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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량심(四無量心, pali. brahma-vihāra)>
- 자(慈)⋅비(悲)⋅희(喜)⋅사(捨) -
사무량심(四無量心)이란 네 가지 무량(無量)한 마음이란 말인데,
무량이란 한량없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 그런 뜻으로
거룩한 마음이 한량없음을 의미한다.
즉, 무량심(無量心)이란 중생을 한량없이 어여삐 여기는 불ㆍ보살의
거룩한 마음이란 말이다.
중생을 향한 불ㆍ보살의 「자(慈, mettā), 비(悲, karuṅa), 희(喜, muditā), 사(捨, upekkhā)」
네 가지 마음을 말한다.
육바라밀을 성취한 보살이 중생들을 위해서 한량없이 베푸는 마음이 무량심(無量心)이며,
아무리 사용해도 끝이 없는 마음이 무량심이다.
번뇌와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들을 제도해 무량한 복덕(福德)을 가져다주고
무명에 쌓여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살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이타(利他)의 마음이 무량심이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아난다를 비롯한 젊은 비구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사무량심(四無量心)에 대해 법을 설하셨다.
“아난다여, 너희들 비구의 마음이 사랑(慈)과 연민(悲)과 기쁨(喜)과 평온(捨)을
함께 하기 때문에 맺음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으며,
지극히 넓고, 크고, 한량이 없이 잘 닦아
일체세간(一切世間)에 두루 차게 성취해 노니느니라.
아난다여, 이 무량심을 마땅히 젊은 비구들을 위해 설하도록 해라.
그것으로서 그들은 안온을 얻고 힘을 얻고 즐거움을 얻어 몸과 마음이
닳지 않아서 그 몸이 마치도록 범행(梵行)을 행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러한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사범부(四梵住)라고도 하고,
사등심(四等心:네 가지 평등한 마음)이라고도 한다.
범주(梵住)란 거룩한 마음가짐(梵住, Pali. brahmavihāra)을 말한다.
그래서 사무량심을 네 자기 거룩한 마음가짐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많은 경전에서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이 출가자에게
시설되지만, 출가자보다는 행복한 사회 구현을 위해서 실천해야 할
재가자의 덕목으로도 강조되고 있다. 때문에 두 덕목은 많은
초기경전에서 출가자 및 재가자를 대상으로 시설돼 있다.
※사섭법(四攝法)---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고 섭수(攝受)하기 위해
행하는 네 가지 기본행위를 말한다.
사섭법은 ‘네 가지 거두어 주는 일’, ‘네 가지 보살핌’이라고 할 수 있다.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을 말한다.
이는 인간생활 혹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해야 할 네 가지 포용태도를 말한다. 즉,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기본 마음가짐 4가지를 일컫는 일종의 사회윤리이다.
사섭법은 사무량심(四無量心)과 더불어 불교사회사상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교설이다.
※섭수(攝受)---자비심으로 중생을 포용하고 가르쳐 인도함.
중생을 거둬 보살핌.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임.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거두어 들여서 보살핌.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사무량심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나거나 항상 부지런히 닦아야 할 덕목으로 제시됐다.
그리하여 사무량심은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내 이웃에,
그리고 사방(四方) 또는 육방(六方)에 한없이 확장해 항상
가득 채우고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① 자(慈, metta) 무량심(無量心)
무량한 자애심(慈愛心, metta)으로 중생에게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려는
마음을 일컫는다. 즉, ‘자애()’를 말한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몸을 던져
위험에 빠진 어린 자식을 지키려는 것과 같이 아무런 조건 없이
무량한 자비심을 베푸는 마음이다.
사랑과 미움 따위 집착을 떠나 평등하게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즉, 어떤 차별도 없이 중생을 사랑하는 보편적이며 무한한 사랑의
실천을 말한다.
자무량심(慈無量心)의 '자(慈)'란 pali. metta(skt. maitra)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진실한 우정' 또는 '순수한 친애의 정'을 나타내면서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마음을 말한다.
자무량심은 끝없는 사랑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는 마음으로
잘못된 향락이나 놀이가 아니라 올바른 견해와 판단으로 참 사랑의 길로 인도해
마음의 평화를 누리도록 하면서 진정한 기쁨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불자라면 반드시 만인을 평등하게 사랑해 ‘자(慈)’의 즐거움을 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② 비(悲, karuna) 무량심(無量心)
무량한 연민심(karuna)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한량없이 덜어주려는
마음을 말한다. 비(悲)는 pali. karuna(skt. karuna)를 번역한 말로서
'연민(憐憫)' 또는 '동정(同情)'의 뜻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비무량심(悲無量心)이란 모든 중생들의 고통과 슬픔을 자기의
고통과 슬픔으로 생각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을 가지고
중생들 개개인이 그러한 고통과 슬픔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한량없는 마음으로 힘껏 도와주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남의 불행을 자기 것인 듯 슬퍼하는 마음,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는
무량한 마음이다.
