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에 있는 많은 친구들은 한국과 40년 이상 인연을 맺어온 나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써보라고 오래전부터 권유해왔습니다. 비극적 전쟁에 따른 파괴와 빈곤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의 당당한 주역으로 성장한 이 나라의 불가사의한 역사에서 나는 수많은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950년이후 한국과의 만남은, 풍요롭지만 은둔적인 문화에서 대륙 곳곳에서까지 영향력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역동적인 국가로 떠오른 한국 현대사의 중대한 시기를 모두 포괄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학자로서 생활해 온 경력때문에 많은 글을 쓰면서 주석이 달린 길고 분석적인 이야기들을 써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온 한국과 한국민들에게서 경험했던 바를 보다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를 원해왔습니다.
때문에 나는 수많은 사건과 사람, 주요 이슈, 그리고 우연히 마주쳤던 한국에 대한 모든 기억을 일화형식으로 꾸며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러한 기억들은 풍부한 전통과 극적인 변화를 이뤄온, 그리고 긴장과 분열의 비극을 견뎌온, 그래서 독특한 현대화의 길을 걸어온 이 나라와 나와의 유대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데 하나의 모자이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소개할 일화들은 나 자신의 관찰과 해석에 기초한 것입니다. 한두가지 민감한 사안은 파문을 일으킬 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민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한국민과 한국에 대한 나의 깊은 애정과 한결같은 관심을 이해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이러한 특별한 애정은 고인이 된 나의 아내 셀레노(세니)도 마찬가지였다고 확신합니다.
냉전기의 격렬했던 투쟁을 겪지 못한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기억들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1990년대 이전 발생한 주요 현안들에 접근하려면 냉전, 즉 개방된 사회와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시기내내 나는 각 분야의 지도자들과 친구가 됐으며, 그들이 한국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 일하면서 지녔던 확신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됐습니다. 한국 국민들에게 냉전이란 북쪽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부터의 위협을 뜻했습니다. 불행히도 한반도에는 실패한 체제의 마지막 잔해가 아직도 위협적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모택동)의 묵인아래 1950년 6월25일 침략전쟁을 감행한 이후 한국의 운명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군의 능력에 의존해왔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미국의 동맹국들이 한반도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이것이 한국의 정치·사회에서 군부에 새로운 권력의 자리를 제공케 됐는데 이것은 과거의 전통과는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이어 한국이 동맹군의 일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몇몇 군 지휘관들의 중요성이 강화하는 경향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외국인 다루기, 현대적 장비를 구축하고 사용하기, 공병학과 병참학의 숙지, 민간 관심사와 관계된 문제를 다루는 실제적인 경험을 갖게 됐습니다.
한국에서의 세세한 경험을 피력하면서 나는 기관이나 조직보다는 한국 사람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출 생각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와 신의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한국사회의 유교적 전통과도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나는 지난 47년동안 훌륭한 한국사람들과 우정을 나눠왔습니다.
어떤 친구는 50년대초 미국 예일대에서 내가 가르쳤던 조교 학생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주요 인사가 된 사례는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나는 두 나라의 깊고 밀착된 인간관계의 덕을 보았으며 이는 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는 또 한미관계에서 특별한 가치를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회고록은 한국을 방문했거나 혹은 한국에 살면서 접한 모든 경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5년3개월 동안 발생한 사건들은 서로 겹쳐지기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아내는 시대의 요구에서 벗어나 경치가 아름다운 시골 구석구석을 친구들과 평화롭게 나들이할 기회도 가졌습니다.
사건이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상징화합니다. 그리고 그 상징은 때로 어떤 이들에게는 긍정적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합니다. 한 국가의 역사란 흔히 뿌리깊은 감정에서 비롯된 갈등적인 해석을 낳을 때가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독립전쟁 당시 보여준 영웅적 행동과 모진 겨울날 벌어진 밸리 포지 전투에서?그의 지도력을 기억합니다.
한국전 당시 강추위가 몰아친 1950∼51년의 첫 겨울을 견뎌냈던 미군들의 이미지도 이와 견줄만합니다. 미국 남부에서는 남북전쟁에 관한 수많은 기억이 다양한 소설과 역사 서적의 중심소재가 돼왔습니다. 상징성과 이미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쉽사리 아물지 않는 기억들을 몰고온 중요한 상징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침략, 1950년의 한국전, 53년에서 지금까지의 판문점, 80년 광주, 83년 랑군사태, 그리고 88년 서울올림픽이 그것입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과 미국 양국을 결속시켜 주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를 갈라놓기도 한 많은 문제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나는 이런 것들의 상당수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가능한 한 명확하게 이를 표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때로 이런 문제들은 문화적 차이가 현격한 두 나라사이에서 복잡한 상호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종종 지나치게 단순화한 용어로 묘사돼 이를 설명하는데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민주화」 「세계화」 「인권」 「노동개혁」 「국가안보」 그리고 「현대화」 등이 그것입니다. 코끼리의 진실을 찾는 눈먼 사람들에 관한 아프리카의 오랜 속담이 있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은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져보고 이를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만 아무도 코끼리를 완벽히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한국에서의 오랜 생활동안 겪었던 환상적인 경험에서 나는 한국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치게 됐습니다. 이에 따라 나의 삶은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81년 워싱턴 DC에서 열렸던 「한국예술 5000년전」에서 나는 풍부한 문화적 향취를 누렸습니다. 설악산과 대천 해수욕장, 용평, 경주, 제주도에서의 모험담도 있습니다. 나는 또 세대에 따라 사건에 대한 접근 방식이 변해가는 한국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현대화와 국가안보를 추구하는 한국사람에게 미국은 정답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적인 것에 대한 존경심은 빛을 잃어 갔습니다. 미국인들은 스스로가 한국인들에게 큰형이 아닌 동등한 친구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고, 개별원칙에 입각해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정세에서 높아지는 한국의 위상과 끊임없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과정에 참여하는 관찰자가 된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입니다.
50년대초이후 한국에 대한 나의 글은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주를 이룹니다. 나는 가끔 한국과 미국의 동료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안보문제에 집착하는 지나친 반공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 소련과 마오쩌둥 사후 중국에 대한 책을 출간하면서 나는 나의 입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사람에게도 평양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신봉자라는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과 한국민, 한국문화가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활기차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물론 나의 기억들은 가속화하는 변화의 시대에서 전통이 중시되는 이 사회를 감싸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 등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나는 민감한 부분을 다루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드러날 전체적인 윤곽은 이 기억과 관계된 많은 한국 친구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 또한 반영되기를 희망합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주한 미 대사직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나는 「스스로 일어선 나라」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이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전면에 자리잡은 오늘날에도 아주 적합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음악 예술 기술 산업 문학 축제 스포츠 그리고 수많은 다른 분야에서 세계가 보다 발전할 수 있도록 긍정적인 기여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1986년 11월 미 국무부와 작별을 고했을 때 나는 한국과의 관계가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1년에 3∼4 차례씩 여권에 찍힌 한국 입국도장을 보면서 한국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남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다음의 한국에 대한 소묘에서 독자들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리처드 워커는 누구인가
6·25참전·대사 거친 '반세기 지한파'
서울에서 반미·반정부 데모가 절정으로 치닫던 80년대 중반. 당시 주한 미 대사로 있던 워커씨는 실언소동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본인은 지금도 극구 부인하고 있는 이른바 「버릇없는 자식들(spoiled brats)」사건이 그것이다. 그가 극렬데모를 주동하는 한국 대학생들을 「버릇없는 자식들」이라고 불렀다는 소식은 미국의 한 지방신문에 보도된 뒤 서울 장안에 급속히 번져나가 반미데모를 부채질했다.
워커 전 대사는 이에 대해 『내가 그런 표현을 쓴 게 아니고 한국의 택시 운전사들이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버릇없는 자식들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던 게 와전됐다』고 해명했다.
그같은 오해 때문에 워커 전 대사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그는 대사재임중 전두환 정부의 곱지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미 문화원 점거사건의 주동자들을 경기도 청평유원지로 불러 민주주의와 광주항쟁 등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가하면, 이른바 학원안정법으로 알려진 학생운동 탄압조치에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밝혀 이를 저지하는데 일조하는 등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7년전 45년을 동고동락해온 부인과 사별하고 지금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버스에서 후학지도에 힘쓰고 있는 워커 전 대사는 틈만나면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에서 혼자 거주하는 100세 노모를 찾아뵙는 소문난 효자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치는 물론 역사, 문화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워커씨는 『한국은 내 인생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며 거의 반세기에 걸친 한국과의 인연을 자랑스러워 한다.
