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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귀검신 31장 : 사천풍운(四川風雲)-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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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높이 올려졌던 소문의 검이 점점 밑으로 내려왔다.
파바팍!
검 끝이 밑으로 내려오면서 소문의 주위를 감싸던 기운
은 더욱더 용솟음쳤다. 의식도 없이 소문을 향하던 독
혈인 마저도 그 강맹한 기운에 위협을 느끼는지 움직임
을 멈추고 멍하니 서있었다.
“피, 피하랏!”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독왕은 주변의 만독문의
제자들에게 화급히 명령을 하고 봉천에게 빨리 독혈인을
뒤로 물리라 명을 내렸다. 하지만 봉천은 고개를 흔들
며 다급하게 말을 했다.
“이미 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저 기운에 의해
모든 음파(音波)가 차단된 듯 합니다.”
“이, 이런 낭패가!”
꽈꽈꽈꽈꽝!!
봉천의 말을 듣던 독왕은 갑자기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
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전해져 오는 것은 비단
소리만이 아니었다. 천지를 가르는 굉음(轟音)과 함께
쏘아져 오는 것은 살인적인 강기(?氣)였다.
“저, 저럴 수가!”
고개를 돌린 독왕은 자신에게 밀려오는 강기를 막을 생
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소문의 검식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저 들고 있
는 검을 아래로 한번 내리치는 동작이 끝이었다. 그러
나 그런 단순한 동작에서 어찌 저런 위력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소문과 가장 가까이 있던 독혈인은 어느새 그 흔적을 찾
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찢겨져 버렸고, 그 뒤를
이어 다른 독혈인도 같은 운명을 맞고 있었다.
“아, 안돼!”
어떻게 만든 독혈인 이란 말인가? 만독문의 사활(死活)
을 걸고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힘겹게 만든, 사랑하는
제자 열명의 목숨과 바꾼 대가로 얻은 것이었다. 비록
의식이 없는 강시와 같은 독혈인이었지만 만독문의 옛 영
화를 찾게 해 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異見)이 없었다
. 그런데, 그런 목숨과도 같은 독혈인이 저리 허망하
게 쓰러지다니….
독왕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였다.
“위험합니다. 문주님!”
봉천은 우두커니 서 있는 독왕의 신형을 안고 땅바닥을
뒹굴었다. 간발의 차이로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강
기의 힘을 느끼며 봉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무린가?’
입에서 계속해서 흐르는 피를 보며 소문이 중얼거렸다.
과연 무극지검의 위력은 절대, 그 자체였다. 12성을 완
성하지 못한데다가 내공마저도 여의치 않아 제대로 시
전하지 못했음에도 소문에게 접근하고 있던 거의 대부분
의 독혈인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독혈인의 뒤에서 조심
스럽게 접근하던 독마와 갈태악은 소문의 기운을 감지
하자마자 달아났기에 그나마 어육(魚肉)의 신세를 면했
지만 이미 치명타를 입고 땅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러
나 그런 위력을 보이기 위해서 소문이 감수한 피해또한
상상을 불허했다. 별거 아닌 듯 말은 했지만 갈태악에
게 얻어맞은 가슴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인체의
모든 곳이 그렇겠지만 가슴이라는 곳은 특히 위험한 곳
중 하나였다. 그런 곳을 일반인도 아니고 그저 그런
인물에게 맞은 것도 아닌 한 문파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
에게 맞은 것이었다. 당연히 무사할 리가 없었다. 게
다가 그의 공격을 성공시키게 만든 그 독기가 여전히 소
문을 괴롭히고 있었다. 눈치를 보이지 않으며 필사적으
로 억눌러 잠시 그 활동을 멈추게 했지만 그런 상태에
서 절대삼검, 특히 무극지검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살행
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갈태악의 공격에 자
제심을 잃은 소문은 무모한 도박(賭博)을 시도했다.
