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하는 신부님들끼리 코로나 검사를 받았습니다. 증상이 없는데 받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혹시 양성으로 확진자가 되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에, 저도 업무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결과 음성판정을 받으면 안심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검사결과 양성판정을 받으면 자가 격리를 하면서 충분한 휴식을 하면 좋습니다. 물론 법적으로 증상이 없으면 굳이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검사를 받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한국도 선별진료소를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본인이 원하면 증상이 없어도 무료로 검사를 해 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검사를 해서 증상이 없는 사람들 중에 양성판정을 받은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방법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눈이 많이 왔었고,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은 고백성사를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한 어르신이 전화로 고백성사를 볼 수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교회법적으로 전화로 고백성사를 보는 것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성사가 남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의 비밀이 지켜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화로 고민을 이야기하거나, 신앙 상담을 할 수는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은 사회생활은 물론 신앙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저도 대림특강을 영상으로 하였습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영상으로 미사를 보았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갈증을 해소한다고 합니다. 신법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고, 바꿀 수 있습니다. 남용되거나, 오용되지 않는다고 하면 신앙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사목자의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법의 절차를 따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성공, 재력, 권력, 명예, 능력, 지위, 업적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섬기라고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행복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획일적인 가치와 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교회의 법과 규정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안식일의 규정은 최소한의 것이지 좀 더 사랑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을 할까요? 저는 두 번째 의견에 저의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교황님께서도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너무 쉽게 버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절대시 하면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석 기준은 좀 더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정과 법을 넘어 이웃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2021년 나해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용서받지 못하면 회개하지 못한다>
복음: 마르코 2,23-28
마르코 복음 사가는 왠지 ‘공동체’의 중요성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공동체는 죄를 용서받는 장입니다. 그러나 규율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는 죄의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르코는 이런 규율이 지배하는 대표적인 공동체를 ‘바리사이들’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는 하늘 나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죄의 용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남의 집 땅에서 자라는 밀이삭을 훔쳐 먹었습니다. 율법 규율이 그 집단의 지배 원리인 바리사이 공동체는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율법을 어기는데도 그들을 옹호해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율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에는 참다운 안식이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율법을 뛰어넘는 당신이 그 안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그렇게 이루어진 안식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주인이십니다.
피아제와 콜버그는 사람은 성장하면서 도덕성도 발달한다고 말합니다. 도덕성의 발달은 규율로부터 얼마나 자유롭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래의 지문을 읽고 하인츠의 행동이 정당했는지 살펴봅시다.
“하인츠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는 데 필요한 약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때 한 약국의 약사가 아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하인즈는 약을 사러 갔지만 약사는 제조비의 대가로 원료값의 10배인 한 알에 2000달러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인츠는 모든 지인에게 찾아가 돈을 빌렸지만 1000달러밖에 구하지 못해 약사한테 사정을 해봐도 약사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인츠는 절망하고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약국을 부수고 약을 훔쳤습니다.
이때 하인츠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가요?”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유아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생존에 유익한 것이 옳은 것입니다.
만약 “그래도 법을 지켜야지요. 법은 지키라고 있는 거예요.”, 혹은 “돈을 안 내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잘못된 거죠.”라고 대답하면 어린이 정도의 도덕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혼나기 싫어서 부모의 말에 복종합니다. 자율적 판단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단 횡단하거나 신호등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참지 못하고 신고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더 높은 단계는 법보다 상황과 사람을 더 중요시하는 단계입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 벌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과 자비가 법을 넘어서는 단계입니다.
장발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습니다. 그런데 그 죄로 19년을 복역했습니다.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을 주시합니다. 장발장은 19년 동안 자신이 당연한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나라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에서 하정우는 가슴 따듯한 사람으로 나오고 그의 후임으로 온 친구는 그런 사랑을 받았음에도 무자비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후임을 용서하지 못하고 후임은 자살을 선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발장도 용서받지 못했기에 남의 물건을 훔칩니다. 먹여주고 재워줘도 주교관에서 금 촛대를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만약 빵을 훔친 것에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였다면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교는 그것을 그냥 준 것이라 말합니다.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장발장은 그날 이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겉보기엔 남의 곡식을 훔쳐 먹고 안식일을 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함께라면 그 공동체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아마 다시는 예수님께 그런 상황을 만들어드리지 않기 위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코는 처음에 바오로와 바르나바 공동체와 함께 다녔습니다(물론 그 마르코가 마르코 복음 사가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르코가 바오로의 뜻을 거스릅니다. 그래서 더는 마르코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르나바는 마르코가 사촌이었기 때문에 그를 옹호합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관 일을 맡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마르코는 자신의 믿음이 교회 공동체 때문에 형성되었고 그 공동체가 자신 때문에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바오로가 용서해 주어서 자신이 변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르코가 회개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동체의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고 새로 태어남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벌 받는 게 두려워서 지켜야만 하는 율법주의자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누군가의 회개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전삼용신부)
2021년 01월 19일 화요일
[녹]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형제 여러분,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11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14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5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1(110),1ㄴㄷㄹ-2.4-5.9와 10ㄷ(◎ 5ㄴ 참조)
◎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시고, 당신 계약을 영원히 세우셨네. 그 이름 거룩하고 경외로우시다. 주님 찬양 영원히 이어지네. ◎
복음 환호송
에페 1,17-18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분명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확언하시며, 모든 제도와 율법 위에 당신의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 앞에 나온 마르코 복음서 2장 10절의 ‘사람의 아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 때 받은 은총의 수혜자로 자유로이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올바른 의미로 어려운 상황에서 위축된 사람들을 회복된 삶, 구원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안식일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날로, 이런 개념은 모든 안식일의 규정이나 법규를 넘어섭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때 기도를 많이 할까요? 그리고 어떤 때에 기도하여야 하느님께서 잘 들어주실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기만 하면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언제 기도를 하여야 주님께서 잘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매일매일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우리가 너무 규범적이고, 율법과 같은 법규 준수에 머물러 있거나,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따지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분석하려고 하여 올바로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율법을 보호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 위에 계신 최고 권위시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진 권위만을 주장하게 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은 잘 짜여진 그물 같은 바리사이들의 세상에 하나의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기도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이 구원으로 초대된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