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는 떡을 자주 한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떡을 하게 된다. 신년 첫 주일, 부활절, 어버이주일,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은 기본이고 그러한 절기가 없는 달에는 그냥 한다. 떡을 하는 것은 나의 담당이다. 내가 떡을 자주 하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목사님과 사모님이 떡을 엄청 좋아하는 줄로 생각한다. 물론 우리 부부는 떡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서 간식을 줄이고 있으므로 떡을 좋아하지만 많이 먹지는 못한다.
내가 떡을 자주 하는 이유는 성도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다. 나이가 지긋한 한국 사람이라면 대개 떡을 좋아한다. 가끔 떡 생각이 난다고 한다. 옛날에 비해 가정마다 먹을 것이 풍부한 요즘에는 집에서 떡을 해 먹는 일이 드물다. 명절을 제외하고는 이제 먹고 싶다고 집에서 떡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떡 생각이 날 때쯤이면 교회에서 떡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누구나 떡을 보면 즐거워한다. 밥보다 떡을 먼저 집어 먹는다.
얼마 전에 이모 댁을 방문했다. 무슨 얘기 끝에 이모가 “난 뒤꼍 장독 위에 늘 떡시루를 얹어놓고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모는 결혼 전에 풍족한 집에서 살았다. 그 때 외가는 땅이 많았다. 외가에는 딸만 둘이었다. 이모는 누군가의 소개로 만난 김제 총각과 연애를 하여 결혼했다. 시집에 가보니 남편은 큰 아들인데 동생들이 넷이나 되었고 살림은 거덜이 나서 집까지 경매로 남에게 넘어갈 형편이었다.
시아버지가 노름꾼이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두 딸에게 상당히 많은 땅을 주기로 했는데 이모는 시집갈 때 그 땅을 팔아서 가지고 갔으나 그걸로 겨우 집을 찾았고 나머지는 빚잔치를 했다. 그 후로부터 이모부 내외는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했다. 어느 날 젊은 새댁이 이웃집에 일을 하러 갔는데 그 집 뒤꼍 장독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시루가 있었단다. 떡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렸더란다. 김제는 평야지대라 집집마다 쌀이 넘쳐나 떡을 잘 해먹던 시절이었다. 이모네는 식구는 많지, 농사지을 땅은 다 없어졌지, 하루 세 끼 밥도 못 먹고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모부 내외는 땅 욕심이 많다. 계속하여 땅을 늘리더니 지금은 150마지기 정도의 땅을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우리는 가끔 이모 댁을 방문하여 전도를 한다. 이모는 오래 전에 교회를 다녔는데 지금은 교회를 안 다닌다. 교회를 다니게 된 내력과 그만 다니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모네 동네에는 주변이 모두 논이고 둑 너머에 큰 강이 하나 있다. 아이들은 방과 후에 그 강에서 수영을 하곤 했다. 이모의 큰 딸이 중학생 때 어느 여름날 학교 갔다 와서 혼자 거기서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일로 인하여 이모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 때는 놀러 가면 교회 이야기를 주로 했다. 권찰이 되었네, 곧 집사가 될 것 같네, 하는 이야기와 헌금한 이야기, 봉사한 이야기 등을 재미나게 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때는 겨울이었는데 눈이 엄청 많이 왔던 해였다. 이모네 집을 가려면 둑방길로 2km쯤 가야 한다. 그 당시에는 길이 그다지 넓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넓어졌다. 목사님이 길이 미끄러워 봉고차로 그곳을 갈 수 없다고 장례예배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른 형제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와서 장례예식을 치러주었다. 그 이후 이모는 교회를 떠났다.
이모의 그러한 전적을 들으면서 우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성도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늘 경계하며 조심한다고는 하지만 어느 순간 누군가를 실족케 한 일이 없었을까. 목회자란 특히 매사에 말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단순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라도 성도를 실족케 하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실망하실 것인가.
이모부는 우리가 전도를 하면 귓등으로 넘기고는 자기의 육신의 양식이 풍족한 것을 자랑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의 얘기는 서로 겉돌곤 한다. 우리는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하는데 이모부는 육신의 양식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참으로 안타깝다.
요한복음 6장에서도 그러한 일이 나온다. 예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으로만 세어서 오천 명쯤 되는 자들을 배불리 먹이신 후에 사람들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6:14)”고 감탄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늘에서 내려주신 생명의 떡인 것을 알지 못했다. 이튿날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간 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보리떡 5개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기적을 베푸신 일을 기억하며 사람들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하나님이 내리신 만나를 먹으며 40년 동안 살았던 일과 결부시켰다. 아마도 자기들도 조상들처럼 날마다 예수님이 먹여주시는 떡을 실컷 먹으며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제 먹었던 보리떡도 아니요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도 아니요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주신 참 떡 곧 생명의 떡이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힐난하였고 제자들도 어려워 들을 수 없다고 수군거렸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거저 주시는 생명의 떡이심을 알고 사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육과 영의 삶이다. 물론 둘 다 중요하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삶의 목적을 육에 두지 않고 영에 두는 자들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육신의 일에 삶의 목적을 두고 산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육신의 일도 열심히 하며 살지만 삶의 목적은 영의 일에 둔다. 영의 일이란 예수님을 믿는 일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려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를 알아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듣는 것, 성경을 친히 읽는 것, 신앙서적을 읽는 것 등이다.
시골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이 연세가 많고, 설령 연세가 적다고 하여도 쉼 없이 일을 하며 살고 있으므로 성경을 친히 읽을 수 있는 성도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로는 시골교회의 성도들은 특히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잘 듣는 것이 신앙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배시간에 설교말씀을 잘 듣는 성도들과 조는 성도들은 여러 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난다.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말씀을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예배를 띄엄띄엄 드리는 자와 자주 드리는 자 역시 큰 차이가 난다. 새 신자가 공적인 예배를 안 빠지고 잘 참석하면 신앙이 쑥쑥 성장하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그러나 신앙의 연조가 많은 성도라도 공적인 예배를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빠지는 자들은 신앙이 후퇴하는 일이 많다. 간혹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열심도 있을 수는 있지만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힘을 드리면 그 모든 것들이 허투루 돌아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