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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배드민턴 루이 레이커시코리아 원문보기 글쓴이: 라임나무
<2016 리우 올림픽에서 일본 여자단식조가 금메달을 확정하는 순간 박주봉 감독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주 '셔틀콕의 황제 박주봉을 말한다'편에서는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꼬마가 어떻게 세계 배드민턴계를 지배하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지를 다뤘다. 이번에는 현역에서 은퇴한 박주봉이 지도자의 길로 나선 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특히 일본 배드민턴 국가대표팀을 이끌게 된 박주봉은 지난해 리우 올림픽에서 일본 배드민턴 역사상 첫 금메달을 따내면서 현역 시절 못지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국 배드민턴이 리우에서 '노 골드'에 그쳤기에 더욱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배드민턴은 이제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박주봉이 이끄는 일본 대표팀과 건곤일척의 마지막 대결을 펼쳐야만 한다. 한국이 낳은 세계 배드민턴의 레전드가 왜 정작 고국의 대표팀 사령탑으로는 활동할 수 없었는지, '지도자 박주봉'이 걸어왔던 길을 더듬다보면 우리는 그 의문과도 만나게 된다.
◇전영오픈의 고향 영국, 배드민턴이 국기인 말레이시아에서 지도자의 첫 발을 떼다
영국은 배드민턴의 고향으로 통한다. 1820년 경 인도 봄베이 지방에서 성행했던 민속 경기 푸나(Poona)가 인도에 주둔중이던 영국 장교들에 의해서 본국에 알려졌고 이후 규칙 등 체계를 잡아 지금의 배드민턴이 됐다. 그런 연유로 1970년대 후반 세계선수권대회가 시작되고 1992년 올림픽 정식 종목에 채택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전영오픈은 세계배드민턴계의 최고 권위 메이저 대회로 인정받았다. 박주봉은 현역 은퇴 이후인 1997년 배드민턴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애틀랜타 올림픽이 끝나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뒤 향후 진로를 구상하면서 나는 국제 배드민턴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배드민턴계의 최고 국제기구인 세계배드민턴연맹(BWF)에서도 언젠가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영어를 잘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은퇴 이후 지도자 생활을 영국에서 시작하게 된 것도 영국 대표팀을 가르치면서 현지에서 학업도 병행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현지에서 박사 과정을 들어갈 계획도 세웠다. 박사 과정 입학을 염두에 둔 대학의 관계자와 미팅도 가졌다. (지도자 영입을 제의했던)영국배드민턴협회가 그 대학과 연결도 해줬다. (박사 과정을 하기 위해서는)일단 영어가 먼저 잘 돼야 하니까 랭귀지 스쿨을 다녔다. 별도로 개인 영어 교습도 받았다. 처음에는 영국 대표팀에 복식 헤드코치로 부임해서 풀타임으로 훈련을 시켰는데 학업을 병행하려다 보니 일주일에 3~4회 정도 가르치는 방식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어가 그렇게 빨리 느는 것만은 아니더라. 현지에서 박사 과정을 제대로 밟는게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박주봉을 당황시켰던 것은 비단 영어만은 아니었다. 영국 대표팀 선수들의 훈련 방식은 우리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자율적이었고 개인훈련과 사생활이 많이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박주봉은 영국 대표팀의 분위기를 인정하면서도 한국적 특성을 접목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끝에 2년 6개월여 동안의 영국대표팀 지도자 생활중 유럽선수권대회 남자복식 우승, 전영오픈 혼합복식 우승, 세계선수권대회 남자복식 동메달과 혼합복식 은메달 등의 값진 성과를 남기게 됐다.
영국에 이어 말레이시아에서 영입 요청이 왔다. 영연방인 말레이시아에서는 배드민턴이 '국기'로 통한다. 또 BWF의 본부가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등 명실상부한 세계 배드민턴계의 중심국가였다. 언젠가 BWF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박주봉에게는 놓치기 싫은 기회였다. 그는 1999년 10월부터 말레이시아 대표팀에서 일하게 된다.
