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구리의 역사인데..쩌~~기 밑에 보면 진해 장복산에서 제1회 대학생대회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그 대회 주최가 경상대학교였다~~!!
행글라이더의 역사는 1948년부터 시작된다. 스탠포드대학 항공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항공우주국 NASA의 전신인 NACA 방계의 Langley Research Center 엔지니어로 1936년부터 일하고 있던 로갈로(Frances M. Rogallo)는 "A flying machine with no rigid element or element designed to produce rigidity. A completely new concept, never seen before, with no model in nature"를 목표로 대중들이 쉽게 날 수 있는 새로운 비행체를 개발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가 1948년 그의 부인과 함께 유약 코팅한 무명천으로 "삼각형 유연 날개(Flexible Delta Wing)" 모형을 만들어 풍동실험에 성공하고, 이듬해인 49년에 특허를 받게 되었다. 그는 이 유연날개가 우주선 사령탑의 지구 귀환을 위한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정부 각 기관들을 상대로 제안하였으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이 먼저 우주선 스푸트니크호 발사에 성공하자 다급해진 미국 정부가 서둘러 로갈로가 일하고 있던 NACA를 흡수하여 NASA를 창설하면서 본격적인 우주 경쟁이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 당시 풀어야 할 숙제 중의 한가지가 바로 유인 또는 무인 우주선을 지구로 귀환시키는 방법이었고, 로갈로의 플렉서블 윙은 그 해법 중의 한가지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어 50년대 중반부터 NASA와 NASA의 요청에 참여키로 한 몇몇 민간 기업들을 중심으로 로갈로의 플렉서블 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로갈로와 그의 삼각날개 아이디어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양과 크기의 삼각날개들과 파워 플랜트들이 개발되었다. 또한 지구귀환용 목적 외의 다른 용도로의 가능성도 별도로 연구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helicopter towed flex-wings, radio controlled self-steering cargo delivery gliders, rocket powered escape Rogallo modules, Fleeps and Paresevs(Paraglider Rescue Vehicles) 등 다양한 연구 개발이 1964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우주선의 지구귀환방법이 낙하산을 펼쳐 바다에 떨어지게 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로갈로 날개에 관한 연구는 일거에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개인 비행체로서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도전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1960년대 초 금속 튜브에 플라스틱 날개를 씌워 로갈로형의 날개를 실물 제작, 실험한 미국 스탠포드대학 학생이었던 Barry Hill Palmer나, 모터보트 견인으로 떠올라가는 평판 연(flat kite)을 로갈로 이론에 따라 삼각날개로 만들고 여기에 조종을 위한 삼각 콘트롤바를 단 John Dickenson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John Dickenson은 호주 시골 구석에서 잡지에 난 로갈로 윙의 사진 한 장을 보고 만들어보기로 하고 63년에 "Ski Wing"이라는 모터보트 견인비행용 날개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은 이전까지 없던 콘트롤바를 장착하였고, 오늘날 알려진 초기 로갈로타입 행글라이더의 모양을 처음 구현해 낸 것으로 매우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로갈로의 삼각날개 이론과 디킨슨의 엔지니어링이 결합함으로써 오늘날의 스포츠 행글라이딩이 탄생된 것이다.
디킨슨은 항공공학을 배운 사람이 아니고 전자공학을 한 엔지니어였다. 당시 호주에서는 수상스키어들이 매년 축제 기간 중에 flat kite에 매달려 모터보트가 빠른 스피드로 질주할 때 항력에 의해 떠올라 끌려 다니는 시범을 보이곤 했는데, 매우 위험하여 매년 사람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때 디킨슨이 좀 더 안전하게 날 수 있고, 조종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하여 로갈로의 삼각날개를 만들기로 했던 것인데, 이것이 아주 잘 날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 만든 기체는 리딩에지를 나무로 하고, 크로스바는 알루미늄, 콘트롤바는 철, 그리고 세일은 푸른색 플라스틱(비닐) 천으로 제작되었는데, 총 자재비가 겨우 24달러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만들어 훌륭히 모터보트 토잉 비행을 마친 디킨슨은 이 모델을 수상스키로 비행하는 날개라는 뜻으로 "Ski Wing"이라 명명하고 63년 10월 11일 특허를 신청하였다.
