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란 바로 이런 것이다.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로 열연한 문소리는 작품에 대한 헌신으로 불가사의한 연기의 신경지를 보여준다.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 문소리가 18개월간의 침묵에서 깨어났다.
2001년 봄 - 절대 만들어서는 안 될 영화
이창동 감독님은 워낙 웃기는 인간들에게 관심이 많으신 분이다. 지금 생각하면 <오아시스>의 이야기가 될 아이디어를 여러 번에 걸쳐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냥 드문드문 생각나는 대로 툭툭 던지셨는데 어느 날은 ‘남자가 여자 장애인을 강간하는 이야기는 어떨까?’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펄쩍 뛰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장애인을 강간하는 것은 너무 부도덕한 일이다. 나는 절대 안 된다고 아주 강력하게 반대했다. 물론 그 장애인이 내가 맡을 배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박하사탕> 이후 감독님과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있지만 '감독님의 차기작에 출연하고 싶다, 혹은 출연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서는 안 될 부분이라 여겼다. <박하사탕>을 하면서 연기나 상업성이 떨어지는 나를 기용해 얼마나 힘드셨는지를 옆에서 지켜봤는데 다음 영화는 더 잘 돼야지, 내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는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감독님은 평소답지 않게 서두르시며 ‘빨리 해서 겨울에 촬영할까?’라고 하셨지만 경구 오빠나 나는 별로 기대를 안 했다. 경구 오빠는 ‘감독님 영화는 푹 삭아야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금방 안 나올 것’이라고 장담했다.
2001년 여름 - 무엇을 위한 취재인가?
감독님이 여성 장애인을 미리 섭외해서 나에게 취재를 부탁했다. 물론 목적이 있는 거였지만, 여름 내내 그분들과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집에 가서 놀기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한 분은 목동에 사는 정윤수씨(34)였고 다른 한 분은 시흥에 사는 홍미선씨(30)였다. 윤수 언니는 굉장히 씩씩하고 농담도 잘했다. 집도 너무 깨끗하게 잘 꾸며놓고 옷도 화려하고 예쁜 것만 입었다. 원래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는데 혼자 살면서 성격이 변했다고 했다. 윤수 언니는 동사무소와 싸워 슈퍼마켓, 관공서 가는 길의 턱을 다 없애고 비탈을 만든 사람이다. 미선 언니는 윤수 언니와 성격이 정반대였다. 수줍음이 많고 감상적이며 소녀 같았다. 하루는 미선 언니 집에 갔다가 정학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노을을 봤다. 지상에 역사가 있는 정학역은 승객이 별로 없어 무척 황량한 느낌을 주는 곳인데 그때 휴대용 CDP로 듣고 있던 음악이 <파리, 텍사스> OST였다. 갑자기 눈물이 막 흘러내렸다. 언니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이런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어서 안 그래도 힘들게 사는 장애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다.