"영국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말레이시아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말레이시아는 실력으로도 강국이었고 BWF 본부가 있는 등 행정적으로도 세계 배드민턴계의 중심국가였다. 이런 곳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번 한다면 상당히 도움이 되고 경험이 쌓이겠다는 판단에서 영국협회의 양해를 구해서 말레이시아로 갔다. 처음에는 복식 헤드코치로 갔는데 나중에 대표팀 감독으로 승격했다. 말레이시아에서 배드민턴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한마디로 국기였다. 미디어의 관심이 엄청났고 최고 인기종목이었다. 평상시의 대표팀 훈련에도 기자들이 상시적으로 취재를 올 정도였다. 대표선수들이 부상만 당해도 스포츠신문 1면에 나왔다. 배드민턴 기사들이 매일매일 쏟아졌다. 국내에서는 비인기종목이었고 영국에서도 배드민턴이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엄청난 관심을 많이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워낙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다보니 솔직히 어깨가 으쓱하는 기분도 들었다. 한마디로 일할 맛이 났다. 반면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도 엄청났다. 부담감도 컸다. 미디어에서는 성적이 좋으면 한껏 치켜올렸다가 성적이 나쁘면 가차없이 비판을 해댔다. 행복했던 만큼 결과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도 많았던 시간이었다."
2001년 동남아시안게임에서 라이벌 인도네시아를 꺾고 10년만에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2002년 영연방게임에서는 역대 최고인 4개의 금메달을 따내는 등 말레이시아 대표팀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이후 박주봉은 한국 국가대표팀과 짧은 인연을 맺게 된다.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앞둔 한국 대표팀에게 '복식의 필살기'를 전수해주기 위해서 파트타임으로 합류한 것이다. 이 6개월 남짓의 대표팀 생활이 한국이 낳은 '셔틀콕의 황제'가 태극마크를 단 후배들을 직접 가르쳤던 전부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박주봉(왼쪽에서 세번째)이 유일하게 한국대표팀 후배들을 가르쳤던 시절. 김중수(왼쪽에서 네번째) 감독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연합뉴스>
"3년반 정도 말레이시아에서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계약이 끝났다. 이후에는 BWF에서 구상하는 배드민턴 아카데미 관련 일을 하려고 했다. 당시 독일 불가리아 중국 등에 BWF가 운영하는 트레이닝 센터가 있었다. 같은 방식의 센터를 쿠알라룸푸르에 만드는 계획이 있었고 나는 지인들을 통해서 그 프로젝트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동시에 BWF 순회코치를 맡아 남미 등 배드민턴이 약한 나라들을 돌면서 클리닉을 하러 다녔다. 그러던 차에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배드민턴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복식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서 단기적으로 복식 담당 코치를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고국의 후배들을 돕는 일이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김중수 감독 밑에서 성한국 선배가 단식 코치를 맡고 내가 복식을 담당하는 구조였다.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까지 선수들을 가르쳤다. 아테네 올림픽 현장에는 방송(KBS) 해설위원으로 가게 됐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배드민턴협회 관계자는 "지금도 올림픽 등 주요 대회를 앞두고는 대표선수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대표팀 코칭스태프들 이외에 별도의 훈련전담 코치를 추가로 보강하기도 한다. (박주봉은)본선이 열리기 전까지 파트타임으로 훈련만 전담하기로 협회와 합의를 해서 합류했던 것으로 안다"고 기억했다.
박주봉은 한국대표팀에 합류한 직후 가진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그동안 외국에서만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한국 대표팀을 지도하게 돼서 뿌듯하다. 올림픽을 4개월 가량 앞둔 시점에서 합류하게 돼 부담도 많이 되지만 후배들을 지도하니까 기분도 좋고 보람도 느낀다"는 감회를 밝히기도 했다.
◇한국이 낳은 레전드, 일본에서 '박주봉 매직'을 만들다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이후 박주봉의 지도자 행보는 운명적으로 일본과 연결된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뒤 일본배드민턴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일본 대표팀에는 한국 국가대표 출신 후배 박성우가 코치로 있었다. 일본협회는 박성우를 통해서 나를 대표팀 감독으로 초빙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제안을 받고 고민이 컸다. 마침 쿠알라룸푸르에 계획중이던 BWF 트레이닝 센터 건립 문제도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또 BWF 순회코치도 일종의 클리닉을 담당하는 것인데 1년 반 정도 그 생활을 하다보니 배드민턴의 톱클래스 대회와는 많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 됐다. 현장 복귀가 더 늦어진다면 국제 배드민턴계의 최신 흐름을 쫓아가기 힘들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일본이 당시만해도 상당히 전력이 약했지만 이런 팀을 맡아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판단하게 됐다."