그는 이듬해인 64년에는 모든 골조재질을 알루미늄으로 바꾸어 판매까지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로갈로가 편지를 보내 설계도와 자료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64년 말에 디킨슨이 보낸 자료를 검토해 본 로갈로가 65년 1월 29일 아주 잘 만들어진 플렉서블 윙으로 극찬하였다. 이에 고무된 디킨슨은 66년 시드니로 이주하여 당시 "Ski Plane"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플렉서블 윙을 생산하고 있던 Mike Burns의 Aerostructure사와 합작하기로 하고, 이 회사에서 "Ski Wing"을 생산, 판매하기로 하였다. 디킨슨은 수많은 시범비행을 펼쳐 관중들을 열광케 하였으나 그 열기가 사업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이 무렵 그는 2시간을 비행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67년 들어 빌 베네트(Bill Bennette)와 빌 모이스(Bill Moyes) 등에게 비행기술과 기체 제작기술을 전수하였다.
John Dickenon에게서 "Ski Wing" 비행을 배운 호주의 빌 베네트(Bill Bennette)와 빌 모이스(Bill Moyes)도 함께 수상스키를 신고 삼각날개에 매달린 채 모터보트에 이끌려 떠오르는 비행시범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토잉(towing)이륙과 같은 것이었으나 당시로서는 분리하여 자유비행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저 모터보트의 강한 견인에 이끌려 연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연을 견인하고 있던 모터보트가 모래 언덕으로 처박히는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공중에서 견인줄을 끊고 이탈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우연을 통해 로갈로 날개의 기막힌 활공성능을 알게 되었고, 무사히 활공하여 물로 돌아와 내릴 수가 있었다. 이것은 그들로서는 보트 토잉에 의한 연같은 비행에서 자유 활공의 세계를 처음으로 경험한 일대 사건이었고,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들은 1969년 그들의 비행 기술을 온 세상에 알리고자 베네트는 미국을, 모이스는 유럽과 호주를 맡기로 하고, 각자 새로운 땅으로 떠나게 되었다. 빌 모이스보다 빌 베네트가 훨씬 성공하였는데, 그는 동부를 중심으로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여기저기 순회하며 수천회의 시범비행을 펼치는 동안 그는 미국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고, 이 새로운 스포츠 행글라이딩이 대중화되는데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첫 번째의 위대한 프로모터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후 빌 베네트는 미국에서 델타윙 카이트(Delta Wing Kite), 빌 모이스는 호주에서 모이스 행글라이더즈(Moyes Hanggliders)라는 유명한 행글라이더 제조업체를 설립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이 비행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뒷받침해 오고 있다.
빌 베네트가 미국 동부에서 모터보트 토잉으로 행글라이딩을 시범보이고 있는 동안 서부에서는 리차드 밀러(Richard Miller)같은 사람들이 언덕에서 발로 뛰어 이륙하는, 오늘날의 전형적인 행글라이딩 비행실험을 해 오고 있었다. 리차드 밀러는 글라이딩 잡지인 "Soaring"지의 편집인으로 60년대 후반 대나무와 폴리에틸렌천으로 직접 로갈로 날개를 만들어 로스엔젤레스 해변 언덕에서 비행하였고, 그의 친구들과 함께 100회 이상의 비행을 하는 동안 체중이동으로 하는 조종법을 익히게 되었다. 이 때 밀러와 함께 비행한 친구로 나중에 미국행글라이딩협회장이 된 로이드 라이처(Lloyd Licher)와, 유명한 인력항공기인 고사머 콘돌과 고사머 알바트로스를 설계한 폴 맥크레디(Paul MacCready)가 있다. 대나무 로갈로윙으로 비행한 리차드 밀러는 "내 자신이 한 세기는 앞서 있는 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 세기를 뒤 처진 듯도 하다"라는 말로 행글라이더의 과학성과 단순성을 잘 표현하였다.
