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역사상 최고의 밴드는 누구일까. 신중현과 엽전들, 사랑과 평화, 백두산, 부활, 노찾사, 시나위, 들국화, 넥스트 같은 소위 '거장'일까. 아니면 90년대 크라잉 너트, 노브레인, 자우림도 이제 국내 로큰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팀일까. 혹자는 마니악하게 크래쉬나 레이니 썬 같은 밴드를 꼽을 수도 있겠다. 아, 지금은 다소 무리겠지만 요새는 장기하와 얼굴들이란 밴드도 인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사상 최고로 꼽고 싶은 밴드는 따로 있다. 그 주인공은 ‘두쉬건’이란 생소한 이름의 블루스 밴드.
기타(보컬), 베이스, 드럼의 삼인조로 구성된 이들은 2000년대 중반 약 1년 반 동안 서울 밤거리에서 미친 듯이 블루스를 연주했다. 그리고 새벽이 끝날 때까지 술을 마시고 또 연주했다. 이들의 ‘탐닉’이 완전히 끝나는 건 항상 새벽 동 틀 무렵이었다.
아, ‘블루스’(BLUES)라고 해서 ‘춤 추실래요’라고 하면서 중년 남녀가 얼싸안는 가운데 나오는 배경 음악이 아니다. 기타를 배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초짜’들이 처음 배우는 음악도 블루스다. 대부분 음악의 기초다. 과장을 덧붙이면 모든 팝 음악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블루스의 원조는 매우 거칠다. 생각처럼 말랑하지 않다. 아무런 효과음 없이 기타와 베이스, 그리고 드럼, 마이크 만으로도 가장 거칠고 원초적인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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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밴드 얘기로 돌아가면 나는 2003년 즈음 이 3인조 밴드를 처음 만났다. 이 셋의 ‘화학작용’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당시 로큰롤과 펑크에 빠져있던 난 이 밴드를 통해 블루스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공연은 곧 내 일주일 스케줄이 됐다. 나는 곧 이들의 매니저를 자임하게 됐다.
이 밴드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75년생, 당시 29~30세)는 성격파탄자에 가까웠다. (아니, 성격파탄자 맞다) 마치 록의 전성기였던 70~80대 영국의 록스타처럼. 음악(기타)과 술, 여자를 제외한 모든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집이 꽤나 잘 살아서 돈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형님은 모 대학 교수다. 본인은 어차피 이런 것들에 관심조차 없었지만.
이 사람은 미친 듯이 기타를 잘 쳤다.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이 사람의 기타는 살아 있었다. 테크닉이나 속주, 감미로운 사운드가 최고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떨 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이 느끼는 대로, 다시 말해 '되는 대로' 기타를 쳤다. 그리고 '되는 대로' 지껄였다.
난 그 모습을 보면 마치 지미 헨드릭스나 에릭 클랩튼의 초창기 라이브를 보는 것처럼 피가 끓어올랐다.
그의 연주는 사람들에게 ‘예술은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는 타고 난 천재였다.
밴드의 베이시스트(77년생, 당시 27~28세)는 음악 엘리트였다. 잘생기기까지 했다. 음악으로써는 최고의 학벌을 갖췄고, 나름 돈 깨나 만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이 밴드를 택했다. 느낌이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돈과 명예, 부, 그리고 ‘잘 나가시는’ 여자친구까지 포기했다.
연주도 자신을 내세우는 화려한 테크닉 대신 블루스에 맞는 거칠고 원초적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드러머는 서태지와 동갑인 72년생(당시 32~33세)으로 밴드의 맡형이었다. 그는 결혼과 안정적인 수입원이 시급한 노총각 드러머였다. 위에 소개한 베이시스트와 단짝으로 4년 동안 여러 밴드에서 활동해 왔다. (참고로 훌륭한 밴드라면 베이스와 드럼은 ‘부부관계’ 이상으로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실제 연인이나 부부 이상으로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보통.)
하지만 운이 지지리도 없는지 밴드를 만들어도 잘 안 됐고, 때로는 기획사에 돈을 떼이기까지 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내 인생을 걸겠다.” 그는 밴드 결성에 앞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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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은 앞서 말했든 약 1년 반 동안 블루스 넘버를 연주했다. 홍대 클럽에서의 첫 공연. 처음에는 워낙 생소한 무대인지라 별 반응이 없었지만 곧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만 관객은 커녕 100명도 채 안 되는 곳에서의 공연이었지만 확실히 ‘반응’은 있었다.