이번에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도 『학자로서의 한 생애를 정리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친구들에게 한국과 한민족의 경이로운 발전과정을 지켜본 소감을 전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고록 관련 문의전화:한국일보 국제부 (02)724―2325 ▲E―mail 주소:jslee@hk.co.kr<이종수 기자>
□약력 ▲1922년 4월12일 펜실베이니아주 벨폰테 출생 ▲뉴저지주 드루대학 졸업(역사·정치학 석사·1944) ▲예일대 졸업(국제정치학 박사·1950) ▲예일대 교수(1950∼57) ▲사우스캐롤라이나대 국제문제 연구소(현 리처드워커 연구소) 창립 ▲2차대전 기간중 맥아더 사령부의 중국어 통역관으로 근무, 한국전 참전(1950) ▲미 국무부, 공보처 등 근무 ▲한국체류(1973) ▲최장수 주한 미 대사(1981.8∼1986.11) ▲16권의 저서출판·한국관계 논문 13편
한반도 통일 속도·기준 첫 제시/김준엽씨 주도 박정권도 이례적 지원/김경원·이홍구·한기식·박준규씨/브레진스키·페이지·우첸차이 박사 등/국내외 안보전문가 심도있는 논의
70년 8월말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는 한반도통일이라는 매우 중대한 사안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외국 학자들과 국제안보문제 전문가들도 기대 이상 많이 참석하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반도통일문제는 2차대전 이후 분단의 아픔을 겪어온 한국민들에게는 나라와 개인적 운명이 함께 걸린 최대의 관심사였다. 주변국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도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회의는 그 이후로 전개된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의 속도와 기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번 회의는 내게 한반도통일 문제에 기여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정서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통일문제를 강도높고 철저하게 다룬 이번 회의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나만 이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회의는 참석자들의 회의록 분량이 1,251 페이지에 달할 만큼 열기가 대단했다.
6·25 전쟁을 치른 뒤 한국민들은 남북이 통일이 되기전에는 한반도에 평화와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또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는 아시아는 물론 세계 무대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워커힐 회의에서 나는 한국민들에게 통일이란 얼마나 정서적으로 민감한 문제인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통일은 이산가족을 비롯한 한반도 이남의 많은 사람들에게 각양각색의 의미를 갖는 문제였다.
워커힐 회의는 내게 한국과 외국의 저명한 인사들과의 교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적절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워커힐에서의 경험과 그때 교류를 맺은 인사들은 내가 81년 8월 주한 미대사로 부임한 이후 업무를 수행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워커힐 회의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와 그 책임자였던 김준엽 박사가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김박사는 워커힐 회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워커힐 회의가 열리기 1년5개월전인 69년 3월 통일원(NUB)을 설립했다. 통일원은 당시 장관급이 책임자였다. 오늘날에는 그러나 부총리가 통일원장관을 맡고 있다. 그만큼 한국내에서 통일문제의 중요성이 점점 높아졌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당시 워커힐 회의를 지원했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이 마침내 통일문제에 관한 좀더 자유로운 논의를 적극적으로 허용했음을 의미했다. 박대통령은 손수 조그만 환영행사를 마련해 외국인 참가자들을 영접하기도 했다. 내가 워커힐 회의에 참석한 데는 김준엽 박사와의 개인적 연분이 크게 작용했다. 나는 김박사와 60년대초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나는 또 66년 6월 아세아문제연구소가 후원한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관한 온양 학술회의에 참석하면서 조동하씨를 알게 됐다. 당시 그는 아시아반공연맹에서 일했는데 나중에 통일원 교육홍보실장을 맡았다. 조동하씨가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전문가인 내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반공연맹과 인연을 맺기전 나는 통일원에서 최초의 외국인 고문으로 활약했다.
통일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감정적인 문제였다. 한국에는 북한에 부모형제와 친척을 남겨 두고 남하한 실향민과 이산가족이 많았다. 통일문제는 또 한국 학자들이 다루기에는 다소 미묘한 주제였다. 그들은 정부의 사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워커힐 회의는 한국과 외국인들이 통일문제를 공개적이면서도 심도있게 논의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상징적 의미도 띠고 있었다.
70년 당시는 냉전이 여전히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점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는 소련과 중공, 그리고 북한은 명확히 적으로 규정됐으며 김일성은 끊임없이 한국에 대해 위협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한국은 어렵고도 취약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처럼 불확실한 시기에 열린 워커힐 회의의 주요 성과중 하나는 세계 도처의 지도급 인사들이 한국의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국의 정계 관계 학계 인사들은 물론 기업인들도 두루 만났다. 예를 들어 김준엽 박사는 한국 언론계의 거물인 김상만(94년 1월 사망) 당시 동아일보사 회장의 협조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동아일보사는 동아일보와 월간지인 신동아를 발간했다.
나는 김회장이 영국 정부로부터 명묽脩?작위를 받은 이후에는 그를 김상만경이라고 불렀다. 김회장은 이 회의를 계기로 나와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는 워커힐 회의 참석자들을 위한 리셉션 자리를 마련하는 데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워커힐 회의 개막 연설은 정일권(94년 1월 사망) 당시 국무총리가 맡았다.
많은 외국 학자들도 이처럼 의미있는 회의에 기꺼이 참석했다. 이들의 면면은 김준엽 박사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하나같이 훌륭했다. 우선 미국측 인사로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박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지미 카터 미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냈다.
나는 그가 카터 전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진정으로 지지했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워커힐 회의에서 한반도 통일과 북한의 위협에 대해 많은 사실을 깨달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레진스키 박사의 동료이자 한반도문제 전문가인 컬럼비아대 제임스 몰리 교수와 하와이대의 글렌 페이지 교수, 그리고 프란츠 마이클 등 쟁쟁한 학자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대만에서는 국제관계연구소(IIR) 창설자이자 소장이었던 우첸차이 박사가, 독일에서는 유르겐 도메스 박사가, 홍콩에서는 프랭크 킹 박사가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나의 오랜 지기였다. 일본의 무샤노코지 킨히데 박사와 이토 신키치 박사 등도 자리를 빛냈다. 워커힐 회의에는 또 한국계 미국인 학자들이 스무명 남짓 참석했다. 이들은 미국에서도 존경을 받는 거물급 학자들이었다.
한국인 참석자 명단도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외국인 참석자들은 그들의 면면을 보고 한국에는 민감한 통일문제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훌륭한 전문가들이 수두룩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들의 지적수준은 매우 높았으며 학계에서 나름대로의 명성을 쌓고 있었다.
일단 몇사람만 열거하고자 한다. 나중에 주미 한국대사를 지낸 김경원 박사,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함병춘(83년 10월 아웅산 테러때 사망) 박사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홍구 박사도 워커힐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는 나중에 국무총리가 됐다. 한기식, 박준규, 박봉식 박사 등은 이 회의를 계기로 내가 존경하게 된 학자들이다.
한국의 국내외 학자들은 워커힐 회의에서 통일문제에 관한 모든 관점들을 분석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이들은 한반도 분단의 책임자를 둘러싼 논란은 물론 미국과 소련이 저지른 실책의 범위와 정도도 따졌다. 우리는 한국 친구들과 함께 이런 사안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기회도 가졌다.
한편 워커힐 회의에서는 여느 회의와 마찬가지로 한반도통일에 관한 파격적이면서도 다소 엉뚱하게 들리는 제안도 나왔다. 한 미국인 학자는 한국의 어린 세대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감동에 찬 어조로 호소했다. 그는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무장지대(DMZ)내에 작은 캠프 또는 공원을 조성, 남북한 어린이들이 함께 뛰어놀게 하자고 진지하게 제안했다.
그렇게 되면 남북한 어린이들은 서로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그들이 성장할 때쯤이면 한반도의 분단은 자연히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들 몇몇은 그가 제안한 말이 도대체 믿겨지지 않아 눈알을 굴리기도 했다. 특히 한국인 참석자들은 그가 진심으로 말하는건지 의아해 했다.
이와는 달리 나와 친밀했던 마이클 박사는 조직력과 조직관리에 관한 공산주의의 테크닉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북한과 협상하게 될 경우에는 강경한 정책을 취해야한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한국민들은 독일 통일 이후 불거진 「통일 후유증」이라는 관점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에 따라 북한의 고립과 사회 불안이 심해지면서 한반도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 게 사실이다.
한국민들은 북한의 존재에 대해서 긴밀하게 관찰하는 한편 통일의 의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은 또 아시아의 경제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정치·사회적 민주화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고 있다.
나는 한국이 이처럼 갖가지 상황에 대해 성숙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과 세계에서의 높아진 위상을 즐기게 된데는 워커힐 회의같은 통일관련 회의들이 밑거름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워커힐 회의때 도출된 결론들은 오늘날까지 장기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지금도 여전히 통일문제에 관한 공개적인 토론과 국제적인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한국의 경제계와 정부 그리고 학계 인사들 사이의 협력을 강화해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아세아문제연구소는 한국과 외국 학자들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건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70년에 이뤄진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과 그때 쌓은 우정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 회의는 박정희 정권이 권위주의적인 통치권을 행사한 기간에도 한국은 경제 정치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방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번 회의는 또 한국민들이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고 뚜렷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음을 외부 세계에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됐다. 한국민들은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세련되고 명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워커힐 회의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발전을 위한 매우 중대한 조치였다고 확신한다. 외부 세계는 이 회의를 통해 한국이 심각한 국제 문제를 논의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과 한반도통일은 핵심적인 국제문제로 남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 물론 통일문제는 지금도 다른 국가들의 평화와 안보에도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나는 워커힐 회의를 계기로 통일문제는 한국민들에게 있어 정말 복잡미묘한 감정의 문제라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또 통일문제는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외국 친구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지도 절실히 느꼈다.
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국제문제연구소(IIS)에서 근무하면서 워커힐 회의때 접촉했던 인사들과의 교류를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워커힐 회의 이후 우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두 차례의 학술회의를 열었다. 이들 회의에는 한국 학자들을 초청해 미국내의 「코리아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지금 돌이켜볼 때 나는 워커힐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갖게 된 것 자체에 대해 개인적으로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다. 한국이 좀더 자신만만하게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을 증대시켜 나가는 모습과, 중공과 소련은 물론 옛 공산권의 많은 나라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역사를 지켜보면서 한국에 관한 나의 확신도 더욱 공고해졌다.
