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을 고치기 위한 두 번째 말씀
열왕기하 5:1-7 94, 199, 204, 559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처음 가정은 곧 작은 교회요 작은 국가였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는 가장 중요한 곳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서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게 하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므로 아담의 행복한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진 가정을 다시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아담은 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창5:3) 하나님께서 셋으로 인하여 무너진 아담의 가정을 믿음의 대를 이어가게 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한 가정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아만의 가정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나 행복한 가정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나병환자였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이 있으면 가정이 행복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1절에 ‘이에 여호와께서’라는 말씀은 군대 장관 나아만이 나병환자가 된 것도 여호와께서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행한 나아만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가정, 천국에서 안식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불행한 나아만의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 주시는 그 일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서 사로잡아온 어린 아이에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어린 여종은 나아만의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아람의 신 림몬을 섬겼던 나아만이 나병을 고침 받고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아나이다’(15)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여종이 전해 준 말대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의 가정은 하나님을 섬기는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어린 여종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면서 주인이 나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에 선지자 엘리사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여주인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3)
오늘의 불행한 가정을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이와 같은 어린 여종처럼 해야 합니다. 사탄에게 매여 귀신을 섬기는 자가 있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중에 버려진 자를 보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성경에는 나병을 죄로 형벌로 저주 받은 무서운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 입니다. 죄로 인하여 받게 될 영원한 지옥형벌은 나병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운데 버려진 부모나 형제가 있다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이 지옥불 속에 던져져 고통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불쌍한 자들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지옥형벌을 받을 것을 알고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린 여종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나아만을 미워하고 저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고치기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죄중에 버려져 있는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죄인도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옥 불속으로 던져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사람이 용서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종처럼 그 말씀을 지옥불 속에 던져질 부모 형제에게 전해야 합니다.
나아만의 아내는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남편이 나병환자였기 때문에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나병환자였기 때문에 여주인은 어린 여종의 말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남편이 나병환자가 아니었다면 매우 교만했을 것이며 여종의 말 따위는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벨기에 대사 부인이 백화점 종업원에게 폭행을 했다고 합니다. 교만이 넘쳤습니다. 군대 장관의 부인도 그와 같은 교만한 장관 부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나병환자였기에 교만하지 않고 어린 여종의 말을 들었고 그래서 불행한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여주인이 남편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기록이 없다고 해서 여주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것을 다 했을 것입니다. 림몬 신에게도 빌어 보았을 것입니다. 좋다는 의원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종으로부터 주인의 나병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그 때에 그 말에 믿음이 갔습니다. 곧 바로 남편에게 여종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감동이 오고, 저 말씀을 누군가에게 전해주어야 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여호와께서 주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그에게 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무시하고 전하지 않으면 다시는 그러한 기회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죄로 인하여 지옥형벌 받을 불쌍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와 여러분들이 함께 일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함께 그 일하지 않을 것 입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사로잡아온 어린 여종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가 자기의 나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아만에게는 자신을 고치고 살리는 복음이었습니다. 자신을 구원 받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말을 왕에게 전했습니다. 아람 왕도 이스라엘을 치고 승리하여 강대국이 되었지만 군대 장관 나아만이 나병환자였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나아만은 왕에게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 이러 하더이다’ 라고 말했습니다.(4) ‘이러 이러 하더이다’라는 말은 여종이 한 말을 가감하지 않고 전했다는 것을 강조해 줍니다.
아람 왕은 그 말을 듣고 당장 나아만에게 ‘갈지어다’(5)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5) 은 십 달란트는 약 343kg(저의 몸무게의 약 60배정의 은)이고, 금 육천 개는 약 68.4kg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옷 열 벌을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아람 왕이 보낸 예물은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예물을 주고 보냈습니다.
아람 왕이 이렇게 한 것은 군대 장관 나아만의 나병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증거입니다. 나아만은 왕이 주는 편지와 예물을 병거에 싣고 종들과 함께 이스라엘 왕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여종이 전해 준 말에서 어긋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 종은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지 않고 이스라엘 왕에게로 갔습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아람 왕이 이렇게 한 것은 병든 나아만 장관이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진심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칭찬을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어린 여종의 말을 듣고도 그 말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더 좋게 더 많은 것을 한 것 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나병을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왕이 오해를 하고 화를 내고 옷을 찢기까지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7)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아람 왕이 보낸 예물을 보고 욕심이 생겨 엘리사를 속이고 거짓말을 하므로 나병환자가 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27)
여종은 ‘우리 주인이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그가 그 병을 고칠 것’(3)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종은 왕의 편지나 예물을 많이 가지고 가야 나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람 왕은 여종의 말을 듣기는 바로 들었지만 그 말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했습니다. 아람 왕은 하나님의 사람이 베푸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종의 말 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나아만을 고치고자 했다고 봅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6)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보낸 편지를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고 하며 분노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옷을 찢는 것’은 극한 슬픔이나 분노를 표현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크게 분노 했습니다.
그리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7)고 하며 아람 왕이 보낸 많은 예물을 보고 오히려 오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치기는 고사하고 이스라엘 왕과 아람 왕과의 관계가 더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왕에게 어린 아이보다도 못한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람 왕보다도 믿음이 더 없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병든자를 고치고 기적들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이러한 일들을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다면 나아만을 엘리사에게로 돌려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에게로 가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었다는 말을 듣고 엘리사는 ‘왕이 어찌하여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8)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라는 말은 어린 여종이 한 그 말대로 나아만을 ‘내게로 보내라’는 말을 했습니다.
잘못 된 길로 간 나아만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아만은 여종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엘리사에게 가면 그의 병은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행한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그제야 나아만을 엘리사에게로 보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무시하고 내 맘대로 살았다면 지금이라도 말씀대로 돌아와야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가정이 행복할 것이며 나아가 영원한 가정에서 영원히 안식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들이 성경말씀에서 벗어난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그림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이고 기도 합니다. 심방을 갔더니 벽 한 가운데 나무 십자가를 걸어 놓고 그 앞에 작은 상에 성경을 펴 놓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그 앞에 무릎 굻고 앉아서 기도한다는 성도를 보았습니다.
불교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천주교에서도 작은 아기예수 동상의 머리에 쪽박으로 물을 떠서 부어주는 의식이 있습니다. 아들 예수보다는 성도 마리아가 더 모성이 있고 자비롭다고 해서 마리아 그림이나 동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 합니다.
서울에 어떤 교회는 예배시간에 한복을 잘 차려 입은 권사들이 강당에 올라가서 몇 사람이 몇 절씩 돌아가며 설교할 성경을 봉독 합니다. 그 교회 예배가 은혜스럽고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가 부흥이 됩니다. 그러나 좋은 방법인 것 같지만 잘못된 예배입니다. 잘 믿으려고 하지 마시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하는 교회나 성도가 믿음이 좋은 것 같으나 성경에서 벗어난 미신과 같은 믿음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대로 믿어야 올바른 믿음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돌아 와야 불행하게 만든 모든 것 고침 받고 더 큰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대로 믿읍시다. 그래서 고침 받고 구원 받고 하늘나라 영원한 집에 들어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