아무런 홍보도 없이 (심지어 보컬은 공연 중에 그 흔한 ‘멘트’ 한마디 안 했다) 인터넷 카페에는 ‘무려’ 100명이 넘는 팬이 가입했다. 또 매 공연마다 ‘무려’ 10명, 많을 때는 30여 명의 고정 관객이 찾기 시작했다. (보통 3~4개 밴드가 연합으로 공연하기 때문에 공연장은 꽤 붐볐다)
그리고 밴드와 팬은 공연이 끝나면 으레 그렇듯 술판을 벌였다. 술에 거나하게 취할 즈음 점잖은 재즈 클럽이나 장비가 부실한 술집에서 깽판에 가까운 공연을 시작했다. 당시 술을 못 마시던 나는 매니저로써 밤새 벌어지는 술판을 지켜보기만 했다. 또 이들의 ‘묻지마 공연’ 후 클럽 혹은 가게 사장과 명함을 교환하는 게 주 업무.
아, 집에 갈 때면 11년 된 낡은 ‘에쿠셀(‘엑셀’을 ‘에쿠스’급으로 높여 부르는 말)’을 끌고 이들을 집까지 모셔다 주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곧 두쉬건이란 밴드의 이름은 업계에도 알려졌다. 같이 밴드하자는 ‘유명 인사’도 있었다. 뭐 이쪽 업계에만 알려진 유명 인사지만. 또 돈 많으신 팬은 으레 술값을 내 주며 밴드 재정을 도왔다. ‘나도 사실 이런 음악, 이런 삶을 살고 싶었다’며 신세한탄은 좀 귀찮았지만. 아 물론 그렇다고 잘 나갔던 건 아니다. 어차피 음악, 게다가 블루스는 한국에서 마이너 중에 마이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돈? 당연히 한 푼도 안 들어왔다. 클럽 사장이나 돈 넉넉하신 팬이 술을 사 주는 게 고작. 나도 말이 매니저였지 돈 버는 방법은 몰랐다. (방법을 알았다고 해도 이렇게 거친 마이너 밴드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나. 말쑥하게 양복이라도 입히면 모를까.) 그냥 몸으로 떼울 뿐이었다.
먹고 사는 건 ‘예술’하는 사람이 으레 그렇듯 악기 레슨이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꾸려갔다.
그리고 결국 첫 공연을 한지 1년 반 만에 밴드는 해체했다. 물론 기자회견 같은 건 없었다. 뼈다귀 해장국 집에서 조용하게 마지막 식사를 했다. 매주 1~2차례 이 밴드의 연주를 낙으로 살아 온 팬들은 당황했지만 별 수 없었다. 돈도 미래도 없어 해체하는 걸 무슨 수로 막는가. 특히 드러머 형님의 자금난은 심각했다. 마은 다 돼 가는데 모아놓은 건 3천 정도 대출받아서 마련한 전셋집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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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밴드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은 여전히 그답게 살고 있다. 전해들은 얘기로는 술과 기타 밖에 없는 생활을 이어가다 무슨 요양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갔다 와서 최근에는 가지고 있던 악기를 전부 팔아치우고 그 돈 전부를 들여 옷을 샀다고 한다. 천만원은 족히 될 그 돈으로 무슨 옷을 왜 샀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여전히 그답다는 게 재밌다.
베이시스트는 자신에 더 잘 어울리는 한 여자 보컬을 만나 결혼했다. 최근에는 음악 학원을 차렸다. 그런데 난 개업식 때 찾아간 이후 거의 연락도 못한다. 어제쯤 "보고 싶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역시 바쁘다는 핑계로 안 들렀다. 못 본지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드러머 형님도 이런저런 밴드와 함께 학원 강사와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하다가 최근 역시 드럼 학원을 차렸다. 베이시스트의 학원은 ‘스펙’이 받쳐 주는 만큼 나름 잘 운영되는 듯 한 데 이 형님은 썩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운 없는 건 여전한 모양. 얼마 전에 전화해 봤더니 “똑같지 뭐..”라는 답변 뿐. 결혼은 물론 여전히 감감 무소식. 이제 그도 벌써 39살. (소개팅 급구)
여튼간 오늘 밤 문득 이 때 이 밴드가 생각난다.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았고, 부족한 것 투성이었지만, 그때가 지금보다도 더 내 '진실'에 가까웠다는 생각이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꼽는 최고의 밴드는 지금까지 말한 3인조 블루스 밴드 '두쉬건'이다.