2001년 9월 - 미안해 엄마, 날 용서해
가족이나 친구들은 내가 뭐하고 다니는지를 전혀 몰랐다. 취재는 조용히 진행됐다. 감독님은 내 취재를 통해서 <오아시스>가 제작 가능한 영화인지 알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감독님이 원하는 수준의 장애 연기를 장애인이 아닌 배우가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셨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 모르지만 나에게 오디션 기회를 먼저 줄 테니 준비해 보라고 넌지시 언질을 주셨다. 무척 부담스러웠다. 스포츠센터에 다니면서 우선 체력 단련부터 시작했다. 물론 집에는 새 영화에 대한 얘기를 비밀로 했다. 나중에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도 찾기 어려운 곳에 꽁꽁 숨겨뒀다. 딱 꼬집어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부모님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2001년 10월 - 공주는 장애인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여인
방문을 잠궈놓고 장애 연기 연습을 했다. 윤수 언니나 미선 언니를 녹화한 테이프가 있긴 했지만 사람마다 신체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똑같이 따라해도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것 저것 해보면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장애 정도를 찾아 나갔다. 잠깐은 되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서 연기를 할 수 있나 확신이 안 섰다. 혼자 머리를 싸매면서 연습을 하는데 집이라 왠지 불안했다. 영화사의 작업실로 자리를 옮겨 햇반에 3분 카레 얹어 먹으면서 혼자 연습을 했다. 카메라 켜놓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마음이 동하면 연습하고 또 나중에 돌려보고 연습 장면이 아닌 부분은 지우면서 테이프 열 몇 개를 채웠다. 10월 말쯤 감독님이 연기를 보자고 했다. 실제로 보여주는 것보다는 녹화한 것을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감독님과 조감독님이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고 플레이 버튼만 누르면 되는 순간, 도저히 못 누르겠다며 캠코더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감독님이 그걸 보시고 연기를 하라고 해도 싫고, 안 되겠다고 해도 싫을 것 같았다. 감독님은 무척 심란한 표정이었다. ‘영화를 못 만드는구나. 이번에는 어렵겠구나’하는 속마음이 읽혔다. 조감독님이 따로 얘기 좀 하자고 했다. “감독님은 네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자 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일단 보여주는 거다. 그게 100에 50십을 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감독님이 말하길 그때 내 눈빛이 좋았단다. 혼자 방에 처박혀 꼼짝도 안하고 있으니까 눈빛이 퀭해진 것이다. 눈빛은 맘에 드는데 내가 보여주질 않으니까 감독님이 오지혜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소리 한번 만나 봐라.”
얼마 후 오지혜 선배가 찾아왔다. 우리 영화를 같이하는 선배도 아니고 그날 처음 만난 선배인데 몇 시간 동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오선배가 “문제는 네 욕심이다. 너는 신인이고 아무도 너에게 세계적인 명연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역은 아무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게 정답이다. 그런데 뭐가 무섭냐? 너 감독님 못 믿냐? 배우가 감독님도 못 믿는 이런 태도는 굉장히 거만한 거다”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던 부분에 대해 지적을 받자 헝클어졌던 마음이 정리가 되고 머리가 개운해졌다.
오선배가 두번째 방문하던 날 녹화된 테이프를 보여줬다. “저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일단은 안심이었다. 거기에 자극을 받아서 다시 오선배를 만나는 날까지 열심히 연습했다. 하지만 세번째 만나는 날에는 “너 장애인 흉내내기 대회 나가는 거야? 왜 거기에만 집착해? 너는 종두와 사랑에 빠지는 공주야. 그게 제일 중요한 거고 그냥 장애인처럼 보이면 돼”란 소릴 들었다. 그 말이 내게 용기를 줬다. 그러다 얼마 후 오선배가 봤던 똑같은 위치에서 감독님과 조감독님께 테이프를 보여줬다. 조감독님은 대번에 “할 수 있겠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고 감독님은 그냥 “연구해보자”고 말했다.
2001년 11월 - 내 안에 들어온 한공주
이미 다 알고 있던 얘기지만 드디어 시나리오가 나왔다. 사무실 위 작업실에서 연기 연습을 하면서 종종 사무실에서 열리는 연출부 회의에 참석하던 나는 감독님과 공주가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종두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강간당하는 것 자체도 납득이 안 되고 그런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더더구나 이해가 안 됐다. 토론을 하면 할수록 남자 스탭들과 코드가 안 맞았다. 나중에는 울고 불고 싸우면서 얘기를 했다. 내 의견이 반영이 된 부분은 강간 장면을 찍고 나서다. 시나리오에는 강간 미수 사건 후 공주가 과도로 자살하려는 신이 나오는데 내가 “공주는 안 죽는다. 밤에 자다가 죽어버릴까 생각할 수는 있지만 공주는 다음날 칼을 꺼내들지 않는다”고 우겨서 결국 편집에서 빠졌다. 11월 말에 공주의 오빠, 새언니, 그리고 종두가 공주인 내 연기를 보러 왔다. 그동안은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확신이 없었는데 공주 오빠 역을 맡은 손병호 선배가 칭찬을 많이 해줬다. 경구 오빠도 내게 “입에서 장애인 침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띄워줬다.
