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관세음보살과 마주 앉아 있나 생각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남극일기]의 임필성 감독은 후덕한 몸매를 가진 사람이다. 양 미간 위쪽에 검은 점까지 있다. 마치 석가모니의 그것처럼. 그러나 [남극일기]를 촬영한 뉴질랜드 촬영장에서의 그의 별명은 피터 잭슨이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정말이었다. 내 눈 앞에는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이 앉아 있었다. 거뭇한 구렛나룻도 그렇지만 후덕한 몸매에 얼굴이 영락없는 피터 잭슨 감독이었다.
인터뷰 시작하면서 나는, 자기 사진이 없으면 피터 잭슨 사진 오려다 써도 되겠다고 농담을 하려고 했지만, 좀 추울 것 같았다. 내가 그를 만난 곳은 녹음실 건물이었다. 그는 지금 [남극일기] 막바지 녹음을 하다가 인터뷰를 위해 할 수 없이 1층에 있는 중국집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는 탕수육을 시켰다. 아니, 저녁식사로 탕수육을? 그는 탕수육을 밥처럼 먹나? 그만큼 좋아하기도 하지만, 후반 녹음 작업하면서 이것저것 먹었다는 것이다. 나는 복음밥을 주문했다. 배가 고팠다.
남극의 도달불능점 탐험에 나선 6명의 탐험대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남극일기]는 상반기 최대의 기대작 중 하나이다. 예산 규모도 가장 크다. 순제작비 70억원, 마케팅비까지 포함하면 제작비가 90억원 대에 이른다. [주먹이 운다]나 [달콤한 인생]은 물론,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 [혈의 누]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다.
이마의 보살점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그는 웃었다. [안 그래도 거의 보살이 되어 가고 있다. 참을 인자 세 개면 부처라는데...] 영화의 마지막 작업을 지휘하는 감독의 마음이 지금 어떨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데뷔작인데 영화의 규모가 너무나 큰 것 아닌가? 어떻게 남극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나.
[처음에는 데뷔작을 중간 정도 예산의 서스펜스 호러로 할 생각이었다. 그게 잘 안됐다. [남극일기]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6년 전이다. 한국 탐험대가 남극에 간 다큐멘타리를 1999년에 케이블 티비로 봤는데, 대원이 아파서 할 수 없이 탐험을 포기하게 되자 허영호 탐험대장이 우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나는, 도대체 이 사나이를 울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남극의 어떤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띄고 있는지. 이 이야기를 더 극단적으로, 가령 탐험대장이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에이하브 선장 같은 캐릭터라면, 탐험 대원들 간의 균형이나 갈등이 더 첨예해진다면, 영화적으로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탐험대가 대부분 남자들뿐이어서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제작비가 분명히 많이 들 것이기 때문에 데뷔작으로 찍을 거라고는 감히 생각도 안했다. 2000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초고가 2001년 나왔다. 그것을 영화화하는데 이 정도로 힘들 줄 몰랐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원형적이고 클래식한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화법이나 규모도 필요했다. 또 이 영화를 준비하는 지난 4-5년 동안 한국 영화 제작비도 상당히 올랐다. 그래서 처음 계획한 55억원보다 제작비가 상승된 것이다. 그러나 규모에 대한 고민은 별로 안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했고 또 규모로 움직이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다 보니까, 대중적인 접점도 찾아야 되고 그래서 스펙타클한 장면도 필요해졌다.]
-영화에서 남극으로 나오는 부분을 실제로는 뉴질랜드에서 촬영을 했는데, 언제 촬영을 했나? 그리고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는가?
[뉴질랜드의 퀸스 타운 근처에 있는 [스노우 팜]이라는 리조트에서 작년 6월부터 8월까지 두 달 동안 찍었다. 마운틴 갑이라는 데서도 일부 찍었고 크라이스트 처치 인근에서도 찍었다. 뉴질랜드 촬영 분량이 영화 전체의 45% 정도 차지한다. 거기에다 배경 소스나 CG용 화면을 합하면 전체의 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양수리나 수원 촬영장의 실내외 셋트에서 찍은 30%와 50미터 블루 스크린으로 찍은 것 등 나머지를 뉴질랜드에서 찍어 온 분량과 연결을 했다. 영화적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남극에서만 이야기가 펼쳐진다.]
-낯선 오지 촬영인데다 소재 자체도 새로운 것이어서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다.
[시작하기 전 준비과정이 길어서 큰 착오 없이 촬영을 마쳤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1회 이상씩 뉴질랜드에 갔다. 프리 프러덕션 단계에서 기본적인 준비를 많이 했고, 제작사인 싸이더스에서 어떻게 찍을 것인지 비쥬얼한 부분을 총정리한 500페이지짜리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항상 현장에 컴퓨터 그래픽 아티스트들이 두 명 이상 있었다. 또 탐험가인 박영석 대장이 슈퍼바이저로 참여했다. 그는 최근에 남극과 북극을 모두 다녀와서, 배우들이 장비 활용을 할 때나 탐험 과정에서의 디테일한 면을 고증했다. 화면은 처음 생각한대로 나왔다. 촬영하면서 원래 의도보다 더 잘 찍힌 것도 있다. 그것은 배우들의 힘인 것 같다. 편집하면서 뉘앙스가 많이 바뀌었는데, 그래도 내가 원한 것의 70%는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6명의 대원이 영화 전체를 거의 차지하기 때문에 배우들의 화음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
[유지태를 제외하고, 송강호를 비롯해서 박희순, 김경익, 윤제문, 최덕문 등 다른 배우들의 베이스가 원래 연극 쪽에 있던 사람들이라 서로 잘 아는 사이다. 찍기 전에 일박 이일로 콘도에 가서 두 차례 리딩을 했다. 호흡은 아주 잘 맞았다. 의례적인 갈등만 있었다.]