처음 다가오던 독혈인을 날려버렸을 때는 그 도박이 성공
하는 듯 했으나 간신히 억누른 독기가 다시 한번 소문
의 발목을 붙잡았다.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는 진기의
흐름을 억지로 밀어붙이며 공격을 감행한 소문은 결국 심
각한 내상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중독에 이은 또 하
나의 위기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은 소문은
몸에 남아있는 모든 내공을 끌어 모아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적을 향해 발출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소문의 앞에 두발로 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문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감행하던 독혈인
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멀리 떨어져 있던 만독문의 문도마
저 소문이 일으킨 기운의 여파에 이곳저곳에서 쓰러졌다
. 공격을 한 소문마저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위공
을 바탕으로 한 거의 무한대의 내공은 이 한번의 공격으로
바닥이 나고 말았다. 지금 소문의 단전(丹田)은 무공
을 익히기 전의 텅 빈 백지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
면 소문을 괴롭히던 독기 또한 발출되는 내공과 함께 모
조리 몸 밖으로 발출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소문도 미
처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독기를 제어할 힘이 남아있지 않
은 소문에겐 큰 행운이었다. ‘내가 미쳤지. 그냥 도망가면
그만이었는데….’
자신만만하던 소문은 자신의 만용(蠻勇)을 탓하며 한숨
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번 싸움은 자신의 방식과는 어
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키기엔 늦은 일
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이제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
는 것이었다. 아니 이미 몸 상태는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
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만독문의 문도들이 있었고,
문주인 독왕이 있었다.
‘어쩐다….’
모든 내공이 사라진 지금 자신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아
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응? 이건?’
갑자기 몸 구석 구석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
한 소문은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곧 쾌재를 불렀다.
‘옳거니!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군.’
반야심경도해의 내공이었다. 무위공의 내공에 밀려 저절
로 온 몸으로 퍼졌던 반야심경도해의 내공이 서서히 움
직이고 있었다. 비록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고 심각한
내상을 입었지만 반야심경도해의 내공이라면 출행랑의 시
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힘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 힘도 미미했다.
약간을 움직였을 뿐인데도 전신을 칼로 난자당하는 고통
이 밀려왔다.
‘침착해야 한다.’
자신의 상태를 적에게 알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잠깐
멈칫했던 소문은 이를 악물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고 당당하게 어깨를 피곤 그제 서야 몸
을 일으키고 있는 독왕과 만독문의 문도들을 바라보았다
. 소문을 바라보는 문도들의 시선은 두려움, 그 자체였
다. 인간으로서 어찌 저런 기운을 일으킨단 말인가?
비교적 소문과 멀리 떨어져 있던 그들은 소문의 무극지
검을 보다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단 한번의 동작으
로 주변의 모든 사물을 초토화(焦土化)시킨 소문이 그들
에겐 더 이상 인간일 수 없었다. 복수니 뭐니 하는 생
각은 애당초 사라지고 그저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나가길
빌며 소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할 뿐이었다.
“그게 무슨 검법이더냐?”
소문을 바라보던 독왕의 입에선 더 이상 놀람도 살기도
없는 그저 허탈한 음성이 자연스레 흘러 나왔다.
“가전무공(家傳武功)이오.”
“가전무공이라… 그런 검법은 내 일찍이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내 고향은 중원이 아니오. 그리고 무공을 일부러 세상
에 드러내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것이오.”
독왕은 더 이상 말없이 서서히 붉게 물들고 있는 하늘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이군. 아직 내공이 부족한데….’
소문은 모이기는 했지만 출행랑을 펼치기엔 다소 모자람
이 있는 내공력을 느끼며 독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이 결정 될 것이었다. 그의 결정만
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선수를 쳐야 했다.
“이만 했으면 되었다고 생각하오. 사실 당가와 인연이
있는 나로서는 만독문의 행사를 알고도 막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더 이상의 살생은 하고 싶지 않소. 물론 도전
을 한다면 피하지는 않소. 허나 그 결과는 장담하지 못하오!”
