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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밀한 삶의 기록
박숙희 작가의 소설집 『오이와 바이올린』이 〈푸른사상 소설선 55〉로 출간되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 동성 간의 사랑, 성차별, 반려견 문제 등 현대사회의 다양한 면들을 보여주는 아홉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평범한 인물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기존의 문화와 관습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 박숙희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장편소설 『쾌활한 광기』 『키스를 찾아서』 『이기적인 유전자』 『사르트르는 세 명의 여자가 필요했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그림에세이 『너도 예술가』 등 출간. 2014년 첫 전시회 이후 지금까지 10회의 회화 개인전을 개최한 화가로도 활동중.
목차
책 속으로
그리면 그릴수록 그림과 멀어진다는 말을 종종 했거든, 하연이. 살아서 펄떡거리는 어떤 느낌, 그것을 그리고 싶어서 붓을 들었는데 그 느낌을 캔버스에 옮기기도 전에 생생하던 그것이 죽어버린다는 거야. 그러니까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은 이미 죽은 그림이라는 거지. 하연이 그렇게 수많은 그림을 그렸으면서도 한 번도 전시회를 열지 않은 것 또한 그 때문이야. 제주에서라도 개인전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고 수도 없이 권했는데 그럴 때마다 하연이 그렇게 말했거든.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죽은 그림을 전시장에 걸어놓을 순 없다고 말이야. 화폭에 담으려고 하는 순간 달아나버린 그 느낌이 다시 자기를 찾아와줄 때까지 기다리는 하연의 모든 그림은 그러니까 늘 미완성인 거지, 말하자면. (「그냥 전화했어」, 32~33쪽)
오이와 바이올린. G가 오이라면 K는 바이올린이다. 꼬인 것 없이 시원한데 왠지 밍밍한, 그러나 쉽게 질리지 않는 남자가 G였다. K는 섬세하며 날카로워 다치기가 십상인, 그리고 끊어질 듯이 이어지는 그래서 온전히 다 듣고 있으면서도 뭔가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예민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바이올린 연주를 떠올리게 하는 남자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K는 웃음을 잃은 남자였다. 늘 뭔가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는데 그 집중이 그를 약간 화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남자였다, K는. 그에 반해 G는 느닷없이 웃음을 토해내 상대를 놀라게 만들곤 했다. 맥락에 맞지 않는 웃음 때문에 약간 부족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나는 G의 헤픈 웃음이 싫지만은 않았다. G가 입을 활짝 연 채 그런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어쩌면 G는 완전히 솔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맛을 남기지 않는 오이처럼. 게다가 G는 영혼 따위 운운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갈 것 같은 남자였다. (「오이와 바이올린」, 79쪽)
- 뭐가 그렇게 잘났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데 지깟것들이 뭐라고 나를 업신여기느냐 말이야. 누구라도 할 말 있으면 이리 나와봐. 내가 전부 상대해줄 테니까. 이놈의 집구석, 내가 오늘 끝장을 내버리고 말 테니까.
자신의 알몸을 무기로 내세우며 발광하는 그녀의 몸짓은 위험하면서도 처연해 보였다. 너무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장면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나에게는 그다지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뭐랄까,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녀의 벗은 몸, 그것이 약간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아무튼 그랬다. 그러나 내 마음속의 은밀한 바람은 불과 몇 초 사이에 끝장나고 말았다. 곧이어 부엌에서 달려 나온 시누이 두 사람과, 그들 편일 수밖에 없는 시집의 다른 여자들이 죄다 합세해 형의 여자를 개 끌 듯이 어디론가 끌고 가버린 것이다. (「그 여자」, 99쪽)
출판사 서평
박숙희가 주요 대상으로 삼은 존재는 예술가 부류(「그냥 전화했어」의 하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날개가 아니다」의 장형수, 「시인 이상」의 이상)도 있지만, 회사원(「여씨」의 여씨)이나 술집 손님(「오이와 바이올린」의 G와 K) 등 도시인(「동거의 조건」의 주요 인물들)도 있고, 그냥 평범하다 할 수 있는 서민들(「그 여자」의 ‘그 여자’, 「아주 사소한 죽음」의 아버지)도 있다(「나는 2번이다」의 시점인물인 강아지까지!). 이들은 그 신분이나 사는 지역에 상관없이 모두 동시대를 살아왔거나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로 작중인물로 채택돼 있다. 이 시대 어디에서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자 동시에 각자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특별한 인물’이다.
박숙희 소설의 관찰과 사변은 이 ‘평범’과 ‘특별’ 사이를 오가는 방법적 매개다. 독자는 이 매개의 남다른 독서 과정으로써 ‘읽는 묘미’와 더불어 그것이 드러내는 ‘평범’ 뒤에 숨은 ‘특별’을 이해한다. 그것은 동시에 그 ‘특별’ 또한 우리의 흔한 ‘평범’이라는 것을 아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평범하다고 그저 평범한 것이 아니며, 특별하다고 그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 둘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삶’이라는 형태를 이룬다. 세상 사람들은 이 단순한 것을 모른다. 박숙희 소설은 때로 우스꽝스럽고 때로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속인의 무식을 찌른다.
- 박덕규(소설가, 문학평론가 ,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기본정보
ISBN발행(출시)일자쪽수크기총권수시리즈명
9791130821276 | ||
2023년 12월 26일 (1쇄 2023년 12월 15일) | ||
264쪽 | ||
145 * 210 * 22 mm / 501 g판형알림 | ||
1권 | ||
푸른사상 소설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