이런 점에서 한국이 오늘날처럼 발전하는 데 일조한 워커힐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 없는 긍지를 느끼고 있다. 70년은 한국의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이었다.<워커 전 주한 미대사/번역=이종수 기자>
미 하원 한국관련 청문회
미 정계 “한반도서 손떼자”/박 정권 통치스타일 비판시각 맞물려/70년대 중반 고립주의 견해 팽배/“내정 과민반응땐 북오판 소지”/청문회 출두 한국안보 중요성 강조
80년여름. 미국 전역은 11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 양당의 경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양 진영의 선거전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중요성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특히 동서냉전의 상황에서 점점 비중이 커질 한국과의 안보협력 관계가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냉전이 한창 진행중인 시절이었다. 나는 60년대 말부터 10년도 넘게 한반도가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분쟁과 대결구도에서 핵심역할을 수행할 지리적 운명을 타고났다고 확신했다.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나의 이런 신념을 글과 연설을 통해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내기 위해 80년 여름에 논문 10여편을 정리하는 작업을 벌였다. 우선 나는 70년 고려대가 후원한 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부터 손질했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초기의 나의 우려는 71년 10월19일 서울에서 열린 한 회의에 제출했던 논문에 잘 담겨 있다.
나는 논문에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은 향후 세계정치의 향방을 가늠하는 척도역할을 할 수 있다.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기 위해서는 한국 상황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의 급성장과 국민의 단결심, 그리고 중심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지닌 한국은 다가올 태평양 시대에서 균형을 유지하는데 중추 역할을 떠맡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논문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펴내기에 앞서 「사태」는 훨씬 긴박하게 전개됐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뒤 구성된 레이건 선거 캠프의 외교정책자문단 위원으로 위촉됐다. 나는 「한국의 안보와 한미관계」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던 논문들의 사본을 아시아태평양지역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자문단 멤버들에게 배포했다.
이 단행본에는 74년과 75년 미 하원 위원회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했던 두개의 보고서가 포함돼 있었다. 이들 보고서는 20여년전 발생했던 기억할 만한 가치를 지닌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요긴한 배경설명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들 보고서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라는 큰 틀안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의 개인적 견해가 그나마 수도 워싱턴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도전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는 공직을 수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속셈에서 우리의 견해와 호의를 멋대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정치풍토에서는 이런 일이 흔히 발생한다. 75년 내가 (의회에서) 한국에 관해 증언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지금은 당시의 일을 한발짝 물러나 덤덤한 마음으로 회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를 생각하면서 미소를 짓기도 한다. 당시의 사건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73년과 74년 사우스 캐롤라이나대에서 안식년 휴가를 얻어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장기간 머물렀다. 그러던중 나는 74년 여름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차미네이드대가 후원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이끌었다.
나는 하와이 체류중 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와 국제기구 소위원회에 「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의 변화하는 안보관계」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동아시아의 민감한 안보문제에 정통했다고 생각한 나는 기꺼이 나의 견해를 피력하려고 했다.
다행히 나는 당시 하와이를 경유하게 된 두명의 한국인 친구와 한미 안보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었다.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김경원 박사와 통일원(NUB)에 적을 둔 조동하씨가 바로 이들이었다. 두 사람은 한국의 불안을 가져오는 진정한 요인 가운데 몇몇 사안들이 한국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인 일단의 워싱턴 정치인들에 의해 간과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당시 하원의 각종 청문회를 주도했던 도널드 프레이저 민주당 의원을 대표적 인물로 꼽았다. 아무튼 나는 74년 7월30일 상·하 합동 소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나는 이 보고서에서 『워싱턴 정계에서 한국을 좀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나름의 관측결과를 제시했다. 실제로 한국은 세계 열강들의 이해가 맞물린 동아시아에서 국방과 안보문제에 관해 핵심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국은 또 당시 베트남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데 힘입어 이 지역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반면 북한정권은 한국에 대한 위협적인 수사를 강화하는 한편 비무장지대(DMZ)내 군사분계선에서 남침용 땅굴을 파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한국 정부는 당연히 긴장된 분위기에서 국정을 이끌었고 불안을 느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안보를 의존해 온 동맹국인 미국에서 자신들에 관한 부당한 비난이 일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라도 할 경우 일종의 「강박관념」에 빠져들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나는 미국 일각에서 한국 내정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행위는 북한 김일성 정권의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간단히 말해 나는 미국의 신뢰성과 지역안보는 한국 정부에 대한 우리의 공약과 임무수행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이 한국 지도자들과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협의를 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프레이저 위원회에 보낸 메시지의 결론을 맺었다. 즉 『우리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구축한 신뢰성과 지역안보를 저해할 가능성이 있는 어떠한 조치에도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강조했다. 위원회에 대해 민간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고 생각한 나는 한국에 관한 외교정책을 수립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자부심까지 느끼게 됐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초반에는 미국의 대한 정책이 엄청난 변화를 겪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과 아시아에 관여해 온 정책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팽배했고, 이같은 반응은 워싱턴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뚜렷이 부각됐다. 특히 윌버 밀스를 비롯한 의원들은 아시아에서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외교 게임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공 카드를 구사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한반도를 주무대에서 몰아내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75년에는 또 미국이 베트남에서 완전히 발을 뺐으며 괌 독트린이 선포됐다. 동맹국들이 국방의 짐을 더 많이 떠맡기를 바랐던 미국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 셈이다. 사태가 이렇게 흐르자 서울에서는 안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다소 경직되고 다루기 벅찬 박정희 대통령이 이끌던 한국과의 관계가 살얼음 위를 걷듯 긴장에 휩싸이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런 와중에서 미국 정계를 상대로 「제멋대로」 로비활동을 벌였던 박동선씨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스캔들이 터져 나오자 미 의회는 한바탕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박동선씨 사건은 미국에서 나중에 「코리아게이트(Koreagate)」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워싱턴의 압력 단체들은 또 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되자 박대통령과 한국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표적삼아 맹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미 국방부 채널을 통해 잠재적인 한반도 안보위기 상황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들을 속속 입수했다. 안식년 휴가 기간에 한국에 주둔중인 군사기지를 방문하면서 이를 피부로 실감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서태평양 지역에서 소련의 군사력도 눈에 띄게 증강하고 있었다.
특히 75년 4월 실시된 소련의 「오키안(OKEAN) 2」 해군훈련에서 이 지역의 가공할 만한 군사력이 동원되자 일본의 안보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와 더불어 갈수록 심각해지는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에 대한 한국의 우려도 높아졌다.
한국민들은 한국 내정에 대한 미국의 비판적 시각에는 고립주의가 반영돼 있으며 이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정책에 그럴듯한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 의회에서 내놓은 몇몇 성명은 한국민들의 이같은 우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대외원조를 9,300만달러나 삭감하자 긴장국면은 더욱 악화했다.
프레이저 소위원회 청문회는 계속 이어졌고, 나는 75년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 소위에 민간인 자격으로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의원들과 그들의 보좌관들 앞에서 나의 견해를 직접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북한군이 저지를 수 있는 남침위협의 심각성과 한국은 항상 방어적인 입장에 처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각계 각층을 막론하고 한국 사람들은 미국의 고립주의 정서를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민들은 한반도 안보공약에 관한 미국의 의지가 확고부동한지도 의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청문회에서 제기된 한국에 관한 미국의 비판은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청문회에서 돌출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서울의 정책에 관한 미국의 매도 여론이 자칫 한반도의 우려와 불안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되면 한국 정부가 매사에 더욱 고삐를 조일 가능성이 높았다. 미 의회도 이런 결과를 낳는 것은 원치 않으리라 확신했다.
나는 또 나보다 앞서 증언했던 제롬 고헨(하버드대 국제정치학) 교수의 견해에 단도직입적으로 이의를 달았다. 그는 결코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전체주의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한 뒤 『한국이 반공을 강조한다고 해서 미국의 안보이해에 무조건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은 김일성이 한국전의 실책을 되풀이해서 다시 남침을 감행하는 빌미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청문회장에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나는 의원들이 극단적인 찬·반양론으로 갈려 대립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나의 우려는 소위원회 멤버이자 예수교 신부인 드라이넌이 내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현실화했다. 그는 내가 보기에 도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인신 모욕적인 질문을 했다. 어찌됐든 나는 책임있는 학자로서, 전문가로서, 그리고 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청문회에 나온 「손님」의 입장이었다.
나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드라이넌 의원에게 『의원님, 당신은 내가 미국 정부에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나는 순수한 동기에 의문을 표하는 당신의 무례한 태도를 참아야 할 의무도, 의도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문회장에는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웅성거림이 쏟아졌다. 그러자 드라이넌 의원도 정도를 지나쳤다고 직감한 듯 투표가 있다면서 서둘러 발언을 마친 뒤 청문회장을 빠져나갔다.
그 다음날 언론은 나의 증언내용과 이 사건을 꽤 비중있게 다루었다. 나의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 미국인들은 주요 맹방인 한국의 생사가 걸린 이해관계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김일성 정권이 또다시 오판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때로는 긴장되고 때로는 정서적으로 상반되는 맹방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가를 깨달았다.
