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딧세이>
때는 이미 트로이 성이 함락 지 10년 뒤. 그리스의 오딧세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여신 칼륩소가 사는 동굴에 머물고, 오딧세우스의 왕비 페넬로페는 이타카 섬에서 포악 무도한 구혼자들에게 시달리고, 오딧세우스의 재산과 가축은 그들의 손에 유린당하고 있었다.
아테나 여신은 오딧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격려하여, 구혼자들은 탄핵한 뒤, 자신은 아버지를 찾아 길을 나서라고 권하고 이때 궁전 살롱에서는 음유시인 페미오스가 트로이로부터 귀국하는 그리스 군의 불 행한 이야기를 노래한다.
한편, 오딧세우스는 헤르메스 여신의 도움으로 칼륩소의 섬에서 나오게 되지만 포세이돈이 폭풍을 보내 파선 당한다. 어느 샛강에 떠밀려온 오딧세우스는 알키노오스 왕의 딸 나우시카아를 만나 그녀의 도움으로 성으로 가던 중 아테나 여신의 숲에 도착한다. 알키노오스 왕의 도움으로 배를 제공받고 저녁 잔치 자리에서 왕에게 10년동안에 걸친 바다에서의 표류와 모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딧세우스는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배를 타고 이타카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에 도착해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거지로 변장한다.
한편 텔레마코스는 스파르타에서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어머니의 구혼자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피해서 상륙한다. 그때 그는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에 도착해 오딧세우스와 만나게 된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을 모아놓고 화살로 도끼자루 구멍을 관통하게 하는 시합을 개최하고 오딧세우스는 거지 분장을 한 채로 시합에서 유일하게 열두 개 도끼자루의 구멍을 관통한다. 오딧세우스는 구혼자들을 아들 텔레마코스와 모두 물리치고 구혼자들과 한통속이 되었던 열 두명의 하녀들을 목졸라 죽인다. 페넬로페는 오딧세우스와 재회를 하게 되고, 구혼자의 친척들이 복수의 결의를 하지만 아테나에 의해 화해가 성립된다.
Helene glorifee - (Gustave Moreau - 1896-1897)
= 트로이 전쟁의 시작 '헬레네' =
벤자민 웨스트 Benjamin West,
[파리스로부터 데려온 헬레네] Helen Brought From Pari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미녀는 헬레네이다.
미녀 하면 헬레네를 떠올릴 만큼 미모는 태양처럼 빛났다.
헬레네가 이처럼 빼어난 용모를 지닌 것은 신들의 제왕인 아버지 제우스와
미녀로 소문난 어머니 레다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헬레네의 화려한 미모는 어릴 적부터 그리스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불과 열두 살 때부터 그리스 남자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헬레네를 원하는 남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과연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그 많은 구혼자 중에 단 한 사람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 헬레네의 유일한 고민이자 비극이었다.
헬레네의 계부인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우스 역시 선택되지 못한 구혼자들의 원성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거의 모든 그리스의 왕족이 헬레네에게 구혼을 했기 때문이다.
틴다레우스는 교묘한 꾀를 내어 헬레네가 직접 남편감을 고르게 했다.
그리고 남자들의 영웅심을 교묘히 부추겨 경쟁에서 탈락한 구혼자를로부터
앞으로 헬레네의 남편에게 난관이 닥치면 몸을 바쳐 돕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틴다레우스의 계략에 넘어간 구혼자는 이 충동적인 맹세의 댓가를 훗날 톡톡히 치르게 된다.
무려 10년 동안 계속된 참혹한 트로이 전쟁이 바로 신랑 후보들의 섣부른 서약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돈 많은 왕족 메넬라오스를 남편으로 선택한 헬레네는 딸 헤르미오네를 낳고 몇 년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Francesco PRIMATICCIO(1504-1570),
[헬레네의 납치]The Rape of Helene, 1530-39
그러던 어느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궁전을 방문하여 손님으로 묵자
결혼 생활에 권태감을 느끼던 헬레네는 잘생긴 파리스에게 마음이 쏠리게 되었다.
호감을 내색조차 하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던 두 사람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메엘라오스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크레타로 떠나자 파리스는 헤레네를 유혹해 몸을 섞은 다음
자신과 함께 트로이로 건너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자고 졸랐다.
