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앞서간 그리스도인들중 굉장히 유명하신 분들이 형제회 소속이었던 분들이 많습니다
참고로 F. F. 브루스라는 유명하신 분이 쓰신 글이 있습니다
아래 올려드립니다
그리스도인 형제단은 누구인가?
F. F. 브루스
‘형제단’ 혹은 ‘그리스도인 형제단’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들은 사실상 모든 구원받은 동료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교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반적으로 형제단은 크게 두 그룹이 있는데, 하나는 흔히 ‘개방적인 형제단’(Open Brethren)으로 알려진 그룹과 또 하나는 ‘배타적인 형제단’(Exclusive Brethren)로 알려진 그룹이 그것입니다. ‘개방적이다’ 혹은 ‘배타적이다’ 라는 용어는 교제권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본인은 다만 본인이 속해 있는(브루스는 영국의 ‘형제단’에서 신실하게 주님을 섬겼음-역자주) ‘개방적인 형제단’에 관해서만 논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본인은 ‘배타적인 형제단’에 대한 글을 쓸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단(Assembly, 교회)은 한 마디로 중앙 통제기관이 없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이들은 영국과 미국, 그리고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그리고 아시아 여러 국가 등에 널리 퍼져 있으며, 각 지역마다 많은 수의 교회 혹은 모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실상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각 지역 교회는 그 운영에 있어 독립적입니다. 그들은 어떤 총회나 노회 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 간에는 가족처럼 친밀한 교제와 강한 결속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형제단의 기원
교회사적으로 볼 때 ‘형제단 운동’의 기원은 주후 1825년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형제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그 교회의 기원은 사도 시대부터 시작됩니다. 실상 이들의 목적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단순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려는데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초 무렵 여러 기독교 교단들에서 분리되는 일들은 오늘날 형제단 교회들이 직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형제운동의 개척자는 일단의 청년들로서 대부분 영국 더블린에 소재한 트리니티 대학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반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배와 교제를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같은 모임이 장차 큰 운동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실상 그들은 결코 새로운 교단을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같은 시도야말로 그들이 함께 모이는 순수한 목적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동안 그들 중 일부는 전에 소속된 구성원으로 남아 있었고 그중 극소수만이 성직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같은 성직 수여 관행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이 형제단 운동의 초기 인도자 중의 하나가 바로 존 넬슨 다비(J. N Darby, 주후 1800-1882)로 불리는 아일랜드 교회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비상한 지적 능력과 성품의 소유자로서 각 교단 소속 교회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시기에 그리스도 교회의 연합을 증거하는 전 세계적 협력을 꿈꾸었습니다. 여하간 다비의 여러 견해는 개방적인 그룹보다는 배타적인 그룹에서 고수되었습니다. 그리고 1848년 개방적인 그룹과 배타적인 그룹간의 분열이 일어났을 때 다비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에게 ‘배타적인 형제단’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같은 형제단 운동은 더블린에서 시작하여 영국 전역으로 그 세력이 확장되었습니다.
영국의 첫 번째 ‘형제단’ 모임은 1831년 플리머스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그 지명을 따라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이란 낯익은 이름이 붙여졌다. 플리머스에 세워진 ‘형제단’의 두 인도자는 사무엘 트레겔레스(Samuel P. Tregelles, 1813-1875)와 그의 친척이 되는 벤자민 뉴톤(Benjamin W. Newton, 1807-1899)이었습니다. 뉴톤은 19세기 당시 영국에서 출간된 헬라어 신약성경역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책의 주편집자였습니다.