2001년 12월- 술과의 전쟁, 살과의 전쟁
4일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제작발표회 뒤풀이에서 경구 오빠와 내가 제일 먼저 뻗었다. 둘 다 살 빼느라 체력이 약해져서 소주 몇 잔에 바로 갔다. 경구 오빠가 먼저 실려 나가고 그 다음에 내가 실려 나갔다. 현장에서도 경구 오빠와 나는 맨밥에 된장찌개만 먹었고 줄넘기라도 운동을 해야 했다. 원래 된장찌개를 좋아하긴 하지만 삼겹살 냄새, 부대찌개 냄새에 괴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밤 촬영 때 먹었던 야식도 생수와 오이였다. 다른 스탭들은 사발면, 햄버거, 콜라를 먹었다. 그래서 동대문 아파트 세트장에서 촬영할 때 하루에 하나씩만 먹었던 붕어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2002년 1월 - 비둘기야 제발 연기 좀 해봐
원래는 공주의 첫 촬영은 1월 중순부터 잡혀 있었다. 비둘기와 나비가 날아가는 신만 찍고 공주 신을 촬영하자고 했는데 비둘기가 문제였다. 산비둘기도 잡아오고 앵무새도 날렸지만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잡아온 산비둘기가 알을 낳았다. 새끼를 밴 비둘기였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임신한 비둘기를 그렇게나 많이 괴롭혔던 것이다. 스탭들이 뇌성마비 비둘기가 탄생하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다. 오늘은 내 촬영을 시작하겠지 하고 현장에 나가면 비둘기만 날리고 또 나비만 날리고, 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2002년 2월 - 나 떨고 있니?
모두들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2월 4일 공주의 첫 촬영이 있던 날 현장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첫 장면부터 공주의 클로즈업이었다. 몇 번의 리허설을 하는 동안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이게 뭔 짓이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감독님은 내가 어색해 할까봐 경구 오빠에게도 뇌성마비 연기를 해보라고 하고 스탭들에게도 해보라고도 했다. 또 “나도 해볼까” 하고 직접 나서서 울던 나를 웃게 만들었다. 긴장이 풀어진 것이다. 그날 저녁 투자사 사장님이 오셔서 회식을 했다. 물론 나는 그날도 된장찌개를 먹었다. 술 한 잔 걸치신 감독님은 기분이 좋아 이젠 종두 흉내까지 냈다. 첫 출발이 순탄하게 진행돼 마음이 좀 놓였다.
2002년 2월 - 이름만 공주면 뭐하나
<오아시스>를 찍으면서 “나 못 생기게 나오기로 아시아 최고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세계 최고’는 너무 뻥인 것 같고 ‘국내 최고’는 너무 약한 것 같아서 ‘아시아 최고’라고 했다. 예쁘게 나오는 것은 애당초 포기했지만 분장팀 언니들은 “공주 판타지 신에서는 예쁘게 해줄게”라며 위로를 많이 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감독님이 지하철 판타지 신에서도 그 흉한 가짜 이빨을 끼라는 거다. 기가 막혔다. 공주 옷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분장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이빨까지 끼라고 하는 거는 정말 너무하다. 내가 열 받아 있으니까 감독님은 강제로 시키지는 못하고 일단 슛 자세를 잡는다. 그러고는 멀리서 “소리야 이빨 낄래? 뺄래?” 그러는 거다. 내가 한숨을 팍 쉬었더니 경구 오빠가 내 맘을 알고 “감독님, 소리 이빨 뺀대요”라고 대신 소리쳐 줬다. 솔직히 ‘감독님이 끼라고 하면 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안 낀다고 우겨보려고 했는데 내 작전이 유효했다. 카메라가 앉아 있는 공주와 서 있는 종두를 잡고 있다가 종두 쪽으로 올라가면 화면에서 빠진 공주가 2, 3초 사이에 정상으로 변해서 종두 옆에 서야 한다. 그 사이에 이빨을 얼른 빼고 머리도 한 번 만져줘야 한다. 한 컷에서 찡그리고 있다가 바로 멀쩡하게 웃으려니 나도 황당했다.