헬레네는 파리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고 남편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도 모자라
값진 보물까지 몽땅 챙겨 파리스를 따라 나섰다.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
[파리스와 헬렌의 사랑] The Love of Paris and Helen
18세기 화가 다비드는 헬레네와 파리스가 사랑에 빠진 달콤한 순간을 그렸다.
남편 메넬라오스가 먼길을 떠나자마자 두 사람은 자석에 이끌리듯 서로를 탐닉한다.
웅장한 스파르타 궁전의 내식에서 아폴로 신처럼 매력적인 모습으로 분장한 파리스가 헬레네를 유혹하는 장면을 보라,
스파르타로 돌아온 메넬라오스는 아내의 배신에 치를 떨며 복수를 결심했다.
그가 지난 날 서약을 맹세한 구혼자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리자
결혼 전 그를 돕겠다고 약속한 구혼자들은 꼼짝 없이 발목이 잡혀 트로이 원정대에 합류했다.
헬레네의 부정 행위로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The Fire of Troy, Last third of the 16th century (?) Keuninck (Coninck), Kerstiaen de
BAROCCI, Federico Fiori (b. 1526,d. 1612), Aeneas' Flight from Troy, 1598
PRETI, Mattia(b. 1613, d. 1699),
Aeneas, Anchises and Ascanius Fleeing Troy 1630s
10년 동안 계속된 전쟁은 결국 그리스 군의 승리로 끝나고 트로이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남자들은 몰살당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화근이 된 헬레네는 파리스가 전사하자마자 새로운 남편을 맞이하였고
트로이가 함락된 후에는 전 남편인 메넬라오스와 공모하여 지금의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전쟁의 승리감에 도취된 메렐라오스는 간통한 아내를 당장 죽이겠다고 협박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다시 헬레네의 유혹에 넘어가 묵은 죄를 모두 용서하였다.
스파르타로 돌아가는 뱃길은 7년이 걸렸는데 그 사이 헬레네는 요부 기질을 발휘해 메렐라오스를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이다.
헬레네는 간통을 저지르고 첫 남편의 재산까지 빼돌렸지만 큰 소리 떵떵 치며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모든 죄악을 용서받을 만큼 완벽한 미모를 지녔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가브리엘 로제티 Gabriel Rosseti ,
[트로이의 헬레네] Helen of Troy
이 전설적인 헬레네의 미모를 로제티의 그림에서 만날 수 있다. 로제티가 그린 헬레네는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풀어헤친 금발과 매혹적인 붉은 입술, 화려한 액세서리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기 도취에 흠뻑 빠진 헤레네는 감각적인 쾌락에 온몸을 맡기고 있다.
화가는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도록 화면 전체를 눈부신 황금색 색조로 통일했다.
이 초상화에서는 베네치아적인 특성이 물씬 풍겨 나오는데, 헬레네의 화려한 의상과 다채로운 색상,
회화적인 느낌의 풍요로운 붓 터치는 16세기를 화려하게 꽃 피운 베네치아 거장들의 양식과 유사하다.
<트로이 전쟁과 관련하여...>
1. <서사시권(Epic cycle)>=논문형식
우리가 흔히 보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테나의 세 여신 가운데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 하는 경쟁을 둘러싸고 일어난 파리스의 심판으로 시작하여 오디세우스의 "트로이의 목마" 계략으로 말미암아 트로이가 함락되고 파멸하면서 마무리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어느 기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인가? 간단히 호메로스의 저 유명한 서사시, 『일리아스』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것은 좀 불완전한 대답이다.
왜냐하면 『일리아스』는 사실 10년에 걸쳤다는 트로이 전쟁에서도 거의 마지막 부분, 또 그 중에서도 50일 정도의 시간만을 잘라내어 시간적 배경으로 사용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등장 인물의 대사 등을 통해 그 이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도 압축적으로 제시되므로, 아예 그 50일 가량 동안 일어난 일만 다룬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만큼' 충분한 것도 아니다.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걸려 내부에 그리스군이 숨은 목마를 성 안으로 옮기는 트로이인들.
