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일단 저는 대전에 살아서 하루 일찍 가거나 하는 번거로움은 없었어요.
대신에 본인확인 하려면 신분증이 필요한데 제가 빠른 생이라서 수능 끝나고 만들려고 안 만들었었거든요.
동국대에선 학생증도 받아서 서울예대도 되겠거니 했는데 실기 전날 유의사항 다시 확인하는데 왠지 안될 것 같았어요.
근데 이미 한밤중이라 입학처도 전화를 안 받고 청소년증인가 뭔가 있으면 된다고 하는데
청소년증은 발급신청하고 2주정도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네이버에서 그래서 저는 원서비만 날리는 건가 하고 걱정했어요
근데 수험표 확인하면서 보니까 생활기록부 사본도 괜찮다고 써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생활기록부 사본을 가져갔습니다!
한 11시쯤에 출발했던 것 같아요.
문창과는 단국대랑 겹친다고 5시로 늦춰줬는데 극작과는 그런 게 없어서 2시부터 실기였거든요.
길이 안 막히기도 했고 저희 아빠가 원래 좀 밟으시는 타입이라 12시 반 되니까 도착하더라고요...ㄷㄷ
가니까 주차안내 하시는 분들 계셔서 운동장에 차 세워놓고 차에서 가지고 간 습작들 좀 읽었어요.
옆에 차 보니까 다들 도시락 드시더라구요 ㅋㅋ 저는 동국대 때는 정말 긴장을 너무 안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웃으면서 있다가 왔거든요 근데 동국대 떨어지고 나서인지 이제 정말 극작과 가고싶은 학교라서 그런지
서울예대는 가만히 있어도 막 울렁거리고 긴장을 엄청 했었어요 ㅠㅠ
1시쯤 되니까 차에 타 있던 사람들이 슬슬 밖으로 나가는 것도 같고, 사람들도 슬슬 모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차에서 내렸는데 안으로 들어가려니까 30분 전부터 입실 가능하다고 막아서 그냥 경안고 화단 구경했어요.
기숙사 건물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안에서 애들이 휴대폰으로 아이돌 노래 틀어놓은 소리가 들리더라고요ㅋㅋ
그래서 긴장이 조금 풀렸던 것 같아요. 엄마 아빠랑 걸으면서 학교 구경하다가 벤치 쪽 보니까 다들 막 열심히 뭘 읽던데
저는 오히려 눈에 안 들어와서 그냥 손에 들고만 있었어요ㅋㅋ
30분 전이 되니까 이제 입실 가능한지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저도 엄마랑 아빠한테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1학년 2반이라 2층 왼쪽 끝이였어요.
가면 문 앞에 수험번호대로 자리배치 해 놓은 표가 있는데 그거 보고 앉았더니 칠판 바로 앞자리더라고요...
안 좋은 자리 배치 받은 것 같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면 뒷자리 앉아봤자 오히려 다른 사람들 보여서 그거 신경쓰느라
집중 못할 바에야 맨 앞자리라 아무도 안 보이는 편이 낫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좀 안심했습니다. ㅎㅎ
앉아서 그동안 괜찮다 싶어서 챙겨뒀던 습작들 죽 읽어나가는데 밖에서 여자애 둘이 엄청 떠들더라고요.
교실 안은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는데 걔들은 입실도 안 하는지 교실 문도 열려있는데 그 앞에서 정말 엄청 떠들었어요.
시시콜콜한 연예인 얘기부터 시작해서 들어오기 전에 나눠준 입시학원 전단지 보더니
자긴 여기 붙을 거니까 이런 건 필요 없다는 둥 정말 쓸데없는 얘기를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었어요.
몇 번 눈치를 줬는데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랑곳않고 계속...
결국 2시 10분까지 입실인데 9분에 가더라고요. 보니까 저희 고사실도 아니였어요-.- 남의 고사실 앞에서 그렇게 떠든...
암튼 그 두 명 때문에 짜증은 있는 대로 난 상태였고 동국대 때는 훨씬 일찍 감독관 두 분이 들어오셔서
유의사항 말씀해 주시고 질문 있으면 하라고 하고 그러셨는데 서울예대는 실기 경험이 너 많아서인지 아니면
저희 감독관님만 그랬던 건지 20분 다 되어서 들어오셨어요. 오셔서도 쭉 훑어 보시더니 별 말씀 없으셨습니다. ㅋㅋ
가지고 있는 전자기기 전원 끄고 가방에 넣어서 가방은 고사실 밖으로 빼 놓으라고 하셨어요. 다들 그렇게 했고
동국대 때는 컴퓨터용 싸인펜이나 볼펜 안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대 때는 아무도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연습지를 먼저 나눠주셨어요. 그냥 수험번호 쓰는 칸이랑 이름 쓰는 칸 있고 백지였어요.