냉전이 막을 내리고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안보와 관련해 당시와 비슷한 기본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거의 똑같은 논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금도 미국에는 우리가 한국에 존재해야 하는 상징적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미국의 존재는 폭력적 수단에 의존하는 북한의 호전성을 억제하는 동시에 동북아의 평화를 유지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한국과 동반자적 입장에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원 위원회에 제출했던 두개의 보고서에서 지적한 많은 부분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80년 당시 200쪽에 달했던 나의 논문들을 읽어본 많은 친구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이듬해 여름 나를 주한 미 대사로 임명했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번역=이종수 기자>
레이건 대통령의 전화
“워커 박사,론입니다 한국대사 맡아주세요”/81년 3월 미 바닷가 별장 우리부부와 조동하씨 함께 휴식/갑작스런 백악관전화 받고 세사람 기쁨과 흥분의 도가니/소식들은 김종희씨 첫 축하전화
주한 미대사를 향한 나의 여정은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시작됐다. 나와 아내 세니는 80년 11월의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진영을 적극 도왔다. 당시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철수 주장과 엉성하기 짝이없는 대아시아정책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우리 주에서 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에 당선된 캐롤 캠벨과 함께 공화당을 지원하는 선거운동을 벌였다.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도 레이건부시 후보를 위해 뛰었다. 나는 지역신문에 공화당을 지지하는 기고를 싣는 한편 연설을 통해 레이건 후보를 뽑으라고 호소했다.
많은 공화당 친구들은 내가 대사직에 임명되기 전부터 레이건 행정부에 몸담고 있었다. 지기인 리처드 앨런은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에 지명됐고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제자인 리 애트워터도 핵심 참모직을 꿰차고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내가 대사로 임명되는데 큰 힘이 됐다.
국무장관에 발탁된 알렉산더 헤이그 장군도 나의 오랜 친구였다. 우리는 그가 미 육사인 웨스트 포인트에서 보병전술을 가르치던 대위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가 됐다. 헤이그장군은 서몬드 의원이 내게 대사자리를 주자고 제안하자 『워커 박사가 원한다면 어떤 자리든 힘껏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우리 부부는 81년 1월20일 거행된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그때까지 대통령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행정부에서 공직을 수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3월 중순께 우리 부부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머틀 비치 인근의 바닷가 별장에서 한동안 머물기로 했다. 우리 부부와 친했던 조동하씨가 바다를 끼고 있는 이 별장에 함께 가기로 했다.
마침내 81년 3월25일 레이건 대통령의 전화가 왔다. 세니는 이날 일을 매우 재미있는 필치로 적어 두었다. 내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이 글을 인용하는데 대해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내 아내도 기쁘게 생각하리라고 믿는다. 아내의 글은 이랬다.
조동하씨와 나는 테니스 경기에서 한세트씩을 따냈다. 3세트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이 브레이크로 승부를 내기로 했고, 조동하씨가 이겼다. 그는 만족해했다. 나도 손님을 제대로 대접한 셈쳤다. 별장에 돌아오는 동안 하늘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3월이었지만 우리는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곧바로 별장의 샤워장으로 향했다. 나는 부엌에서 목을 축였다. 남편은 몇발짝 떨어진 식탁에서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은 『여보, 당신이 받아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한손에는 물잔을 든 채 다른 손으로 부엌벽에 걸린 수화기를 집어 들고 『워커 부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상대방 여자는 매우 쾌활한 목소리로 『네, 워커 부인, 박사님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실례지만 어디시죠』라고 되묻자 그녀는 『예, 여기는 백악관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편을 바라보는 내 눈은 휘둥그래졌고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나는 물잔을 조리대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한손에 들려 있는 수화기를 가리키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한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윽고 남편은 의자를 박차고 달려와 내손에서 수화기를 가져갔다.
남편이 차분하게 『워커 박사입니다』라고 말하자 상대방은 『아, 박사님, 죄송합니다. 대통령께서 전화 걸라고 하셨는데 지금 잠깐 나가셨습니다.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물론이죠』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남편에게 달려가 힘껏 끌어안았다. 나는 조동하씨가 들어가있는 샤워장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며 『우리 부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하려면 빨리 나오세요』라고 외쳤다. 나와 남편은 서로 싱긋이 웃었다. 조동하씨도 수건을 두른 채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머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고 몸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나는 숨을 고르면서 백악관이 지금 막 전화를 걸어왔고 다시 남편에게 전화하기로 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 세 사람은 제자리에 선채 벽에 걸린 수화기를 뚫어질 듯이 쳐다봤다.
전화가 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갑자기 벨이 울리자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남편은 이번에도 내가 대신 받으라는 시늉을 했? 나는 다시 『워커 부인입니다』라고 말했고, 상대방 여자도 다시 남편을 찾았다. 나는 『잠깐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한 뒤 수화기를 남편에게 건넸다. 남편은 내가 엿들을 수 있도록 수화기를 귀에서 살짝 떼었다.
저쪽에서는 『워커 박사. 론(로널드 애칭) 레이건입니다. 오늘 어떠십니까』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빙긋이 웃으며 『좋습니다. 각하께서는 어떠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글쎄요, 나도 괜찮습니다만, 박사께서 내 요청을 받아주신다면 더욱 좋겠는데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대통령 각하, 당신을 돕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하겠습니다』라고 되받았다. 그리고 난 뒤 남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청을 받았다. 그것은 『워커 박사, 우리 행정부에서 차기 주한 미대사를 맡아주시는데 동의하시겠습니까』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리처드 루이스 워커 박사는 레이건 행정부의 초대 주한 미대사가 됐다.
이 날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한지 단지 8주정도 지난 무렵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활기차면서도 보람찬 새 인생을 출발하는 날이었다. 이처럼 각별한 전화를 받은 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우리는 시부모에 이어 우리 아들 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제프리는 텍사스주 휴스턴에, 앤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 그리고 브래들리는 콜로라도주 파고사 스프링스에 있었다).
그들의 배우자들도 우리와 함께 환호성을 울렸다. 어느만큼 흥분이 가라앉자 다시 벨이 울렸다. 서울에 있는 김종희(81년 7월 사망) 한국화약그룹회장한테 온 전화였다. 그는 남편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 전화를 끊은 뒤 우리는 조동하씨를 쳐다보면서 『그런데 김회장이 어떻게 임명사실을 알게 됐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이 잠시 이층에 올라갔을 때 우리 보스에게 전화를 걸었죠. 김회장에게 제일 먼저 여기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김회장이 다시 전화를 건거죠』라고 대답했다. 그가 환한 미소를 머금자 트레이드 마크인 작은 눈에도 미소가 넘쳤다. 우리 모두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어 『이제 뭔가 축하를 해야 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흥분과 긴장속에서 몇달동안이나 이 전화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서몬드 의원은 남편의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워커 박사, 워싱턴에서는 당신이 우리 행정부의 일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사께서 어떤 자리를 원하는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해 남편을 놀라게 했다.
남편은 이에 『그런데 의원님, 저는 지금 교수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른 자리는 바라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서몬드 의원은 『워커 박사, 당신은 우리 정부에서 찾고 있는 적격자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이후 몇차례 걸려온 통화에서 우리는 레이건 행정부가 남편에게 중국이나 한국 호주 그리고 대만 대사를 맡기면 어떨까하고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백악관에서 전화가 온만큼 조동하씨는 워싱턴으로 떠났다. 대신 우리는 앤(딸)이 사위 윌, 손녀인 브레이든, 메그와 함께 「판자(Plank)」라는 별명이 붙은 우리 별장에 들르겠다는 전갈을 받고 새 손님 맞이 준비에 나섰다. 우리 가족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했다. 그리고 백번도 넘게 레이건과 남편의 통화내용을 되풀이해 들었다.
우연이지만 나는 레이건이 전화하기전 전화기에 녹음기를 갖다댔었다. 아이들이 집에 온뒤 나는 그들에게 통화내용을 틀어주었다. 녹음기를 두번씩 돌릴 때도 있었다. 두 손녀는 달을 보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나는 그때 갑자기 레이건 대통령의 음성 다음에 손녀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녹음기를 틀어놓은채 손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브레이든은 여섯살이었고 메그는 세살 반이었다. 녀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거실로 나와 손녀들과 녹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윌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는 『장모님, 방금 무슨 일을 저지르셨는지 알고 계십니까』라고 말했다.
아차 싶었다. 그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제든 통화내용을 듣고 싶을 때에 대비해 녹음기를 처음 상태로 되감아 놓은 걸 깜빡했던 것이다. 손녀들의 목소리를 넣겠다는 욕심 때문에 대통령과의 통화내용을 지워버렸으니!
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어요. 남은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남편은 『글쎄, 당초 통화내용을 녹음하지 말았어야 하는건데』라고 말했다. 앤은 『괜찮아요 어머니, 손녀들의 목소리를 녹음하는 게 더 중요할수도 있잖아요』라고 위로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네명의 어른이 최소한 두번이상 들었던 대화내용을 한마디 한마디씩 원상복구하려고 애써 보신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커피테이블 주변 마루바닥에 둘러 앉아 온갖 시도를 거듭했다. 그러나 정확한 통화내용에 이견을 보인 부분이 몇군데 있었다. 대통령과 직접 통화한 남편마저 정확히 어떤 용어와 표현이 오갔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 다음날(3월30일)에는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사무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중 암살기도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뉴스를 별장에서 라디오로 알게됐다. 나는 남편이 그처럼 화가 난 모습을 본적이 없다. 남편은 서둘러 컬럼비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선뜻 이해되지 안는다. 별장에서도 컬럼비아 집에서처럼 언제든 전화통화는 가능했는데 말이다.