Giovanni Domenico Tiepolo작. 1773
그렇다면 『일리아스』의 50일 남짓 이외의 시간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고대에는 『일리아스』 외에도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 작품들이 존재했으니, 『퀴프리아』, 『아이티오피스』, 『소(小) 일리아스』, 『일리오스 함락』등이 그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일리아스』가 다루지 않았거나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이야기들의 보고였다. 예를 들어『퀴프리아』에서는 파리스의 심판을 비롯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을 노래하고, 아킬레우스는 『아이티오피스』에서 죽음을 맞는다. 언제부터인가 이 작품들은 전쟁의 후일담과 오디세우스의 모험 여행을 담은 『귀향』, 『오뒤세이아』, 『텔레고네이아』 와 함께, <서사시권>(흔히 Epic Cycle로 부름)이라고 하는 장대한 시리즈로 묶였다.
오늘날 <서사시권> 가운데 『일리아스』와 『오뒤세이아』, 이 두 대작 외의 모든 책은 실전되었다. 그러나 후세의 요약본과 여러 책에 흩어진 몇줄의 인용문이 남아있으며, 이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또다른 창작물들이 있어서 우리에게 옛 영웅시의 흔적을 전해준다. 예를 들어, 트로이 목마 계략과 관련되어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인 이야기는 다름아닌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진수를 드러내는 것이다.
2. 히타이트 문서와 트로이의 실체?
사실상 요즘 와서 트로이의 실체에 대해 말하려는 사람은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13세기 정도에 걸쳐 편년되는 몇개의 히타이트 문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일련의 문서에 등장하는 "윌루사" 라는 고대 지명이 바로 트로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트로이가 어떻게 윌루사가 되는가? 고전 문헌에서는 빈번하게 트로이를 "일리오스" 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서사시 『일리아스』의 제목도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일리오스와 윌루사를 놓고 비교하면 비로소 발음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윌"루사가 "일"리오스가 된 배경은 고졸기 그리스어에서 /w/ 발음(디감마 ϝ 가 원래 이 발음을 표기하던 문자)이 사라져간 현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히타이트인들의 기록에서 일리오스가 아닌 "트로이"와 유사한 지명으로는 "타르위사"(혹은 트루위사) 라는 것이 있다. 윌루사와는 같이 언급되며 아마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북쪽 어디였다고 짐작된다. 고전적으로 트로이라 생각되었고 또한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그 고대 도시의 위치와 부합하는 것이다. 윌루사와 타르위사가 따로 기재되었다는 것은 발음상 전혀 다른 트로이와 일리오스가 왜 같은 지역의 이칭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단서일 수도 있다. 어느 시점엔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합병했을까?
청동기 말기의 아나톨리아. 주로 점토판에 쓰여진 형태로 발견되는 히타이트 기록에 나오는 지명 가운데 여러개는
발음이나 대강의 위치 관계를 통해 비정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밀라와타(Milawata)는 후세의 밀레토스일 것이다.
(그림 Bryce2002에서)
이 윌루사의 지배자로, 문서에서 언급되는 "알라크산두" 라는 인물이 있다. 기묘하게도 또 이 이름은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바로 그 사람, 파리스 왕자를 연상시킨다. 어째서인가? 파리스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알렉산드로스"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에서 호메로스는 파리스를 반복하여 "신과 같은 알렉산드로스" 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로스와 "알라크산두"는 극히 상사하다.
더구나 "타와갈라와 편지(Tawagalawa letter)"로 불리는 문서에는 히타이트가 대략 기원전 13세기 중엽에 "아히야와" 라는 또 다른 거대 세력과 윌루사를 둘러싸고 뭔가 분쟁을 일으켰다는 암시가 나온다. "아히야와"는 "아카이아(Akhaia)인가! 호메로스는 그리스인 전체를 총칭하여 종종 '아카이아인(Ἀχαιοί)'으로 불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문서의 제목이 된 "타와갈라와"란 그 내용 가운데 등장하는 인명인데, 아히야와 왕의 형제였던 것 같다. 설마 이 이름도 그리스인의 신화와 영웅 서사시 속에서 찾을 수 있는가? -있다. "타와갈라와"는 아마도 그리스어 Ἐτεϝοκλέϝες 와 관계가 있을 것이며, 여기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바로 테베의 왕이자 전설적인 후레자식
오이디푸스의 아들로 되어 있는 '에테오클레스'다.