소문은 내심과 다르게 시종 여유있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닥쳐라! 우리 만독문을 어찌 보고 그따위 말을 늘어놓
는 것이냐? 네놈이 그 잘난 실력을 믿고 있는 모양인데
이미 네놈의 몸도 정상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허세
는 통하지 않는다. 사부님,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제자
가 나서서 저놈을 요절을 내겠습니다.”
“…….”
독왕은 대뜸 나서는 제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든 장
로가 쓰러지고 부상을 입었기에 지금 만독문에선 자신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고수였다. 기수곤의 말대로 소문 또
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은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
다. 그러나 방금 소문이 보여준 무위는 그런 모든 사
항을 감안하더라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는 힘으로 작
용했다. 만약 그의 부상이 생각과는 달리 심각한 것이
아니라면? 단 한번이라도 아까와 같은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게다가 자신을
생각해서 살짝 전음을 보내오는 봉천도 싸움을 극구 말리고
있었다.
“그만… 하도록… 하자….”
“사부님!”
기수곤이 깜짝 놀라 독왕을 불렀지만 독왕은 그런 기수
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되었다. 너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지금은 아니다.
나도 이러는 내가 한심해 보이지만 여기서 만독문의 멸
문을 보고 싶지는 않구나.”
“하지만 사부님 저놈은 이제 힘이….”
“만약 너의 판단이 틀렸다면 어찌 하려느냐? 백번 양보
하여도 그가 단 한번이라도 아까와 같은 무위를 보여
준다면 너는 막을 수 있겠느냐?”
“그건….”
기수곤은 독왕의 말에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아
까 적이 보여준 무위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난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참기 힘든 수치였다
. 싸우다 죽을 지언 정 제자들을 도륙(屠戮)한 적을
앞에 두고 물러서라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 그래서 처음으로 사부의 말에 반발을 하려는 찰나
귓가에 전해오는 소리가 있었다.
[참으시게. 문주님은 결코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게 아니네. 자네도 문주님의 성정을 알지 않은가?
만독문의 미래를 생각하시는 문주님의 고충을 이해하여
야 하네. 여기서 자네나 더 이상의 문도들이 쓰러진다
면 향후 수십 년간 우리 만독문은 그저 변방의 조그만
문파로 지낼 수 밖에 없는 것을….]
봉천의 말은 흥분으로 가득 찼던 기수곤의 마음을 차갑
게 식히는 힘이 있었다. 과연 그랬다. 독왕은 결코 목숨이
아까워서 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약간은 고집스럽
고 자존심이 강한 사부가 얼마나 힘들게 참고 있는 것
인지 주먹을 쥐고 있는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멍청한놈! 제자라는 놈이 사부의 마음 하나를 헤아리지
못해서야….’
기수곤이 자신의 성급함을 탓할 때 독왕의 음성이 들려
왔다.
“힘을 키우거라. 다시는 우리 만독문에게 이런 수치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명예롭게 죽었을 것이나 네가
있기에 이런 수치도 참을 수 있음이니….”
“사부님….”
마침내 기수곤은 흐르는 눈물에 볼을 적시며 고개를 떨
구고 말았다.
“결정이 난 것 같소이다. 그럼.”
사제(師弟)간의 대화를 초조하게 지켜보던 소문은 쾌재
를 부르며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그리곤 천천히 발걸
음을 돌렸다.
“자네 별호나 이름이 무엇인가? 이것도 인연이면 인연인
데 이름이나 알려주게.”
“별호는 없소. 이름은 소문이라 하오. 을지소문.”
독왕의 물음에 잠시 멈췄던 소문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
였다.
“잊지 마라. 을지소문이다. 두고두고 가슴에 새겨야 할
이름이다.”
