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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서 가을이 되어서 밤중에 날씨가 쌀쌀합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다음 편은 금요일 날 올리겠습니다. 이번 주는 즐거운 정모이니 많으신 분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달리겠습니다.
그로부터 2개월 뒤 요동성 6월경
“태왕폐하만세”
적봉전역에서 승리한 고구려군은 18년 전쟁을 종결하는 돌궐과의 화의를 맺고 요동성에 도착하자 성의 수많은 백성들이 승리와 평화를 가져다준 고구려의 10만 대군을 환영했다. 요동성주는 직접 성 밖에서 고구려에 승리로 안긴 장수들인 고흘과 연자유, 강이식, 고승을 정중히 맞이하였다.
이제 이들은 요동성에서 며칠 휴식을 취하고 오골성을 거처 평양에 입성하여 개선식을 할 것이다. 원래는 바로 평양성에 가야 되었지만 돌궐이 화의조건을 잘 이행하는지 확인하고 철군하기로 고구려군 지휘부는 결정하였다. 종전이 되었으니 많은 장병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 행복한 삶을 꾸릴 것이다. 그래서인지 거의 모든 병사는 전쟁종결을 기뻐하였지만 몇 명의 장군들과 장교들은 이번 화의에 심하게 불만을 품었다. 그중에 한명이 고구려 10위 관등인 소형 온달이었다.
“돌궐과의 화의는 굴욕 그 자체입니다. 이럴 바에는 무엇을 하려 그토록 희생을 하였습니까?”
온달의 부관이자 고구려 11관등인 제형(諸兄) 마위는 탁자를 치면서 분노했다. 가득히 인상 안 좋은 마위의 얼굴을 더욱 찌그러져서 어린아이들이 본다면 엄마를 부르며 울면서 도망갈 정도였다. 냉정한 설연도 왼손으로 귀볼을 만지작거렸는데 무엇인가 잘 안 풀릴때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이편성이나 현기같은 다른 장교들도 얼굴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온달과 부하 장교들은 요동성내 온달에게 배당된 거처에서 이번 화의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들의 지휘관인 온달은 부하들의 분노에는 즉각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똑같은 기분이었다.
돌궐과의 화의 조건은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1.돌궐은 요해, 요동, 요서, 부여일대에 고구려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돌궐군을 즉각 철수한다.
2.고구려는 구 유연지배지역인 막북(漠北 돌궐본토 지금의 외몽고 일대), 즉 돌궐 핵심 영향력 내에 쌓은 성을 허물고 고구려군은 즉각 철수한다.
3.고구려와 돌궐 양국은 전쟁에서 생긴 포로를 전원 송환한다. 다만 돌궐이 고구려양민과 포로를 먼저 송환하고 그 후에 고구려가 돌궐포로를 송환한다.
4.고구려와 돌궐 양국은 옛 고구려-유연때 같이 상업적 교류를 제기한다. 장수태왕시절에 고구려 북방교역망의 복원을 뜻한다.
5.고구려와 돌궐 양국은 각자 내정간섭하지 않는다.
고구려는 장수태왕 시절 지두우정벌때 확보한 모든 북방영토를 완전 회복하였지만 고구려가 점령한 막북(漠北)내의 성까지 돌려준 것은 아무리 보아도 너무 저자세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막북에서 주로 작전한 온달 당대로써는 피를 뿌리고 쌓은 성이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돌궐에 대한 전쟁 책임은 한마디도 안 나왔다. 고-돌전쟁은 돌궐의 침공으로 시작하였다. 당연히 그에 따른 목간칸의 직접적인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군사적 조치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화의를 들은 온달은 방안에 탁자를 때려 부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지휘관이면 감정을 제재해야 하니 마음속으로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피를 흘리며 돌궐과 싸운 목적이 이따위 것인가.’
입만 열면 평화를 주장하는 평양의 대로들은 이따위 화의조건에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무엇을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로란 고구려 후기 13관등 중에서 5위관등 이상에 고위관리들. 대모달이라는 장성이상급으로 귀족회의에 구성원들로 이 정도면 고구려에서 실력자들로 불렸다.>
사실 온달만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이 아니다. 연자유와 강이식, 돌궐과의 후반기 8년 동안 서 두 번이나 많은 부하들을 잃은 고승같은 장군들은 평양의 결정에만 따른 것이지 마음속은 온달과 같았다. 군부 내의 원로인 고흘장군이 말려서 그런 것이지 이들은 심지어 돌궐의 사신을 배어 평화협상을 막을까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왔다. 평소 강경파 장교그룹들은 간교한 평양의 대로들에게 품었던 불만은 이 화의를 계기로 증오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온달은 마음과 달리 십장들을 다독거리고 종전으로 긴장에 풀린 사병들이 요동성에서 사고치지 않도록 명령하고 돌려보냈다. 천정을 보면서 한숨을 쉰 그는 갑옷을 벗고 깨끗한 관복을 입고 방을 나섰다.
“달아, 불만이 많나보구나.”
고흘 장군은 온달의 얼굴을 보고 한 번에 그의 마음을 읽었다. 장군은 이번 전쟁에 공이 세운 온달을 치하하기 위해서 그를 불렀다. 마음을 읽힌 온달은 고개를 숙였다. 67살에 고흘은 왕족출신의 노장으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던 1차 고-돌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서 군부의 핵심인물로 오른 인물이었다.
군에 신망이 높았던 고흘은 대대로로 선출될 번하기도 하였지만 평양의 대로들의 반대로 계속 전장을 떠도는 신세였다. 8척 조금 위인 온달보다 그는 9척으로 키가 크고 눈같이 흰 긴 수염에 50여년 동안 전장에서 단련된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3살의 건장한 온달과 비교하면 역시 늙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18년 전 1차 고-돌 전쟁때만해도 그가 있는 곳에는 북쪽에 부는 겨울바람이 불었다고 평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나이 때문인지 온후한 성격으로 변해있었다.