이빨은 다행히 빼게 됐지만 전반적으로 감독님은 좀 너무했다. 내가 장애인이고 아무리 못살아도 ‘이런 옷을 입을까’ 싶을 정도로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옷을 가지고 와서 입으라고 하신다. 의상은 최대한 평범하게 입는 걸로 합의를 봤는데 솔직히 그게 평범한 건가? 너무 후져서 튀는 거지? 소품에는 내 의견이 반영됐다. 나는 공주가 곱창 머리띠를 좀더 화려한 것을 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사랑에 빠진 공주가 꾸밀 수 있는 게 머리띠 말고 또 뭐가 있겠나? 더 밝고 씩씩한 공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2002년 3월 - 제 정신으로는 찍을 수 없었던 장면
강간 미수 장면 촬영이다. 하지만 스탭들은 ‘강간’이라는 말을 안 썼다. 그냥 ‘사건’이라고 했다. 사건이 있던 전날, 그 다음 날,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 내가 예민해지는 것을 아니까 그렇게 배려한 거다. 우선 6mm 캠코더로 리허설을 하고 똑같은 앵글로 필름 촬영을 했다. 나는 정사 신보다 훨씬 힘들었다. 네번째 테이크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 목욕탕 입구에서 컷이 끝나는데 ‘컷’ 소리만 나면 사지가 떨려서 일어나질 못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경구 오빠가 ‘컷’ 떨어지면 나를 꽉 잡고 가만 있으라고, 괜찮다고 진정시켰다. 분장팀에서는 뜨거운 물수건 대주고, 아로마 향을 물에 타서 긴장을 풀어줬다. 전속 마사지 트레이너도 스웨덴식 스포츠 마사지를 해줬다. 처음에는 연기고 뭐고 정신이 없었는데 일곱 테이크쯤 가니까 다음 동작이 예상이 가고 정신이 들었다. 나중에 들으니 감독님은 그보다 표현 수위를 더 세게 원하셨다고 했다.
2002년 4월 - 왜 이렇게 서러운 걸까?
종두 어머니 생신 잔치 장면을 찍었다. 그 신에서는 종두가 방울새 얘기를 하면서 막 웃는데 실제 촬영장도 웃음바다가 됐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한 테이크에 OK가 난 장면이 그 장면이다. 현장에서 감독님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NG가 날 뻔하다가 간신히 OK가 났다. 감독님은 컷을 한 후 모니터를 확인하면서도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도대체 뭐가 웃긴 거야?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고 비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왜 웃는 거야?’ 공주는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울기 싫어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뭐가 재미있다고 웃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장면 끝나고 감독님이 “소리야, 수고했다”고 하는데 인사도 안하고 집에 왔다. 나중에 영화를 보니 감독님은 그 장면에서 공주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잘 담아내고 있었다. 그 장면의 웃음이 비틀어진 웃음이었는데 나는 영화를 찍으면서는 너무 서러웠던 거다.
영화를 찍으면서 아무도 공주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 야속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장애인 역을 맡다 보니 간접적으로라도 장애인들의 소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은 내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데 조명을 설치하던 스탭이 “거기 공주 좀 치워줘요” 하는 거다. 나보고 직접 비켜달라고 하면 되는데 나를 왜 물건 취급하지? 이 영화가 장애인 복지 개선을 위해 만드는 영화도 아닌데 혹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묻어 있지 않나 자꾸 신경이 쓰였다.