<일본대표팀을 맡았던 초창기 2005년에 코리아오픈 출전을 위해서 방한했을 때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어찌 보면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 배드민턴은 실력면에서 한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박주봉 자신도 고 1때 출전했던 한일 고교 교환경기에서 일본 고교랭킹 1위인 3학년생과의 맞대결을 승리로 이끌면서 크게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전편에서 이미 소개했다. 박주봉을 필두로 한국 배드민턴이 세계 정상권으로 도약하는 사이 일본은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일본팀을 맡았을 때 일본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조금 나약한 면이 있었다. 국제대회라는 것은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이기려고 가는 것이고, 성적을 내기 위해서 가는 것인데 그런 절박함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마음자세, 정신자세 이런 것부터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다. 훈련도 마찬가지였다. 대표팀에 소집되면 그냥 훈련만 하다가 간다는 느낌이었다. 훈련을 할 때도, 국제대회에 나설 때도 성과와 결과를 내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이 필요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훈련 여건도 좋지 않았다. 대표팀을 위한 체육관 시설, 트레이닝 센터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 스포츠과학연구원 소속 체육관에서 다른 종목의 훈련이 없는 시간대를 빌려서 운동을 했다. 2008년 1월이 되서야 내셔널 트레이닝센터가 만들어졌고 배드민턴도 전용 체육관이 생겼다. 이곳에서 항상 합숙훈련을 하면서 말하자면 한국식 훈련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예전에는 국제대회를 앞두고도 사나흘 훈련을 하고 가던가 심지어 공항에서 만나서 떠난 적도 있었다. 일본에서 첫 국제대회 4,5개를 출전했는데 대회마다 사나흘씩 모여서 훈련을 하고 갔으니 성적이 나올 수가 없었다. 또 일본 배드민턴계가 클럽 위주로 운영되다보니 대표팀 코치들도 모두 클럽팀 소속 코치들이 대회때만 모여서 잠깐 지도하다가 (소속팀으로)복귀하는 일이 반복됐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애정이나 성적에 대한 목표 등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월급을 주는 소속팀에 더 신경을 썼고 대표팀에 대한 책임감이 떨어졌다. 그래서 한국처럼 대표팀 전임코치제를 도입하기 위해서 애썼다."
박주봉의 노력으로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은 서서히 체계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성적도 조금씩 향상됐다. 일본 체육계도 이런 변화를 주목하면서 배드민턴 종목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려나갔다.
"2004년 아네테 올림픽때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은 총 12명이 출전했는데 11명이 1회전에서 탈락했다. 내가 맡은 이후 첫 올림픽이었던 2008 베이징 대회에서는 4위가 1명, 8강이 2명, 16강이 3명이 나왔다. 비록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4년 전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자 일본올림픽위원회에서도 배드민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처음으로 대표팀 전임코치를 2명 둘 수 있었다. 지금은 전임코치가 4명으로 늘어나 각기 남녀 단식과 남녀 복식을 전담한다. 대표팀 상비군에도 전임코치를 2명 둘 수 있게 됐다. 대표팀 전담 물리치료사나 비디오분석관도 생겼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총 12개 종목이 집중 육성 종목으로 선정됐는데 베이징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종목 가운데는 유일하게 배드민턴이 선정됐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이런 지원 아래 4년간 칼을 갈았던 박주봉은 2016 리우 올림픽에서 드디어 큰 '사고'를 쳤다. 일본 배드민턴 역사상 첫 배드민턴 금메달을 여자복식(마쓰토모 미사키-다카하시 아야카)에서 따낸 것이다. 여기에 오쿠하라 노조미가 여자단식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박주봉 매직'이었다. 박주봉은 당초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2020 올림픽때 금메달 획득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금메달을 따낸 직후 현지 인터뷰에서 "(올림픽 출전이 처음인 마쓰토모-다카하시가)리우에서 경험을 쌓으면 4년뒤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수들이 너무 잘해줬다. 4년 빠르게 금메달을 딴 것"이라고 말한 이유다.
