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 3,14-18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월, 성모성월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아름다운 만남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첫째 만남은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여인들입니다.
한 여인은 동정인 채 아기를 가진 처녀이고, 다른 한 여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나이가 많은 돌계집인데도 아기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두 여인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만남에서,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 기쁨과 찬송이 되어 터져 나오게 됩니다.
먼저,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엘리사벳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루카 1,44)
그리고 마리아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곧 작고 낮은 자 안에 벌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찬송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한 만남입니다.
동시에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카 1,45)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입니다.”
둘째 만남은 더욱 더 의미심장한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사실 요한이 6개월 형이지만, 아우 예수님께 먼저 태중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듯이, 요한도 태중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의 방문에 몸 둘 바를 몰라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벌어진 아기 예수님의 이 신비로운 방문은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세상을 방문하신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친교를 나눕니다.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비로운 소통과 친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은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 마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에서 보통 여인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교제하는 깊은 친교와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능력 있는 부모, 더 이익을 주는 동료,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후배가 아니라, ‘더 믿어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을 보는>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로마 12,13-15)
우리는 보통 스바니야서를 오늘 첫째 독서로 읽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가지고 저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왜냐면 바오로 사도의 서간이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라고 하는데,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이 바로 이런 뜻에서 방문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 전례가 이 서간을 택한 것이라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고, 엘리사벳의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서 방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생각도 해봅니다.
마리아 편에서 필요는 없었을까?
이 방문에 엘리사벳을 위해서만 방문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 자신을 위한 것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기 전에 마리아에게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복음을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임신 사실을 통보받을 때 마리아는 놀랍고 두려웠으며 의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루카 1,36)
그래서 가서 본 것일 겁니다.
가서 보면 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두려움도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입니다.
가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눈으로 확인해보면 더더욱 그리될 것입니다.
확인에 의한 확신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고, 확인하지 않고도 확신할 수 있는 마리아라고 우리가 믿지만,
마리아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면도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시메온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봤을 때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라고 하느님을 찬송하는데, 이것이 목동들에게도 보라고 하는 루카 복음사가의 일관된 생각입니다.
구원을 보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공통적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믿지 않는 이들은 서로에게서 구원을 보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을 보고 싶지도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며 이 두 분에게서 배울 점은,
우리의 수많은 만남이 인간적인 위안이나 기쁨을 주고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원을 보고파서 서로 만나고 그래서 마침내 서로에게서 구원을 보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구원을 보는 사람이고,
서로에게서 그리고 만남 안에서 구원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행복하기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 하는 오늘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어머니의 청을 통하여 이루어졌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어머니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여러분의 모든 바람을 어머니의 마음과 일치시켜 예수님의 구원 능력에 맡겨드려서 풍성한 열매를 반드시 얻기를 바랍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고 또 그것을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뱃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으로 가득 차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두 여인은 참으로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달프고, 미운 사람은 봐서 가슴이 아프답니다.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더 풍요로워집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28)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성 베르나르도)
여러분도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굽어보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끼며 사는 법>
메릴린 먼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한 여성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나는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이 많습니다.
나는 사랑에 굶주리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래에도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렇게도 공허하고 이렇게도 불행합니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마지막 말에 힌트가 있습니다.
“나는 폐장한 해수욕장처럼 외롭습니다.”
사실 축하를 가장 많이 받는 생일파티가 가장 외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있지만, 자신의 마음까지 들어온 친구는 하나도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그 아픔이 더 큽니다.
우리는 해수욕장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까지 누군가 들어와야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까요?
내가 먼저 방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아내까지 죽고 더는 살 의미가 없어 자살하려다 결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결국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영화 ‘오베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살이었는데 이웃이 귀찮게 해서 도와주면서 자살을 미룹니다.
특히 새로운 이웃인 파르바네와 그녀의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오베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서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오베가 여자 아이를 차에 태우고 가면서 미소를 지으며 하는 하나의 대사가 있습니다.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정말 늦은 나이에 나에게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가 몰고 있는 차는 바로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그 아이는 이웃들을 의미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 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그렇다고 무작정 방문하면 될까요?
