후 내내 너무나 비참했는데, 그 밤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때 나는 우리의 기분과 생각 속에,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 만나는 사건 속에 영적인 공격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걸 깨닫고 싸워야겠다고 생각한 후에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습니다.”
-출처: 황명환, 「깨어 기도할 수 없겠느냐」(두란노,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6월호), 103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주셨던 선한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으로 시작한 그 일을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속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비록 중간에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기준으로 보면 초라해 보이고, 시간 낭비처럼 보이며, 스스로 부질없는 행동이라고 느껴지더라도 그 일을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속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선하신 일들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 어떤 것보다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위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나가십시오. 그리하여 먼 훗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크게 칭찬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