◇'감독 박주봉'은 왜 한국에 오지 못했을까
우리는 이제 여기서 이 글의 주제 부분을 다뤄보고자 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배드민턴 레전드인 박주봉이 왜 한국 대표팀과는 지도자로서의 인연을 맺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을 풀어본다. 박주봉이 현역으로 은퇴한 이후의 궤적을 추적하다보면 그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다. 은퇴 이후 박주봉이 지도자로서의 변곡점을 맞을 때마다 '한국 대표팀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접점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서 언젠가 그가 한국 대표팀을 맡을 수 있을지의 가능성을 마지막으로 탐색해 보자.
<박주봉 감독이 리우 올림픽에서 여자복식 금메달을 따낸 마쓰모토-다카하시 조를 격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먼저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이 끝나고 박주봉이 현역에서 은퇴한 뒤 국가대표팀에 코치로 합류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수 있다. 전편에서 살펴봤듯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박주봉은 1차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이후 모교인 한체대에서 조교 등으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4년동안 대한배드민턴협회의 요청으로 현역복귀와 은퇴를 두차례 반복하게 됐지만 이미 한체대에서 지도자로 활동했기에 자격은 충분했다. 한체대 스승이기도 한 박기현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은 박주봉이 이미 지도자로서도 좋은 자질을 당시 보였다고 증언했다. 박 회장은 "주봉이가 이미 한체대 4학년때부터 후배들의 운동을 지도해줬다. 지도하는 것이 무언가 달랐다. 경기를 보는 눈이 있었기에 한마디,한마디가 후배들을 혹하게 만들었다. 어떤 것을 지적해주고, 어떤 것에 변화를 줘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어떤 이론이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가르치는 것에)동물적인 감각이 있었다. 이것은 오랜 노하우와 감각이 있어야 가능하다. 단지 이론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다. 주봉이는 그때부터 그런 점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박주봉 스스로가 당시에는 아직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합류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은퇴 직후에 대표팀 코치 합류에 대해서 (배드민턴협회와)비공식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내 스스로가 선수 은퇴 직후였고 좀더 지도자 수업을 제대로 받으면서 (코치 이론을)정립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아직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합류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내 스스로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배드민턴협회랑 협의 과정을 통해서 영국으로 간 것이다."
박주봉은 당초 학업과 지도자 수업(영국 배드민턴대표팀 코치)을 병행하기 위해서 영국으로 갔다. 그러다가 말레이시아 대표팀으로 가게 된다. 이때 한가지 변수가 생겼다. 영국에 갈 때에는 한국 협회와 협의를 한뒤 결심을 했는데 말레이시아로 옮길 때는 그 과정이 생략됐다. 박주봉 개인의 독자적인 판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혹시 대한배드민턴협회가 그에게 '섭섭한 감정'을 가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영국에 갔을 때는 우리 협회랑 충분히 협의를 하고 갔다. 영국에는 돈을 벌려고 간 것은 아니다. 영어 공부하고 지도자 수업받는게 주 목적이었다. 그런데 (영국협회랑)계약을 내가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다보니 계약 조건이 조금 엉망이었다. 한달 생활비를 쓰고 집세를 내면 통장 잔고가 제로가 되는 상황이었다. 영국에 있으면서 내가 나서서 추후로 계약 조건을 몇개 변경했지만 아무튼 열악한 환경이었다. 아무리 공부가 목표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힘들었다. 그런 차에 말레이시아에서 (영입)제안이 온 거였다. 그래서 우리 협회와는 별다른 협의없이 그쪽으로 옮기게 됐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판단할 때 박주봉이 한국대표팀과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는 아테네 올림픽을 전후했던 때였다. 당시 실제로 아네테 올림픽을 앞두고 박주봉은 국가대표팀 복식전담코치로 합류해서 대표 선수들을 지도했다. 그러나 앞서 밝힌대로 일종의 '파트 타임'이었기에 아테네 올림픽에는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직후 결국 일본으로 행선지를 정하게 된다.
