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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을 물에 내려놓는 수행은 특별한 방법을 새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수행을 그대로 하되 거기에 매달리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기도를 마친 뒤 오늘 기도가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를 따지지 않는 것 독경을 마친 뒤에도 몇 번 읽었는지를 세지 않는 것 수행의 결과를 놓아야 수행 자체가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부처님께서 전하시는 가르침의 방향은 일관됩니다. 보시에 머물지 말라 하셨고 분별에 머물지 말라 하셨습니다. 마음의 작용에 머물지 말라 하셨으며 분노에 머물지 말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가르침을 담고 있는 법 자체에도 머물지 말라 하십니다. 집착의 층위가 점점 깊어지고 있으며 금강경은 그 마지막 한 겹까지 벗겨내고 있습니다. 바깥의 것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하여 안의 것에 대한 집착을 지나 마침내 가르침 자체에 대한 집착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과정을 따라오면서 우리는 놓아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거듭 발견하게 됩니다. 이 가르침 앞에서 잠시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수행 자체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가 경전의 문자를 쥐고 있으면서 경전이 가리키는 자리는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십시오. 뗏목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수행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수행의 결과에 메이지 않고 수행 그 자체를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집착을 놓은 자리에서 부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지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형상으로 열애를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물으십니다. 30 이상으로 열애를 볼 수 있느냐고 30 이상이란 부처님의 몸에 갖추어져 있다고 전해지는 32 가지 뛰어난 신체적 특징을 뜻합니다. 발바닥이 평평하고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 같은 막이 있으며 정수리에 육개가 솟아 있고 몸에서 광명이 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경전에서는 이 30 이상을 갖춘 분이 곧 부처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전륜성왕 곧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상적인 왕도 30 이상을 갖추고 있다고 경전은 전합니다. 그렇다면 30 이상을 갖추었다고 해서 모두 부처인 것은 아닙니다. 영상만으로는 부처와 전륜 상황을 구별할 수 없기에 형상이 곧 부처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뜻이 이미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30 이상으로 열애를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십니다. 30 이상으로 열애를 보아서는 안 된다고 열애가. 서란 30 이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이름이 30 이상일 뿐이라고. 이 말씀이 처음에는 매우 난해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특징이라고 가르쳐 놓고 그 특징으로 부처님을 보면 안 된다니 모순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 금강경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30 이상은 부처님을 알아보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30 이상 자체가 부처님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형상에 매달리면 형상 너머에 있는 진짜 부처를 놓치게 됩니다. 이것이 금강경이 거듭 전하고 있는 가르침의 연장선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보다 더 강렬한 구절이 있습니다. 범소유상 개시어망 무릇 잇는 바의 상은 다 허망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성은 허망하다고. 부처님께서는 단정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전하셨습니다. 약견제 상비상 직견열에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열애를 보리라. 이 두 구조를 함께 놓고 보면 금강경이 가리키는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형상을 통해 부처를 찾으려 하면 부처를 만날 수 없고 형상이 허망함을 꿰뚫어 볼 때 비로소 부처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금강경의 흐름 속에서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한층 분명해집니다. 모시에 집착 분별의 집착 마음의 집착 분노의 집착 가르침의 집착을 차례로 놓은 뒤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으로 붙여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따르면서도 부처님의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금강경만이 던질 수 있는 가장 과감한 가르침이며 집착을 놓는 수행의 마지막 관문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수행 현장을 돌아보겠습니다. 절에 가면 법당 한가운데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금빛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합장하며 기도를 올립니다. 이 불상에 절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불상은 부처님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방편이며 수행의 마음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불쌍히 곧 부처라고 여기기 시작하면 방편이 집착으로 바뀝니다. 불상이 크고 화려한 절이 더 좋은 절이라고 생각하거나 불상 앞에서만 기도가 통한다고 믿게 되면 형상의 마음이 매여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경계하신 것이지 불상에 절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에는 이보다 더 직접적인 경고도 담겨 있습니다. 만약 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돌을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열애를 보지 못하리라. 금강경의 이 구절은 평상에 대한 집착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뜻하고 음성이란 귀에 들리는 소리를 뜻합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눈으로 찾거나 부처님의 목소리를 귀로 구하려 하면 열애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불교의 수행에서 불상을 보고 독경 소리를 듣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것에 머물지 말라 하십니다. 