성모님은 그렇게 방문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땅을 점령하고 유배지에서 외롭게 죽어가던 나폴레옹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정복했지만, 나의 왕국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사랑의 왕국은 나날이 번져가지 않는가?
그와 우리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영웅들과도 다르며 성자들과도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점령하는 게 아니고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참다운 방문은 나의 이익이 아닌 상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나를 방문하게 됩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보험 판매원으로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클레멘트 스톤이 자기 위주의 마인드에서 고객 위주의 마인드로 변화하게 된 구체적인 사건과 과정은 그의 자서전과 그가 남긴 글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보험을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판매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객에게 보험 상품의 장점만을 강조하고, 때로는 과장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고객이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고, 판매 실적이 저조했습니다.
어느 날 스톤은 한 고객에게 보험을 판매하려다 거절당했습니다.
고객은 “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팔고 있지 않아. 너는 단지 너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팔려고 할 뿐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스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자신의 접근 방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스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먼저 고객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진정한 성공의 열쇠임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 농부 고객은 가뭄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스톤은 이 고객에게 고액의 보험 상품을 강요하지 않고, 그의 상황에 맞는 소액 보험 상품을 추천했습니다.
농부는 스톤의 진심 어린 조언에 감동했고, 결국 장기 고객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가장 비천한 이들과 사귀기 이전에 이렇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엘리사벳도 오늘 성모님께 이렇게 소리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방문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랑이 내 안에 자리 잡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마음의 기쁨과 평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방문하지 않으면 방문 받지 못하고, 무조건 방문하면 그건 침범이 됩니다.
그래서 먼저 행복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방문하십시오.
그러면 사는 맛이 무엇인지 느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복음서 안에 등장하시는 성모님은 참으로 말을 아끼십니다.
신비로운 베일에 싸인 아들 예수님의 때로 이해하지 못할 언행 앞에서, 그저 성모님은 마음에 간직하십니다.
성모님은 침묵과 기도가 일상이셨던 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성모님께서는 억울한 일들을 꽤 많이 당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수태고지 사건 때,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는 요셉과 단란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삶을 물건너 갔습니다.
인간적 시선으로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이러쿵 저러쿵 억울하다며 하소연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딱 한 사람, 연세가 들고 지혜로운 엘리사벳을 찾아가 그분의 영적 동반을 받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을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삿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 42-45)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당신은 항상 부드러움과 신중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곁을 지키셨으니,
시련을 당할 때 저희를 버리지 마시고,
믿음이 흔들리는 어둠의 순간에 저희 손을 잡아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1)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일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한 일이기도 합니다(루카 1,30-33).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바로 그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사벳은 즈카르야와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다시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이 성모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처음 전해진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나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 너도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우리 함께 기뻐하자.” 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일이 바로 선교활동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메시아 강생 소식’을 들은 자신의 기쁨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 라고 표현하셨는데, 자신의 큰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을 ‘첫 선교사’ 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2)
성모님을 통해서 ‘기쁜 소식’을 듣게 된 엘리사벳은 자신의 기쁨을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엘리사벳 자신의 기쁨을 표현한 말이지만, 세례자 요한의 기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요한 3,29)
소식을 전하는 사람도 기뻐하고, 그 소식을 듣는 사람도 기뻐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1,29-30)
이 말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기쁜 소식’이 주는 기쁨은 누구에게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큰 기쁨’입니다(루카 2,10).