언론·미디어에서 거들먹거리면서 나름 거장이랍시고 인지도를 얻은 밴드 혹은 가수들, 생각보다 진실되지 않다. 그들에게 보여지는 진실된 모습 조차 가공된 것이라는 게 눈에 선히 보인다. 한마디로 ‘진짜’가 아니다. 아이돌이야 둘째 치고, 밴드라고 해도 몇 개 빼고는 별 볼 일 없다는 게 내 생각.
여러 음악인의 음악을 들어 왔고, 좋아하는 음악도 많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진짜’ 라이브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 꼭.
첫댓글 황선홍 밴~~~~드 ..;;
바세린....
제목 딱 보고 들국화 1집 커버가 스쳐지나가더군요.
흥미롭습니다. 음악이나 밴드에 깊은 관심을 두지는 않는 사람이지만, 님의 추억담을 읽으면서 과정은 강렬했으나 결과는 무미한 B급 청춘영화를 떠올렸습니다. 그들이 다시 뭉쳐 보란듯이 밥을 벌어 먹고 산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아 저도 바라고 있어요. 오랜만에 그들의 라이브 실황(MD로 녹음ㅋ;)을 들으니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임재범이 보컬을 맡았던 아시아나.
이브ㅋㅋㅋ 콜ㅋㅋ
콜 받고 레이스 "트랜스픽션!"ㅋㅋㅋㅋㅋ
.....그때가 지금보다도 더 내 '진실'에 가까웠다는 생각이다...... 명언입니다. / 로큰롤!!!
형, 공채 시즌이 다가온다. "로큰롤!"
한스밴드.....
닥~터 피쉬
아악!ㅋㅋㅋ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ㅎㅎ모름지기 팀이란 개개인보다 맡은 바 역할을 잘 하는 팀웍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크라잉 너트는 개개인의 개성이 돋보이는 정말 멋진 밴드죠 (너무 좋음ㅠ)
비슷한 질문에 전 늘 '미선이 밴드'를 꼽곤 합니다. 실력과 연주를 따지기 이전에 이들의 음악은 세기에 나올까말까 한 감성과 전달력을 지녔던 것 같아요. 진달래 타이머와 치질, 그리고 불후의 명곡 SAM과 송시는 들을 때마다 절 마취시켜요 ㅜ (80형 글에 잠시나마 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캄사)
미선이 밴드 들어봤는데 기억이 안나요ㅠ
폴님이 계셨던!+_+ 저도 미선이 밴드-
산울림은 언급이 없네요.. 들국화 1집을 듣고 충격에 빠지고
산울림을 듣고 실의에 빠졌던..
본인이 직접 참여하는 밴드가 최고의 밴드입니다.
무한궤도. " 여름날 햇빛속에 옛 동네를 걸어가다 건널목 앞에 있는 그녀를 보았지!!" 저 건널목 많이 건넜습니다.
조금은 변한듯한 모습 아쉽기는해도 햇살에 비친 그모습은 아름다웠지~ ㅎㅎㅎ
바세린, 트랜스픽션 모두 좋은 밴드..! 그래도 아직까진 산울림이 아닐까요?:)
대일밴드.......................SK브로드밴드...........
밴드는 아니지만 국내 역사상 최고의 듀오는 알고 있습니다. D.E.U.X 듀스 forever ㅡㅜ
달콤한 소금! 달콤한 소금! 달콤한 소금!
예전최고의 밴드는 '들국화'가 가장 기억에 남구요. (삼촌한테 들었을때는 최고였음) 지금은 부활이죠! ㅎㅎ 국민할매도 있는 밴드... '부활'ㅎㅎ 그래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는 '노브레인'입니다.ㅎㅎ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저에겐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밴드가 '산울림'이네요. 어렴풋한 기억으로 1980님 '플라스틱 피플'의 초창기 베이시스트였다던 것 같은데 요즘도 연주하시나요?
레알?
아시아나 한표 더
언니네 이발관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