형상과 소리는 입구일 뿐 그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입구를 통해 들어가되 입구에 서서 머무르지 않아야 비로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상 앞에 앉아 기도할 때를 떠올려 보면 이 가르침의 뜻이 한결 가까워집니다. 처음에는 불쌍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이것은 방편이며 매우 자연스러운 시작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깊어지면 어느 순간 눈앞에 불쌍이 사라지고 오직 마음만 남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순간이 바로 형상을 넘어 열애를 만나는 자리입니다. 형상에서 시작하되 형상을 넘어가는 것 이것이 금강경이 전하는 수행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열에는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곧 열애를 본다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형상이 상의 아님을 본다는 것은 형상의 실체가 없음을 꿰뚫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불상을 볼 때 금빛 형상에 머물지 않고 그 형상 너머의 가르침을 보는 것 경전을 읽을 때에도 글자에 머물지 않고 글자가 가리키는 마음을 보는 것 이것이 재상 비상의 실천입니다. 여러분 이 가르침은 법당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형상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람의 외모 직업의 지위 집의 크기 차의 종류 이 모든 형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마음을 메어둡니다. 좋은 형상에는 끌리고 나쁜 형상에는 밀려나며 그 사이에서 마음이 쉴 틈 없이 흔들립니다.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음도 형상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거울 앞에 서서 예전과 달라진 얼굴을 보며 한숨 쉬는 그 순간에도 형상이라는 상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범소 유상 개시어망이라는 말씀은 이 모든 형상이 본래 실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젊음이라는 형상도 영원하지 않았고 건강이라는 형상도 변하기 마련이며 아름다움이라는 형상도 시간 앞에서는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실체가 없는 것에 매달려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2한 9절 안에 담겨 있습니다. 경전의 말씀은 하는데 삶에서는 여전히 형상에 흔들리는 그 간극을 느끼셨던 분이 계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바로 그 간극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절에서 큰 불상 앞에 앉아 기도할 때와 집에서 작은 불상 앞에 앉아 기도할 때 마음의 깊이가 달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산속 깊은 암자에서 수행하는 것과 도시의 작은 방에서 염분하는 것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란 없습니다. 형상의 크기와 장소의 격이 수행의 깊이를 결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형상에 머물지 않는 마음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이 자유를 체험할 수 있는 수행법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나 독경을 마친 뒤 눈을 감고 잠시 앉아 보십시오. 방금 보았던 불쌍의 모습 들었던 독경 소리 맡았던 향 냄새를 하나씩 놓아 봅니다. 형상도 넣고 소리도 넣고 향기도 놓은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를 가만히 살펴봅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머물러 보면 고요한 가운데 무언가가 깨어 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깨어 있음이 형상 너머의 부처이며 금강경이 가리키고 있는 열애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가르침을 하나로 꿰뚫는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금강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고계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체 위법 염홍한 포영 여러 역 여전 응작여시관 일체의 유의법은 꿈과 같고 헛계비와 같으며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 금강경 전체를 마무리하는 이 네 줄의 개성을 사국이라 부릅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의 마지막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모든 가르침을 이 사국의 하나로 응축하여 전하십니다. 지금까지 놓으라 하신 모든 집착의 끝에 이르러 이 세상 모든 것의 본질을 한마디로 설하시는 것입니다. 유의법이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을 뜻합니다. 인연이 모여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지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내 몸도 내 마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내가 쌓아 올린 것들도 모두 인연에 의해 잠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유의법의 본질을 여섯 가지에 비유하셨습니다. 첫째는 꿈이며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생생합니다.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며 진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깨어나면 그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 또 깨어나기 전에 꿈과 다르지 않다고 부처님께서는 전하고 계십니다. 어젯밤 꾼 꿈을 아침에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지금 이토록 생생한 오늘의 일도 세월이 지나면 꿈결처럼 흐릿해질 것입니다. 둘째는 헛개비입니다. 환이라고도 하며 실체가 없는 허상을 뜻합니다.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데 손을 뻗으면 잡히지 않는 것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실은 헛개비처럼 실체가 없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물거품입니다. 물 위에 뜬 거품은 잠깐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가 곧 터져 사라집니다. 우리의 감정도 우리의 생각도 이 물거품과 같아서 올라왔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합니다. 거품이 터질 때마다 슬퍼할 필요가 없듯 마음에 올라오는 것들이 사라져 간다 하여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넷째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어야 생기지만 그림자 자체는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의 모든 현상 어떤 실체의 그림자일 뿐 그것 자체가 실체와는 다릅니다. 성공도 실패도 칭찬도 비난도 모두 본래의 나에게 붙어 있는 그림자이지 본래의 나 자체는 아닙니다. 다섯째는 이슬입니다. 새벽에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햇살이 비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아름답고 영롱하지만 머무르지 못하는 것 우리의 젊음도 건강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시간도 이슬처럼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지금 곁에 있는 이의 소중함을 이슬이 사라지기 전에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는 번개뿔입니다. 