3)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인데도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만 기뻐하고, 안 믿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헤로데의 경우에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메시아 강생 소식’은 ‘기쁜 소식’이 되기는커녕 ‘듣기 싫은 소식’이 되었습니다(마태 2장).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할 때, 또 그 계획을 실행할 때, 예루살렘 주민들과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히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보다도, 헤로데처럼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돈을 모으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잘 모으는 방법에 관한 소식’만이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다음 말씀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태 10,14-15)
‘기쁜 소식’을 들어도 전혀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은 ‘심판을 경고하는 무서운 소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4)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신앙인들 자신들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정말로 기쁨 속에서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전해 주려면, 신앙인들이 먼저 그렇게 기뻐해야 하고, 그 기쁨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신앙인들의 삶에 기쁨이 없다면, 신앙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활동이 신앙인들의 본분이고 의무라 하더라도 의무감으로 할 일이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기쁨 없이 의무감만으로 전하는 소식은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중심(中心)의 영적 우정 - 마리아와 엘리사벳>
근래 보기드문 참 좋은 계절의 5월 성모성월이었습니다.
밭에 채소 모종 후 때에 맞게 비가 와서 물주는 일이 없었다 합니다.
우리가 순리대로 살면 하늘 은총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됩니다.
어제 피정중인 자매로부터 레지오 마리애 협조단원이 되어 달라는 부탁과 더불어 기도 주문을 받았습니다.
시작 기도 부분이 좋아 나눕니다.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참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주님 중심의 영적 우정에 이런 성령의 도움은 절대적입니다.
오늘 5월 31일, 성모성월 마지막날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입니다.
이제 5월 30일 요셉수도원 성전 대축일 다음에는 어김없이 이 축일이 자리잡고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수도원 방문하는 이를 대할 때 마다 “오늘은 형제님, 또는 자매님 수도원 방문 축일입니다.” 덕담을 드릴 때 기뻐하는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삶의 여정에 참 좋은 도반과의 영적 우정은 필수입니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머나먼 인생 여정 함께 가야 끝까지 갈 수 있겠습니다.
언제든 눈감으면 생각나는, 또 반가운 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눌 분, 또 답답한 일이 있거나 보고 싶을 때 언제나 찾아 나설 분이 있으신지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친구에 대한 정의도 새롭습니다.
“친구는 또 하나의 자아다.
사귀는 벗들의 무늬와 무심코 뱉는 말의 결이 그를 말해 준다.”
“친구와 사귀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과 만나는 일이다.
나 역시 다른 세상을 보여줘야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참 좋은 영적 우정의 모범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듣고 찾은 분이 바로 사촌 언니 엘리사벳이었습니다.
두 분의 영적 우정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복음 서두가 엘리사벳을 찾는 마리아의 절박한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제자리 삶에 충실한 정주의 여인들이었음을 봅니다.
역시 성령의 도움은 결정적입니다.
성령의 사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외칩니다.
이어지는 영적 도반 엘리사벳의 격려 말씀은 마리아의 내면의 어둠을 환히 밝혔을 것입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두 영적 친구의 만남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안에 있습니다.
두 분의 만남을 통해 이미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은 태중의 예수님께서 겸손히 세례자 요한을 찾아 나섰음을 암시합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임이 이미 태중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활짝 마음을 여니 이에 화답하여 마리아도 활짝 마음을 열어 감사찬미가를 쏟아냅니다.
이어지는 감격에 벅찬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저녁 성무일도 때마다 바치는 '마니피캇' 감사찬미가입니다.
교회의 가난한 영혼들이 성모님과 함께 부른 아나뵘의 노래, 마니피캇이요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감사찬미기도입니다.
새삼 가난한 영혼들에게 감사찬미기도 “노래의 힘”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로 시작되는 마니피캇은 개인의 노래이자 우리 모두의 노래임을, 감사찬미가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과의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도반들과의 깊어지는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영적우정에 전제되는 바 두 분 각자의 주님과의 깊은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도반들과의 우정입니다.
이래서 공동체 형제자매들이 함께 바치는 감사와 찬미의 시편 공동전례기도가 그리도 중요합니다.
일치의 중심이신 주님과는 물론 서로간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견고한 우정의 기초위에 서로간의 우정도 깊어집니다.
믿는 친구간은 물론 부부간의 우정도 이러합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우정의 원리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서 두분의 주님 안에서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태중의 예수님 태교에도 참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스바니야 예언서에 등장하는 딸 시온이, 딸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 그리고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뵘의 후예인 우리 모두입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신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시리라.”