“전쟁은 군인들이 하지만 평화를 만드는 것은 수도에 대로들이 결정하는 것이야. 우리 군인들은 그것에 충실이 따르면 되는 것이고?”
고흘은 차분한 목소리로 군인은 태왕폐하와 대로들의 합의체인 대로회의 결정에 복종해야한다고 말하자 온달은 입을 다물기로 하였다. 그의 입속에는 이번 화의에 부당함과 화의를 맺은 평양의 대로들을 분노가 가득했지만 이번 종전에 찬성한 고흘장군님앞에서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은인인 그분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던 것이었다.
사실 고흘 장군님은 평민출신인 온달의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을 힘써주신 분이다. 그는 사병시절에 전장에서의 재능을 알아본 온달을 태학에 입학시켰다. 온달입장에서는 갈 기회만 주었지 모든 시험은 스스로 통과해야만 했지만 귀족들의 교육기관인 태학에 실력자의 추천이 없이는 일반평민이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고흘은 태학 졸업 후에 전장에서의 온달의 맹활약을 듣고 자식이 성공한 것같이 크게 기뻐했다. 특히 이계찰대에게 패배한 뒤 실의에 빠진 그가 위한이었던 것은 온달의 대활약 소식이었다. 그 온달이 자신을 패배시킨 이계찰대를 죽였다.
고흘은 주의에 말만 안했지 맘에 쏙 드는 온달을 양자로 들일 생각을 굳혔다. 그는 3명의 아들 모두를 돌궐과의 전쟁과 평양에서의 권력투쟁과정에서 잃었기 때문에 가문을 잇기 위해서 양자를 빨리 들여야 했다. 때마침 온달이 이계찰대의 목을 베는 공적을 올리자 고흘은 자신이 직접 키운 그에게 가문을 물려주기로 마음속으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주위 왕족들이 출신을 들어 반대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온씨 성도 안내려 주는 것인데 바로 고씨 성을 주면 될 것을....’
온달은 평민출신으로 처음에는 성이 없었다. 태학 입학 전에 성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왕족출신 명장인 고흘이 왕실에 허락을 받고 달에게 자신이 지어준 온씨 성을 하사했었다.
고흘은 온달에게 이번 화의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고 말은 하지만 그는 온달의 마음을 이해는 하고 있었다. 고흘 자신도 돌궐에 수많은 부하들을 잃었고 심지어 아들까지 전사했으니 그의 분노 또한 온달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솔직히 돌궐의 전쟁에 대한 책임은 협상과정에 안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돌궐에서는 이 모든 책임은 이계찰대에게 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계찰대는 초원동쪽의 왕으로 자기 멋대로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군인 온달이 이계찰대를 죽임으로써 그 책임은 사라졌다는 것이 돌궐측 입장이었다. 협상과정에서 이계찰대와 죽은 고구려강경파 장수들 시신의 송환은 한마디도 안 나왔다.
“너희들이 가지고 맘대로 해라 우린 그런 사람 모른다.”
돌궐이 이상한 행동은 평양에 대로들은 혼란스러워 했지만 고흘같은 몇몇 사람들은 돌궐 내에 권력의 변동 때문이라는 직감하였다. 신미년 전쟁때 돌궐의 고구려에 대한 강경한 입장은 18년이 지난 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물량전 양상이 되어간 고-돌 전쟁후반기, 수많은 성을 쌓고 막대한 병력을 동원하는 강대국 고구려에게 돌궐은 서서히 지쳐갔다. 고구려는 자신의 영토를 모두 지켜냈고 별동대를 투입 돌궐본토인 막북까지 침공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문제인 고구려의 영역 내에 약탈에 성공한 물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조건을 제외하면 돌궐같은 유목족의 침공로는 자신이 생산한 수 없는 물자가 많은 곳으로 가서 약탈하는 것이다. 풍요로운 부국 고구려는 그들에게는 매력적인 공격목표이지만 고구려군의 치열한 방어에 들고 오는 것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막대한 손해였다.
돌궐은 이제 국가가 완성되었다. 18년 전 국가 건설기에 유연을 멸망시키고 주의에 주변 국가들에게 행패부리기만 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의 존망까지 걸어야 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은 이제 부담이었다.
차라리 만리장성 남쪽에 분열된 선비족 국가들을 침공하여 비단을 수탈하여 그들이 장악한 서역과의 교역로를 이용해 페르시아나 비잔틴제국과 교역하는 것이 훨씬 났다는 것이 돌궐내의 대다수 지배층의 결론이었다. 그런데 동쪽의 왕 이계찰대만이 해가 뜨는 곳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온 땅의 지배자가 대 칸임을 인정을 인정받아야한다는 무모한 생각을 갖고 고구려침공을 선동하니 돌궐의 집권층 대다수는 서서히 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심지여 이계찰대의 후견인인 목간칸마저.
그런데 고집쟁이 이계찰대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죽었다. 돌궐의 집권층들은 겉으로 표현만 안했지 춤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칸에게 달려가서 협상조건만 좋으면 고구려와 화의를 맞자고 설득했다. 패전의 소식에 병이 들어 누어있는 목간칸도 분노하는 척만 했지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무엇보다 이계찰대의 10만병력을 손실했기 때문에 병력부족에 시달리던 돌궐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속할 수도 없었다. 대신 목간칸 자신의 사과는 있을 수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사실 돌궐처럼 강대국의 지배자가 다른 나라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은 국가 분열을 낳을 수 있는 정치적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계찰대가 정치적인 희생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읽은 고흘은 협상에 주도적으로 나서 고구려에 유리하게 맺으려 하였다. 특히 포로 선 송환과 상업 제게는 큰 성과였다. 돌궐군은 많은 양민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았는데 화의에 자기 돈을 들여 먼저 송환하기로 명시했다. 만약 송환에 적극적이지 않다면 돌궐포로 송환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돌궐은 자신이 할 있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포로를 먼저 송환받는다는 것은 이 전쟁에 승자가 고구려임을 공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18년간 단절되어 있던 유목족과의 상업교류는 고구려에게는 희소식으로 옛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의 웅대한 북방교류망 회복을 의미했다. 두 선대왕때는 고구려가 초원의 지배자인 유연을 통해서 초원의 길을 따라 서역무역까지도 손을 대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동맹국이던 유연이 돌궐에게 몰락하면서 고구려는 서역무역이 완전히 차단되었는데 이번 화의로 그 길이 다시 뚫린 것이다.