“예! 사부님!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궁귀검신 31장 : 사천풍운(四川風雲)-8
사천 서부의 점창산(點蒼山)에 위치한 점창파(點蒼派)는 비
록 그 세는 화산이나 무당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름대로
뛰어난 검법과 의기를 지닌 명문대파(名門大派)였다.
그 시작은 무당과 같은 도가적 색채를 띠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는 희석되고 속가(俗家)적인 문파로서 거듭났는바
정의(正義)와 협의(俠義)를 중시하여 항상 공명정대(公明正大)한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중원을 대표하는 구대문파의 하나로 당당하게
인정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점창파에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쳐들어와 비록 그 의미가 퇴색했다하나 아직은 도교의 가르침을
따르며 조용히 자기수련에 힘쓰던 점창파를 피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만들었으니 소문이 한참 독혈인과 싸우고 있을 때였다.
패천궁의 명령과 요청에 따라 구대문파인 일원인 아미(峨嵋),
점창, 청성파(靑成派)와 사천당가를 치기 위해 사천에들어선 세력은
모두 네 개였다. 아미파는 패천궁에서, 점창파는 흑도에선 패천궁에
이어 두 번째로 커다란 세력을 지닌 지옥벌(地獄閥)이,
청성파는 음자문(陰刺門)이 각각 책임지기로 되어 있었다.
당가를 치기로 되어 있는 만독문과 마찬가지로 중원을 벗어
나 한참을 우회하여 사천땅에 들어선 이들은 각기 약속된
시간에 자신들이 맡은 문파를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인원이 많고 잔인한 지옥벌의 공격이 가장 먼저 시
작되었다.
아무런 예고(豫告)도 준비(準備)도 없이 지옥벌의 무인들을
맞이한 점창파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 밖에 없
었다. 더구나 상당수의 제자들이 정도맹에 참여하고자 본산
을 떠나 있었기에 이들에게 대항할 제자의 수도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일선에서 은퇴하여 조용히 여생을 지내고
있던 전대의 장로들과 선배들이 등장하여 본산에 닥친 위
기를 막고자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지만 하나의 손으로 천
개의 칼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밀
려오는 지옥벌의 공세에 힘이 부친 노 고수들이 하나 둘 쓰러
지고 결국 전 전대 장로이자 점창파의 최고 어른인 화일해
(華逸海)의 장렬한 죽음을 끝으로 더 이상의 저항할 여력이 없었다.
비록 싸움에는 패했지만 부상을 입고 제자들의 목숨을 구걸
하는 현 장문인 구화진(丘花嗔)의 간절한 바램을 간단히
무시한 그들은 구화진은 물론이고 살아남은 점창파의 제자라
면 나이를 불문하고 모조리 목을 베었다. 정확하게 반나절
동안 지속된 이번 싸움으로 지옥벌은 많은 수하들을 잃었
지만 점창파 장문인 구화진을 비롯하여 삼백의 제자를 모
조리 전멸시키는 승리를 얻었다.
그들은 승리자의 권한으로 오랜 세월 풍상(風霜)과 싸워오
며 꿋꿋하게 버텨온 수많은 전각들을 불태우고 약탈을 했다.
결국 점창파의 가장 깊숙한 전각에 숨어 있다 자진(自盡)
한 식솔들의 죽음을 끝으로 명문 대파이자 구대문파의 일
원이었던 점창파는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사정은 음자문의 공격을 받은 청성파도 별반 다르지 않았
다. 청성파 역시 많은 제자를 떠나보냈기에 점창파와 마찬
가지로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과거 무림의
살수계(殺手界)에서 독보적(獨步的)인 위치를 차지하다 최근
음지(陰地)에서 양지(陽地)로 나온 음자문의 무인들은 지옥
벌처럼 잔인하지 않았다. 승자의 권리를 누리되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사람이나 항복한 어린 제자들에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청성파의 상징인 상청궁(上淸
宮)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승리를 자축할 뿐이었다.
