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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이의세상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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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스크랩 전선야곡
이쁜이 추천 0 조회 6 13.03.06 19: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선야곡 (1951)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노래 신세영

 

(1)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거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2)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여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3)방아쇠를 잡은 손에 쌓이는 눈물
손등으로 씻으며 적진을 노려보니
총소리 멎어버린 고지 위에 꽂히여
마음대로 나부끼는 태극기는 찬란해.
아~ 다시 한번 보았소.


전선야곡(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 1951년 10월 발표).

‘불멸의 보초가’로 병영 막사에서 군가보다도 많이 불리는 ‘전선야곡’의 가수, 그리고 ‘청춘을 돌려다오’의 작곡가이기도 한 신세영 선생(82). 지난 4월 18일,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 회장으로 재선출되어 또다시 원로가수들의 권익과 가요계 발전을 위한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나이를 잊은  듯 완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세영 선생의 활동을 재조명해본다.

 

‘신세영’이라는 예명은 당시 유명가수들이었던 申카나리아의 ‘申’, 장世정의 ‘世’, 이난影의 ‘影’자를 한 글자씩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흔히 그를 일컬어 ‘해방 이후 현인에 이어 두 번째로 가수가 된 인물'이라 칭한다. 그도그럴것이 당시엔 음반을 찍어낼 물자와 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누구나 쉽게 음반을 낼 수 없었던 탓이다. 그만큼 가수 또한 귀했던 시절이다. 1948년,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사를 통해 데뷔곡 ‘로맨스 항로’를 발표한 데 이어 ‘병원선’, ‘무영탑 사랑’, ‘이백리 푸른 달밤’, ‘십자성’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신세영의 본명은 정정수. 그는 1925년 광산업을 하는 부친 정자경과 포목점을 운영했던 모친 김옥경 사이 3남매 중 외아들로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어릴 때 대구로 이사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 복싱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콩쿠르에 참여하면서부터 점차 노래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이 무렵 이재호, 백년설, 이인권 선생 등 대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가수에의 꿈을 한껏 키우던 1945년 초, 해방을 불과 얼마 앞둔 시점에 그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집된다.

이때 평소 아껴주던 백년설씨가 역까지 마중 나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외동아들인 만큼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고 당부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고 회고한다. 그뒤 만주 봉천을 거쳐 항구 전선에 투입되는데 이때 그는 ‘B 29’의 폭격을 받아 대부분의 전우들을 잃고 그도 역시도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이송, 생사의 갈림길에서 감격적인 해방과 일본 패망 소식을 듣는다.

 

이 무렵 그는 정신대의 참혹상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더구나 그 주인공 중 한 여성을 최근 서울 방송국에서 다시 재회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이역만리에서 통한의 시간을 보냈던 정신대 할머니와 징용군이었던 신세영씨, 당시 절박한 상황만큼 60년 만의 해후는 믿기 어려려우리만치 감동적이었으리라. 일본 패망과 함께 중국에서 한달 반 가량 수용소 수감생활을 거친 뒤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전개하던 때 그의 대표곡 ‘전선야곡’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에 취입한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대표곡 이상으로 의미가 각별하다.

취입했던 바로 그날 어머니가 운명하셨기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항시 목이 메였다고 한다. ‘전선에서 그리는 고향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고스란히 담은 이 ‘전선야곡’은 대표적인 전쟁가요로 그 무렵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길가다가도 느닷없이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선 바람에 정작 어머니 얼굴조차 뵙지 못보고 고향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던 탓이다. 때문에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하는 부분에서는 특히 가슴이 북받쳐 올라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희생을 강요했다. 그 역시 이듬해 정훈국 공작대에 소속되어 국군들의 작전을 따라 최전방 덕천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는데, 이틀 만에 탈출하는 등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이때 생사를 함께 한 7사단 군예대원
중에는 가수 손인호씨도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작곡 활동도 함께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노래가 ‘청춘을 돌려다오(신행일, 현철, 나훈아 등 취입)’, 그 외에 ‘정처 없는 방랑자(최무룡)’, ‘화전민(배호)’, ‘비에 젖은 로맨스(안다성)’ 등을 작곡했다.

 

가족은 부인 박목련 여사와 슬하에 2남 2녀가 있다. 특히 장남 정태진씨는 한때 ‘태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하며 그의 작곡인 ‘추억의 동백섬’과 ‘남포동 소야곡’과 ‘저 달이 엿볼까봐’ 등을 발표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지난 1974년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이어 신세영씨도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들과 합류한 이후 틈틈이 한국을 오가다가 3년 전 2004년에는 비자를 반납하고 귀국했다.
 ‘묻혀도 한국 땅에 묻혀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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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정정수.1925년 광산업을 하는 부친 정자경과 포목점을 운영했던 모친 김옥경 사이 3남매 중 외아들로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대구로 이사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 복싱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콩쿠르에 참여하면서부터 점차 노래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1945년 초, 해방을 불과 얼마 앞둔 시점에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징집된다.

