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내 인생의 예수 찬스/ 누가복음 19:1-10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를 모르는 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삭개오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두들 잘 알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의 회심>이 그 주제라고 말입니다. 삭개오라는 히브리식 이름의 뜻이 “깨끗함” 또는 “순수함”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름 속에 이 이야기의 결론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삭개오는 로마제국 세금징수원이었습니다. 추측으로는 규모가 좀 되는 세관운영자여서 부자였습니다. 세금을 바치는 유대인들은 당연히 그를 멸시했습니다. 지배자 편에 서서 동족을 착취하는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겠지요. 하지만 부자인 삭개오를 대놓고 함부로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삭개오 자신의 마음입니다.
로마의 법대로 세금을 걷어서 주고, 남는 징수액을 자신의 수입으로 삼는데, 늘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얼마를 더 붙여 걷어야 적당할까요? 얼마까지 더 받아야 유대인 동족들이 자신을 죄인 취급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까지가 떳떳한 경제활동일까요?
누가복음을 앞에서부터 단번에 읽기 시작하면 매우 이상한 것이 느껴집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매우 불친절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게 더 쉽다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삭개오를 보자마자 “네 집에 가서 묵겠다.”고 하십니다. 군중들은 그런 예수를 보면서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수군대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우리는 어디까지 비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삭개오의 이야기는 배타성(exclusivity)의 문제라고 봅니다. 담장을 만들어 세우고 밖으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2023년에 나온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영화 내용이 꼭 여기에 해당됩니다. 지진 때문에 다 무너져 버린 처참한 세상 속에서 자기들만 살아남겠다고, 외지인은 모두 아파트 밖으로 몰아내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그런데 3세기 카르타고(Cartage) 신학자 키프리안(Cyprian, 210-258)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on salus est)
그래서 그런지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교회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데,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환영을 받으면서 저 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배타적 기독교라는 말이 도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저 문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구별하는 눈빛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예수님도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다른 유대인과 똑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삭개오의 회심>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가 집에 들어가서 삭개오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회심한 것으로 보아서, 삭개오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기만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그 누구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다시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준다면 정말 잘 할 수 있는 데하고 간절히 원했던 적은 없습니까?
게임하던 중에 현재 점수를 뒤집을 수 있는 <찬스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점수를 두 배로 주기도하고, 정답을 물어볼 수 있는 전화찬스도 있습니다. 저는 삭개오가 사용한 것이 바로 <예수 찬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삭개오를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찬스카드를 삭개오에게 흔쾌히 주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배척하지 않고 자기의 집으로 선뜻 들어와 주신 주님 앞에서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혹시라도 자신이 부당하게 착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세리의 일을 그만 두지는 않으니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만, 더 이상 부자 소리는 못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삭개오가 원했던 것은 남들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지나친 재물의 우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예수는 그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키프리안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지배하던 16세기라는 시대에 걸 맞는 적절한 변경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신 안에서 살아있다.”고 바꾸고 싶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바로 <찬스 카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나의 인생에서 예수 찬스카드를 나를 위해 사용하던, 아니면 남을 위해 사용하던, 그 찬스 카드는 그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인자는 잃은 자를 찾으러 왔다.”는 말씀이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2024년 11월 3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