거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속에 나오는 도시나 사람 이름이 히타이트 유물에 새겨진 기록에서 속속 등장하다니 경이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위에 쓴 대응 관계와 설명은 극히 적은 자료를 바탕으로 추단한 것이다.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 나온 말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어떤 사람은 저런 설명을 수용하고, 어떤 사람은 수용하지 않는다.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는 '암흑기' 이전 아나톨리아 서부의 역사를 그런 방법으로 보는 수도 있다는 정도만 알면 충분하지 않을까?
3.아이네이아스의 직계 후손들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쓴 일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관점에서 바라볼 여지가 다분하다. 아이네이아스는 물론 로마 건국 영웅 로물루스의 선조로 되어 있지만, 그와 함께 매우 유명한 어떤 귀족 집안의 선조로도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귀족 집안이란 다름아닌 율리우스 씨족이다.
배경 설정은 이렇다. 아이네이아스가 라비니움을 세우고, 그 아들인 "아스카니우스" 가 알바 롱가를 세웠다. 알바 롱가는 전설에서 로마의 모(母)도시격이다. 그런데 아스카니우스의 다른 이름이 "이울루스(혹은 율루스)"로, 율리우스 씨족은 바로 이 사람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율리우스 씨족은 본래 알바 롱가 왕의 일족이며, 로물루스의 어머니 레아 실비아의 일족이며,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이네이아스의 직계이며, 더 나아가 아이네이아스의 어머니가 아프로디테 여신이므로 "신의 후손"이 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말, 이 '신의 후손' 집안의 대표성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에서-그는 아우구스투스파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노골적으로, 어떤 곳에서는 은밀하게 아우구스투스의 위대함과 로마 재조(再造)가 암시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새로운 아이네이아스, 컴컴한 대양에서 풍랑을 만나고 길 잃은 트로이의 후손(로마인)들을 인도하여 신천지로 인도할 사자일까?
이 '신의 아들'을 두고 쓴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베르길리우스의 또 다른 시 한 대목을 소개하면서 마치도록 하자.
이제 시빌의 노래에서 예고되었던 전성기가 온다네
위대한 새로운 순환이, 시대에서 길러진 순환이 다시 시작된다네
이제 새로운 정의와 황금시대가 돌아오고
그 첫 자녀가 높은 하늘에서 하강하네
이 소년이 태어나면 철의 세대가 지나가고
황금의 세대가 세계를 물려받을 것이라네
참고
『일리아스』천병희 역, 숲(2007)
Trevor R. Bryce, 「The Trojan War: Is There Truth behind the Legend?」, 『Near Eastern Archaeology』, Vol.65, No.3(2002), pp. 182-195
Hans G. Güterbock, 「Hittites and Akhaeans: A New Look」,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Vol.128, No.2(1984), pp.114-122
톰 홀랜드, 『공화국의 몰락』, 김병화 역 웅진닷컴(2004)
-또 다른 이야기-
[책의 내용 설명,객관적인...]
트로이전쟁은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트로이군의 헥토르와 아이네아스 등 숱한 영웅들과 신들이 얽혀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아킬레우스와의 대결에서 헥토르가 죽고 아가멤논, 펜테실레이아, 글라우코스, 파리스 등 트로이군은 주요 장수들을 모두 잃은 다음에도 트로이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트로이는 새로운 동맹자를 얻어 저항을 계속하였다.
트로이에는 팔라디온이라 불리는 아테나의 유명한 조상(彫像)이 있었는데 그것이 트로이성 중에 있는 한 트로이는 함락되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것을 알고 그리스 측의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변장하고 성안으로 들어가 팔라디온을 탈취해왔으나 트로이는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
그리스군은 무력으로 트로이를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하고 오디세우스의 충고에 의하여 한가지 계략을 쓰기로 했다. 그들은 성을 포기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꾸미고 함선의 일부를 퇴각하여 인접한 섬 뒤에 숨겨두었다. 다음 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테나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선전하였으나 사실 그 속에는 무장한 군사들이 들어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리스군 진영을 살펴보던 트로이측은 놀라움에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스군은 모두 철수한 뒤였고, 거대한 목마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군이 물러난 것에는 크게 기뻐하던 트로이 주민들도, 목마에 대해서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트로이군이 잡아온 그리스쪽의 첩자는 팔라디온을 훔쳐간 그리스군에 노한 아테나의 분노를 풀기위해 목마를 바친 것이라고 말했다. 목마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진 트로이 주민들은 목마를 성안으로 받아들였다.