돌궐은 서역무역에 대한 독점적 권리의 상실에 상당히 난색을 표했지만 아직 북방에 주둔중인 10만 대군의 알 수없는 위협이 가미된 고구려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하였다. 유목국가이자 상업국가인 그들로써도 동쪽의 부국 고구려와의 상업교류는 돌궐 자신에게도 막대한 이익이기 때문에 특별한 손해는 아니었다.
이제 고구려는 북방에서는 전성기인 장수태왕시기의 영향력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얻을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한 고흘은 이번 화의가 결코 나쁜 조건이 아님을 군부내 강경파에 설득하였다. 하지만 연자유나 강이식, 온달은 그 말을 귀로는 듣고 있었지만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고구려 최고 역사가이자 그 시대를 살았던 이문진을 후일 이들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그의 저서에 기록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전쟁으로 성장한 미천한 출신의 무관세력들이다. 고구려내에 좋은 가문이나 토지, 상단을 가지고 있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전쟁을 통해서 이 나라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 전쟁이 끝나자 이들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싹텄다. 자신들이 활약할 전쟁이 사라지면 자신들은 다시 하급 가문이나 평민으로 도태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그들에는 있었다. 그 두려움이 결국 비극을 불러들였다. 전쟁을 간절히 기원한 그들은 돌궐과의 전쟁이 끝나자 수도 평양에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고구려의 실력자들인 대로들을 상대로…….
“이제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
고흘장군은 이번 화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으려니 하고 온달의 앞으로 계획을 물어보았다.
“…….”
조금 화가 나있던 온달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솔직히 생각은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라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15살에 입대한 후 군대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 해본 적이 없고 사회에 나가서 뾰족이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군에 남고 싶었다. 그런 고민 중에 며칠 전에 상관인 강이식이 온달은 자리가 결정되었다는 언질은 들었었다. 하지만 온달은 자신보다 다른 평민출신 동료들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모두 군에 남을 수 있을까?’
거의 평민출신인 사병들은 모두 전역하겠지만 평민출신인 장교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궁금증에 답이 없었다. 아마 원칙대로 간다면 전후 군축단계에서 모조리 전역을 한다. 하지만 귀족가문에 오르길 원하는 평민장교들은 당연히 전역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전쟁에 참전한 귀족들이야 평양이나 지방의 좋은 근무지로 알아서들 잘 가겠지만.
“고흘장군님 이번 전쟁이 끝난 뒤 저희들이 어떻게 될 것이라 보십니까?”
온달의 얼굴은 약간 저자세로 질문을 하였다.
“저희들이라니 무슨 말이냐?”
“귀문출신이 아닌 장교들이 사병들처럼 전역해야 되는 것은 .............”
온달은 왠지 민망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고흘장군님께 신분도 모르고 사소한 전공을 내세운다는 꾸지람을 들을 것 같았다. 온달은 윗사람에게도 할 말 다하는 당당한 사람이지만 고흘 장군님에게는 예외였다. 고흘은 고개를 잠시 기우뚱하더니 그 말뜻을 이해하고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달아 걱정이 과하구나!”
그는 인자한 얼굴로 말을 이으며 온달의 걱정을 씻어 주었다.
“영광스러운 고구려의 창업자중 하나이신 대무신왕께서 신분은 알 수도 없고 단지 키 큰 청년에 지나지 않은 괴유님을 장군으로 임명한 것은 신분이 아니라 그 괴유님의 능력 때문 아니었느냐? 대무신왕의 선견지명이 시조이신 추모성왕의 원수였던 간적 대소의 목을 얻고 부여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또한 동천왕때 활약하신 밀우, 유유, 유옥구 3공신분들도 명문가의 자식이 아니었음에도 국난에 새운 공으로 명문의 반열에 오르시지 않았느냐.”
“장군님”
“그런 불필요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고구려군에 천 명 정도 된다고 하였냐?”
“1027명입니다.”
온달은 같은 평민출신이었고 자랑스러운 고구려군 장교인 그들과 생사를 언제나 같이 하면서 귀족들의 심한 텃세를 이기고 돌궐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수많은 공적을 쌓았다. 좀 자만이 될 수도 있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평민출신 장교들이 전역 당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당당히 귀족가문으로 올라 귀족이 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나 고흘이 보장한다. 그들은 전공에 따라 평양이나 지방에 군요직으로 발령이 날 것이다.”
온달의 표정은 어두운 구름이 걷히듯이 환해졌고 돌궐과의 화의에서 생긴 분노는 싹 날아가 버렸다.
“장군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거듭 고흘에게 감사드렸다.
“허허 참 그런 걱정이 있었으면 미리 나에게 말을 할 것이지.”
마음속으로 자식이라 생각하는 온달의 기쁜 표정을 보니 고흘의 마음도 흡족했다.
온달은 같은 출신의 장교들을 모아서 고흘장군님의 말씀을 전했다. 군부에 수장급이신 고흘의 약속을 듣자 그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싹 사라졌다. 그들은 온달의 손을 붙잡고 그에게 고마워했다.
“온당주 정말 고맙네! 정말!”
“이제 살았다. 10년간 전장에서 살다보니 가족들에게 정말 미안했는데 이제야 아버지구실을 하는구나!”
“정말 조국에 충성한 보람이 있구먼.”
사실 온달은 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제일 마음을 졸였다. 이들 중에 관등을 받은 사람은 온달 자기뿐이었던 것이다. 무관 관직인 당주에는 모두 임명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온달을 제외하고는 관등을 받지 못했다. 연자유은 상부에 계속 임명을 요구했지만 평양의 대로들은 허락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평양의 대로들은 평민출신 장교로 인해 신분질서가 무너질까봐 내심 그들을 꺼려하였다.
