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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러나 피터 틸은 비즈니스에서는 정반대라고 말한다. “행복한 기업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다들 독특한 문제를 해결해 독점을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실패한 기업은 한결같습니다. 비슷비슷해서 결국 경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독점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좀 더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좋은 독점은 사회에 풍족함을 제공합니다. 테슬라는 실제로 사람들이 운전해보고 싶어하는 첫 전기차를 개발했어요.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혁신을 통해 기존에는 없던 새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독점은 항상 부족함을 유발합니다. 사회에 돌아가는 혜택의 공급을 제한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4층 이상 건물을 지을 때 ‘지역개발규제법’의 영향을 받습니다. 재개발을 하거나 새집을 지으려면 법의 허락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족함이 양산됐고, 결국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혜택은 기존 빌딩 주인들이 독식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런 형태의 독점에 항상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작다 싶을 만큼 작게 시작하라
―독점 기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 작게 시작해서 독점하세요. 너무 작다 싶을 만큼 작게 시작해야 합니다. 장악하고 지배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신생 기업에 완벽한 표적 시장은 경쟁자가 없거나 아주 적고, 특정한 사람이 모여 있는 시장입니다. 처음부터 1억명 시장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완전히 빨간불입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할 테고, 이는 곧 이윤이 ‘0’이 된다는 말이니까요.
둘째, 그렇게 해서 일단 시장을 장악하고 난 뒤 몸집을 키우세요. 제프 베조스가 아마존을 처음 세웠을 때는 책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슷한 시장부터 공략했죠. 음악 CD, 비디오, 소프트웨어를 거쳐 지금은 만물상이 됐습니다.
셋째는 파괴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생 기업은 파괴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습니다.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라는 유행어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괴에 집착하면 장애물이 늘어납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설령 파괴를 하더라도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마세요. 신생 기업은 ‘창조’라는 활동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가능하면 경쟁은 피할수록 좋습니다. 경쟁은 회사를 약하게 만듭니다.”
☞파괴적 혁신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인터뷰 <2013년 2월 2일자>
―경쟁이 회사를 약하게 만든다고요?
“경쟁엔 부작용도 크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을 흐려놓습니다. 왜 싸우는지 목적을 잊어버리고 경쟁을 위한 경쟁에 집착하고, 근시안이 되게 만듭니다. 실제로 기업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는 짓을 분석해 보면 정말 회사와 제품을 위한 의미 있는 행동은 없습니다.”
페이팔 성공 이유는 경쟁 없는 기업 문화
1998년 틸이 창업한 페이팔은 결제에 사용할 신용카드로 본인 인증을 하고, 돈을 이메일 계정으로 송금하는 온라인 결제 서비스다. 결제할 때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돼 절차가 간편하다. 최근 금융에 IT를 결합한 ‘핀테크’가 유행인데, 그 원조 격인 셈이다.
―페이팔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페이팔 창업 당시 믿었던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새로운 기술로 과거 기술을 대체하는 것은 언제나 좋다는 겁니다. 문제는 새 시스템이 아무리 편리하다고 해도 아무도 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비자카드, 마스터카드도 똑같은 문제를 겪었습니다. 카드에 가입해봤자 상점에서 쓸 수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반면 상점 입장에선 고객이 카드를 안 쓰면 카드사에 가입한 효과가 없습니다. 마치 닭과 달걀 같은 문제입니다.
저는 결제 플랫폼으로 네트워크 효과를 만들려면 적어도 사용자가 100만명 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페이팔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솔루션은 ‘이메일’이었습니다. 1999년 당시 이미 300만명 이상이 이메일 계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메일 계좌를 이용해 돈을 주고받는다면 300만명 고객을 끌어모을 수 있을 터였습니다. 간단한 아이디어였지만 그것이 성공 비결이었습니다.”
☞네트워크 효과란
일단은 판을 키워라… 선순환이 시작된다 <2014년 8월 30일자>
―‘마피아’란 말이 있을 정도로 페이팔 출신은 페이팔을 떠나서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업 문화를 만들었습니까?
“저는 페이팔 직원을 모을 때 이력서를 검토해 가장 재능 있는 사람들을 뽑은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직원들이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가 되길 바랐거든요.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만 골라 뽑았습니다.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함께 일하는 것 자체를 즐겨야 했습니다. 저희는 협력이 잘 됐습니다. 우리는 모두 SF 장르의 영화나 소설을 사랑했다는 공통점도 있었습니다.(웃음)
제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회사의 모든 사람이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책임지게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사람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역할을 구분해 주다 보니 동료 간 충돌이 줄어들었습니다. 회사 내에서 다툼이 생기는 건 대부분 같은 책임을 두고 동료들끼리 경쟁할 때입니다. 경쟁을 제거하면 모든 사람이 비즈니스 관계를 넘어 인간적 관계를 맺기 쉬워집니다.”
―페이팔은 핀테크의 원조입니다. 앞으로 핀테크 사업을 독점할 기업은 어디가 될까요?
“아직은 무엇이 성공할 것이라고 단정하기 너무 이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비즈니스 모델이 얼마나 좋은가’와 ‘실제로 어떤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제가 영국의 핀테크 기업인 ‘트랜스퍼와이스(TransferWise)’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회사가 정말 작은 시장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해외 송금(transfer)’에만 집중하고 있거든요. 종종 핀테크 기업 중에는 목표를 ‘온라인 뱅킹의 효율성을 키우겠다’고 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 뱅킹은 수십조달러짜리 시장입니다. 그런 회사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물고기 한 마리가 되겠다고 하는 격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술이 어디에 있는지 봐야 합니다. 예컨대 빅데이터 분석 기술을 가졌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마케팅 구호로만 떠드는 회사는 독점 기업이 될 수 없어요.”
☞트랜스퍼와이스는
금융업 뿌리 흔드는 '핀테크 벤처' <2014년 11월 15일자>
로스쿨 나왔지만 대법관 안 돼서 다행
틸씨는 스탠퍼드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대법관을 꿈꿨지만 대법관 보좌관 시험에 응시했다 떨어지고 기업가의 길을 걸었다.
―당신이 대법관 보좌관이 안 돼서 우리로서도 참 다행입니다.
“(웃음)고맙습니다. 사실 로스쿨 재학생에게 최고로 선망받는 직업은 대법관이 되는 겁니다. 그러려면 단계별로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하죠. 문제는 최종적으로 대법관이 될 기회는 오직 1~2명에게만 주어진다는 겁니다. 저는 케네디 대법관 보좌관직에 지원해 면접을 봤지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은 (잠시 쉬며) 정말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음절 하나하나를 끊어 말할 만큼 강조했다.) 세상이 끝난 줄 알았어요. 제게는 대법관만이 유일한 꿈이었거든요.
10년이 지나고 우연히 로스쿨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 한 명과 마주쳤습니다. 그는 10년 만에 만난 제게 ‘와, 정말 반갑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피터, 그때 시험에 탈락해서 정말 다행스럽지 않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무언가를 잃고 나면 엄청나게 좌절합니다. 그러나 1년쯤 지나고 되돌아봤을 땐 ‘에이, 별거 아니었네’ 싶을 때가 더 많아요. 제 인생에서 대법관이 딱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때 탈락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은 하면 할수록 더 힘들어집니다. 새로운 경쟁은 언제나 눈앞에 나타나고 그 경쟁에서 승리할 확률은 점점 줄어들죠. 저는 굳이 ‘승자의 저주’를 말씀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승자의 축복’도 없다는 건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