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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내시 김처선(이글 픽쳐스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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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영화 <왕의 남자>가 쾌속 항진하고 있다. 무한질주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가지고 있던 흥행 랭킹 1위의 기록을 탈환했다. <왕의남자>가 왕으로 등극하며 우리나라 영화사를 다시 쓰고 있다.
이렇게 <왕의 남자>가 뜨자 덩달아 연산군에게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왕 이전에 성종과 윤비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 융(諱)에게 연민의 정을 보낸다. 시대를 넘나들며 백성과 국민들에게 회자되는 연산군은 어디에 잠들어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조선왕조에는 42릉 2묘가 있다. 그 2묘 중에 하나일 텐데 찾아봐도 짚이는 게 없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비공개로 관리되고 있다는 것 뿐 별다른 정보가 없다. 서울시 홈페이지를 따라 도봉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우리 고장 사적지로 방학동에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택시를 타고 기사 아저씨에게 방학동 연산군 묘 아느냐고 물으니 잘 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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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었으되 폐주가 되어 유배지에서 죽었기 때문에 홍살문이 없고 철문이 굳게 잠겨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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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택시기사 아저씨가 내려준 바로 그곳에 제법 규모가 큰 묘역이 있었다. 폭군으로 낙인찍힌 연산군 묘가 이렇게 잘 가꾸어져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가까이 가보니 연산군 묘가 아니다. 세종대왕의 둘째딸 정의공주 묘였다.
동네사람에게 물으니 길 건너 야트막한 산자락에 연산군 묘가 있단다. 12년을 재위한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폐출되어 유배지에서 죽었고 임금이 아니라 군으로 강등되었으니 택시기사 아저씨가 헷갈릴 만하다.
어렵게 찾아 연산군 묘에 도착하니 문이 굳게 잠겨있다. '무단출입하는 자는 2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경고문까지 붙어있다. 난감하다. 취재본능이 발동되어 철조망을 넘을까도 생각해봤지만 유물이 묻혀있는지는 모르지만 도굴범으로 몰릴까 두렵다.
연산군 묘를 관리하고 있는 태강능 관리사무소에 문의하니 묘역이 협소하고 정비가 안 되어서 훼손 염려가 있으므로 비공개로 관리하고 있단다. 단, 학술조사와 취재에는 신청을 받아 처리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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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조망에 갇혀있는 연산군 묘. 연산은 죽어서도 철창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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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철조망 사이로 묘역을 살펴보니 초라하기 짝이 없다. 왕위에 있었으나 군으로 강등되어 유배지에서 죽었으니 그러하리라. 왕이 묻혀있는 곳이 능(陵)이다. 공주와 왕자가 묻혀있는 곳이 원(園)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묻혀있는 이곳은 연산군 묘라 불린다.
재위 12년을 만인지상의 자리 용상에 있었지만 폐주가 되어 강화도로 쫓겨났고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 42능 2묘 중 공교롭게도 2묘는 강북에 있다.
연산군은 거기에 그렇게 쓸쓸히 묻혀있었다. 아버지 성종과 동생 중종은 황금 땅 부자동네 강남 선릉에 잠들어 있는데 연산은 능(陵)이라는 문패도 달지 못하고 도봉산 자락에 누워있다. 부자지간과 형제지간으로 태어나 다 같이 군주의 자리에 있었지만 사후의 위상은 이렇게 판이하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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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 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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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이튿날. 묘역에 들어서니 햇살이 따사롭다. 3월의 햇빛을 받으며 연산군이 누워있다. 조선조 518년을 관통하는 조선 역사에서 희대의 폭군으로 지목받은 연산군이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와 나란히 잠들어 있다.
중종반정으로 강화도에 위리안치 된 연산은 그곳 교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역사는 그의 죽음을 병사(病死)라 기록하고 있지만 유배 3개월 만에 31세의 젊은 장정이 죽었다.
그의 사후 7년 되던 해, 연산군과 함께 중전에서 거창군부인으로 강등된 부인 신씨가 시동생 중종에게 이장을 요청했다. 강화도 교동에 묻혀있는 연산을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 능성 구씨 묘역으로 이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를 중종이 가납하여 이곳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493년을 이곳에 누워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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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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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왕위에 있었으나 군으로 강등되어 죽었으므로 여타의 왕릉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우선 입구에 홍살문이 없다. 또한 왕릉에 있는 병풍석과 석양(石羊), 석마(石馬)와 무인석이 없다. 그리고 왕릉에 없는 향로석이 중앙에 버티고 있다. 왕릉은 제사각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연산군 묘는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3월의 햇살이 따사롭다. 원혼이 된 연산이 햇볕을 쪼이기 위하여 양지에 나와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나라에서 어머니 윤씨에게 원수를 갚아주어 고맙다는 얘기를 들었어요?"라고 물으니 "만나보지 못하여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것 같다.
"대궐에서 벌어진 광란의 굿판이 마마 콤플렉스라는 것을 인정하세요?"라고 재차 물으니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영화 <왕의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니 "나도 그 때 가 영화 찍는 일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역사는 역사고 영화는 영화야..."라고 말하며 슬픈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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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입구 계단. 왕릉이나 대군묘는 돌계단으로 되어있으나 연산군묘는 나무계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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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연산군 묘를 뒤로하고 나무계단을 내려오는데 연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길은 멀고 땅은 미끄러워 다니기 어려운데/ 충성심 가시지 않아 대궐에 나왔구려/ 비노니, 어진 정승들이여 나의 잘못을 살펴주고/ 복령과 대춘처럼 오래오래 사시오"
감성이 풍부한 연산이 지었다는 시(詩)다. 연산군이 지은 시는 대부분 불태워졌지만 실록 <연산군일기>에 몇 편이 남아있다. '나의 잘못을 살펴 달라'는 군주도 폐주가 되어 지하에 묻혀있고 군주가 복령과 대춘처럼 오래오래 살아달라고 기원했던 정승들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역사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계단을 다 내려왔는데 또 한편의 시를 읊조리는 것 같다.
"바람 이는 강에/ 물결 타고 건너기 좋아마오/ 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으리오"
연산은 이 시를 지은 지 딱 2달 후 반정군에 의하여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패악을 저지르면서도 인간이기에 고뇌하는 모습이 심저에 깔려있다. 어쩌면 자신의 최후를 예견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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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령 830년 된 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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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묘역을 빠져나오는 길목에 높이 24m 둘레 9.6m에 이르는 860년 된 노거수가 연산군 묘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늙고 병들어 축 처진 가지는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고 푹 파인 몸통은 시멘트로 덕지덕지 덧옷을 입고 있다. 그렇지만 살아있다. 봄이 되면 새잎이 돋아난다.
500여 년 전 사람 연산은 그를 왕위에서 밀어낸 반정공신들의 입김이 서린 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연산군 일기>에 폭군이란 딱지가 붙어 화석처럼 굳어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학습한 후세들은 그를 폭군이라 기억하고 있다. 이제 그를 양지로 끌어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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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묘라고 새겨진 표지석. 연산이 철창에 갇혀있는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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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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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묘도 그렇다. 책에서 만난 그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국민에게 주어야 한다. 이것이 살아있는 역사교육 현장이다. 문화재와 사적지는 보존만이 능사가 아니다. 유럽의 고성(古城)들은 활용하면서 보호한다. 이번에 국보 1호 숭례문 중앙통로 홍예문을 일반에게 공개한 것처럼 연산군묘도 일반에게 공개했으면 좋겠다.
이 글은 [오마이 뉴스] 이정근 기자의 글을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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