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메뉴 ⸺스무아흐레 (외 1편)
김혜순
엄마의 쌀독엔 쌀이 없고
엄마의 지갑엔 돈이 없고
엄마의 부엌엔 불이 없고
오늘 엄마의 요리는 머리지짐
어제 엄마의 요리는 허벅지찜
내일 엄마의 요리는 손가락탕수
부엌에선 도마에 부딪치는 칼
부엌에선 국물이 우려지는 뼈
부엌에선 기름에 튀겨지는 허벅지
엄마의 쌀독엔 엄마
엄마의 지갑엔 엄마
엄마의 부엌엔 엄마
엄마의 칼밑엔 엄마
네 엄마는 네 아잇적 그 강기슭
네 엄마는 네 아잇적 그 오솔길
강기슭 지나 그 오솔길 너 혼자 멀어져 가노라면
우리 딸이 왔구나 힘없는 목소리
어서 들어오너라 방문 열리면
텅 빈 아궁이 싸늘한 냉기
네 엄마의 부엌엔
배고픈 너의 푹 꺼진 배
녹슨 프라이팬처럼
검은 벽에 매달려 있는데
너는 오늘 밤 그 프라이팬에
엄마의 두 손을 튀길 거네
마요⸺마흔아흐레
공중에 떠가는 따스한 입김 하나가 너를 그리워 마요
너보다 먼저 윤회하러 떠난 네 어릴 적 그 입술에 살랑 닿는 바람이 너를 그리워 마요
무한 창공 떠가는 아파서 죽은 그 겨울 그 여자의 얼음심장에
가느다란 바늘이 가득 꽂히면서 너를 그리워 마요
떨어진 이파리들이 언 강물 위에 지문을 가득 붙여가면서
1백 층 2백 층 건물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면서
안경은 안경끼리 신발은 신발끼리 입술은 입술끼리
눈썹은 눈썹끼리 발자국은 발자국끼리 커다란 서랍 속으로 쓸려가면서 너를 그리워 마요
80센티미터로 강물이 얼어붙고, 그 위로 탱크가 지나가고, 그 얼음 밑에서 물고기들이 너를 그리워 마요
담배 가게 앞에서 14년째 전봇대에 묶인 개가 너를 그리워 마요
커다란 바람이 미쳐서 죽은 여자 수천 명을 데리고 날아가는데
네 일생의 ‘너’들이 웃어젖히는 소리, 쏟아지는 머리칼
겨울 풍경 전체가 울며불며 회초리를 휘두르며 너를 그리워 마요
눈발이 수천 개 수만 개 수억만 개 쏟아지며 너를 그리워 마요
온 세상에 내려앉아서 울며불며 수런거리며 눈 속에 파묻힌 눈사람 같은 네 몸을 찾지 마요, 예쁘게 접은 편지를 펴듯 사랑한다 어쩐다 너를 그리워 마요
너는 네가 아니고 내가 바로 너라고 너를 그리워 마요
49일 동안이나 써지지 않는 펜을 들고 적으며 적으며 너를 그리워 마요
2019년 그리핀 시문학상 수상작
⸺시집 『죽음의 자서전』 (2016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