1970년에 잭 램비(Jack Lambie)라는 사람은 캘리포니아 롱비치 인근에 행글라이딩 학교를 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잡지와 신문에 연일 기사를 써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스포츠의 두 번째 위대한 프로모터로 인정되고 있다. 램비는 밀러의 제안으로 함께 글라이딩의 아버지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의 생일에 맞추어 1971년 5월 23일 세계 첫 행글라이딩대회인 릴리엔탈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간 여기저기에서 각 개인들이 서로 모른 채 독립적으로 움직이다가 드디어 1971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행글라이딩협회가 처음 발족되었고, 1975년에는 국제항공연맹(FAI) 산하에 국제행글라이딩위원회(CIVL)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CIVL이 창설된 이듬 해인 1976년에 오스트리아 코센에서 첫 세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고, 79년 제2회 대회(프랑스 그레노블)에 이어 매 2년마다 한번씩 열려 99년으로 12회째 개최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75년도에 처음 시작이 되었다.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이연재, 이승재 형제였는데, 당시까지 행글라이딩 장비나 비행기술이 전혀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형항공 잡지에 실린 행글라이더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된 이들 형제가 만들어보기로 결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뒤늦게 시작하였으면서도 호주의 John Dickenson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정보나 자료도 없이 사실상 처음 시도된 독자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건축용 알루미늄 파이프와 다훼다(Taffeta)라는 100% 나일론 천으로 삼각날개를 만들어 서울 중랑천 둑에서 시험비행하기 시작했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로갈로 타입 행글라이더를 완성해내었다.
이들이 비행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백준흠(현 한국사회체육진흥회 산하 항공스포츠협회장), 홍경기(초대 패러글라이딩분과위원장 역임. 미국 이주) 등의 인물들이 당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달려 와 비행을 배우는 등 동호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76년도에는 백준흠의 친구인 유병재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트럭으로 견인하여 이륙을 시도하다가 균형을 잃고 추락,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시행착오는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도 오태석(한국활공협회장 역임. 공무원), 송진석(현 진글라이더 대표) 등 새로운 희망자들이 속속 찾아와 행글라이딩의 세계를 확장해나갔다. 이후 이들 초창기 멤버들은 사단법인 대한항공협회(대한민국항공회의 전신) 산하에 명목상 존재하던 한국활공협회를 실질적으로 맡아 운영하기로 하고, 당시 한국항공대학 학장이던 김석환씨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고 이연재가 사무국장을 맡음으로써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초기의 이씨 형제들은 그들의 불굴의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말미암아 당시 동호인들로부터 '한국의 라이트형제'로 불리게 되었다.
다른 나라의 앞선 기술에 대한 정보 교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뿌리내려 온 우리 나라 행글라이딩계는 1981년도 일본 벳부에서 열린 제3회 세계행글라이딩선수권대회에 처음으로 이승재, 홍경기 두 선수가 출전함으로써 비로소 발전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전까지 6년여의 세월동안 로갈로타입 행글라이더와 기본적인 비행술밖에 모르다가 처음 세계대회에 나가보니 모든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행글라이더는 더 이상 단순한 홑 세일로 된 삼각날개가 아니고 이미 이중 구조를 가지고 날개각도 새의 날개처럼 넓게 벌어진 고성능기로 발전했으며, 고도계, 승강계, 속도계 등의 각종 계기로 무장한 파일러트들은 열기류를 이용하여 까마득히 높은 구름 속까지 올라가 수십km의 먼 거리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처음 출전한 세계대회에서 이것저것 정신없이 보고, 듣고, 배운 두 선수들은 귀국하면서 새로운 장비와 비행술을 들여와 국내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새로운 장비들을 복제하여 비행 수준을 전체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 진보라고는 없던 국내 동호인들에게 이들이 가져온 것들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 했다.