성문을 허물고 목마를 성안의 아테나 신전으로 모신 트로이군은 10년 만에 맞는 평화를 만끽하며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이 되자 목마의 문이 슬그머니 열리고 그리스군이 소리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섬뒤에 숨어 있던 동료 그리스군 함대에 신호를 보냈다. 목마에 숨어 있는 용사들이 성안을 돌아다니는 동안, 그리스의 대군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소리 없이 진행된 이 행동은 곧 트로이의 몰락을 가져왔다. 성안의 집집마다 불이 타고 사람들은 죽어 나갔다.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군에 맞서 싸우던 트로이군은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다. 이렇게 트로이군은 반격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하루밤새 무너졌다.
|
[윗 글과 같은 맥락에서 연결해 본다]
1.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죽음
피리스는 아폴론의 명령에 의해서 아킬레우스에게 화살을 쏘았았는데, 이때 피리스가 쏜 화살이 공교롭게도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에 명중하여 아킬레우스가 죽었지만, 이 당시에 피리스는 아킬레우스가 전쟁 중에 헥토르..등, 파리스의 형제들을 적지 않게 죽였기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그리고 그러한 원한으로 화살을 쏘았을 것입니다.
1) 내용
트로이아의 총사령관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를 향해 공격을 해왔다. 아폴론신의 비호를 받은 헥토르는 창으로 파트로클로스를 찔러 죽이게 된다.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매우 슬퍼하며 분개했다. 그리고 친구의 복수를 위해 드디어 출전을 결심한다.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을 염려해 다시 전장에 나가는 것을 말렸지만 아킬레우스의 결심은 확고했다. 테티스는 설득을 포기하고 아들을 위해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새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주었다. 이는 어떤 무기도 뚫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새 갑옷과 투구를 몸에 걸치고 죽은 친구를 위해 곧바로 전쟁터로 나갔다. 맹렬한 기세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아킬레우스에게 트로이아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모두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고 아킬레우스는 마침내 성문 앞까지 당도했다. 성문 앞에는 단 한사람 헥토르만이 도망치지 않고 아킬레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아킬레우스 앞에 선 헥토르는 공포에 짓눌려 맞대결을 피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성벽 주위를 쫓고 쫓기면서 돌아다녔다. 헥토르는 칼을 뽑아들고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아킬레우스에게 덤벼들었지만 역부족이었고 게다가 그의 갑옷을 뚫을 수는 없었다. 큰 창을 들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머리쪽을 겨냥했고 그대로 관통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트로이아의 최고 명장 헥토르는 최후를 맞이했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갑옷을 벗기고 양발 뒤꿈치에 구멍을 낸 다음 가죽 끈으로 전차 뒤에 매달아 트로이아 성 주위를 세 바퀴 돌았다.
성 누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헥토르의 아버지인 노왕 프리아모스는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며 한탄했다.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그리스군 진영으로 돌아온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으로 가서 친구의 혼을 위로했다. 헥토르의 시체는 며칠간이나 아킬레우스의 막사 밖에 방치되어 있었다. 어느 날 밤, 트로이의 연로한 노왕 프리아모스가 막대한 몸값을 갖고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왔다. 프리아모스는 무릎을 꿇고 아킬레우스의 손에 입을 맞추고는 아들의 유해를 돌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는 프리아모스의 모습에 감동받은 아킬레우스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같이 울면서 화답하면서 헥토르의 유해를 돌려주기로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헥토르의 장례기간에는 휴전을 하기로 약속했다.
헥토르의 유해는 그리스 진영을 뒤로 하고 새벽녘에 트로이아 성으로 돌아왔다. 프리아모스 왕과 헥토르의 유해가 돌아오자 트로이아 시민들은 깊은 애도에 잠겼다. 헥토르의 장례는 열흘동안 치러졌다.
그러나 그리스 최고의 무장 아킬레우스의 죽음도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 날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의 성문까지 적들을 밀고 들어갔는데, 이것을 본 아폴론은 파리스에게 화살을 쏘도록 명했다. 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파리스는 형 헥토르와 달리 뛰어난 무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쏜 화살이 공교롭게도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에 명중한 것이다!
예전에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려고 명계의 스틱스 강에 담갔다. 그런데 이때 발뒤꿈치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만은 불사의 몸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군은 아킬레우스를 기리기 위해 17일간에 이르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