-공개된 예고편을 보면 탐험대장 송강호와 유지태의 긴장이 상당한 것 같다. 내러티브 전개가 어떻게 되는가?
[처음에는 탐험대와 자연의 대결로 시작한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을 걸으면서 생기는 화이트 아웃, 남극의 눈보라 현상인 블리자드, 했다가, 빙하 속에 균열이 생긴 크레바스 등이 대원들을 위협한다. 그리고 탐험대 내의 대원들 간의 갈등, 나중에 송강호와 유지태의 갈등, 후반부에는 인물들이 자기 내부와 싸우는 갈등으로 구조가 이루어졌다. 특별히 누가 주역이거나 단역이거나 그렇지는 않다. 유일한 여자인 강혜정만 잠깐 특별 출연한다.]
-송강호와 유지태의 격투씬이 공개되었는데 혹시 부상을 입지는 않았나? 그리고 공개된 영상을 보면 호러 같기도 하고 스릴러 같기도 한데, 영화의 장르는?
[체감 기온이 영하 25도에서 30도를 오르락 거렸다. 어느 정도 합을 짜고 여러 번 맞춘 뒤 촬영을 했다. 두 사람은 그동안 액션 영화를 많이 해서 무술감독 없이도 잘했다. 다만 유지태가 송강호를 발로 밟는 씬은 진짜다. 장르로 말하자면, 스릴러나 호러 쪽이 더 가까운데 미스테리 요소도 있다. 전형적인 장르 영화라기보다는 드라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장르적 요소를 활용해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작용한다. 그러나 장르가 전면으로 드러나는 영화는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얀 눈 위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면 혹시 관객들이 시각적으로 지루해 하지 않겠는가?
[눈이라는 재료는 컨트롤하기 매우 어렵다. 조명하기도 굉장히 까다롭고, 또 셋트 촬영을 할 때는 대형공간도 필요하다. 눈의 색깔이나 카메라의 활용을 사전에 계획하고 갔다. 흰 색만이 아니라, 석양빛이 섞인 따뜻한 눈이 있고, 블루가 많은 차가운 느낌의 눈도 있다. 그런 식으로 눈의 질감이나 느낌을 지루하지 않게 표현했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초반에는 무난하고 보기 편한 각도를 유지하다가, 뒤로 가면서 광각이나 망원처럼 극단적인 대비를 쓴다거나, 컷트가 빨라진다거나, 영화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드라마가 괜찮고 캐릭터가 재미있다면 배경 또한 캐릭터처럼 작용할 수도 있다. 영화 초반에는 남극이나 설원의 느낌이 낭만적으로 그려지다가 점점 변한다. 남극 그 자체가 살아있는 느낌으로 다가서도록 노력했다.]
-시각적으로 단조로울 수도 있기 때문에 청각적 역할이 중요할 것 같다. 음악은 누가 맡았나?
[지금 사운드 작업을 한참 하고 있는데 우려했던 그런 지루함은 없다. 음악은 일본 작곡가인 가와이 겐지가 맡았다. 공각기동대, 링, 이노센스, 검은 물 밑에서 등의 영화에서 음악을 맡은 실력 있는 사람이다. 영화의 90%가 낮 장면이고 6명의 배우 밖에 등장하지 않으며 텐트 아니면 눈만 펼쳐진 설원이 무대여서, 빙하가 녹는 소리가 있다면 그런 음악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완성된 음악을 들어보니까 추운 장면은 더 춥게 느껴지고 시각적인 부분과 호흡이 잘 맞는다. 그리고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허밍으로 참가를 했다.]
-아무래도 CG가 큰 역할을 할 것 같은데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CG가 사용된 컷은 400컷 정도다. CG의 물리적인 양은 상당하다. 그중 100컷은 입김처럼 티가 안 나는 데 쓰였고, 배경을 합성한다든지 몇 군데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런닝 타임은 115분인데 전체는 천 컷 정도 된다.]
-[남극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송강호가 맡은 최도형이라는 인물은, 남극의 도달불능점에 도달하려는 자기의 목표를 위해서, 온갖 비극적인 상황이나 최악의 상황을 감내하며 목표에 집착한다. 그런데 결국 우리 모두에게는 각각 자신의 도달불능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 탐험가들을 취재할 때, 왜 그렇게 목숨 걸고 힘든 탐험을 계속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굉장히 추상적이었다. 어떤 사람이 요리를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에도 현실적인 이유는 드러나지 있지만, 추상적인 목표는 숨겨져 있다. [남극일기]의 문학적 원형은 멜빌의 소설 [모비딕(백경)]이다. 흰 고래를 잡아야 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고래가 에이하브 선장의 한쪽 다리를 자른 것이지만, 사실 그 사람의 광기나 의지가 더 고래를 잡으려는 강렬한 내적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결과가 주는 비극과, 원형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미 예고편에 공개된 [모든 건 거길 가기 위해서였어. 그게....그게 시작이었어]라는 유지태의 독백과 [니가 나를 멈춰줄 줄 알았다. 네가 나를 멈춰주었어야지]라는 송강호의 독백은 이 영화의 비밀을 캐는 핵심적인 부분들이다. 원래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던 그는 MBC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1년 정도 작가를 했고, [씨네 21] 객원기자를 했으며,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해피엔드]를 만든 정지우 감독과 같이 영화를 공부했다. 그동안 단편을 4편 만들었고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날 떼쯤 그는, 내 시집 [비디오/천국]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그가 부처처럼 보였다. [남극일기]가 인간의 욕망이 일으키는 비극적 실패를 통해 삶을 돌아보게 해주는 좋은 영화가 될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