또 다른 모임 가운데 중요한 교회는 브리스톨에 위치한 베데스다 예배당(Bethesda Chapel)으로서 스코틀랜드 태생 유대인 목회자인 헨리 크레이크(Henry Craik, 1805-1866)와 독일계 죠지 뮐러(George Muller, 1805-1898)가 공동으로 사역한 곳입니다. 특히 죠지 뮐러는 1836년에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고아원을 운영한 사람으로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가 시작한 고아원들이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바네이도 박사(Dr. T. J. Barnado)도 ‘형제단’ 멤버로서 1870년에 영국에 죠지 뮐러처럼 고아원을 세워 운영한 인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해외 선교
죠지 뮐러의 매재인 안토니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 1795-1853)는 ‘그리스도인 형제단’의 최초의 해외 파송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엑스터(Exeter)에서 운영하던 치과병원을 그만두고 개척 선교사가 되어 먼저는 바그다드로 나갔고, 후에 다시 인도에 가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이 그들을 분열시키는 어떤 일들 보다 더 중차대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자신과 심각한 불일치를 보이는 몇몇 사람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소유한 선한 것에서 분리되느니 보다 차라리 그들의 제반 악행을 감내하겠네”. 그가 생각한 악행이 어느 정도 실제인지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그의 고백을 통해서 개방적인 형제 교회가 추구하는 태도가 무엇인지는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안토니 그로브스로부터 시작된 ‘형제단’ 선교 운동은 전 세계 6대륙에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의 ‘형제단’들이 파송한 선교사의 숫자는 1,200여명이 넘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들은 여러 곳에서 개척 선교사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중 특출한 인물로는 스코들랜드 출신의 프레드릭 아르놋(Frederick Stanley Arnot, 1858-1914)과 단 크로포드(Dan Craford, 1870-1926)로서 이들은 복음의 볼모지인 중앙 아프리카 지역에 복음을 증거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실상 아르놋는 1880년 경 카탕가(Katanga)에 최초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선포한 개척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어권 ‘형제단’ 선교사들은 주로 중앙 아프리카와 인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 체류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이에 반해 아시아권에서 나간 선교사들은 주로 중앙 아시아와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하고 있음-역자주).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권 출신 선교사들은 실제 선교 현장에 있는 다른 선교사 단체들과 협력하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선교 사역과 활동은 선교사 후원 단체인 CMML(Christian Missions in Many Lands)과 그 기도 잡지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참고로 CMML은 미국을 중심으로 캐나다, 그리고 뉴질랜드와 말레이지아 등에 지부를 두고 있음-역자 주).
교리와 신조
사실상 성경 교리에 관한한 ‘형제단’들은 교회사에서 정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리를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확고히 붙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믿는 바로는 ‘믿음과 실천의 기반이 되는 절대 무오한 성경’에서 그 같은 교리와 믿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타락한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복음 전파의 열망 때문에 그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순수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무리들과 기꺼이 합력해서 일하기도 합니다. 실례로, 미국의 빌리 그래함 전도팀이 영국의 여러 섬에서 전도사역을 할 때 개방적인 형제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그들과 합류해서 일하였습니다.
성경 예언 성취는 ‘형제단 운동’의 시초부터 상당한 관심사였습니다. 실상 ‘형제단’ 소속의 많은 설교자들이 지금도 주님의 재림과 종말에 상당한 관심과 식견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이 지은 찬송가 곡 중에서도 주님의 재림에 비중을 둔 내용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들은 특정하게 주님의 재림 시기를 정하거나, 현실 생활의 도피를 가르치는 극단적 종말론주의자들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경건한 삶의 필요를 강조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이 형제 교회들에서 발견하는 매력은 형제 사랑을 기반으로 한 풍성한 교제와 지적인 자유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실행(實行)
‘형제단’의 특징적인 요소는 교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실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개방적인 형제단’에서 침례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 한에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침례의 방법도 물에 담그는 침수(浸水)를 지지합니다. 이들은 매주일 아침마다(어떤 교회는 저녁 시간) 만찬을 통해 주님을 기억하고 있으되, 이같은 주의 만찬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주님이 베푸신 것으로 믿습니다. 분명 이같이 매주일 드리는 성만찬이 ‘형제단’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떡과 잔을 떼기 위해 모일 때 그들은 예배 참여자들을 미리 선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자발적이고 질서에 따른 참여로 인해 만찬 시간은 경건하게 실행되고 있습니다. 이때 여러 형제들이 찬송가를 선택하여 부를 것을 제안하고, 기도와 감사로 회중을 인도하며, 성경 본문을 읽거나 문맥을 간단히 해석하면서 주님의 성품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찬송하면서 떡과 잔을 대합니다.
‘형제단’에는 교단 등에서 위임한 목사(목자)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 내에는 성직자 개념으로서의 목사가 아닌, 은사로서의 목사(목자)를 두고 있으며, 이 은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해고시키거나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의 필요를 따라 친히 세우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상 각국의 교회마다 복음 전도와 성경을 가르치는 상당히 많은 수의 전임 사역자들이 사역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 교회는 장로들 혹은 감독들로 불리는 책임있는 인도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나, 이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벗어나서 타 교회에서도 동일한 역할을 감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장로들은 직분이나 권위보다는 본이 되는 삶을 통하여 성도들을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치는지?, 예수를 알게 하는지?,그 가르침대로 지키고 행하는 교회 인지를 살펴보시면 되겠습니다.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사도신경을 안한다니 그건 잘하는것 같군요,
우리는 솔로몬의 예배형태를 살피면서 왜 그 예배를 주관하고 예배를 하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임하시지 아니했는지를 잘 알아야 할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이 아니였기에 그런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은 그런 웅장하고 화려한 예배가 아니라 즉, 제사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모하고 좋아하고 의지하는 마음과 자세가 없었기에,말씀에 순종치 아니했기에 그런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가 예배하는 모습이 어쩜 당시의 솔로몬식의 예배를 닮았는지 짐작이 갈것입니다.예배 프로그램을 보면 거의 동일하다고 여겨집니다. 기악과 성가대들의 찬양,헌금, 신앙고백,율법의 가르침,등등...