“시주께서 하신 약속은 꼭 지키리라 믿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약속을 저버리는 자라면 무사라 불릴 자격도
없겠지요.”
금명신니(金明神尼)는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
자들의 눈길을 느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 승부에 따
라서 아미파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이 비무에서 승리를 한다면 이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
남은 물론이고 아미파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허
나, 만에 하나라도 패하게 된다면 아미파는 죽음으로도 씻
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개파(開派) 이래 단
한번도 무릎 꿇지 않았고 소림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불
문의 성지(城地)로 추앙받고 있는 아미파를 지키기 위해서
라도 이번 비무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반드시!’
마음속으로 수차례 다짐을 하며 비장한 결심을 하는 아미파
의 현 장문인 금명신니와는 다르게 신니 앞에 서 있는 청
년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대단한 기도군요.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루다
니….”
“훗, 별말씀을….”
청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칭찬에 인사를 했다.
‘정말 대단해. 저렇게 웃고 있지만 정중동(靜中動)의 자세!
공격을 할 빈틈이 안 보이는구나!’
금명신니는 눈앞의 청년이 처음 볼 때부터 심상치 않은 실
력을 지닌 청년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손속을 겨루게 되자 심상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전해져 오
는 느낌에 이미 그의 실력이 자신의 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기선을 제압하지 않고는 승산이 없다.’
금명신니는 이번 비무에서 승리하기 위해 체면을 던져버렸
다. 서로에 대한 인사치례와 예의로써 몇 초를 허비하는
무림에 거의 불문율(不文律)처럼 전해 내려오는 비무 방식
을 아예 내던지고 후배와 비무를 하는 선배로선 고개를 들
지 못할 일이었지만 기습적인 선제공격(先制攻擊)을 감행했다.
“하아앗!”
“훗!”
청년은 그런 금명신니의 모습에 잠깐 실소를 지었을 뿐 조
금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무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
청년이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아미파를 방문한 것은 막 점
심 공양(供養)이 끝나고 오후 예불(禮佛)을 시작할 때였다.
“사, 사부님!”
일주문(一柱門)을 지키다 소리를 지르며 급히 위로 뛰어 올
라오는 제자를 맞이한 것은 사부가 아니라 엄하기로 소문난
명신사태였다.
“멈추지 못하겠느냐?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을 떠는 것이
더냐?”
“그, 그게 아니오라….”
“어허, 네가 감히 변명을 하려 하는 것이더냐?”
명신사태의 추상(秋霜)같은 호통에 어린 제자는 고개를 떨
구고 말았다.
“하하, 어리신 스님을 너무 혼내지 마십시오.”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깜짝 놀란 명신사태는 고개를 획
돌렸다. 거기에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청년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였는데 그 인원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시주는 누구신가?”
정체를 묻는 명신사태의 얼굴에서 자연 긴장이 빛이 흘렀
다.
“환야(幻倻)라 합니다. 뭐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혈검(血
檢)이라는 별호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다지 유명하지 못해서
아시지는 못 할 것입니다.”
‘말대로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데….’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던 명신사태는 냉랭한 어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본사를 방문한 까닭이 무
엇이오?”
“하하, 절에 오는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부처님께 예불이
나 드리러 온 것이지요.”
환야라 밝힌 젊은이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가식(假
飾)이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너무나 자연스런 웃음이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예불만을 드리러 왔다곤 믿기
지 않는 일. 과히 좋지 않구나!’
그때 눈앞의 청년을 경계하느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명신
사태에게 느닷없이 질문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분들은 누구지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본 명신사태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
며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예, 본사에 예불을 드리겠다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아미파의 장문인인 금명신니는 고개를 돌려 청년을 바라보
았다.
“환야라 합니다. 이렇게 장문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
다.”
“아미타불, 반갑습니다. 명신은 이분들을 왜 이렇게 서 계
시게 하나요? 예불을 드리러 온 분들을 어서 대웅전(大雄殿
)으로 안내하세요.”