동국대는 문창과라 그런지 2천자 원고지 나눠줬는데 예대는 극작과라 그런지 연습지도 백지 주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정답지를 나눠주셨습니다. 정답지도 특별히 다른 건 없었어요.
수험번호, 이름 쓰는 네모 칸이 있고 제목 쓰는 칸이 있었어요. 제목도 써야 한다는 건 몰랐는데 있더라고요.
제 기억이 맞다면 제목 옆에 시제랑 관련 없는 내용이면 불합격 처리 한다고 써 있던가,
감점이라고 했나 암튼 그렇게 적혀있었어요. 그래서 그거 보고 나서 제목도 신중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ㅜㅜ
두근두근 거리는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눈 감고 있으라고 하시더니 시제가 적힌 종이를 나눠주셨습니다.
동국대는 칠판에 <이방인> 이라고 단어를 써줬는데 예대는 극작과라 상황을 주는 시제라서 그런지 종이에 따로 줬어요.
주제는 다들 아시다시피 한 인물이 여행지에서 ( )를 목격하고, 지구 멸망의 징후였고
그래서 이 인물은 마지막 밤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시제였어요.
처음엔 정말 멘붕했어요. 연습지에 제가 가져갔던 습작들 제목을 쭉 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시제에 끼워맞출 수 있는
스토리가 나오는 게 없더라고요. 입실 하기 전에 아빠한테 백지로 내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했는데
정말 백지로 내게 생겨서 머리속이 하얘졌습니다. 그래도 일단 펜을 잡았으니 뭐라도 써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평소에 꿈꾸던 멸망을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몇 번 상상했던 적은 있었거든요.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멸망을 맞게 된다는 건 생각해본 적 없지만 종말이 오면 나는 마지막 날 뭘 할까? 하는 생각이요.
그래서 연습지에 이것저것 끄적거렸어요. 괄호 안을 뭐라고 채울까 고민하다가
제가 좋아하는 웹툰 중에 '조의 영역'이라는 웹툰이 있거든요. 거기 보면 사람보다 훨씬 커진 물고기가 나와요.
그래서 저는 멸망의 징후로 그걸 썼어요. 사람보다 커지고, 사람의 형태와 닮은 물고기.
그래서 더 이상 물을 지배하는 게 인간이 아닌 상황이예요. 물고기를 이길 수 없는,
바다에서 어업도 할 수 없고, 사람들은 식수배급을 받아야 하는.
그런 상황이고 한 인물은 따로 이름을 설정하지 않았어요. 그냥 '나'라고 설정했는데 주인공인 나는
엔지니어였다가 해고당한 인물이예요.
저는 첫 마디를 좀 강하게 주고 싶어서 이렇게 썼어요.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친놈이라고 했다."
나는 해고당한 이후 아들과 시간을 못 보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아들과 둘만의 낚시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다 동해바다에서 사람보다 커다란 물고기를 발견하죠. 잘못 본 거라 치기엔 물고기 얼굴이 너무 사람 같았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뉴스를 통해 그 물고기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본 건 사람보다 컸지만
뉴스에 나오기 시작할 때는 이미 초등학교 교실 두 칸 만한 크기로 커진 놈들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안 믿던 사람들이 전문가가 인터뷰를 하고, 목격담도 올라오고 그 물고기에 먹힌 사람들도 있고
사진도 올라오고 동영상도 올라오다보니 점차 종말이라는 혼돈을 이루는 덩어리가 되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저는 여기서 죽은 도시라는 표현을 썼어요. 슈퍼마켓은 상비약과 식료품, 자외선 차단제 등이 모두 털려 폐허가 된 지
오래고 심지어 뉴스 앵커조차 뉴스를 진행하다말고 이걸 하고 있을 시간에 가족들 얼굴을 5분이라도 더 보겠다며
뛰쳐나갑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내가 미친놈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얘기합니다.
나는 정부에서조차 어업을 금지하고 식수를 배급하는 상황에서 잠수함 한 대를 헐값에 삽니다.
이 잠수함은 나의 어렸을 적 꿈이었고, 내 아들의 스케치북에서도 꿈으로 그려진 그런 잠수함이예요.
사람들은 미쳤다고, 노아의 방주도 아니고 저게 뭐하는 짓이냐며 혀를 찹니다.
커다란 해일이 육지를 덮치는 것으로 종말이 시작된다고 했으니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종말이 시작되는 바다로 나아가려고 하니까요.
하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요. 이왕 죽을 거 꿈이라도 이루고 죽자는 마음도 있고, 죽는 순간까지
경쟁하는 것은 싫다는 심리도 있고, 먼 바다에서는 오히려 쓰나미가 육지를 덮쳐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종말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것에 거는 약간의 기대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종말이 뭔지 아직 감조차 잡지 못하는 아들과 함께 잠수함에 필요한 물건들을 채워 넣어요.