그래서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앓는다고 한다.
중생이 병들어 있는 까닭에 그들을 구하기 위해 보살도 앓는 몸으로 나타낸다는 뜻이다.
<유마경>에 나오는 말이다.
자비(慈悲)라는 말에서 자(慈)와 비(悲)는 분명히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자(慈)’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것으로 '여락(與樂)'을 말하고,
‘비(悲)’는 고통과 슬픔을 제거하는 '발고(拔苦)'로 해석한다.
예를 들면 부모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당장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이다. 함께 슬퍼하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마음이 비무량심이다.
한편 ‘사랑하는 마음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는 것’은
다른 말로는 자비관(慈悲觀)이라 한다. 이것은 성내는 마음이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자비심을 내어 그 성내는 마음을 없애기 위한 수행이다.
그래서 자무량심과 비무량심을 닦으면 성내는 마음이 사라지고,
중생의 마음이 대자(大慈)와 대비(大悲)의 마음으로 승화하게 된다.
③ 희(喜, mudita) 무량심(無量心)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mudita)으로 중생에게 한량없는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게 하려는 마음을 일컫는다.
남의 행복을 자기 행복처럼 기뻐하는 마음, 남의 성취ㆍ행복을
자기의 것처럼 기뻐하는 마음, 즉 ‘수희(隨喜)’를 말한다.
그래서 ‘같이 기뻐함’ 혹은 ‘함께 기뻐함’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과 같이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아니라 중생들의 기쁨이
바로 나의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불⋅보살의 마음을 말한다.
함께 경쟁을 하다가 상대방이 승리하고 내가 패했을 때
승리한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축하해줄 줄 아는 마음이며,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다른 사람이 성취했을 때 진정으로
기뻐해주는 마음이다.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을 버리지 못하는 중생들로서는
무척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진정한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을 닦는 것엔 자비관(慈悲觀)적인 성격과 부정관(不淨觀)적인 성격이 다분하다.
부정관이란 탐심이 많은 사람이 육체의 부정함을 관찰해 탐욕을
없애기 위한 수행인데, 기쁘게 하는 마음을 닦는 희무량심 또한
자기만의 이기적인 탐욕을 제어하고 기쁨을 남과 더불어 누리고자
하는 불탐욕(不貪慾)을 기르는 것이기에 희무량심을 닦으면
탐욕이 사라진다.
④ 사(捨, upekkha) 무량심(無量心)
평온과 평정의 마음(upekkha), 침착하고 평정한 마음을 말한다.
즉, 안팎의 경계에 끌리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
사랑하되 욕심에 빠지지 않고, 연민하되 걱정에 빠지지 않고,
기뻐하되 홍소(哄笑;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에 빠지지 않는
중정(中正)한 마음을 말한다.
선입견이나 편견에 흔들릴 수 없는 평온이나 공평무사한 고결한
정신적인 특질을 뜻한다. 무량평등심(無量平等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무량심은 자타(自他)와 친소(親疏)에 대한 집착과 분별을 없애려는 것으로,
선악(善惡), 호오(好惡), 유무(有無), 고락(苦樂) 등에
흔들리지 않고 이들을 여읜 평정하고도 평온한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를 살리기 위해 중국에서 우뻬까(upekkha)를 번역한
‘사(捨)’라는 글자에는 버린다, 베풀다, 내버려두다,
그런 뜻이 있어서 아주 절묘한 글자 선택이었다고 하겠다.
• 탐욕과 집착이 있으면 마음이 평온할 수가 없다.
그래서 탐욕과 집착을 버리고 평정을 찾으란 말이다.
• 우뻬까(upekkha)는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대하는 차별 없는 마음이기도 하다.
혹은 나의 입장을 떠나 중생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려는, - 베풀어주려는 마음이라 해석할 수 있다.
• ‘평온(平穩)과 평정(平靜)’의 삶이란 인생의 모든 파란곡절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마음이다. 상대가 진실을 몰라주어도 담담히 바라봐주는,
- 내버려두는 무량한 마음을 말한다.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 ‘자식은 쑥과 같다’고 했다.
쑥이 어릴 때는 좋은데 커서 쇠면 못 먹는다.
쇤 쑥은 먹으면 쓰기만 하다. 그래서 자식은 쑥과 같다고 했다.
부모는 자식을 다 키웠으면 보내버려야지 보내지 않고
붙들고 갈등을 일으킨다. 때가 되면 버릴 건 버려야 한다.