“하지만….”
“예불을 드리러 오신 분을 이리 대접하는 것은 불제자(佛弟
子)가 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르
시지요.”
명신사태는 갑작스런 장문인의 행동에 흠칫 놀라며 뭐라 말
을 하려 했지만 귓속을 울리는 전음에 그 움직임을 멈췄다.
[제자들을 단속하세요. 어쩌면 본사에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으니 미리 준비를 하도록 하고….]
‘그럲구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전음을 받은 명신사태는 가볍게 합장을 하고는 총총히 자리
를 떠났다.
“하하, 생가만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너무 염
려 하지 마십시요.”
환야는 마치 이들 간의 전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웃으며
말을 했다.
“따르시지요.”
금명신니는 환야의 말에는 대꾸를 하지 않고 그를 대웅전으
로 안내하고자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따라온 이들에게 소
란피우지 말고 있을 것을 명령한 후 금명신니를 따라 나선
환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미
파의 대웅전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명신니가
안내한 대웅전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견 보기에도 작아
보이는 전각의 규모하며 황금빛으로 번쩍 거려야 할 불상
(佛像)은 녹슬지는 않았는지 걱정될 정도로 허름했다.
“허, 불문의 성지인 아미파의 대웅전이 이렇게 아담할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나 말을 실수할 것을 염려한 환야는 자신이 느낀 심정
을 최대한 부드러운 단어로 돌려 표현을 하고자 했다.
“아미타불,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놀라곤 하지요. 허
나 규모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저 마음을 단정히 하고
정성으로 부처를 모시는 게 진정한 불제자의 자세이자 불심
(佛心)이지요.”
“하지만 아미파의 위상(位相)도 있는데….”
“그까짓 위상이 무에 필요한 것인지요? 이 대웅전은 본사가
생기기 이전부터 이곳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누가 만든 것
인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후 이곳
은 저희 아미파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되었지요.
때때로 시주와 같은 생각을 지닌 분도 있어서 보다 아름
답고 웅장한 대웅전으로 꾸미자는 말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불심을 가장해서 자신들의 얼굴
에 금칠을 하는 것이지요.”
설명을 하는 금명신니의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환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웅전 안으로 들
어가 예불을 드렸다. 금명신니의 말을 들어서 그런지 처음
에 보잘 것 없이 보였던 불상들에게서 알 수 없는 신비감
이 솟아나는 듯 했다.
“후, 어쩌면 나는 오늘 이곳에서 벼락을 맞아 죽을지도 모
르겠군.”
환야는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며 금명신니에게 다가왔다.
“제가 오늘 아미파를 방문한 것은….”
“이곳은 예불을 드리는 곳입니다. 말씀은 자리를 피한 후에
하시지요.”
환야는 자신의 말을 막는 금명신니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웅전을 벗어났다.
대웅전을 벗어나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 그들은 아까와는 확
연히 다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자리에는 어느새
무장한 아미파의 제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중앙에 명신
사태가 살기를 풀풀 풍기며 서 있었다.
“하하, 이것 참, 분위기가 너무 살벌하군요. 이런 분위기를
원한 것은 아닌데….”
환야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금명신니에게 웃으며 말을 하
자 금명신니도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그건 전적으로 시주에게 달린 것이지요.”
“흠,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전 피를 보려
고 아미파를 오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불만 드리러 온
것도 아닙니다만….”
“…….”
금명신니의 눈빛에서 계속 말을 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받은
환야는 약간은 경색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봉문(封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딱 오년간만!”
“닥쳐라!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더냐? 봉문이라니!!”
아미파의 여승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중앙에서 이들을 이
끌고 있던 명신 사태는 엄청난 분노를 터뜨리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검집에 손을 대고 있었다.
“혹시 패천궁에서 온 것인가요?”