남편은 아무튼 자기가 반드시 컬럼비아의 집에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3시간동안 운전한 끝에 컬럼비아에 도착했다. 우리는 차안에서도 라디오 방송 하나하나에 귀를 곤두세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워싱턴에 전화를 걸어 암살기도 사건과 관련해 가능한 모든 정보를 알아내려했다.
암살사건에 얽힌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다. 워싱턴에 도착한 조동하씨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은 뒤 숙소인 워싱턴 시내 파크 호텔로 돌아갔다. 그는 호텔주변의 보안상태가 평소와 달리 삼엄하다고 느꼈지만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다음날 뉴욕으로 날아간 그는 그때서야 대통령에게 총을 쏜 존 힝클리가 바로 그 호텔에 머물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여러해동안 이 이야기를 많은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우리는 그리 큰 어려움 없이 한국(대사직)을 선택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남편이 중국을 택하리라고 기대했다. 중국어에 능통한데다 펜실베이니아와 예일대 시절부터 중국문제 전문가로 정평이 났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러나 공산국가에서는 자신의 역할이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며 거부했다. 호주도 비록 많은 친구가 있고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선택에서 제외했다.
한때 캔버라에서 미국 대사와 함께 머무른 적이 있고 호주를 매우 사랑했지만 말이다. 호주는 우리 가족과 너무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우리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데 기뻐하며 참여하셨을텐테!) 우리 부부는 또 30년동안 세차례에 걸쳐 살았던 대만도 사양했다. 우리는 대만 사람들이 오랜 친구인 남편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승인한 미국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국에서 우리는 대사직을 정말 훌륭히 수행했다. 역대 대사들과의 차별화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맞았고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국에는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새로운 국무(외무)장관과 국방장관, 그리고 각료진이 들어설 상황이었다. 주한 미대사직이라고 새 사람이 들어서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나는 우리 부부의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했던 순간을 묘사한 아내의 글을 읽으면서 아내가 81년 여름 서울에서 시작된 우리 부부의 공동임무를 수행하는 데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아내는 정말 훌륭한 연대기 작가였다. 우리 부부는 결혼 36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머틀비치 인근의 「리치필드 바이 더 시」에 있는 별장에 갔던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우리 부부에게 준 기념선물은 참으로 멋진 것이었다!<워커 전 주한 미대사/번역=이종수 기자>
주한 미 대사 만들기
한국 1주만에 아그레망 "초스피드"/상원 우호적 인사청문회… 만장일치 비준/안전·VIP접대법 등 망라/국무부 외교지식 브리핑/CIA·NSA선 특별교육도
나는 지난주(1월12일자) 자세히 설명한대로 81년 3월26일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주한 미 대사직을 맡아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날 이후 서울에 도착한 7월말까지 4개월동안 우리 부부는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 세니와 내가 그처럼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는 어찌 보면 한국 부임에 앞서 훌륭한 준비운동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매사가 바삐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 부부는 그때보다 분주했던 시절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국과 한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은 본질적으로 막중한 (주한 미 대사의) 임무를 고려할 때 매사가 쉽게 풀릴 것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평범한 한 대학교수가 외교계에 발을 들여놓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을 이해한다면 한층 더 읽는 재미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부부는 당시 여러가지 난관에 부딪쳤고 그만큼 준비과정에서 골치를 앓기도 했다.
물론 대통령의 전화 이후 수도 워싱턴에서는 다양한 정부 기관들이 빗발치듯 전화를 걸어 왔다. 우선 세니와 나는 즉각 치과진료를 포함한 철저한 건강진단을 받고 그 결과를 국무부 의료 사무소에 보냈다.
또 있다. 대통령이 내게 전화를 걸기전부터 나에 관한 예비 신원조회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국무부는 우리 부부의 생활방식을 파악하기 위해 이웃과 친구들을 인터뷰하는 등 조사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국무부는 우리에게 6월 초순에는 워싱턴에 머무는 계획을 세워두는 게 좋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이는 그때까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 집에서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것을 뜻했다.
국무부는 우리가 컬럼비아 집에서 서울에 있는 대사관저로 실어 나를 수 있는 가재도구의 한도를 일러주었다. 집에 두고갈 물건을 보관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무엇을 싣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과연 내 개인 도서관에서 어떤 책들을 가져가는 게 한국에서의 업무수행에 가장 도움이 될까? 그리고는 집을 세놓는 일에도 매달려야 했다.
원래 우리 집에 세들기로 했던 사람이 막판에 약속을 취소, 골치를 썩였다. 다행히 한 의사가 세들겠다고 나서 우리는 6월 일 집을 비워 주었다. 이후 우리는 워싱턴에서 모든 일이 매듭지어 질 때까지 가족과 친지 집에 머물러야했다. 상원에서 나의 임명에 대한 비준이 날 때까지는 어떤 물건도 한국에 부칠 수 없었다. 그런데 상원의 비준은 7월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국무부 한국과는 상원외교위원회 의원들에게 (나의 임명과 관련해)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지를 문의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모두 호의적이었다.
4월과 5월 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잡담을 나누었다. 손님중에는 한국계 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친구인 조지아주립대 안낙영 교수는 두번씩이나 방문했다. 동료학자이자 당시 뉴욕 총영사였던 김세진 박사도 축하인사를 전하려고 컬럼비아까지 내려왔다. 그는 슬프게도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뒷날(82년 2월) 도쿄(동경)의 한 호텔에서 화재로 숨진 친한 벗이었던 김태동 박사도 10명의 한국인 재계 인사들과 함께 찾아왔다. 그들은 때마침 우리 집에 있던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개발위원회(SDB) 멤버들과 즐겁게 지냈다. 폴 클리블랜드 부부는 4월초 우리 집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클리블랜드는 예일대 제자인데, 나는 그를 주한 미대사관의 부대사로 추천했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다른 대사직에 임명됐다.
우리 부부가 4반세기동안 살았던 컬럼비아시에 대한 의무도 있었다. 세니는 중국요리에 일가견이 있었고 컬럼비아에서 중국요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많은 주민들은 우리에게 축하인사를 전하려고 했고, 우리가 짐을 싸 떠나기 전에 각종 사교모임에 초대했다. 우리는 우리 집과 남의 집을 오가며 서로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예를 들어 세니는 4월 2일, 4일, 그리고 12일에 10명에서 12명의 손님을 초청해 8개 코스에서 10개 코스에 이르는 중국요리를 대접했다.
워싱턴과 뉴욕에서도 나를 만나자는 전화가 수차례 걸려 왔다. 나는 빡빡한 여행일정을 짜야 했고 덕분에 아내도 일복이 터졌다. 예컨대 5월6일 우리 부부는 새벽 5시45분에 서둘러 아침을 먹었다. 아내는 워싱턴행 아침 비행기에 맞춰 나를 컬럼비아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는 그날밤 10시10분에 도착하는 비행기에 맞춰 45분동안 차를 몰고 다시 공항에 나왔다. 5월11일에도 다시 워싱턴에 올라가 13일까지 머물렀다.
서울에서 워싱턴으로 급히 날아온 존 몬조 당시 주한 미대리대사가 우리 부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컬럼비아를 찾아온 적도 있다. 몬조 대리대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집을 장식한 세니의 예술적 안목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서울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참모들을 모아놓고 『아름다운 한국 궁전양식을 간직한 대사관저에 어울리게 집을 꾸밀 수 있는 적격자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어 참모들에게 세니가 도착할 때까지는 (관저장식 비용을) 「잘 물어다 저장해 두라」고 농담했다.
그러나 마무리지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국제문제연구소(IIS)의 업무를 매끄럽게 인수인계해 줘야 했다. 가족에 대한 의무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켄터키주 오웬스보로에 살던 나의 누이부부는 우리 개를 맡아 기르기로 했다. 이 개는 몸집이 크고 붙임성이 좋아 각별히 정을 쏟았다. 이 개를 오웬스보로까지 데려다 주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펜실베이니아주에 계신 부모님과도 같이 지내고 싶었다.
우리는 국무부가 5월18일 한국 정부에 대해 나의 대사임명을 승인해 달라는 공식요청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됐다. 그전까지 이 문제는 비공식적으로만 논의됐다. 요청(Request)이란 단어는 서구식 외교 용어로 「아그레망」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 정부의 승인은 불과 1주일만에 나왔는데 미국 정부쪽에서는 이를 하나의 기록적인 일로 평가했다. 나는 외교절차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사실을 86년 8월 후임인 제임스 R 릴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아그레망을 위해 이원경(이원경) 당시 외무장관을 방문하면서 알게 됐다.
월 초순 우리는 워싱턴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처럼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국무부내 외교연구소(FSI)는 새로 임명된 대사들을 위해 무시무시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몇몇 사람들은 이를 익살맞게 「신부 학교(Charm School)」라고 부르기도 했다. 6월 2주동안 우리는 온갖 종류의 브리핑과 교육을 받았다.
동아시아 전문학자와 교수라는 나의 경력 때문에 우리 부부는 수차례나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었지만, 이 프로그램에는 대사와 그 부인에게 기대되는 예비지식 등도 포함돼 있었다. 아내는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하면서 겪을 수 있는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특별 「심리 상담」도 받았다.
사실 아시아에서 오래 살았던 아내는 이런 경험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특별교육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아무튼 아역배우 출신으로 가나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셜리 템플(흑인)은 자신의 경험을 정성껏 들려주었다. 그녀는 능숙하고 정말 유능했다.