 

이후 만주 봉천을 거쳐 항구 전선에 투입되는데 이때 그는 B29의 폭격을 받아 대부분의 동료들을 잃고 그 역시도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이송, 생사의 갈림길에서 감격적인 일본 패망 소식을 듣는다. 이 무렵 그는 정신대의 참혹상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더구나 그 주인공 중 한 여성을 최근 서울의 한 방송국에서 다시 재회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1981년 신세영씨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틈틈이 한국을 오가다가 3년 전에는 아예 비자를 반납했다.'묻혀도 한국 땅에 묻혀야 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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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불멸의 보초가 ‘전선야곡’의 신세영 07. 6. 30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아∼ 그 목소리 그리워//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정안수 떠놓고서 이아들의 공 비는/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아∼ 쓸어안고 싶었소.//방아쇠를 잡은 손에 쌓이는 눈물/손등으로 씻으며 적진을 노려보니/총소리 멎어버린 고지 위에 꽂히며/마음대로 나부끼는 태극기는 찬란해/아∼ 다시 한 번 보았소.' -전선야곡(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1951년 10월 발표).

 

'불멸의 보초가'로 현재까지도 병영 막사에서 군가보다도 많이 불린다는 이 노래,'전선야곡'은 대표적인 전쟁가요다. 전 국토의 4분의3이 전쟁터로 변하고 온 국민을 전장으로, 피란민으로 내몰았던 6·25 한국전쟁. 당시 나온 노래로 특히 '전선에서 그리는 고향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고스란히 담은 이 노래는 온 국민들의 소맷자락을 적셨다.

 

특히 길가다가도 느닷없이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선 바람에 정작 어머니 얼굴조차 뵙지 못보고 고향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던 탓. 때문에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하는 부분에서는 특히 가슴이 복받쳐 올라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현재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장을 맡고 있는 신세영(82)씨.

 

이 '신세영'이란 예명은 당시 최고 여가수들이었던 신카나리아의 '申', 장세정의 '世', 이난영 이름의 '影'자를 한 글자 씩 조합해 만든 이름.1948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데뷔곡 '로맨스 항로'를 발표한 데 이어 '영 너머 고갯길','바로 그날 밤','무영탑 사랑' 등을 잇달아 발표했던 그는 해방 이후 현인에 이어 두 번째로 가수가 된 인물. 음반을 찍어낼 물자와 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누구나 쉽게 음반을 낼 수 없었던 탓으로 그만큼 가수 또한 귀했다.

이 노래는 그에게 대표곡 이상으로 의미가 각별하다. 취입했던 바로 그날 어머니가 운명하셨기 때문.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더욱 목이 메었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그 역시 이 노래를 발표한 이듬해 국방부 정훈국 공작대에 소속되어 북진하는 국군의 작전을 따라 최전방 덕천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에게 포위, 이틀 만에 탈출하는 등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이때 생사를 함께 한 7사단 군예대원 중에는 가수 손인호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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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야곡’<세계일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이 노래 ‘전우야 잘 자라’는 6·25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노래 중 전장에 가장 가까이 간 노래다. 쌓인 시체들에게 ‘잘 자라’는 한마디 남기고 총탄 속으로 다시 전진하는 상황이 절박하고 비장하다.

 

이 노래는 정식 군가로는 채택되지 못했다. 2절 가사에 나오는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가 ‘감상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노래 말고도 정작 군가보다 더 병사들에게서 사랑받았던 6·25전쟁이 만들어낸 명곡은 많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나리는 이슬도 차거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아아아 그 목소리 그리워

 

 이어지는 현인의 ‘전선야곡’은 애절하다. 영화 ‘고지전’에서는 참호 속에서 병사가 이 노래를 부르지만, ‘전우야 잘자라’ 같은 전장의 노래는 아니다.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씨가 1952년 부산 피난시절에 만들었다. 사실 6·25전쟁에서 전방과 후방을 나누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고통은 전방위로 널려 있었다. 남은 이들의 고통을 담은 노래가 더 많았다. 화약연기 속에 끌려간 님을 한탄하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나, 1·4후퇴 때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목을 놓아 불러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금순이’에게 어디에 있든지 ‘굳세어라’고 울먹이는 노래들이 그렇다.

 

피난지 부산 중앙시장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에게 울지 말고 속시원히 말이나 해보라고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러이 묻는” 노래(‘경상도 아가씨’)도 있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우네”로 이어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경상도 아가씨’의 속편처럼 들린다. 지금이야 노래방에서 취흥을 돋우는 정도로 남았지만 돌이켜 새겨보면 가슴 아픈 노래들이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9월21일까지 열리는 특별기획전 ‘전선야곡’에 가면 이 노래들을 담은 희귀 LP판을 보고 들을 수 있다. 6·25전쟁을 반영한 문학 미술 영화도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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