2002년 4월 - 감독은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냐
정사 신. 감독님은 가혹하게 시키면서도 굉장히 미안해 하신다. 그래서 “제발 미안하다는 말 좀 하지 마세요. 미안하다고 선수치면 제대로 불평도 못 하잖아요”라고 했다. 충분히 고통을 공감하는 것 같은 표정을 김덕님이 지으면 나는 속으로 더 화가 났다. “이건 테이크 많이 갈 수도 없잖니?”라며 위하는 척하면 그건 “처음부터 잘해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그렇다고 종두와 공주가 사랑을 안 나눌 수도 없고, 남들은 옷 벗고 하는 거 우리는 옷 입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질 않는가? “상반신은 꼭 그렇게 노출해야 돼요?” 그런 질문은 우리 사이에 할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강간 신보다는 훨씬 쉽게 찍었다.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2002년 5월 - 이 은혜를 어찌 갚으리
아기 코끼리가 나오는 마지막 판타지 장면을 찍기 위해 태국까지 날아왔다. 지나가는 아무 코끼리나 끌고 와서 찍으면 된다더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간신히 캐스팅한 아기 코끼리 비아는 어미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했다. 비아는 어미가 젖이 나오지 않아 사육사가 두유를 먹여 가며 키운 6개월짜리 아기 코끼리였는데 귀엽기는 했지만 연기를 너무 못했다. 밤에는 너무 졸려 해서 1시간 재웠다가 다시 깨워 마지막 촬영을 끝냈다. 꼬마는 태국에 사는 인도 빈민촌 아이 쏜폰으로 캐스팅했다. 물망에 오른 세 명의 아이 중 가장 영리하고 예의도 바랐다. 조그만 선물을 하나 줘도 3번은 거절하고 난 다음에 받았다. 종두와 공주가 뽀뽀하니까 그 애를 데리고 온 이모가 보지 말라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말레이시아에서 날아온 무희 샤미니는 인도 전통 무용을 전수받은 예술인이다. 춤도 굉장히 잘 추고 의상도 화려한 것으로 여러 벌 준비해 왔는데 결국은 우리가 준비해간 촌스러운 사리를 입고 아주 단순한 춤을 췄다. 경구 오빠가 배우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했더니 “한국 남자 별로네. 인도 남자가 훨씬 멋있다”고 귀띔을 했다. OK 사인이 떨어지자 나는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고, 쏜폰은 곯아떨어졌고, 비아는 마루 한가운데에 폭포수처럼 오줌을 쌌다. 너무 오랫동안 고생하며 촬영해서 그런지 스탭들이 담담하게 인사를 하고 끝냈다.
이창동 감독님은 나라는 인간을 알게 해준 분이다. 나는 내가 콤플렉스도 없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인내심도 많은 줄 알았다. 그동안 내가 나를 얼마나 오해하고 살았는지, 스스로를 정직하게 보지 못하고 최면에 걸려 살았는지를 일깨워주셨다. 또 배우로서의 바탕도 일궈주셨다. 돈으로도 못 배우는 연기라 두고두고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좀 안 만나야 되지 않아요”라고 농담을 했지만 경구 오빠나 나나 감독님이나 다들 진심을 잘 알고 있으니까. 감독님 성에는 안 찰지 모르지만 5월 26일 70회차가 넘는 모든 촬영이 끝났다.
2002년 7월 - 베니스보다 여기에 오아시스를
24일 기술시사를 했다. 차마 눈 뜨고 보기가 힘들었다. 영화를 보는둥 마는둥 하고 집으로 일찍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까 <오아시스>가 베니스 영화제에 가게 됐다고 전화가 왔다. 혼자서 몰래 빠져나오느라고 그 소식을 못 들었던 것이다. 일단은 기분이 좋았지만 베니스에 가면 세계적인 스타와 함께 아름다움을 뽐내야 할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섬>의 서정과 <꽃섬>의 임유진에게 축하 전화가 걸려왔다. 오래 전부터 셋이 친했는데 세 명이 차례로 3년 연속 베니스에 가게 된 것이다. 서정 언니가 농담으로 자기는 ‘문소리 베니스 보내기 추진위원장’이고 유진이 ‘부위원장’이라고 했다. “걱정 마. 우리가 다 해줄게. 의상? 시간, 장소, 분위기에 맞게 다 알아서 챙겨주고, 매너?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가 다 오리엔테이션 해줄 테니 염려 붙들어 매.” 좋은 일이니까 잘 다녀와야겠지만 나는 <오아시스>가 관객이나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