그래서 4무량심 중엔 버릴 사(捨)자 쓴 사무량심(捨無量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빠알리어 우뻬까(upekkha)의 ‘우뻬(upe)’는 접두어로 ‘가까이’라는 뜻이고,
에까(ekkha)는 ‘보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가까이서 본다는 뜻인데,
존재현상을 있는 그대로 가까이에서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현상은 「무상ㆍ고ㆍ무아」라는 삼법인의 법칙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명료히 알 수 있어서 어떤 존재현상에도 끌려가지 않아서,
좋고 나쁨의 분별심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곧 중도의 마음이고, 중도의 마음은 연기, 삼법인을 투철히 깨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상태이다. 따라서 사무량심(捨無量心을 가지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수행을 잘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평정심 수행을 하면 좋은 것은 끌어당기고 나쁜 것은 거부하는
분별심의 질곡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대로 바라보는 지혜의 안목을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사무량심(捨無量心)은 다른 것보다 훨씬 깊이 있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 미산 스님
그리고 사무량심(捨無量心)의 의도가 연기관(緣起觀)이나
계분별관(界分別觀)과 일치한다. 연기관이란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이
12연기를 관해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는 수행이고,
계분별관은 아집(我執)이 강한 사람이 ‘나’라는 존재는
5온의 일시적 인연화합일 뿐이라고 관해 아집을 없애는 수행이다.
그러므로 사무량심을 닦으면 어리석음이 사라진다.
사무량심(捨無量心)을 구체적으로 정리를 하면 아래와 같다.
• 내려놓음, 버림의 선한 마음작용[心所法]을 말한다.
• 집착에 얽매이지 않는 공정한 마음.
•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모두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 상태.
• 들뜨지도 않고 침울하지도 않은 평정한 마음 상태.
• 외부의 자극에 대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상태.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고(不苦不樂),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 상태.
그리하여 사무량심(捨無量心)은 네 가지 고귀한 마음가짐(四梵住)의
마지막 요소로 나타난다. 즉, 「자 ‧ 비 ‧ 희 ‧ 사」에서 사(捨)는
어떠한 대상에 대해 주관적 관념이나 상념을 배제한 상태에서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인식 주체의 심리적 상황을 밝히는 말로 사용됨에 있어서는,
평정 외에, 냉철함, 초연함 등으로도 번역된다.
그리하여 이 용어는 보통 사선정(四禪定)의 상태 그 중에서도
네 번째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는데, 그것의 전형이 되는 어구가 사념청정(捨念淸淨)이다.
즉,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이다.
이는 평정한 마음으로 보는 것, 장애 없이 사물을 주시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사선정(四禪定)의 경지 중에서
제사선(第四禪)을 설명하는 술어로 나타나는데, 평온이 완성되는 경지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4무량심을 닦으면 10악업 중에서도
의업(意業)에 해당되는 탐ㆍ진ㆍ치의 마음을 짓지 않게 된다.
그리고 뜻으로 짓는 악업이 쉬게 되니, 자연히 입으로 짓는 악업,
몸으로 짓는 악업도 그칠 수밖에 없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4무량심을 닦으면 아나함과(阿那含果) 이상의
과보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심을 모두 끊고
다른 세상(색계 이상)에 나서 열반에 드는 성자를 아나함이라고 하고,
이 세상에서 열반에 드는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집에 있으면서도 늘 「자ㆍ비ㆍ희ㆍ사」를 닦으면
그는 반드시 아나함과 이상을 증득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자ㆍ비ㆍ희ㆍ사」라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는 마음, 모든 생명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로해 기쁨을 주려는 마음,
그리고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 주는 마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자ㆍ비ㆍ희ㆍ사」는 모든 인간과 동물에 대해
자비애호(慈悲愛護)의 마음을 가지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사무량심은 초기불교에 있어서 40가지 사마타(samatha)
명상 주제 중의 일부이기도 했다.
크게 사랑함이 대자(大慈)요, 크게 불쌍히 여김이 대비(大悲)요,
크게 기뻐함이 대희(大喜)요, 크게 버림이 대사(大捨)이니
대자대비(大慈大悲) 대희대사(大喜大捨)의 한량없는 네 가지 마음인 사무량심(四無量心)은,
곧 온갖 착한 일의 근본이고, 불ㆍ보살의 마음이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사무량심(四無量心)에 있다.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함의 마음으로서, 모두 업(業)과 관련이 있다.
타인의 불선과보에 대해서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야하고,
타인의 선과보(善果報)에 대해서는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또 불선과보이든 선과보이든 모두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 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에게 기쁨을 주고 고통을 덜어주되, 남겨놓는 마음이 하나도 없이
다 주는 거다. 이렇게 하는 것이 4무량심이다.
따라서 4무량심 전체를 대자대비심(大慈悲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무량심이 이미 모든 중생에게
다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번뇌에 망상에 더럽혀져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란 말이다.
무슨 특별한 수행을 통해 외부로부터 얻게 되거나 부처님으로부터
받아 지녀서 비로소 갖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본래부터 본래심(本來心)으로 가지고 있는 심성인데,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다만 닦아서 묵은 때를 벗겨내어 우리들 마음속에
간직돼있는 사무량심을 드러내면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