이밖에 각종수당과 참모지원, 폭력에 대처하는 방법을 포함한 안전 브리핑, 대사관내 예술 프로그램, 정신건강 문제, 직장사기를 높이는 방법, 대사관내 의사소통, VIP와 손님접대, 그리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외교 전문 이용법(외교관들에게는 정말 중요하다) 등을 다룬 수업도 있었다. 우리 부부는 정신없이 노트를 했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더 많았다. 한국은 우리 미국에는 가장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나라중 하나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FSI 수업에는 핀란드와 어퍼 볼타(부르키나파소의 옛이름), 말리, 뉴질랜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 부임하는 대사들도 있었다.
나는 이들 나라와는 달리 한국은 안보와 군사적 이유로 인해 부임에 앞서 특별한 관심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됐다. 나는 국방부와 중앙정보국(CIA), 그리고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며칠 더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극비정보를 다루는 NSA는 내게 첩보위성과 북한을 감시하는 그밖의 전자통신수단에 관한 개요를 설명해 주었다.
한국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는 나는 이 분야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새로 숙지해야 할 정보량은 엄청났다. 나는 국방부와 CIA, NSA 등이 모두 한국을 가장 중요한 임무지역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워싱턴에서 머문 2주과정은 그야말로 「벼락공부」기간이었다.
미국 헌법 체계상 나는 불가피하게 상원의 비준을 받아야 했다. 이는 내가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개별 방문해야 함을 뜻했다. 몇몇 의원들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은 전직 교수이자 일본계 미국인인 하야카와 S I의원이었다. 일리노이주의 찰스 퍼시 의원도 잘 알았다. 두 사람은 (한국에 관한) 나의 논문들을 읽어본 적이 있어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
드디어 나의 지명에 관한 청문회가 81년 7월13일 열렸다. 청문회는 하야카와 의원?주재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출신인 프리츠 홀링스와 스트롬 서몬드 의원은 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누가 더 유쾌한 용어를 구사할 수 있는지 경쟁했다. 서몬드 의원은 나의 지명을 밀어붙인 주역이었다.
홀링스 의원은 나와 몇몇 정치적 지명자와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나는 정당에 헌금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임하려는 지역의 전문가이자 학자라는 이유로 지명됐다는 설명이었다. 하야카와 의원은 내가 청문회를 갖기 보다는 위원회 멤버를 학생으로 모시고 세미나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청문회에서는 내가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성취하고 싶은 목표들에 관해 진술할 기회도 주어졌다. 나는 다섯가지의 목표를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첫째, 한국 안보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분명히 한다. 둘째, 양국간 신뢰를 강화한다. 셋째, 문화적 교류와 이해를 증진시킨다. 넷째, 미국의 이익을 촉진한다. 이를 통해 양국은 한국 경제의 역동적 성장으로부터 고루 혜택을 누린다. 다섯째, 비무장지대(DMZ)의 긴장을 완화한다.
나는 임기내내 이들 다섯가지 사항을 명심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위험천만한 북한 정권이 어떠한 오판을 하는 것도 방지하기 위해 한국에 상징적이고도 강력한 미국의 존재가 유지돼야 한다는 외교관계위원장의 말에 동의하면서 내 주장의 결론을 맺었다.
상원은 청문회가 열린 그 주말에 레이건 대통령과 그가 한국에 파견키로 결정한 사람에 대해 만족할만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만장일치로 나의 임명을 비준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81년 7월24일 나는 취임선서를 했다. 이를 기념하는 리셉션이 국무부 외교연회실에서 열렸다.
이 리셉션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를 지낸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미국대사와 존 C웨스트 여사, 한 홍보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나의 제자, 그리고 크로포드 쿡 부부 등이 주관했다. 김용식 주미 한국 대사 부부와 김대사의 후임으로 이제 막 미국에 도착한 유병현 대사 부부 등 많은 한국 친구들도 참석했다. 김대사 부부는 우리가 「신부학교」에 다니는 동안 세니와 나를 만찬에 초대했었다.
펜실베이니아주에 계신 우리 어머니도 리셉션에 참석했다. 하지만 80대중반으로 심장상태가 좋지 않으셨던 아버지께서는 장거리 여행길에 나설 수가 없으셨다. 나는 특별 전화중계를 통해 취임선서의 전 과정을 아버지께 전해드리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윌리엄 클라크 국무부 부장관은 내가 선서를 마치자 200명이 넘는 하객에게 『특별한 손님이 먼 곳에서 이 행사에 귀기울이고 있다』고 말했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들은 비밀에 싸인 그 손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라고 얘기할 기회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아버지는 내가 부임하는 나라에서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랑과 가정의 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분』이라면서 소감의 결론을 맺었다.
이건 대통령이 내게 전화한 날로부터 정확히 4개월만인 7월26일 아내와 나는 워싱턴을 떠났다. 우리는 사정상 취임선서 리셉션에 참석하지 못한 아들 브래들리 내외를 만나 보기 위해 콜로라도주에 잠시 들렀다. 그리고 미 태평양사령부(CINCPAC)에서 브리핑을 받기 위해 하와이로 날아갔다.
호놀룰루에서는 조이제 박사 등 많은 친구들도 만났다. 그는 당시 하와이 동서연구소의 소장대리를 맡고 있었다. 그 며칠 후 우리는 날짜변경선을 가로질러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인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는 낙천적이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주요 우방인 한국에서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대통령과 사랑하는 조국을 대표하게 됐다는 자부심도 대단했다. 우리 부부는 무척 바빴던 지난 4개월을 훌륭히 보냈다고 결론지었다. 그 기간동안은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가치도 충분했다. 해외로 발령받는 미국 대사들이 부임준비 과정에서의 경험덕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에 우리 부부는 위안을 받았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번역=이종수 기자>
신임장 제정때 생긴일
전 대통령에 예상못한 '머리 숙이기'/첫 회견 한국말 인사 좋은반응… 열심히 배워/두손으로 봉투내밀자 전 대통령 한발짝 물러서 할 수 없이 몸 더숙여/YS에 제정하는 사진도 '고개숙인 대사들' 개인탓보다 관행인듯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길조였다. 우리 부부는 81년 7월 31일 대한항공(KAL) 001기편으로 하오 7시 30분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일본까지는 미국 항공기를 이용했는데 환승시간이 여의치 않아 도쿄(동경)에서 한국 항공기로 갈아탔다. 나는 아내 세니에게 『내가 증진하려는 양국의 상호 협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부임 준비를 위해 워싱턴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국무부 언어연구소의 한 강사와 함께 서울 도착시 행할 연설을 한국말로 연습했다. 그는 내게 한국말 발음과 긴 문장을 기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오랫동안 체류한 경험이 있는 나는 이같은 노력이 (한국민들의) 호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니와 나는 시차극복이 채 안된 상태였지만 공항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된 짧은 기자회견에 응할 준비가 돼 있었다. 나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한국에 되돌아오게 돼 매우 기쁘다고 줄줄 외우듯 말했다. 나의 발언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음을 이내 느낄 수 있었다.
며칠후 코리아 타임스에 글을 싣던 미국 여류작가 존 카터 커벨이 내 기자회견에 관해 칼럼을 썼다. 그녀는 TV로 기자회견 모습을 지켜본 한국 친구의 반응을 소개했다. 그녀의 칼럼은 다음과 같다. 『그 친구는 「(신임 대사가) 한국말로 얘기했어요.
누구나 암기할 수 있는 단지 한 문장이 아니라 꽤나 긴 연설을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내 눈물 방울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아세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한없이 기뻐할 수밖에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 부부가 결연한 의지를 갖고 한국말을 계속 배우기로 결심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다행히 우리는 품위있고 친절한 연세대 출신의 이경희씨를 설득, 한국말을 배우기로 했다. 그녀는 지금은 어른이 됐지만 정말 귀여운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우리는 아침식사 시간에 맞춰 일주일에 다섯번씩 수업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우리 부부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우리가 한국의 관습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등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마치 딸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해주곤 했으며, 결국 우리는 그녀를 「수양딸(Korean Daughter)」로 삼았다.
서울 도착 기자회견에서는 내가 예상했던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한국을 얼마나 자주 방문했느냐는 질문에도 준비가 돼 있었다. 나는 기자들에게 기간이 만료된 여권이 수두룩하고 한국전 이후 50번도 넘게 방문했다고 대답했다. 존 A 위컴 장군과 존 몬조 부대사을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도 공항까지 마중나왔다.
위컴 장군은 나를 환영하는 의장대 행사를 준비했다. 공노명 당시 외무차관등 많은 한국 친구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나는 아내에게 『공항 행사에 참석한 사람중 미국인보다 한국 사람 가운데 아는 사람이 더 많다』고 말했다. 어쨋든 나는 대사 부임의 첫 발을 성공적으로 내디뎠다.
도착 다음날 저녁 우리는 관저에서 대사관 직원 모두를 초청해 리셉션을 열었다. 이 리셉션에는 배우자와 자녀등 250명이 넘게 참석했다.
세니는 미국인 여성클럽 회원들과 함께 일련의 나들이에 나섰다. 그러던중 불행히도 서울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 견직 공장을 견학하다 계단에서 금속 쪼가리를 밟는 사고를 당했다. 아내는 2주 넘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상처는 한달이 지나서야 완전히 아물었다. 그러나 아내는 환영행사가 열릴 때는 관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의 병실에는 15년 넘게 친분을 맺어 온 한국 친구들이 보낸 꽃으로 가득했다. 물론 문병객들도 많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내는 특별한 한 리셉션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나는 8월 6일 아내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를 강행해야 했다.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등과 배우자들을 관저로 초청한 이날 행사에는 손님이 자그마치 350명이나 됐다.
