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산업의 몰락은 느닷없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피처폰의 제왕 노키아가, 사진 필름의 대명사 코닥이 그리 쉽게 무너진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가는 기업을 보면 한 우물만 파기보다는 새로운 우물을 계속 찾고 계속 판다. IBM은 PC에서 인터넷 상거래와 솔루션,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재빨리 포트폴리오 전환을 했기 때문에 계속 IT업계의 공룡으로 남을 수 있었다. 가전에 집중하던 필립스 역시 몇 년 전부터 조명과 헬스케어로 주력 사업군을 이동하면서 성공적으로 시장에 정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삼성그룹의 전자부품 계열사인 삼성SDI도 IBM이나 필립스와 같았다. 1. 디스플레이 강자로 시작 삼성SDI는 1970년 최초 설립 이래 디스플레이 사업에 주력해온 디스플레이 전문기업이었다. 브라운관 사업에 주력한 삼성SDI는 당시 방송의 시작과 TV의 폭발적인 보급 같은 시대 흐름에 발맞추어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성SDI는 브라운관 생산에만 안주하지 않았고 1980년대 중반엔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평판 디스플레이 기술 개발에 베팅한다. 과거 손목시계나 전자계산기용으로 여겨지던 LCD 기술을 휴대전화에 사용할 수 있는 컬러 LCD까지 개발해 사업화에 성공했고, 택시미터기나 계기판 등에 사용되는 진공형광디스플레이(VFD) 분야에서도 세계 시장을 주름잡았다. TV 등 대형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PDP를 추진했다. 2004년 세계 브라운관 시장은 성장의 정점을 찍었고, 이후 디스플레이 시장은 FPD(Flat Panel·평판패널) 시대로 급격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LCD, PDP뿐만 아니라 FED 등 다양한 신기술이 차기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디스플레이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삼성SDI는 이 치열한 춘추전국시대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한발 앞선 무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고 수년 전부터 개발해온 AMOLED가 그것이다. 일본의 코닥에서 최초 개발한 AMOLED는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난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일본 업체들이 양산을 포기한 제품이었다. 그러나 삼성SDI는 2007년 10월에 양산에 성공해 차세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삼성SDI는 과거 세계 브라운관 시장의 30% 이상을 점유했던 TV용, 모니터용 브라운관에서부터 STN-LCD, TFT-LCD와 VFD 등 소형 평판 디스플레이 사업을 최초로 시작했으며 이후 PDP로 세계 대형 평판 TV 시장에서 족적을 남겼다. 2. 화학기업으로 전환 디스플레이 산업으로 호황 가도를 달리던 삼성SDI는 199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건희 회장 지시에 따라 새롭게 준비한 리튬이온 2차전지 사업에 2000년 본격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디스플레이 사업과는 전혀 다른 화학산업 기반의 사업이었지만 이 회장은 다가오는 미래에는 분명 배터리 시대가 올 것이라 확신하고 강력히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2000년 삼성SDI가 리튬이온 2차전지에 뛰어들 때 일본 경쟁사들은 10여 년 앞서 출발한 상태였다. 그러나 삼성SDI에는 그간 수많은 신사업과 신제품을 세계 제일로 육성해 온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사업 진출 10년 만인 2010년 삼성SDI는 당시 2차전지 분야의 최강자이던 일본 산요를 앞지르고 시장점유율 19.8%를 기록, 세계 1위에 올라서게 된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삼성SDI는 소형 2차전지 분야에서 글로벌 1위를 견고히 지키고 있다. 삼성SDI가 단기간에 산요, 파나소닉, 소니 등 막강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품질이었다. 삼성SDI는 리튬이온 전지의 특성상 안전성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고 물량을 늘리기보다 완벽한 품질을 갖추는 데 더욱 힘을 쏟았다. 2000년대 이후 IT·모바일 기기가 확산되며 배터리 수요도 그만큼 늘어나기 시작했고, 경쟁사들 모두 생산물량을 늘리면서 품질사고가 발생해 리콜을 경험했다. 그러나 삼성SDI에선 단 한 차례의 리콜도 발생하지 않았다. 특히 삼성SDI의 배터리 사업 추진은 강력한 파괴적 혁신의 대표적인 예다. 디스플레이 시장과 전자전기 업종을 한꺼번에 떠나 화학 업종 기반의 새로운 사업 영역에 진입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삼성SDI는 배터리 사업 분야에서 미래가 보이기 시작하자 디스플레이 사업을 깔끔히 정리하면서 미련을 접고 배터리 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3. 전기차 배터리 강자로 변신 한 차례의 강력한 파괴적 혁신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사업을 통해 거대하고 다양한 전후방 사업을 갖춘 전기차를 만드는 파괴적 혁신이다. 삼성SDI는 전기자동차용 전지 사업을 통해 거대하고 새로운 자동차 사업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통해 장치산업이자 기간산업 분야인 전력 사업 분야에도 진출하고 있다. 최근엔 과거 제일모직의 소재 분야를 인수·합병하면서 화학산업의 핵심 기반 기술인 소재 분야에도 새롭게 나서고 있다. 글로벌 최고의 소형 배터리 기술과 브라운관 사업에서 습득한 제조기술력이 집결된 울산사업장의 배터리 생산공장은 BMW의 전기차인 i3, i8 등에 배터리를 전량 공급하는 등 이젠 최첨단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공장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 1라인 건설에 이어 지난해 10월 2·3라인까지 증설하며 지역 경제를 이끌어가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삼성SDI의 성공적인 변신은 산업경쟁력 약화 조짐이 보이고 있는 한국의 제조업 전반에 교훈을 주고 있다. 오랜 불황과 중국 업체들의 추격으로 현대중공업이 지난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자 울산 지역 경기가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삼성SDI 사업장이 있는 울산 삼남면 일대는 구조조정의 찬바람을 피해가고 있다. 이제 `삼성의 5대 신수종 사업`의 하나로 꼽히는 전기자동차 배터리 생산의 심장부가 됐기 때문이다. 과거 브라운관 사업의 메카이자 휴대폰용 LCD와 대형 TV용 PDP 패널을 생산했던 울산사업장은 평판디스플레이 업계의 경쟁이 심화되자 2007년 말에는 브라운관 생산라인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사업을 2009년부터 시작했다. 만약 전 세계 최대 브라운관 생산기지였던 울산사업장이 당시의 영광에만 안주해 혁신과 도전 없이 브라운관 생산에만 매달렸다면 역시 사양산업의 길을 그대로 걸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