번개는 치륵 같은 어둠을 순간적으로 밝히지만 다음 순간 다시 어둠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기쁨과 환희도 번개뿔처럼 잠깐 빛났다가 사라져갑니다. 승진의 기쁨도 합격의 환희도 사랑하는 이를 만났을 때의 떨림도 돌이켜 보면 순간이었습니다. 이 여섯 가지 비유를 하나로 모아보면 공통된 가르침이 보입니다. 모든 것은 잠시 왔다가 간다는 것 그리고 그 잠시 왔다가 가는 것에 매달리는 마음이 괴로움의 근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허무하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꿈이고 물거품이라면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이 올라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 사고계를 통해 전하시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며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짜 자유가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꽃이 지기 때문에 꽃이 아름다운 것처럼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귀한 것입니다. 무상함을 아는 사람은 오히려 지금을 더 깊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은 꿈속의 일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꿈과 같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된 사람은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이 삶이 영원할 것이라는 전제가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삶이 본래 꿈과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죽음의 두려움도 그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일을 먼저 보내신 분들의 마음에도 이 가르침은 조용히 스며들 수 있습니다. 떠난 이와의 이별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면 그 이별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닌 형상의 변화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 사국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먼 이야기처럼 들리던 말씀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함께하던 사람이 먼저 떠나고 몸이 예전 같지 않으며 지나온 세월이 꿈결 같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 있으셨을 줄 압니다. 30년 전의 일이 어제 같고 어제의 일이 이미 아득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런 밤에 이 사고계를 떠올려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이 무상함을 슬퍼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전하신 것입니다. 응작여 시골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진이라. 이 마지막 구절이 사국의 전체의 열쇠입니다. 꿈과 같고 헛개비와 같으며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그저 알기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이와 같이 보라고 부처님께서는 전하셨습니다. 관이란 바라보며 그렇게 바라보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수행을 뜻합니다. 한 번 깨닫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이와 같이 보는 연습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국에는 한 번 읽고 넘기는 구절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바라보는 눈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사고계를 수행에 적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를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겪은 기쁜 일도 힘들었던 1도 하루가 지나면 어제의 일이 됩니다. 한 달이 지나면 기억조차 흐릿해지고 1년이 지나면 꿈처럼 아득해집니다.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오늘의 괴로움에 매달리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순간에 이 사국의 한 구절을 가만히 읊어 보는 것입니다. 염원한 포영 꿈과 같고 헛개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이 한 주를 마음속으로 되내면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이 감정도 이 상황도 영원한 것이 아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떠올림 하나가 마음에 한 뼘의 여백을 만들어 줍니다. 금강경은 이 사고계로 법문의 대미를 장식하였습니다. 모시에서 시작하여 분별을 지나 마음을 지나 분노를 지나 가르침을 지나 형상을 지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것의 본질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유의법이 꿈과 같고 번개불과 같다는 이 한마디가 금강경이 전하고자 한 궁극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가르침을 들은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금강경의 마지막 이야기가 이어서 시작됩니다. 금강경에 긴 여정이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왜 놓지 못하는가? 집착을 버리라는 말은 수없이 들어왔지만 어떻게 버리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2500년 전 스보리도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으며 부처님께 같은 질문을 던진 바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내고 어떻게 항복시켜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번에 주시지 않았습니다. 판 겹식 천천히 집착의 층위를 벗겨 나가셨습니다. 먼저 도시에 머물지 말라 하시며 좋은 일을 하고도 대가를 바라는 마음 공덕을 쌓았다는 뿌듯함에 매달리는 마음을 놓으라 전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와 남을 나누는 분별을 놓으라 하셨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네 가지 집착이 우리 삶에 거의 모든 괴로움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어서 마음의 작용 그 자체에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이 나왔습니다. 음무소주의 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좋은 감정에도 매달리지 않고 나쁜 감정에도 끌려가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 그리고 그 자유로운 마음이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인욕선인의 이야기로 보여주셨습니다. 칼로 몸을 베이면서도 분노하지 않은 까닭은 분노할 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르침 자체에 대한 집착마저 놓으라 하셨습니다. 강을 건넌 뒤에는 뗏목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비유로 금강경조차 집착하면 안 된다고 전하셨습니다. 