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생애 / 이기철
내 생애는 활자에 중독된 세월이었다
누구든 넘어서고 나면 문맹이 그리워지는 시간도 있다
참혹하여라, 나는 삼천 권의 활자를 읽어버렸다
서리까마귀 편편이 북쪽 하늘을 날 때
누군들 울음 남기고 사라지는 기러기 사랑 한 번
해보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끝내 부둥켜안고 가야할 제 생의 눈물 미농 봉지에 담으며
호롱불 켜놓고 밤새 편지 쓰다 사과궤짝 책상에 엎디어 잠든 밤이 잦았다
글자를 심고 글자를 가꾸던 날의 고통스런 기쁨
기다리라 말한들 구름이 멎겠는가
구름은 활자로는 심어지지 않는 잎 넓은 나무
바람의 연원을 찾고 싶어 등성이를 오르면
활자 바깥에 무한이 있음을 선홍 놀이 가르치고
맹목으로도 무한을 만질 수 있는 날이 그리우면
한 번도 행간에 들지 않은 처녀 말을 찾아 헤맸다
그것은 활자로는 옮겨지지 않는 성채
子母에 길드는 동안 활자는 끝없이 나를 순치시켰다
활자는 모름지기 나에게 순종을 가르쳤다
도덕이 있었고 윤리가 있었다
위인과 명언과 聖句가 있었다
그 삼엄한 경계 앞에서 문맹을 그리던 나는
감탄할 시가 있다는 것을 늦어서야 깨달았다
내게 있어 시는 문맹의 길동무였다
슬픔이 문학이 되고 눈물이 시가 되는 줄을 천천히 깨달았다
그러나 시는 쉽게 사는 법보다 고통스럽게 사는 법을 가르쳤다
허구가 실재보다 아름다움을 그것은 가르쳤다
거기엔 넘실대는 정념과 탐닉할 사랑도 있었으나
강물이 구비치다 멎는 곳
누가 눈물을 보태 강물의 수심이 깊어졌겠는가
활자가 가르친 수사들을 끝없이 강물 쪽으로 내어던질 때
내일은 영원한 미지
내일이 걸어와 새벽 빗장을 따주는 한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추억은 늘 뒷걸음 치고 기다림은 언제나 앞질러 갔다
지금 이 시간도 1분 후면 추억이 되리라
아, 그때 나는 왜 네 가슴에 별을 심지 못했을까
활자의 길은 먼 먼 우회로, 그 속에서 길 잃고
길 찾았던 미망의 날들
손금에 강물을 파던 내 고혹의 애인, 증오의 화신,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