우리는 참석자중 5분의 4가 넘는 사람들이 이날 처음 대사관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몇몇은 4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한미 양국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정말 충실한 대사관 직원들이었다. 세니와 나는 이들 훌륭한 친구들을 정기적으로 번갈아 초청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부임 초기에는 할 일도 참 많았다. 한국 정부의 모든 각료들은 내?일일이 찾아가 인사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각료가 모두 26명이나 됐다. 방문때마다 부처에 대한 브리핑을 받는 한편 그 부처와 관련된 한미 관계를 주제로 이야기했다. 한사람의 각료를 방문하는데도 반나절이 걸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내가 이들에 대한 방문을 막 끝마칠 무렵 전두환 대통령이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나는 몇몇 동료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이 나에게 열심히 일을 시키려고 작심한 모양이라고 농담했다. 아무튼 개각 덕분에 나는 부임 첫해동안 자그마치 52명의 각료들을 개별 방문했다.
부임 첫주에 나는 노신영 외무장관을 방문해 신임장을 전달했다. 노 장관은 그 전에 잘 몰랐지만 이범석 통일원 장관과는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도착 하자마자 연락을 취했다. 그는 노 장관 후임으로 이듬해 외무장관이 됐다. 8월 18일에는 오랜 친구이자 경제에 비상한 재주가 있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방문했다.
한국 신문들은 미국 대사가 정래혁 국회의장, 이승윤 재무장관, 서석준 상공장관등 다양한 한국 지도자들과 접견하는 사진을 거의 매일 실었다. 서장관은 후에 경제부총리로 발탁됐는데 애석하게도 2년뒤인 83년 9월 양곤 폭탄테러 당시 숨졌다.
마침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공식 제출해야하는 날이 왔다. 이 행사는 8월 12일 아침에 마련됐다. 외무부 의전국은 식의 진행과정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보내왔다. 대사관 직원들은 모두 예복을 입어야했다.
특히 나는 예장용 모자(Top Hat)를 준비해야 했다. 프랑스 궁정 모델을 토대로 한 서구식 관습에서 파생된 지침들은 마치 무대 상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 같았다. 모든 절차는 외무부의 김형근 의전장과 청와대의 김병훈(미국명 마이크 김) 의전 수석이 주도했다.
역사학도로서 나는 영국과 중국 관계에서 발생한 유명한 사건, 즉 영국의 매카트니 경이 베이징(북경) 궁전을 방문하자 첸룽(건륭) 황제의 의전 담당자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게(커우터우·고두) 만들려고 노력했던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전달할 두 개의 봉투를 가져갔다. 하나는 내가 대사직에 임명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신임장」이었고 또 하나는 (한국) 대통령이 대사직에 다른 사람을 원할 경우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소환장」이었다. 소환장은 그러나 한미 양국간 공식적 외교관계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지침에 따르면 나는 두 손을 내밀어 이 두 개의 커다란 봉투를 대통령에게 전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하자 전대통령은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때문에 나는 몸을 더 숙일 수밖에 없었고 공식 사진사는 바로 이때 신임장 제정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음날 아침 한국 신문들은 미국 대사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진을 실었다.
사진을 찍은 뒤 나는 수행했던 몬조 부대사와 특별 고문, 정치참사, 공보관(오랜 친구인 버나드 레빈은 한국에 오래 머물렀었다), 국방부 소속 무관등을 소개했다. 한국측에서는 노 장관과 김경원 청와대비서실장, 외무부 의전관, 그리고 마이크 김이 참석했다. 마이크 김의 통역아래 전두환 대통령과 10분정도 조용히 대담을 나눌 기회도 있었다. 그리고 의장대 사열을 받은 뒤 나는 호위차량과 함께 관저로 돌아왔다.
나는 이후 다른 대사들이 신임장을 제정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사진들은 한결같이 허리를 굽히고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한발짝 물러나 대사들이 허리를 굽히게 만드는 것은 그의 스타일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신임 영국대사인 L J 미들턴이 도착했을 때 나는 그가 신임장을 제정하기에 앞서 그의 관저를 찾아가 「사진찍기」에 대해 귀띔해주었다. 그의 관저는 우리 관저 인근에 있는데다 영국과 미국은 특별한 관계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매카트니 사건을 끄집어낸 뒤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86년 10월 16일 신임장을 제정했다.
다음날 신문에는 그러나 그가 나보다 더 고개를 숙인 사진이 실렸다. 이반 네메스 헝가리 대사가 95년 9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신문 사진은 더욱 고개 숙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신임장을 받는 한국 대통령의 의전 관행은 똑같은 행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전두환 대통령 개인 탓으로 돌릴 사안이 아니었다.
신임장 제정을 전후해서도 나는 분주히 각종 활동에 참여했다. 8월 5일 나는 평택에 들렀고 그 이틀뒤에는 미군을 격려하기 위해 오산 공군기지를 찾았다. 8월 16일에는 존 위컴 장군(주한미사령관)과 비무장지대(DMZ)의 초소들을 순시한 뒤 장병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8월 27일에는 윈필드 스콧 장군과 진해 해군기지를 방문했고 다음달에는 F16 전투기들이 군산 공군기지에 처음으로 도착하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이?활동들은 내가 워싱턴을 출발하기전에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와 합의한 「결정」을 이행하기 위한 일부분에 불과했다. 우리는 대사관이 미군을 전폭지원하는데 합의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맹국 한국의 안보에 전념하는 「컨트리 팀」을 갖는데 성공했다.
나는 또 당시 주한외교 사절단장이었던 파란즈페 인도대사를 필두로 서울 주재 외교단을 방문했다. 그는 한국에 가장 오랫동안 체재한 외교관이었다. 물론 부임 초기인 당시에는 내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미협회 회장인 송인상씨는 나와의 옛정을 되새기면서 내게 연설을 부탁했다. 미국 상공회의소 지도자들도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정례모임을 갖기로 했다.
대사관내 직원들과 안면을 익히는 일도 중요했다. 나는 일류급 참모들을 거느린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내 알게됐다. 그리고 우리는 워싱턴에 머무르는 동안 아내와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화목한 「대사관 가족」이 됐다. 한국 외무부 인사들도 감동적이었다. 이는 대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기분좋은 조짐이었다.
나는 (재임기간동안) 매사가 항상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애국심으로 충만된 재능있는 한국 사람들을 존경하게 됐다. 그들은 한국 정부와 군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대사관내 직원들도 그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
북한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한미 양국의 역량은 내가 도착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시험대에 올랐다. 북한군이 우리의 SR71 정찰기를 지대공미사일(SAM2)로 격추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서울 도착 첫 2개월동안 나는 주한 미대사직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간파했다. 대사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지만 그래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행운을 누렸다고 생각한다.<정리=이종수 기자>
스틸웰 미 사령관
6·25참전 진정한 '한국의 친구'/대사미 사령관 가끔 충돌… 매주 조찬모임/한국사랑 남달라… 한미협회 창립/73년 사령관시절 체한 친교나눠/당시경험 대사직수행에 큰도움
95년 7월말 미국 워싱턴 DC에서 거행된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제막식은 내게는 참으로 감동적인 행사였다. 이날 제막식에는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 대통령등 한미 양국 정상이 모두 참석했다. 나는 김대통령이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대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나는 이번 행사가 한국인들에게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사실 서반구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전은 지구 반대편 저 멀리에서 벌어진 대수롭지 않은 사건에 불과했다. 한국전은 그러나 오늘날 미국 역사에서 한층 비중을 더해 가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 수도 워싱턴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잡은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데 가장 책임있고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람은 다름아닌 리처드 G 스틸웰 장군이었다고 확신한다. 스틸웰장군은 유감스럽게도 (91년 12월)작고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제막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숭고한 정신과 뜻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정열과 호소력, 인내심, 그리고 한국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신념을 되새겼다.
한국민들은 주한 미군사령관을 지낸 딕(리처드의 애칭) 스틸웰장군을 좋아했다. 비록 장군의 이름은 조만간 잊혀질지 모르지만, 그는 평생을 통해 한국민과 미국인들에게는 정말 영웅같은 존재였다. 장군은 양국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으며, 한번이라도 마주쳤던 이들에게 한결같이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군인과 정치인의 전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틸웰장군은 한국의 각계 인사들과 두루 친분을 맺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선엽 장군이다. 한국 역사상 최연소 4성 장군인 백장군은 한국에서도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스틸웰장군은 그러나 업계 지도자와 상인 등 그야말로 다양한 계층 인사들과도 친했다.
특히 한국 군부는 스틸웰장군이 웨스트 포인트(미 육사) 시절 보여준 남다른 기록(성적)과 2차대전 때 올린 전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25세때인 43년 미 육군 사상 최연소로 중령으로 진급되는 등 명성이 자자했다.
나는 아내 세니와 함께 한국에서 잠시 머무르기 시작했던 73년 가을 이전부터 스틸웰장군과 안면이 있었다. 우리의 인연은 그때로부터도 2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군은 53년부터 56년까지 미 육군전쟁대학에 있었는데 우리는 그때 처음 만난 이후 우정을 이어 왔다.