온달은 고흘장군이라는 후견인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지배층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인 태학을 나왔다는 점에서 관등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온달도 소형이라는 관등도 2달 전에서야 이계찰대를 죽인 후에 정식으로 겨우 받았다. 그전에는 소형은 강이식장군의 재량으로 달고 있었다.
이번에도 온달은 이계찰대의 수급에 대한 공도 평민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히 불이익을 받았는데 정보를 제공한 중리부가 모든 공을 챙겼다. 하지만 온달은 꾹 참았는데 그 이유는 이번 일에 시작과 계획은 중리부에서 거의 짰고 무엇보다도 공정하신 태왕께서 처결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온달은 평양의 핵심요직으로 들어간다는 강이식의 말이 있지만. 하여간 그는 자기만 군에 남고 나머지 동료들이 강재전역당하는 것은 아닌가하며 매우 걱정했었다.
온달은 그들과 함께 기뻐하였다.
“이제는 안심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면 되겠습니다.”
“태왕폐하만세”
“대고구려만세”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돌궐을 굴복시킨 10만 용사는 드디어 수도 평양에 개선을 하였다.
이번전쟁에 총사령관이었던 청색 갑주를 입은 고흘장군이 군사에 맨 앞에서고 실질적인 전쟁을 지휘한 연자유와 강이식과 수많은 장군들 그리고 장군을 경호하는 친위군들이 그 뒤를 따라 갔다. 장군들의 위용있는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하던 백성들은 한순간 숨을 죽였다. 용맹한 장군들의 얼굴에는 복종 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권위가 느껴졌다. 그 뒤에 이번 전쟁에 원흉인 이계찰대와 그 부하 장수들의 목 30개가 꽂아 있는 수레가 지나가고 돌궐의 고위장교급 포로들 3000여명이 비참한 모습으로 줄줄이 묶어서 따라 지나가자 백성들은 그들에게 욕을 하거나 조롱하였다.
그 뒤에 10만명의 용사들이 한껏 자신을 꾸미고 열을 맞추어 백성들 앞에 지나가자 엄청난 환호성이 메아리쳤다. 용사들이 지나가는 평양의 대로변(大路邊)을 따라 40만이나 되는 평양에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은 정말 장관이었다. 백성들은 꽃을 뿌리며 그들의 용맹을 칭송했다. 요동성과 오골성에서 큰 환영받았지만 백성들이 평양외곽 100리밖부터 안학궁까지 이어진 열렬한 환영을 하니 고구려장병들은 전쟁이 끝나고 승리에 개선을 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장병들은 절도 있게 걸어가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과 같이 열광했다.
용사들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40년전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대혼란이 점차 수습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태왕이(평원태왕) 즉위한 뒤에는 백성을 수탈했던 외척 주씨가문도 사라지고 잇따른 귀족들의 반란도 수그러들었다. 정국이 급속히 안정되니 백성들의 살림도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좀 나아졌다. 그리고 강국 돌궐과의 18년 전쟁 또한 완승으로 끝났다. 즉 고구려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 온 것이다.
자신의 타고 있는 말에도 한껏 비단으로 꾸미고 개선식을 하는 중인 온달은 환영을 나온 사람들 중에 어머니가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그가 어머니 곁을 떠난 것은 고흘장군님께서 보내주신 태학을 졸업하고 출정한 3년 전이었다. 그때 이후 어머니랑 연락 한 번도 하지 못했었다. 당주급들은 평양에 연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부하들도 가족소식을 모르는데 몰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잘못된 것 같아서 일부러 연락을 안 하였다. 그런데 온달이 지금 어머니를 찾는 것은 솔직히 인사 나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눈이 안 보이시기 때문에 무리하고 나오셨다가 40만 인파에 휩쓸릴까 마음속으로 불안했다.
“당주님 어머님을 걱정하십니까?”
“누구랑 같이 나오셨겠지만............”
온달의 어머님 사정을 좀 아는 설연은 당주님께 물어보았다. 설연은 당주님이 결벽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전시라지만 연통하나 보내주는 것이 큰 문제인가?
개선할 때 미리 사람을 보내어 어머니에게 전해주면 어떤가?
꼭 그런 것을 부하들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인가?
온달은 결국 40만 인파속에 어머니를 못 찾고 안학궁 쪽으로 향했다. 온달이 안학궁 밖에 잘 다듬은 돌로 만든 대로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멀리 정문이 보였다.
‘역시 굉장히 크구먼!’
처음 평양에서 출정할 때는 자기는 안학궁 밖 멀리밖에 서 있다가 바로 출정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가까이서 왕궁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직 행사준비가 완벽히 안 되어서 잠시 개선한 용사들이 궁문 앞에서 대기했는데 온달은 안학궁문을 보았는데 기둥머리에 얹힌 정말 거대한 주두(柱頭)를 보았다. 주두는 기둥머리 위에 있는 네모난 부제인데 징집되기 전에 건축 쪽에서 일했던 사병이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는 하는데 온달의 눈에는 궁궐을 더욱 웅장하게 하려고 한 것 아닌가 생각되었다. 힘을 상징하는 것 같은 주두 아래 붉은 색의 기둥은 주두와 바닥이 닿는 위아래는 둘래가 작고 가운데는 커서 불룩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온달은 기둥에 붉은 색을 보니까 갑자기 눈을 피했다. 갑자기 그가 죽은 이계찰대의 흘린 피가 생각나서 기분이 안 좋아 졌기 때문이다. 온달은 고구려의 원수인 그 놈을 죽인 것은 자랑스러웠지만 찝찝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때 온달의 머릿속에는 불현듯 한 아가씨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께서 여기서 살겠구나?]