사도 신경을 안한다는것 이것은 그 내용자체가 모순이기에 그러합니다. 세상사람들의 객관성 고백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모르고 그 가르침을 모르고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길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모순적 내용이 발생한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임을, 예수님이 자의로 스스로 그 길을 가심을 감사하고 우리의 자신의 삶을 회개하는 내용이 주축이 되어야 마땅한것입니다.무슨 세계사 공부식으로 밝히는 내용이 무슨 믿음의 고백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위선이고 허위입니다.적어도 예수를 알고 그 진리를 아는 이상 그것은 진실된 고백이라고 할수없는것입니다.그러므로 해서는 안될 대목입니다.우리가 정령 예수를 알고 그 진리를 안 이상 올바른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할것입니다.
아무튼 처음에 앞서 기록한 예수.오직 예수를 알게 하고 그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긍휼과 사랑을 알게 하고 우리가 지키고 행할 본분이 무엇인가를 알게하여 진정한 성도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바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는 교회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임을 명심하시기 바랍
<<저는 형제교회 사랑리모임의 사역자입니다.>>
교회란 예배형식이나 교리도 중요합니다만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안에서 사랑의삶을 사시는 성도님 되옵소서...
초기에 형제들 가운데 우리가 잘 모르지만 주님의 사랄으로 살아간 이름없이 빛도없이
주님만 빛낸 형제 두분을 소개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죠셉 스크리븐 형제와 로버트 채프만 입니다
ㅡㅡㅡ
죠셉 메들리칼 스크리븐 (Joseph Medlicoft Scriven, 1819 ~ 1886) 스크리븐은 모든 찬송가집에 실려 세계적으로 애창되고 있는 찬송가 “죄짐 맡은 우리 구주(What a Friend we have Jesus)의 작시자다. 그는 1819년 9월 10일 아일랜드 다운(Down)군 씨패트립(Sea-patrick)에서 태어나 (어떤 기록에는 1820년 더블린에서 태어 났다고 한 곳도 있음)더블린의 트리니트 대학을 졸업하였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을 나왔고 장래가 크게 기대되는 젊인이로 플리머드 형제단 신자 가족으로 매우 믿음이 돈독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그의 생애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쾌창한 봄 날처럼 밝아야만 하는그의 생애가 음산한 늦가을처럼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한 삶으로 접어 들게 되었다. 즉 그는 아름답고 사랑스런 아일랜드 처녀와 약혼하고 행복한 앞 날을 꿈꾸고 있는데 1840년 결혼 전야 그 처녀가 익사하고 말았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큰 시련이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비참하게 행복의 문전에서 산산 조각이 났으니 약혼녀는 물에 빠져 죽었거니와 스크리븐은 깊은 슬픔의 강에 빠져 익사하게 되었다. 그는 이 슬픔을 잊기위해 사관학교에 들어 갔으나 몸이 허약하여 훈련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 꿈마저 깨어졌다. 이제 마취제를 사용하지 않고 수술을 받는 사람의 고통처럼 그는 그 엄청난 슬픔을 중화시킬 묘안 없이 그대로 당해야만 했다. 그는 프리머쓰 형제단의 교리를 찬성하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주장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웃사람에게 그 사랑을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그의 마음이 아팠고, 사랑하더 약혼녀가 목숨을 잃은 곳에서 살기가 지겨워 그는 1845년 그의 나이 25세 때 어머니를 고국에 남겨 놓은 채 캐나다로 이민 갔다. 삶의 환경을 바꾸어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슬픔을 잊어보려는 시도였다. 캐나다에 도착한 그는 오타리오 주 롸이스 레이크 (RiceLake) 부근 펭겔리(Pengelley) 영지에서 가정교사로 이었고 후에 수 마일 떨어진 비들리(Bewdley) 의 제임스 색빌(James Sackvi-lle)씨 댁의 가정교사일도 보면서 두 곳을 전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자로서 틈만 있으면 고아와 가난한 과부들, 그리고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돌보고 섬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 이라고 했고, 앨버트 로낸더(Albert C.Ronander)와 에텔 포터(Ethel K.Porter)는 그를 성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꾸고저 하는 자에게 결코 거져 돌려보내지 않은 사람이요, 온타리오의 추운 겨울 거리에서 헐벗고 떠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밖에 없는 그의 외투를 벗어주고 대신 떠는 사람이었다. 