이를테면 장군이 육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70년에도 우리는 긴밀히 협조했다. 당시 내가 이끌던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국제문제연구소(IIS)는 「태평양의 미래」에 관해 처음으로 대규모 국제 학술회의를 후원했는데 장군은 이 회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했다. 그만큼 그는 한국과 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중에 국무총리 등 고위직에 올랐던 이한빈 박사도 이 회의의 주요 참석자였다.
스틸웰장군은 한국전에 현역으로 참전했고 한국민들은 그가 주한 미군사령관으로 되돌아오자 몹시 기뻐했다. 나는 안식년 휴가기간이었던 73년과 74년 미 국방부의 부탁을 받고 한국을 방문했다. 스틸웰장군은 아내와 나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우리는 용산 미군 영내에 있던 장군 관저의 길 건너편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장군은 우리에게 자동차와 운전기사 등 온갖 편의를 제공했다.
당시 몇달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나는 한미 관계의 다양한 관점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놀랄 만한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던 (한국) 사회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는 몇몇 문제점들도 짚어보았다.
나는 비무장지대(DMZ) 일대에서도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곳에서 나는 짐 홀링즈워스 한미연합사령관과 미 제2사단의 행크 에머슨 사단장 등 2명의 미군 장성과 의견을 교환했다. 이 두 장군들은 노스 캐롤瓚犬ち翎 ÷獵징°邰?『洹”六棨」瞼÷갚봉活顚淪鬼】쳄訓壙棨〕た棨±틈징』瑛結눼쨉ⅰ×「擔샥÷掠봉벙 린픗컥謙?Gunfighter)」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나는 당시 2사단에서 홍보 및 사회문제 담당부서에서 근무했던 콜린 파월 중령과도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잘 알다시피 파월중령은 91년 걸프전 당시 미 합참의장으로 활약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73년 하반기만 해도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는 진한 동지애가 있었다.
이는 물론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양국군이 공유한 경험을 토대로 형성됐다. 그러나 한국 군부 지도자들이 부하들을 대하는 태도에 우려를 표시하는 미국인들도 더러 있었다. 이들은 그같은 태도를 전혀 불필요한 야만적 행위로 생각하고 있었다. 스틸웰장군도 이 문제 때문에 적잖이 걱정했다. 그는 이에 관해 한국군 최고위 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했으며, 이 문제를 주제삼아 나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 시절 내가 관찰했던 일부 문제점들은 그로부터 8년뒤인 81년 주한 미대사로 부임한 이후 대사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미 대사관과 주한 미군과의 관계는 썩 매끄러운 상태가 아니었다. 스틸웰장군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데다 넘치는 지성미를 자랑하며 어떤 때는 마치 대사인 듯이 행동했다. 당시 미 대사관을 이끌던 필립 하비브 대사도 또한 일류급 지성인인데다 성격이 깐깐한 사람이었다.
하비브대사와 스틸웰장군은 몇몇 사안을 둘러싸고 심한 의견충돌을 빚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가 됐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비브대사가 골프에 흥미를 느끼고 골프광이 된 것은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스틸웰장군은 당시 용산에 있던 미8군 골프장에서 둘 사이의 현안을 풀어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스틸웰장군은 하비브 대사의 후임인 리처드 스나이더 대사와는 그리친하게 지내지 못햇다.
미 대사관과 주한 미군 사이에서 불거진 문제의 상당 부분은 종종 워싱턴의 국방부와 국무부간에 존재하는 깊은 불화를 그대로 반영했다. 물론 미국 대사가 해외에 주재하는 「컨트리 팀(Country Team)」의 수장이며, 해외주둔 미군사령관보다 서열이 높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군부 지도자들은 논쟁이 격렬해지게 되면 「줄무늬 바지차림의 친구들(Striped Pants Boys)」은 안보와 관련된 심각한 문제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국무부도 이에 대해 『군부는 지나치게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맞서는 등 양측간에 긴장이 흐를 때가 적지 않았다. 일부 동맹국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내에서 이같은 분열이 일어나고 헌법에 따라 권력을 분할하는 미국의 시스템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73년 당시 미 대사관과 주한 미군간의 문제점들을 생생히 목격했던 나는 81년 대사로 부임하면서 한가지 결심을 했다. 즉 양측이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나는 5년6개월 가까운 임기동안 매주 수요일 주한 미군사령관과 정례 조찬모임을 가졌다.
대사관 참모들은 대사관저와 사령관저에서 번갈아 열린 조찬 회동에서 우리가 심각한 이견이나 논쟁에 빠져들지 않도록 전날 밤 열심히 브리핑 서류를 작성했다. 사실 나는 부임에 앞서 워싱턴에 머무르는 동안 스틸웰장군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되돌아 보면 스틸웰장군이 주한 미군사령관을 지낸 73년부터 76년까지가 한미 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기였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는 박정희(박정희) 행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스타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구가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틸웰장군 같은 사람이 미군사령관이었다는 점은 매우 바람직했다.
왜냐하면 스틸웰장군은 박대통령과 그의 동료들보다 경험이나 계급면에서 「고참」이었기 때문이다. 군부 경험으로 볼 때 그들은 스틸웰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73년 당시에는 박정권을 비난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민들은 조국이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대에 차 있었으며, 성공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들은 생활 여건이 좋아지고 있으며, 조국이 과거에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특히 박대통령과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세계은행과 서구 지도자들의 비난과 만류에도 불맨構立“繹寬茨撻돈科“퓬냅빨“解㉶構棹」棘咀牟눼?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남부 지역을 연결하며 경제발전의 훌륭한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경부고속도로는 남서부 지역인 전라도를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두고두고 문제가 될 소지를 남겨두게 됐다.
당시는 분명 산업발전과 함께 생활 수준도 급속히 발전하는 시기였다. 박정권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 덕분에 시골 마을에도 전기와 수돗물이 공급됐으며 농촌 사람들의 보건 상태도 크게 개선됐다. 이처럼 전쟁으로 파괴되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농촌 마을이 말끔하게 단장됐다. 바야흐로 한국이 근대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73년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하나의 변화를 감지했다. 이 변화는 그러나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전 당시 나는 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서울에서 대만으로 간 적이 있다. 이때 나는 진흙 투성이의 메마른 한국 야산과는 달리 울창함을 뽐내는 대만의 대비되는 모습을 보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박대통령의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산림녹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데 있다. 식목일에 모든 사람이 한 그루씩 나무를 심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비결은 그의 강인한 군인정신 덕이 아닌가 싶다. 그는 산림녹화 사업을 주도했고 이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야산은 일제강점기때, 특히 2차대전 당시 크게 훼손됐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야산과 언덕에는 전나무를 비롯한 많은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 푸르름이 더해가고 있다.
또 스틸웰장군과 나는 당시 한국의 생활양식에 파고드는 미국인들의 영향과 결과등에 대해 장시간 토론했다. 스틸웰장군은 이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백선엽 장군과 유병현 장군등 자신의 오랜 친구들과 이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스틸웰장군은 내게 한국 군부가 자유의 수호자라기보다는 압제자로 비쳐지지 않도록 미국인들은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어찌됐든 한국인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이 필요했다. 스틸웰장군은 이 문제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으며, 한국전 당시 맺은 동지애를 이용해 박대통령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그 시절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스틸웰장군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다. 우선 나의 한국 경험과 관련해서도 그는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른 아침 커피를 즐기는 넉넉함, 부인 또는 친구들과 고즈넉한 저녁을 함께 보냈던 그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세니와 나는 스틸웰장군과 놀랄 만큼 우아한 그의 부인 앨리스 덕분에 한국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많을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스틸웰장군과 백선엽(일명 휘트니)장군이 손잡고 한미안보 문제를 연구하는 협회를 창설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 협회는 지금도 서울과 워싱턴에서 번갈아 가며 연례 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은 한국전의 교훈들이 잊혀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내가 대사직에서 물러나자 스틸웰장군은 이 협회의 이사로 일하도록 주선했다. 나는 지금도 이 협회 일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 중 하나는 미래 세대의 지도자들과 군의 핵심 참모들에게 우방국인 한국의 중요성을 전달해 주는 데 있다. 동북아시아의 미래 평화와 관련해 한국이 지닌 의미도 전해주고 있다. 이 협회와 한국전 참전 기념비건립위원회는 모두 한미 우호협력에 기여한 스틸웰장군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도 크나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정리=이종수 기자>
첫댓글 넘 길다. ㅠㅠ 읽기쉽게 1부 2부 3부로 나눠주시는게 조을듯 ㅡㅡ;;
넘 길다. ㅠㅠ 읽기쉽게 1부 2부 3부로 나눠주시는게 조을듯 ㅡㅡ;;
길다..프린트해서 읽어야지..-_-;;;
읽다가 질려버렸으요... ㅡㅡ ll
저두요.. ^^ 그리고 댓글로 뭔글들을 남겼나 했더니~~ 역시 ㅋㅋ
수정 다했어요..너무 길어서 선택해서 삭제하는것도 시간많이 걸렸네요. -.,-
한열사에 중독되는 것 같아 탈퇴하려고 들어 왔더가 결국 이글을 끝까지 읽고 말았군요... 글 올리신 분에게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데 너무 많은 내용에 머리가 꽉차서리... 하여튼 수고 하셨습니다. 올리신 분이나 모두 읽으신 분이나...
읽느라고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Daum로그인도 끊어 졌었군요... 크크..
너무 길다... -0-!! 이거 책인가요? 책이라면 이름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