나아가 부처님의 형상에 대한 집착도 놓으라 하시며 범소유상 계시어망이라는 말씀으로 있는 바의 상은 다 허망한 것이라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고계를 통해 이 세상 모든 것이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불과 같다고 전하셨습니다. 이 여정을 따라오신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혹시 이 모든 것을 다 넣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올라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살아온 세월 동안 쌓아온 것들 지켜온 관계들 믿어온 가치들 이것들을 다 놓으면 무엇이 남느냐는 물음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부처님의 답은 분명하였으며 집착을 놓으면 자유가 남는다 하셨습니다. 놓는다는 것은 버리는 것과 다릅니다. 가족을 사랑하되 그 사랑에 매이지 않는 것 일을 열심히 하되 그 결과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 수행을 계속하되 수행했다는 자부심에 머물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놓는다는 것은 손에서 내려놓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내려놓는 것을 뜻합니다. 집착을 놓은 자리에서는 오히려 삶이 더 풍요로워집니다. 이를까 봐 두려워하지 않기에 지금 가진 것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결과에 메이지 않기에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며 남과 비교하지 않기에 나의 자리에서 평안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이 말하는 자유이며 이 자유는 무기력과 전혀 다른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무기력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착을 놓은 사람은 오히려 더 깊이 살아갑니다. 사랑하되 매달리지 않고 슬퍼하되 침잠하지 않는 마음. 기뻐하되 들뜨지 않는 마음입니다.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온전히 느끼되 그 감정이 지나가도록 놓아두는 것 이것이 금강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해 온 가르침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놓아야 할 것과 놓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금강경은 한 가지만을 넣으라고 전합니다. 대상 자체를 노후라는 뜻이 아닌 대상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는 뜻입니다. 재물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재물에 매달리는 마음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건강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놓으라는 뜻입니다. 이 구별이 분명해지면 놓는다는 것이 상실이 아닌 해방임을 알게 됩니다. 오래 수행해 오신 분들 가운데 놓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하는데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간극이 괴로움이 되어 스스로를 탓하셨던 밤이 있으셨을 줄 압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간극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놓으라 하지 않으시고 보시에서 시작하여 한 겹씩 벗겨나가신 것입니다. 금강경의 구조 자체가 한 번의 깨달으라는 요구가 아니라 천천히 한 겹씩 노화가라는 안내였습니다. 오늘 이 범문을 들으시면서 마음 하나만 내려놓아 보십시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밤 하나만 놓아 보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며칠째 마음에 걸려있던 서운함 하나. 오래전부터 앉고 있던 원망 하나 놓지 못하고 있던 후회 하나. 그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 하나를 골라. 오늘 밤 잠자리에서 내려놓아 봅니다. 내려놓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을 떠올린 뒤 이것도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고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면서 그 마음을 놓아 보십시오. 한 번에 놓아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놓으려는 마음을 낸 것 자체가 이미 금강경의 가르침을 살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 독성을 하시는 분이라면 오늘부터 독성을 마친 뒤 잠시 눈을 감고 이 무릎을 던져 보십시오. 오늘 나는 무엇에 머물러 있었는가? 그 머무름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한 겹의 집착이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금강경은 있는 경전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경전이기도 합니다. 매일 한 겹씩 놓아가는 것이 금강경을 사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집착을 버리라는 경전이 아니었습니다. 집착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주고 한 겹씩 스스로 놓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경전이었습니다. 수보리가 처음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경전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었기에 그 답의 마지막은 놓아도 된다는 한마디로 귀결됩니다. 금강경을 다 들으신 지금 처음 들으셨을 때와 마음이 조금은 달라지셨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깨달으셨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금강정은 한 번 듣고 끝나는 경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읽을 때마다 들을 때마다 다른 한 겹이 벗겨지는 경전입니다. 오늘 이 법문에서 마음에 닿은 구절이 하나라도 있으셨다면 그것으로 오늘의 수행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금강경 전체를 한번 독성하는 데는 약 40분에서 1시간이 걸립니다. 매일 독성하기 어려우시다면 오늘 법문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 하나만 골라보십시오. 음무소주의 생기심이 될 수도 있고 범소유산 개시어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고계가 마음에 남으셨다면 그것을 택하셔도 좋습니다. 그 한 구절을 매일 아침 한 번 저녁 한 번 읊어? 보시는 것만으로도 금강경의 지혜는 조금씩 사만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이 더문이 오늘 밤 여러분의 마음에 고요한 쉼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나무 석가모니 불 나무 석가모니 불 나무 석가모니 불 금강경의 지혜가 이 법문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을 비추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집착의 무게에서 한 걸음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편안히 쉬시고 내일 아침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시기를 추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