크게 흥분을 하고 있는 다른 여승들과는 달리 금명신니는
평상심(平常心)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장 분노해야 할 인물이
아미파의 장문인이라 생각하고 있던 환야는 너무나 차분
한 질문에 흠칫 놀라며 조용히 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패천궁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미타불! 역시… 중원에 그 누가 있어 아미파에 와서 이
토록 당당히 봉문을 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아미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시주의 말씀은 없던 일로 할 것이
니 그만 물러가시지요.”
“…….”
환야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흐르고 긴장된 분위기를 반영하듯 양측에서 내뿜는
기운에 대기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저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막고 못 막고는 부처님의 뜻이겠지요. 하지만 아까 말씀드
렸듯 아미는 약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저희들을 일컬어 철혈(鐵血)의 승부사(勝負士)라
하지요. 아무런 결실도 없이 물러선다는 것은 저희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침묵이후 환야의 입에서 나온 말에선 약간의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음….”
철혈의 승부사라니! 환야의 말에 금명신니는 물론이고 지금
껏 기세등등하게 그를 노려보던 명신사태도 깜짝 놀라 다
시금 정면에 대치하고 있는 이들을 살펴보았다.
중원 무림의 수 없이 많은 문파와 집단 속에서 철혈의 승부
사라라 불리는 집단은 단지 하나뿐이었다. 단일 세력으론
최강인 패천궁의 정예중의 정예들로 이루어진 패천궁주의
친위대(親衛隊), 오직 패천수호대(覇天守護隊)만이 그런 칭
호를 받고 있었다.
‘아미타불! 이들의 기세가 범상치가 않더니만… 하필이
면….’
금명신니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이들이 그들의 말대로 패천
수호대라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제자는 아무도 없
었다. 최상의 전력이라면 이들의 무위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나 지금은 전력의 오할이 넘
는 제자들이 자리를 비운 터였다. 이대로 싸운다면 잘해야
양패구상(兩覇俱傷)이고 까딱 잘못하면 불문의 성지인 이
곳이 짓밟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말대
로 봉문을 한다는 것 또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저는 많은 살생을 하기 싫습니다. 그리고 신니께서 제자를
아끼시는 만큼 저 또한 제 수하들을 아낍니다. 그러나 저
희는 아미파를 제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고, 아미파에선 그
걸 용납지 않을 것입니다.”
“…….”
“그래서 신니께 한가지 방법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어차피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일. 그렇다고 무턱대고 충돌
을 한다면 서로에게도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환야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금명신니를 바라보았다. 아미파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임에도 조금 전과 다름없이 한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
금명신니의 모습에 잠시 감탄을 하던 환야는 조용히 그러면
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의 대표를 내세워 비무를 하는 것이 어떨런지요?”
“비무를?”
상당히 의외라는 듯 금명신니는 재빨리 반문을 했다.
“비무를 해서 패한 쪽이 이긴 쪽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요. 저희의 요구는 오년간의 봉문입니다.”
“…….”
금명신니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차피 저
들과 부딪치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리고 그 싸움은 제자들
의 희생은 둘째 치고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결국 다른
길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저희들의 요구는 조용히 이곳
을 떠나 달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정 된 것이군요. 저의 쪽에서는 제가 나설 것입니
다. 아미파에서는 어느 분께서 제게 가르침을 베푸실런
지요?”
“아미타불, 미력하나마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금명신니가 대답을 하자 환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
개를 끄덕였다. 큰 희생을 요하는 싸움을 피하게 되어 안
도의 한숨을 내쉰 그들은 잠시 서로를 응시하다 천천히 거리
를 좁혀갔다. 그리고 아미파의 운명을 결정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
즐감
감사해요~~~^~
감사히 잘보았습니다
ㅎㅎㅎ
아미파의 운명은?
잼납니다
ㅈㄷㄱ~~~~~~~```````````````````
즐감하고갑니다.
즐감/ ~!
봉문
ㅈㄷㄳ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했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아좋아
즐독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