온달은 왼손에만 차고 있던 팔찌를 물끄러미 보았다.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풋내기 시절
4년 전 태학에 19살 학생이었던 그때 생각이 어렴풋 났다.
4년 전
단기 2898년 서기 565년 영강(永康) 1년 평원태왕 7년 을유(乙酉)년 가을
평양 태학
남자 셋이 살만한 기숙사에서 누어서 있어서 책을 보는 둥 마는 둥하던 온달은 문이 열리자 몸을 일으켜서 누군가 확인을 하였다.
“온달 이문진 박사님이 오라고 하는데.”
같은 방을 쓰는 우락부락한 얼굴의 마위가 웃으며 들어온 것이다.
“아휴! 올 것이 왔군.”
“그러 길래 공부 좀 열심히 하지. 어떻게 1000명중에 98....”
“마위 그 입을 다물라. 876등을 한 너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온달 그래도 너와 나 사이에는 100명이 있지 않은가.”
온달은 마위와 이러쿵저러쿵 말싸움을 한 뒤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에 나와 박사님이 계시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구려 학문과 군사교육의 전당인 태학(太學)
전연와 백제의 잇따른 패배로 위축되었던 고구려의 17대 소수림왕은 아버지인 고국원왕의 복수보다는 국가의 체제정비로 국난을 벗어나려 하였다. 그가 선택한 체제정비중 가장 공을 들인 것은 교육이었다. 그동안 고구려는 지배층의 인제양성 기관이 귀족파벌에 따라 여러개로 난립하여 통일되어있지 않았고 그나마 교육 상태도 서쪽의 한족(漢族)국가들보다 뒤진 상황이었다.
경당으로 통한 평민들의 교육은 매우 충실하였지만 국가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명확하게 없다는 것에 대한 대비책이 지식인들 중심으로 요구되었다. 이를 받아들인 소수림왕은 태학의 건립을 추진하여 귀족들 휘하의 교육기관들을 강력하게 통폐합시켰다. 그 소식을 들은 귀족들은 교육기관을 하나로 통일하여 태왕의 간섭 하에 두는 것을 집단적으로 반발하였다. 하지만 소수림왕은 강력한 의지로 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태학을 열었는데 그때가 고구려가 건국된 지 409년인 소수림왕 2년이다.
원래는 국내성에서 개교하였지만 장수태왕의 평양 천도로 인해 42년 만에 국내성시대를 마감하고 평양으로 이전하여 그로부터 139년이 지났다. 온달은 태학의 180번째 기수의 학생이었다.
온달은 태학의 앞마당에서 다른 기수에 수백 학생들의 무예수련모습을 보면서 이문진 박사의 서재로 갔다.
멀리 있는 쪽은 학생들이 마상궁술 시합인 마사희(馬射戱)를 하였고 옆에 박사(博士)들과 보좌하는 조교(助敎)들이 과녁을 보고 채점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쪽은 300명 정도가 창술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핫.”
“이런! 다들 왜 이렇게 창에 힘이 없어. 처음부터 다시.”
“하앗!”
무예를 가르치는 박사(博士)들의 엄한 질책은 계속되자 고단훈련에 힘들어하는 학생들도 기합을 넣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박사나 학생들이나 모두들 굳은 땀방울을 흘리며 수련하고 있었다. 그 곳에 있던 박사들은 지나는 온달을 쳐다보았는데 그가 오른팔을 가슴에 올려놓으면서 인사하자 고개를 끄떡였다. 온달은 인사를 한 뒤에 수업에 방해되지 않게 빨리 지나갔다.
이문진 박사의 서재는 고구려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이웃국가들을 포함해서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한 장문고(蔣文庫)에 가까웠다. 온달은 장문고를 지나가면서 시험에 나올 책을 찾는 수백명의 학생들을 보았다. 모두다 앞으로 있을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온달은 이미 시험을 끝낸 상황이었고 이번에 이문진박사에게 불려가는 것도 그 결과 때문이었다. 이때가 그가 태학을 다닌 지 2년 반이 지난 19살 때였다.
온달이 성이 없는 일개 평민이어서 이름뿐인 달이라고 말 불리던 시절
15살 성인이 된 달은 돌궐과의 전쟁에 사병으로 출정해서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아 16살에는 9명을 부리는 관등없는 십장으로 임명되어 유성(柳城)근방에 작은 진지를 맡게 되었다. 그 곳에서 맡은 임무는 돌궐족들에게 빼앗은 만여 마리 양떼를 관리하는 임무였다. 솔직히 전쟁하고 상관이 없는 한직이었다. 그 해 온달은 위기에 처한 왕족출신인 고승장군을 기가 막힌 전법으로 구해드린 적이 있었다.
고구려의 상업거점이었던 유성(柳城)근방에서 행군 중이던 고승이 휘하 병력과 함께 돌궐군에 기습을 당했다. 그 소식을 들은 조랑말을 탄 달 십장과 9명의 부하들이 만 마리에 양떼를 몰고 기이한 모습으로 전장에 나타났다.
‘도대체 왜 양떼들을 들고 나타났나? 돌궐놈들하고 협상하려고 하는 것인가?’
돌궐군에 포위당한 고승장군은 너무 평화스러운 양치기 온달과 부하들의 출현에 멍해 있었다. 그 뒤에 양치기의 행동은 양떼를 끌며 돌궐군 진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도망갈 거라면 그냥 갈 것이지 우리들 앞에서 저게 무슨 짓인가?’
고승의 머릿속에는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았다.
그런데 돌궐군에 좀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 달은 칼을 휘두르며 양떼를 흩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죽기 싫은 양들은 일제히 매매 울면서 여기저기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고승의 고구려군은 돌궐군에게 전멸당하기 일보직전이었고 반대쪽에 온달의 고구려군은 양떼를 괴멸시키기 일보직전이었다.
‘돌궐군이 아니라 양떼를 공격하다니...........’
달과 부하들의 행동에 죽음의 위기에 처한 고승과 부하들은 멍해져있는 것을 뛰어넘어 몽롱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여졌다.
