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으로 농경의례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수확제, 추수감사제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대해 제사하는데, 이때 형벌과 옥사를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고 했다. <후한서>에도 같은 내용이 전해지는데 그 시기를 臘月이라고 했다. 이는 12월의 다른 명칭으로 은정월과 같다. 일찍 농경사회가 시작된 우리 고대사회의 대부분은 추수가 끝날 무렵 대대적인 농경의례를 행했는데,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10월제가 이에 속한다. 영고를 부여어의 한자표기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맞이굿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고, 북이 활과 화살처럼 하늘과 통하는 신비력을 지녔다고 여긴 예맥계통의 사회 풍속에서 나온 종교행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지에는 부여가 자리잡은 지역이 동이지역 중에서도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며, 오곡이 자리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옛 부여 풍속으로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제대로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국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이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여는 기본적으로 농경을 주된 산업으로 삼고 있었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영고라는 행사가 행해진 때가 유독 겨울이었던 점은 부여사회에 유목이나 수렵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여의 경우 중앙의 최고 관직명이 가축의 이름을 딴 것으고, 臘이 제사의 명칭으로 짐승을 사냥하여 선조를 제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고
부여시대의 제천의식. 공동체의 집단적인 농경의례의 하나로서 풍성한 수확제·추수감사제였다.
≪삼국지 三國志≫ 위서 동이전 부여조의 기록을 보면,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하여 영고라 한다. 이 때에는 형벌과 옥사를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 斷刑獄解囚徒).”고 하였다.
≪후한서 後漢書≫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다만, 첫머리에, “12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크게 모인다.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하여 영고라 한다(以臘月祭天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라 하여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은력의 정월은 하력(夏曆)이나 오늘날의 음력으로 치면 12월이므로 같은 내용이다.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농경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그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집단적인 행동이 가능해져 그것은 종교적 제의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추수감사제였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 부여의 영고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행해졌으나, 영고만은 은력 정월, 곧 12월에 행해졌다.
이것은 아마도 원시시대 수렵사회의 전통을 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부여에서는 오곡이 여물지 않을 때에는 국왕이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거나 죽음을 당해야 하는 시대였던 만큼, 추수감사제 때에는 국왕의 친제(親祭)가 거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는 노래와 춤이 행해졌다. 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고기잡이·사냥·농경 등의 중요한 생산활동을 모두 씨족원의 공동노동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풍작을 기원하는 종교적 의식이면서도 씨족사회 이래의 전통을 이은 축제였다. 그리고 전체적인 행사이므로 ‘국중대회’라 하였다.
또한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는 것은 오늘날 국경일에 죄수들을 특사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동제(洞祭)와 그 시기나 내용·성격 등에서 유사점이 많이 보존되고 있다.
첫댓글 위 설명대로 영고에 대해서는 수렵적 전통을 계승한(혹은 수렵적 성격을 띤) 풍어제라고 생각셔도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