그대로 오늘 가난한 영혼의 아나뵘인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새삼 삶의 중심인 주님과의 우정이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되고 형제들간의 우정의 기초임을 확인하고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공동체 형제들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함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얼마나 고맙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우정은 물론 형제자매들 서로간의 우정도 날로 깊이해 줍니다.
“오소서, 오 창조자 성령이요,
우리의 마음을 찾으소서.
당신이 창조하신 마음을 천상은총으로 채우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싱그럽고, 그만큼 따듯하고,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5월을 성모님의 달로 지내고 있습니다.
계절의 여왕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5월에 본당에서도 다채로운 행사가 있었습니다.
행사에 함께 하려 하니 몸이 2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4일에는 본당 성모의 밤 행사와 평화의 모후 프레시디움 2,000차 축하 행사가 있었습니다.
5일에는 청 영성체와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비자 연장 때문에 한국에 간 신부님을 대신해서 포트워스 미사가 있었습니다.
15일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면서 보현사를 방문했습니다.
18일에는 댈러스 교구 서품식과 본당 성령 기도회 찬양의 밤이 있었습니다.
23일부터 26일까지 중남부 남성 제17차 꾸르실료 교육이 있었고, 26일에는 본당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30일부터 6월 1일까지는 본당 학생들을 위한 여름 캠프가 있습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계절, 성모님의 달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생각해 보니 서울에 있을 때도 발품을 많이 팔았습니다.
하루에 3번 강의를 한 적도 있습니다.
오전에는 길음동 성가 소비녀회 피정의 집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오후에는 해방촌 성당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저녁에는 안양 나자로 마을에서 강의하였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알콩달콩 정을 나누며 사는 것도 사제의 기쁨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교우들과 친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좋은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만난 걸 기억하는 날입니다.
분단된 한반도를 생각하면서 저는 2018년에 있었던 만남을 기억합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고위급 정치인들이 방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북한의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시간은 10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쉬운 만남이 65년이나 걸렸습니다.
같은 해 9월에 남한의 대통령은 북한의 평양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연설하였습니다.
이런 화해와 일치의 분위기는 북한의 위원장과 미국 대통령의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북한과 미국의 지도자는 3번 만났습니다.
판문점, 싱가포르, 하노이에서 만났습니다.
내심 많은 사람은 만남의 결실을 기대했습니다.
북한에 미국의 대사관이 설치되고, 북한은 핵무장을 포기하고,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풀릴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이렇게 순풍이 불어오면 한반도의 허리를 이어주는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비무장 지대는 세계적인 생태공원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상이몽’이었는지 만남의 결과는 선언과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집니다.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듯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꿈은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동정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를 축복해 주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였던 것처럼 남한과 북한, 북한과 미국이 ‘동상동몽’의 꿈을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에 기도로서 화답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즐겨 부르셨다는 ‘만남’이란 노래를 함께 나누면서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습니다.
그래서 연극에서도 제일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역이 좋았습니다.
구연동화 말하기 대회에서도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때, 한 번은 선생님께서 책의 어느 부분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제일 자신 있었던 책 읽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벌벌 떨면서 간신히 읽었던 그때의 기억이 오랫동안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두려움이 제게서 언어를 빼앗았습니다.
제게 이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가 믿지 못합니다.
지금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언제 사라졌을까요?
다시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사람들로 인해 치유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받았다면서 사람들 곁을 떠나는 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떠나 혼자 있다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늘 놓여있습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얻는 두려움에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나 혼자 극복하기란 너무 힘듭니다.
의지를 세울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을 통해서이고, 지금과 다른 변화도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그 안에 계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성모님께서는 큰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부담이지요. 하느님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편하고 쉬운 삶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 성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 또한 뱃속의 아기가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았고 이 아기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는 만나십니다.
분명히 배 속의 아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배 속의 아기가 서로 만나면서 그들은 큰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십니다.
큰 어려움이 함께 하면서 해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