"아테네 올림픽 직전에 대표팀에 잠시 합류했다. 그 당시에 우리 협회와 (향후 진로에 대해서)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갔다면 또는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 향후 계획에 대한 진전된 논의가 있었다면 일본에 안 갈 수도 있었을 것같다. (우리 협회와는)아무런 이야기가 없던 상황에서 올림픽이 끝난 뒤 일본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래서 2004년 11월부터 일본 대표팀에서 일하게 됐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2005년 5,6월께 협회에서 대표팀에 합류해 줄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이미 일본과 계약기간이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협회에서는 일본협회와의 계약 문제는 우리쪽에서 어떻게 해결해 줄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내 개인으로는 약속과 계약은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박주봉이라는 이름이 국제 배드민턴계에 갖고 있는 위상과 이미지도 있는데 한번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지금 상황에는 (한국에)못 들어갈 것같다고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또 한번의 변곡점이 생겼다. 베이징올림픽이 열리기 전 일본에서 열렸던 일본오픈 당시 대한배드민턴협회 관계자가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관계자가 박주봉을 만나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는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느냐고 타진했다고 한다. 박주봉이 한국대표팀과 접점이 생길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또다시 불발로 끝나고 만다.
"일본오픈때 현장에서 만난 우리 배드민턴협회 관계자가 베이징 이후에는 들어올 수 있느냐는 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협회 관계자와 나는)현장에서 딱 한번만 그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그 이후 (협회와)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오케이'를 했기에 마음에 부담이 있었다. (우리 협회에서)공식 오퍼가 오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박주봉 감독이 일본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베이징 올림픽이후 한국에서 박주봉에게 대표팀 관련 공식 오퍼를 했다면 과연 그가 들어왔을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박주봉은 "오케이를 했기에 (한국 복귀에 대한)마음의 부담이 있었고 고민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구체적인 제안이 있었다면 귀국했을 수 있었다는 뉘앙스였다. 아무튼 한국 배드민턴과 박주봉의 접점은 이렇게 또 한번 불발이 됐다.
마지막 접점을 향한 시도는 지난 해에 있었다. 바로 박주봉을 한체대로 직접 스카우트했던 박기현 현 회장이 지난 해 엘리트와 생활체육을 총괄하는 통합 배드민턴협회 수장에 오른 것이다. 박기현 회장과 박주봉은 사제 이상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 회장도 필자와 인터뷰를 할 때 자연스럽게 "주봉이,주봉이", 이런 표현을 많이 썼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애제자를 친아들처럼 아끼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박 회장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 "주위에서도 내가 회장을 하고 있을 때 주봉이를 한번 데리고 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리우 올림픽이 끝난뒤)우리 대표팀을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리우 올림픽에서 한국 배드민턴은 동메달 하나(여자복식)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대표팀 지도 체제의 개편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반면 박주봉은 일본 배드민턴에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기면서 지도자로서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다시 박주봉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는 한국 복귀에 대해서는 언제나 많은 고민이 있었다. 사실 2015년 9월쯤에, 아직 리우 올림픽이 열리기 한참 전이었는데 일본배드민턴협회에서 도쿄올림픽까지 팀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나에 대해서 신뢰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리우 올림픽에서 어떤 결과를 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쿄까지 맡아달라고 먼저 요청했으니 말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나에게 (대표팀에 대해서)제안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연한 것 아닌가. (당시 대표팀이)리우 올림픽에서 어떤 결과를 낼지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결국 리우 올림픽이 끝나고 스승인 박기현 교수님이 마침 배드민턴협회장이 된 상황에서 10월 초 한국에 들어갔을 때 (박 회장이)대표팀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주셨다. 그런데 사실 그때 나는 일본협회와 도쿄까지 가기로 계약이 돼 있는 상황이었다. 또 아이들 교육 문제도 걸려있었다. 회장님은 내가 일본에서 했던 시스템 그대로 한국에서도 할 수 있게 협회에서 최선의 지원을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미 일본협회와 도쿄 올림픽까지 하기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나도 언제간 한번은 한국대표팀을 맡고 싶다는, 또는 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다. 왜 없겠는가. 하지만 (제안을 받았던)그때 상황이 그랬다. 그래서 정말로 어렵게,어렵게 이번에는 안되겠다고 고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이 그해 12월에 내 재계약을 공식발표했다. 그때 제주에 열렸던 대회에 참가하러 한국에 갔을 때 다시 한번 박 회장님에게도 죄송하다고 사과말씀을 드렸다."
