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춘(柳希春)-重九小酌(중구소작)(중구일의 단출한 술자리), 송덕봉(宋德峯)-附次韻(부차운)(차운시를 붙이다)(부부가 함께 하는 중양절 술자리)
(유희춘)
紫極承恩日(자극승은일) 대궐에서 성은을 받은 날
黃花泛酒時(황화범주시) 국화 띄운 술을 마시는 때로다
一堂親五六(일당친오륙) 한 집안 가족 대여섯이 한데 모여
同樂太平期(동락태평기) 함께 태평성대를 즐기는구나
(송덕봉)-유희춘의 부인
昔日分南北(석일분남북) 옛날 남북으로 헤어져 있을 때
那知有此時(나지유차시) 어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겠소
淸秋佳節會(청추가절회) 맑은 가을 좋은 명절에 모였으니
千里若相期(천리약상기) 천리 멀리서 약속이나 한 듯하오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眉巖集미암집)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김성애님은 “예전 학자들의 글을 보면 벗과 동료와 스승 같은 지인이나 부형과 자제 같은 가족과 시를 주고받는 경우는 많아도 부인과 시를 주고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더구나 이를 문집에 함께 싣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그런데 ‘미암집’을 보면 부인의 시뿐만 아니라 부인이 남편에게 보낸 꾸짖는 듯한 내용의 편지도 버젓이 실려 있다. 당대의 여장부라 일컫어질 정도로 문장과 행실이 훌륭한 송씨 부인이 아니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미암 유희춘은 26세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35세1547년 때 양재역 벽서 사건에 휘말려 함경도 종성 땅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20여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55세인 1567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부인은 담양의 명문가 홍주 송씨 송준의 둘째 딸이다. 미암이 유배간 뒤 홀로 시어머니를 봉야하다가 시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후 천 리 길을 떠나 남편의 유배지까지 홀로 찾아간 일화로 유명하다. 아래는 부인이 보낸 편지 중 일부 내용이다.
당신은 몇 달 동안 혼자 지낸 것을 가지고 편지마다 구구절절 공을 자랑하는데, 예순이 다 된 몸으로 홀로 지내는 것은 당신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크게 이로운 것이지 저에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옛날 어머님의 상을 당했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고 당신은 만 리 밖에 나가 귀양 가 있어 그저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통곡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으로 장례를 치러서 남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사람들도 분묘를 쓰고 제례를 올리는 일을 두고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없다고들 하였습니다. 삼년상을 마치고 또 먼 길을 나서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당신을 찾아간 일은 누가 모르겠습니까?
이 편지를 쓴 시기에 미암은 사울에서 벼슬하며 홀로 지내고 있었는데, 이때 시종하는 여자를 들이지 않았다고 부인에게 자랑하는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내가 당신에게 해 준 일을 생각하라는 부인의 꾸짖음은 당차면서도 해학적이다. 아울러 부부간의 두터운 신뢰가 느껴져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이런 고난의 세월을 함께한 부부이기에 가족들과 함께 중양절 술잔을 나누며 옛일을 회고하는 감회가 더 깊었으리라.
예전에는 부모와 자식 간의 수직적인 관계가 가족의 중심축을 이루었다면 현대는 부부간의 수평적인 관계가 가정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기억해 주며 상대의 밑바닥까지도 훤히 알고도 포용해 주는 관계인 부부, 인생의 반려자라는 것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소중한 존재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유희춘[柳希春, 1513년(중종 8) ~ 1577년(선조 10), 자 인중(仁仲), 호 미암(眉巖), 시호 문절(文節), 본관 선산(善山)]-해남 출신. 유양수(柳陽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공준(柳公濬)이다.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鄰)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보(崔溥)의 딸이다. 처부(妻父)는 송준(宋駿)이며,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다. 김안국(金安國)· 최산두(崔山斗)의 문인이다. 153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한 뒤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 때 김광준(金光準)·임백령(林百齡)이 윤임(尹任) 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 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 때 국경 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한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직강·응교·교리 등을 거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했으며, 이어 장령·집의·사인·전한·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선조 8)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해 낙향하였다. 경전에 널리 통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 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 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유희춘에게 배웠던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였다 한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해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한 채 죽었다. 성격이 소탈해 집안 살림을 할 줄 몰랐으나,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나 학문, 정치하는 도리에 대한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은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續蒙求)』·『역대요록(歷代要錄)』·『속휘변(續諱辨)』·『천해록(川海錄)』·『헌근록(獻芹錄)』·『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詩書釋義)』·『완심도(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이 있다.
*송덕봉[宋德峰, 1521~1578]-유희춘의 부인, 사임당이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주제로 시를 창작하여 유교적 규범에 순응하는 모범적인 여성상을 구현한데 비해 송덕봉은 당시 일반 여성과는 약간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송덕봉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송준(宋駿)의 딸이며 자질과 성품이 명민하여 성장하면서 서사(書史)를 섭렵하여 여사(女史)의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16세에 유희춘과 결혼했는데 유희춘은 18세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그러나 27세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종성(鐘城)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때 송덕봉은 고향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친 뒤 40세(1560)에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유배지 종성으로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