돌궐 전군들이 방향을 돌려 자신의 재산인 양떼를 공격하는 달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고승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고 생각한 그들은 완전한 승리보다 양떼가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였다. 고승은 이때를 틈타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고 달도 그들이 쫒아오자 양떼를 두고 역시 도망쳤다. 이로써 달은 왕족출신인 고승장군을 위기에 구해드리는 공을 세웠다. 그 소식을 들은 고구려군 총사령관인 고흘은 달을 당장 불러들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
고흘은 아직 어린 달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 고구려군에게 중요한 것은 태왕폐하에 대한 충성, 군대에서의 군율과 전쟁에서의 승리입니다. 그에 비해 저의 눈에는 비친 돌궐군은 양떼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달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했다. 주위에 장군들은 어린 십장의 당돌한 견해라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고흘은 수년간 돌궐과의 전쟁을 하면서 돌궐군이 군인으로 생각할 수없는 엉뚱한 짓을 가끔 한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유목족인 돌궐군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재산이다. 그들은 군사적인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생각하면 다음 전술을 세우기보다는 노획물부터 챙긴다. 물론 정착민들의 군대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유목민들이 더욱 심했다. 그러니 그들은 군사적인 작전이 자꾸 맥이 끊기고 결정적인 기회를 놓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것은 겨우 1년 동안 돌궐 군을 싸웠던 달은 놀랍게도 그것을 간파한 것이었다.
“놀랍도다! 너의 용기와 책략이 장난이 아니구나! 하하하하하.”
그때부터 고흘은 달을 가까이 두면서 옆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 당시 달은 무예가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비치는 재치가 놀라웠다. 이후 돌궐이 북제의 진양(晋陽)을 대대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고구려와의 전쟁이 정전상태로 빠진 뒤 고흘은 달에게 집중적으로 무예 수련하도록 하였다.
“잔머리 굴리는 것으로는 고구려에 강한 군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달은 이 당시에 고흘의 수련을 이렇게 표현했다.
“고흘장군님께 주목받으면 훈련 복(福)이 터진 셈이다. 정말 겨울에도 온 몸에 소금이 부족했다.”
고흘은 온달이 매일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가만히 쉬게 하지를 않았다. 그런데 그의 훈련은 특별히 수준 높은 것보다는 말타기, 활쏘기, 수박, 창술, 검술에서 기본적인 것만 가르쳤다. 무예란 나쁜 버릇을 철저히 잡아주고 기본만 충실하게 되어있으면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사실 온달과 같이 그가 뽑은 인제들이 많이 있었는데 두 달 뒤에는 달빼고 고단하고 재미없는 수련을 포기하고 부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달에게는 묵묵히 훈련에 임했다. 그동안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배움에 기회는 없었다. 전쟁에서 고향을 잃고 평양으로 흘러들어온 난민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에 맹인이신 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서 모든 평민이 다니는 경당도 다니지 못했다. 그런 비참한 삶속에서 어머니는 자식인 달의 미래를 위해서 성인이 되자 군대에 보냈다. 차라리 이렇게 배우지도 못하고 입에 근근이 풀칠하며 사는 것보다 군대에서 무엇이라도 배우는 게 났지 않겠느냐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살다 고흘장군님의 배움에 얻자 달은 인생에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수련하였다. 어려운 훈련도 꿋꿋이 버티는 달을 본 고흘은 갑작스러운 소환명령을 받자 그를 데리고 평양으로 왔다. 그리고 그는 달에게 온씨성을 내리고 태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소수림왕때 만들어진 태학은 고구려의 국가차원에서 정치제도의 운영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고자 창설한 교육기관이었다.
이곳에 졸업하고 국가에서 지정한 시험에 통과하면 고구려의 13관등에서 자위(自位)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 소식을 들은 앞도 안 보이는 불편한 몸에도 어머니는 한 걸음에 달려와서 고흘장군님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장군님. 못난 자식을 위해서 흐흑.”
온달은 그날 고흘장군님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죽는 그 순간까지 영원히 잇지 못했다.
<경당은 고구려백성들의 교육기관으로 평민이상의 어린 자제를 결혼 전까지 낮에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 신라의 화랑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있는 만큼 소년들에 무예수련집단과도 연관이 있다고도 볼 수는 있다.>
“야 너는 졸업할 마음은 있냐.”
이문진 박사의 호통이 시작되자 서 있는 온달은 머쓱 표정으로 바닥을 처다 보았다.
온달은 나름대로 열심히는 하였지만 글 실력이 꽝이었다. 난민출신으로 어려서 누구나 다하는 글도 제대로 못 띠었으니 태학에서 좋은 성적이 나올 턱이 없었다. 문무를 함께 가르치는 태학에서 온달은 무예는 최상위 권이었지만 역사하고 전사를 제외한 학문은 최하위 권이었다. 태학의 박사들은 온달 고과를 보고 극과 극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문진 박사님은 온달의 재치, 나름대로의 성실성에 높은 평가를 했다. 무엇보다도 역사에 조예가 깊은 이문진에게 역사 관련된 고과가 매우 훌륭한 온달에게 관심이 안갈 수가 없을 것이다.
‘거드름이나 피고 박사를 깔보는 대로 자식들보다 멍청하지만 노력하는 이런 놈이 훨씬 낳다.’
온달이 이런 말을 들었다면 좋아할지 나빠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문진 박사는 아끼는 그를 어떻게든 졸업시킬 생각이었다.
“이번 동맹제 끝나면 태학학생들 전부다 마다산(馬多山 백두산)에 올라가는 것 알지?”
온달의 마음속에는 설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너는 남아서 책이나 읽어라.”
‘악!’
이문진의 말에 온달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마다산은 고구려인들에게는 성산으로 숭배되었다. 국내성시절 모든 고구려인들 무덤의 머리 방향은 그들의 숭상한 마다산 쪽이다. 성스러운 마다산, 그 험기도 산을 한 겨울에 올라서 심신을 단련하는 것은 태학학생들의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문진은 온달에게는 그것보다 글공부 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온달은 어떻게든 마다산에 가려고 박사님에게 사정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솔직히 이문진 박사님이 온달을 이렇게 신경써주시는 것도 감지덕지이었다.