1982년도에 당시 서울에서 명성행글라이딩클럽(현 에어마스타클럽)을 운영하고 있던 김정선(현 한국윈드서핑협회장), 이수열(현 공군사관학교 교수) 등의 주도로 전국동호인친선대회를 처음 개최하여 전국에 산재해 있던 동호인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기량과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마당이 된 것을 시발로 83년에는 첫 국가대표선발전과 제1회 전국대학생선수권대회가 진해 장복산에서 개최되었다. 첫 국가대표선발전은 당시 한국활공협회의 사무국장이던 이휘윤(대한항공 직원)이 진행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10여명의 우수선수들을 초청하여 83년 5월에 장복산에서 사흘간의 열전을 치러 제4회 세계대회(83. 7 독일 테겔베르그)에 파견할 대표선수를 선발하였는데, 선발되고도 경제적 이유 등으로 출전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어 8월에 개최된 제1회 전국대학생행글라이딩선수권대회는 국가대표선수단이 심판을 맡아 진행하였고, 서울, 인천, 부산, 강릉 등 전국 10여 개 대학이 출전하여 체공경기를 펼친 끝에 이정대(현 국가대표선수)가 초대 대학챔피언으로 탄생되었다.
이후 연속되는 국내외 대회를 통해 동호인들간에 정보 교류와 신기술 도입이 이루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행글라이딩인들의 실험정신은 다양한 비행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수소 기구에 행글라이더를 매달아 올려 분리후 자유비행을 하는 방법이 성공적으로 많이 시도되었고, 이런 비행으로 어린이 날 같은 시범비행행사나 CF촬영 등을 함으로써 초기 협회 운영자금 상당부분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구비행은 후에 열기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80년도 말부터는 최종운, 박흥수(현 한국초경량항공기협회 부회장)를 중심으로 행글라이더에 엔진을 달아 지상에서 이륙하려는 시도가 거듭되었다. 모형비행기용 소형 엔진 4개를 달고 발로 뛰어 지상이륙과 비행에 성공하였으나 기대에 차지 않아 하다가 결국 트라이크형 동력행글라이더를 처음 수입하기에 이르고, 박흥수는 이 기체로 제주도-추자도 횡단비행에 성공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동력이 달린 행글라이더 활동은 후에 초경량항공기협회가 별도로 발족하면서 한국활공협회의 관장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86년도에는 송진석과 이수열이 유럽에서 막 태동한 패러글라이더를 제작, 수출하기로 하고 "에어맨"의 브랜드로 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처음 패러글라이딩을 도입하고, 89년부터는 본격적인 국내 보급에 앞장섰다. 이후 패러글라이딩은 한국활공협회 내에 패러글라이딩분과위원회를 조직하여, 체계를 갖추어가다 동력행글라이더분과가 이관되어 나가고 패러글라이딩 동호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한국활공협회의 주류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초창기 패러글라이딩에 관여한 사람들로는 이들 두 사람 외에 서성준(현 에델 대표), 홍경기(당시 대교 개발과장), 백준흠, 송재준(현 마스터즈 대표), 김문호(현 웅비유체 대표), 김홍재(현 파라콘 대표), 박인규(현 파라클리닉 대표) 등이 차례로 뛰어들게 되었다.
행글라이딩계는 80년대 들어 박길영(현 운봉행글라이딩 회장), 김대웅(현 한국활공협회장), 추경인(현 활공협회 육성회장), 한기룡(현 활공협회 감사) 등의 인물들이 등장하였고, 그들 뒤를 이어 정병우(현 활공협회 사무국장), 이상국(현 천풍항공 대표), 정세용(현 패러글라이딩 국가대표) 등이 계속 맥을 이으며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