이렇게 박주봉과 한국배드민턴의 접점을 연결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은 최종적으로 불발됐다. 한국은 결국 배드민턴 대표팀 코칭스태프의 세대교체를 단행하는 카드를 썼다. 강경진(44)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강 감독은 박주봉이 현역으로 복귀해 최고참으로 마지막 혼을 불사르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 멤버에서 막내였다. 배드민턴협회는 일단 강 감독에게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까지 지휘봉을 맡긴 뒤 소정의 성과를 내면 도쿄 올림픽까지 팀을 맡길 계획이다. 애틀랜타 올림픽때 한국 대표팀의 최고참과 막내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운명의 맞대결'을 펼친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과연 도쿄 올림픽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까. 박주봉에게 한국과 일본의 기량 차이를 한번 물어봤다.
"내가 처음 맡았을 때는 일본이 한국과 상대가 안됐다. 엄청난 실력차가 있었다. 지금은 근접했다고 본다. 비슷비슷한 수준이 됐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이 조금 위라고 보지만 일본도 엇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왔다. 최근의 국제대회 결과도 양국간의 비등비등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남자는 아직 한국이 일본보다 근소하게 앞서고 있다고 본다. 여자는 이제 한국과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 됐다."
4년 뒤 도쿄에서 다시 한국대표팀과 진검승부를 펼쳐야 하는 박주봉의 마음은 벌써부터 복잡하기만 하다.
"내가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은 뒤 많은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대결했다. 리우 올림픽에서는 여자복식 4강에서 만나 일본이 이겼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도쿄 올림픽에서는 한국과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한국과 경기할 때 일본팀 벤치에 앉아있으면 마음이 뭔가,(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복잡한 감정이 생긴다. 다른 나라와 할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내가 벤치에서 지시도 내리고, 파이팅도 외치고, 선수들 기운을 북돋아줘야만 하는데, 한국과 만나면 왠지 목소리가 작아진다고나 할까…. 사실 일본 대표팀을 맡으면서 슈퍼시리즈같은 대회에서 한국을 만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이 국민적 관심이 몰리는 대회에서 만나면 마음이 너무 심란하다. 물론 도쿄에서도 현실적으로는 (양국의)대결 가능성이 높다. 승부의 세계이니 이왕 만난다면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리우 올림픽에서 좋은 결과는 내지 못했는데 이것을 반전의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말이다. 이왕 도쿄에서 만난다면 결승에서 맞붙어 좋은 승부를 펼쳤으면 한다."
이제 남은 질문이다. 박주봉은 언젠가는 한번 한국대표팀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박주봉에게 먼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한번은 한국대표팀을 맡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그렇죠. 일본에서의 지도자 생활은 도쿄 올림픽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 한다면 (일본에서만)16년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후의 내 상황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내가 그 이후 한국대표팀을 맡고 싶다고 말할 상황은 아닌 것같다. '기회가 된다면'이라는 마음은 언제나 갖고 있었지만…."
박주봉은 말을 아꼈다. 아마도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한국 대표팀은 이미 지도자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도쿄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객관적으로 이런 세대교체의 흐름을 거슬려서 박주봉을 영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명분도 별로 없다. 만일 한국이 도쿄 올림픽에서도 안좋은 성적을 낸다면? 그것까지 지금 상상하고 예측할 수는 없을 것같다.
한국이 낳은 레전드 박주봉은 지도자로 나선 이후 국가대표팀과 연을 이어갈 기회가 수차례 있었지만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한국 배드민턴는 박주봉을 몇차례 원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박주봉도 언젠가는 꼭 태극마크를 단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지만 인연이 이어지지 못했다. 서로 '짝사랑'만 하면서 20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박주봉과 한국 배드민턴이 마지막 해후를 할 수 있을지는 아마도 '배드민턴의 신'만이 알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박주봉에게 국내 배드민턴 발전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그는 자신이 말할 위치가 아니라고 여러차례 대답을 회피하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말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도 후배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한다면 좀 더 자기희생을 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받으려만 하지 말고 자기가 먼저 희생하고, 먼저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선수들이)우리 때와 다르다는 말도 하지만 세대가 바뀌어도 목표는 똑같은 것 아닌가. 선수라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고 성적을 내고 싶은 것이다.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졌으면 한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목표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선배들이 노력해서 배드민턴을 효자종목으로 만들어놨는데 후배들이 그것을 지켜줬으면 한다. 심신을 좀더 가다듬고 자기 희생을 더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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