약관인 30살에 이문진 박사는 고구려 최고의 역사가에 상당한 문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겉모습부터가 책만 읽은 선비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3년 전 왕후의 가문인 주씨가문의 총애를 받아서 태자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작년에 갑작스럽게 태왕의 명으로 태학박사로 옮겨갔는데 주의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좌천이라고 생각했다. 이문진입장으로써는 특별한 잘못이 없었는데도 태자의 스승자리를 빼앗기자 억울하였지만 태왕의 명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동맹은 고구려에서 10월에 행하던 제천행사이다. 태왕이 직접 하늘에 제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두로 모인다고 하는 데 추수감사제의 성격도 있다.>
<백두산을 과연 고구려사람들이 무엇이라 불렀는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기록에 있는 마다산이 백두산으로 추정되기도 함으로 여기서는 마다산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때 갑자기 박사의 서제에 문이 열렸다.
“박사님 큰일 났습니다.”
박사를 수행하는 학생인 설연이 뛰어들어 왔다. 같은 기숙사를 쓰는 온달을 잠시 흘겨본 설연은 이문진박사님에게 큰일을 대답하였다.
“태왕께서 역모를 꾸민 왕후의 가문인 주씨일족을 멸문시키라는 왕명을 전군에 내렸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잘못 들었나.’
멍하게 온달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같이 있는 이문진의 얼굴이 흙빛인 것을 보고 온달의 얼굴도 놀라움이 퍼져나갔다. 주씨가문은 왕족 고씨보다 권세 있다는 외척집안이었다.
주씨가문은 안원태왕때 둘째왕비를 배출하였고 정적이었던 셋째왕비와 그녀의 가문을 숙청하고 양원태왕을 옹립한 뒤 20년 동안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주씨일족은 이후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해 연이어 양원태왕때와 현재 태왕의 왕후를 배출하였고 고구려 최고 관직인 대대로를 5명이나 나왔다. 대로회의에서 왕족다음으로 제일 많은 표를 행사했다고 그에 따라 수많은 귀족들이 바친 뇌물로 쌓은 재산은 안학궁을 3번 쌓을 정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백성들에 대한 수탈도 만만치 않아서 원성이 많았지만 그토록 강대한 가문을 태왕께서 멸문 라는 조서가 지다니.
다른 것은 다 재처 두어서라도 왕후는 태왕의 아내 아닌가? 단순히 보면 남편이 장인어른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다니.
온달은 주씨가문의 역모에 대한 설연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근거가 미약했다. 그 가문은 이미 상당한 권력을 확보했는데 역모를 꾸밀 리가 없다. 물론 몇 가정을 세운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가정이 성립될 수는 없다.
“왕후께서는 어떻게 되시었느냐? 평양의 상황은?”
이문진의 질문에 냉정한 성격을 가진 설연마저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대답하였다.
“정확한 소식은 아니나 지금 왕후께서는 별궁에 유패 당하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평양의 상황은 안학궁에는 태왕의 밀칙을 받은 동부대인 발안의 사병이 주둔하고 있고 북부대인 구성이 태왕의 친위군과 함께 주씨가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온달은 어린 시절에 수도 평양에서 최고 관직인 대대로 선출 두고 귀족들끼리 전쟁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그 난리가 또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설연 즉시 박사님들을 강당에 불러 모셔와라. 그리고 태학에 문을 모두 닫아라! 평양은 전쟁 중이다. 온달 너는 주씨가문 자제를 모아라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이문진은 즉시 지시를 내리고 강당으로 가셨고 온달도 서재에서 나와 기숙사로 달렸다. 평양의 저녁노을은 오늘따라 더욱 붉게 보였다. 온달은 붉은 하늘에서 돌궐군과 싸울 때와 맡은 사람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머니 괜찮으실까?’
양원태왕이 돌아가시고 즉위하신 양성이 나라를 다스린 지 7년째 되던 때
온달의 나이 19살, 동맹제를 며칠 앞둔 10월 그날 밤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버님! 어머님을 살려주십시오.”
“흐흑 아버니미 흐흐윽.”
어린 남매의 울부짖음은 안학궁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중궁밖에 돌바닥 위에 가을비를 맞으며 11살 태자 대원(大元)의 옆에는 같이 태어난 쌍둥이동생인 명화공주가 울고 있었다.
자식들의 울부짖음에 중궁 안에 화려한 옥좌에 절반정도 누어있는 태왕은 전혀 신경 쓰는지를 않았다. 올해 29살의 청년태왕 양성은 강이식과 같이 9척의 거대한 키에 얼굴도 긴 편이었다. 가느다란 눈에 얇은 입술에 낮은 코 그리고 매끈한 수염을 갖고 있었는데 딱 보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머리에는 태왕만이 쓰는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백라관을 쓰고 오체로 된 용포를 입고 금단추를 단 가죽으로 된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옥좌아래에는 왕족출신의 명장 고흘이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왕족의 원로로써 왕실의 웃어른 중 하나이었기 때문에 태왕 앞에서도 앉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깃털로 장식된 청나관을 쓰고 관복을 입은 고흘은 어린 태자와 명화공주의 울부짖음을 듣고 도저히 마음을 가라안칠 수 없었다.
“고흘 장군 어디 불편한가?”
태왕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용히 말하나 음색이 높아서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다.
“태왕폐하 그것이......”
고흘장군은 태왕의 아내이자 태자와 명화공주의 어머니인 왕후의 가문을 이런 식으로 피를 뿌리면서 멸문시키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입궐하였다. 그는 선대 양원태왕 즉위 때 왕실의 피바람을 지켜본 노신(老臣)중 하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왕실에 유혈을 막기 위해 입궁했지만 태왕의 신속한 명령으로 모든 것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정말 하루아침에 명문 주씨가문은 사라진 셈이다.