시간이 흘러 마지막 날 밤이 되었고 저는 여기서 이 두 인물들의 마지막 날 밤을 "삼겹살 파티"로 장식했습니다.
육지에서의 마지막 날 밤,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날 밤이 될지도 모르는 이 날에 부자는 삼겹살 파티를 합니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아들은 빨리 달라고 보채요. 모닥불 앞에서 같이 앉은 부자는 도란도란 얘기를 합니다.
아들은 아빠에게 아빠랑 같이 있을 수 있으니 매일이 오늘같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아빠인 나는 갑자기 울컥해집니다.
그래서 아들을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아빠는 널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줘요. 그리고 그렇게 끌어안은
아들의 등 너머의 수평선에서 딱 보기에도 규모가 장난이 아닌 해일이 몰려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아들과 함께 잠수함에 타요. 기계소리가 들리고
잠수함은 드디어 물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부자는 해일이 오는 방향을 향해 전진해요. 더 깊은 바다를 향해서.
마지막은 "이유야 어찌됐든, 아들과 떠나는 여행이였다." 라는 문장으로 끝냈어요.
사실 생각했던 결말은 해일이 육지를 덮치고 모든 것이 끝난 뒤 두 부자가 탄 잠수함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잔잔해진 바다 한복판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걸로 끝내려고 했는데 그냥 열린결말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안 썼어요.
1시간 반동안 쓰는데 10분 전부터 퇴실 가능이더라고요. 문장도 다듬고 싶고 구성도 디테일을 살리고 싶었는데
저렇게 큰 틀만 쓰는데도 한 시간이 걸려서 10분동안 뭘 할 수 있나 싶은 마음에 그냥 나왔습니다.
나오는데 마음 한 구석이 쓰리더라고요. 왠지 한 달 뒤에 경안고를 다시 와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 ㅠㅠ
썼을 때는 정신없이 쓰느라 몰랐는데 차 타고 오면서 생각해보니 너무 휘갈겨 쓴 것 같았어요.
종말의 징후인 물고기를 뒤에서도 썼어야 했는데 앞에서 잠깐 나오고 말았다는 점,
마지막 날 두 인물이 한 삼겹살 파티가 파격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
시제 종이에 이 시제는 상상력, 구성력, 표현력을 보기 위한 시제라고 써 있었는데
세 가지 요건을 단 한가지도 제대로 살린 게 없었다는 점... 너무 뻔한 결과라서 한숨만 나오더라고요.
제 친구들은 괜찮은 얘기 같은데? 라고 했지만 제가 보기엔 너무 엉성하고 빈틈 많은 얘기라...
시간이 한 시간만 더 있었어도 문장도 다듬고 구성도 수정해서 썼을 텐데 그렇게 못한 게 많이 아쉬움이 남아요.
어쨌든 월요일이 발표네요! 저는 수시를 두 개밖에 안 썼는데 동국대는 떨어졌으니
서울예대 하나밖에 안 남았었는데 서울예대 결과도 뻔하니 이제 마음 털고 정시를 준비해야겠습니다.
동대는 불합격 세 글자 보고도 허망한 기분 외엔 별다른 느낌 없었는데 예대마저 그러면 이번엔 좀 울지도 모르겠어요..
ㅜㅜ 어쨌든, 모두 화이팅입니다!
+) 혹시 여기 이 후기를 읽고 계신 서울예대 관계자가 계시다면 다음 실기부터는 몸이 불편한 수험생 등을 배려해서 1층에라도 따로 고사실을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 저희 고사실에 다리가 약간 불편해 보이는 분이 계셨는데 가방을 내놓거나 이런 고사실인 2층까지 올라오는 게 조금 버거워 보였어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나나 짱짱걸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10.18 21:37
이야... 정말 친절하시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말씀해주셔서 저도 동행한 느낌입니다. ㅋㅋ
시제 받고 난 뒤의 느낌도 공감하구요... 글도 재밌네요. 상상력이..ㅎ.ㅎ
고사장에 들어가면서 부모님께 인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슴다..크크ㅡ 고생하셨어요.
교수님들도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ㅠㅠ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학생을 챙기는 마음씀까지. ㅎㅎ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덕분에 합격했습니다!! 어휴 ㅠㅠㅠㅠ 너무 어설픈 글이였는데도 좋게 봐주신 교수님들한테 감사할 따름입니다 ㅠㅠㅠ 감사합니다!
ㅋㅋ 저도 1학년2반이엿는데 왠지 님 본것같네요 전떨어졌는데 부럽습니다 ㅜㅜ
헐... 저 보셨어요;ㅅ; 당황... 정시때 꼭 붙으실 거예요! 아자아자!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9.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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