평생 집 한 채 없이 남의 집을 전전하며 남의 일을 도우며 봉사하다 갔으니 더러는 구룰 미친 사람이라고 까지 불렀다. 이제 그는 아이 60이 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톱과 목마(木馬)를 메고 나니며 그의 도음의 손길이 미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신사가 걸어 내려 오다 스크린본 영감을 만났다. 한 사람은 스크리본을 아는 사람이요 다른 사람은 그 도시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옆에 친구에게 건네는 말이 “자네, 저 영감을 아는 모양인데 우리 집 장작을 좀 패주도록 소개해 줄 수 없겠나? “응. 소개는 해줄 수 있지. 그러나 저 노인은 자네 집 장작을 패줄 사람은 아닐세, 자네가 품삯을 지불한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응 모를 걸세, 자네는 우리 마을로 온지가 얼마되지 않으니까 말야-. 저 노인은 한평생을 우리 마을에서 보낸 사람으로 성자와 같은 분이라네. 언제나 불쌍한 과부들이나 아니면 병들어 거동을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만 찾아다니며 무료로 봉사해 주시는 분이시지-. 그러니까 품삯을 낼 형편이 되는 집의 일은 아예 맡지도 않는다네-.아이라 데이빋 생키(Ira David Sankey) 는 그의 부흥 집회 기간중 죠셉 스크리본이 포트 호프(Port Hope) 의 어떤 거리를 톱과 목마를 메고 터벅 터벅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분명히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에 관해 기록하기를 : 그는 작은 키에 다갈색의 머리였고, 짧게 깎은 수염에다 그가 말할 때 빛났던 연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라고 했고, 어떤 이는 “그는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고하였으며, 그와 매우 가까이 지내던 친구는 말하기를 그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고 하였다. 그러나 가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큰 고통이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올 때부터 그의 마을을 늘 멍들게 하였더 우울증이 두 번째 약혼녀 엘리자 캐더린 로쉬(Eliza Catherine Roche) 양이 결핵으로 시름 시름 앓다가 1860년 세상을 떠나 한층 더 심해졌고 돈 없는데다 건강이 악화하여 가난하고 병들어 아직까지 그가 돌봤던 그 친구들에게 오히려 짐이 되지 않을까 하여 심히 염려하였다. 그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사랑을 행하며 친절을 베풀었으나 그들에게 갚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떤 날 밤 이었다. 스크리븐이 중병으로 몸져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랑을 입은 친구 하나가 그를 찾아 갔다. 그런데 그 날 밤 비극이 일어 났던 겄이다. 그의 친구의 말에 의하면 나는 잠 자정쯤 그를 남겨두고 옆방으로 갔읍니다. 쉬려고 건 것이 아니라 밤 새우며 그가 나를 필요로하여 부를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였지요. 그런데 내가 그의 방을 찾았을 때 그의 방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어찌나 놀라며 낙망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를 찾아 헤매었으나 헛수고였고 정오가 약간 지나서야 인근 개울 물속에서 이미 싸늘해진 그의 시체를 발견하였읍니다. 라고 하였다. 그는 1886년 10월 10일 비들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이 사고인지 아니면 자살인지 알길이 없다. 그런데 어니스트에뮤리안(Ernest K.Emurian) 은 그의 저서 「유명한 찬송가의 생생한 이야기들 (Living Stories of Famous Hymns)」(p.139)에서 이르기를 스크린븐의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는 늘 기도하던 때처럼 무릎을 꿇고 죽었다ꡓ 고 하였다. 어찌 죽었든지 비들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아픈 비보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온타리오 포트 호프(Port Hope) 사람들은 피터바로우(Peterborough) 고속 도로 변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 고속 도로는 온타리오 호수로부터 뻗어 내려온 것이다. 이 기념비에 기록되기를 북쪽으로 4마일에 있는 펭겔리 공동 묘지에는 박애주의자요 1857년 포트 호프에서 쓴 위대한 걸작품의 작시자 죠셉 메들리캍 스크리븐이 누워 있다. 라고 씌어 있고 뒤이어 그의 찬송 3절이 적혀있다.
첫댓글 청마님께서 형제교회의 모습을 소개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여러부분에서 많이 아시네요...교회가 바르게 개혁될 부분을 아시기 때문에 많은 교회의 잘못된 관행애 대해서 용감하게 지적을 할 수 가 있겠지요....다른 여러 글에서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십니다...
감동이 되는 이야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