“아 돌궐과 전쟁에서 1년 전에 재미있는 아이를 하나 태학에 입학시켰다 들었는데 이름 달이었나?”
“예 그렇사옵니다. 왕실종친과 상의하여 소신이 성을 하사했는데 온씨로 온달이라 부르옵니다.”
“귀문출신은 아니군. 출신을 보아서 양자로 들일 생각은 아닌 것 같고 .........”
고흘은 태왕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입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왕실의 원로로써 왕실의 더 이상 유혈을 막아야 했다.
고흘은 태왕 앞에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하였다.
“태왕폐하 저가 입궐한 것은 더 이상의 유혈을..........”
꽝
“고흘장군!”
고흘의 말이 나오자마자 태왕은 옥좌를 치면서 분노를 표했다.
“그들은 역적이야 왕실과 짐을 20년간 능멸하였어!”
“태왕폐하 소신 또한 주씨가문의 세도를 잘 아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그에 따른 국법을 해결하심이 옳을 줄 아옵니다. 아무리보아도 주씨가문이 역모를 꾸미어.........”
“국법! 짐에 말이 곧 법이고 절대진리요. 주씨가문이 죄가 없다하더라도 짐보다 강대한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모든 가문의 사람이 능지처참으로도 부족한 죄요”
상승의 명장인 고흘도 태왕의 진노에 놀라 얼굴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태왕께서 이런 단호함을 숨기고 있었는지 상상도 못 했다. 태왕은 즉위하신 이래 6년 동안 아버님이신 양원태왕때와 같이 외척 주씨의 힘을 인정하고 눈치를 보면서 정국을 이끌어갔다.
그런데 돌궐과의 전쟁이 잠시 멎자 친 주씨가문 계열 군대는 전선에 주둔시키고 태왕를 지지하는 왕실세력의 군대와 주씨가문에 눌려있던 대로세력의 군대를 은밀히 평양에 불러들였다. 그리고 10월 오늘 태왕는 주씨가문 제거를 명령하는 친위 반정(反正)을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주씨가문은 동맹제라는 큰 제천행사를 앞두고 있었던 시기였고 태왕 자신도 어머니, 그리고 태왕의 아내이자 태자와 명화공주의 어머니도 역시 주씨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가문을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없다는 두 생각에 방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신속한 태왕의 계략에 강대했던 주씨가문은 저항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으니 한마디로 허를 찔린 것이었다.
사실 역모죄는 태왕께서 씌운 누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역모를 꾸몄다면 평양에 병력이 숨겨두었을 것이고 이 정도로 무기력하게 당했을 리가 없었다.
태왕의 이번 결정에는 굉장한 문제가 있었다. 보통은 죄인들을 심문하고 증거를 모아서 죄의 경과를 논하고 처벌이 이루어져야한다. 즉 법대로 이루어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냥하듯이 주씨 가문의 남자는 나이를 불문하고 체포 즉시 처형, 성인여자도 처형, 나머지는 모두 감금한다는 것은 고구려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멸문지화였다.
이런 무리수에는 주씨가문이 심어놓은 지방 세력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들에게 하루라는 시간만 주어도 지방에 반란을 일으켜 선대 양원태왕때처럼 전국적인 내란이 발생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왕은 이 무리수도 다 계산 되었다. 사실 그가 입궐할 때 그는 기뻐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주씨가문의 세도에 진짜 피해자는 태왕보다는 백성들이다. 그들의 수탈에 분노를 갖고 있던 백성들은 자진해서 주씨가문의 집들을 돌면서 태왕의 비정상적인 명령을 빈틈없이 수행했다. 고흘이 본 백성들은 몽둥이로 자신들의 고혈을 짠 주씨일족의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때려죽이고 있었다. 즉 태왕이 어떠한 행동을 해도 민심이 용납할 수 있도록 상황이 조성되어있었던 것이었다.
고흘은 태왕께서 즉위하고 6년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은 태왕의 어머님이신 태후의 3년상을 기다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올해 여름 어머니의 3년상이 끝나고 나서 태왕께서는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도 엄밀하게 주씨가문이셨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도전한다는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한 기다림에 시간이었다.
주씨가문은 태왕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의 가문이니까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태왕께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철저한 계략과 기다림으로 왕권강화와 국가안정에 걸림돌이 되는 주씨가문의 제거를 완벽하게 이루었다.
이제야 고흘은 자기가 왜 평양에 소환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소환도 주씨가문 제거에 관련 있을 것이다.
동부대인 고성과 북부대인 구성이 일을 벌이면 자신이 군을 동원해서 마무리하라는 뜻.
하지만 고흘은 태왕의 명령을 따를 수는 없었다. 물론 그는 부패한 주씨가문이 불쌍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고흘 자신의 막내아들은 주씨가문 때문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고흘같은 양식적인 사람도 마음 한쪽에는 주씨가문 몰락을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반대쪽은 주씨가문의 피가 섞여있는 태자와 명화공주님의 앞일을 위해서라도 왕후를 지켜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왕후를 지켜드리지 못한다면 어린 태자와 공주님은 ..........’
중궁밖에 계신 어린 태자와 명화공주의 울음소리가 고흘의 귀에 들렸다.
“흐흑 아버님....어머님을 살려주십시오..흐으윽.”
침묵하던 고흘장군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글쓴이, 저작권자 김원식
이 소설에서 시나리오 각색, 도용, 표절을 절대 금합니다.
첫댓글 아,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앞으로도 건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주 금요일날 올리고 다음부터는 한주에 한편씩밖에 못올릴 것같습니다. 너무 분량이 많아서 부담되내요.(일은 해야 되니까!) 금요일은 아마 온달과 공주가 만나기 바로직전에 끝날 것같습니다.
"침묵하던 고흘장군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와 같이 다음에 이어지지 않는게 싫을정도로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근데 3줄 밑에 오타가있네요 "태왕패하만세"
지적 너무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