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지나간다. / 우정아
백설공주에게 온갖 시련을 안겨준 건 따지고 보면
못된 왕비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지 묻는 말에
매번 곧이곧대로 대답한 거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만이 자기의 부와 권력을 지켜준다고 믿은
왕비는 백설공주의 미모가 더해갈수록 점점 커지는
불안과 분노에 사로잡혔으니 말이다.
만약 왕비가 눈치 없는 요술 거울 대신 궁극의 진리를 말해 주는
미국의 미술가이자 철학자 에이드리언 파이퍼(Adrian Piper·1948~)의
거울을 갖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얼굴을 비춰보기 딱 좋은 크기의 고급스러운 거울에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글귀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더 냉정하게 번역하자면 ‘결국 모두를 빼앗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진: 에이드리언 파이퍼, 모든 것 #4, 2004년, 타원형 거울에
금박을 입힌 글씨, 33 × 25.4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는 파이퍼의 똑같은 거울 여섯 점이
서로 다른 전시실에 진열되어 있다.
13세기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기사의 석관 앞에,
오색찬란한 고딕 시대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옆에,
황금기를 누렸던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가운데서
불쑥 튀어나오는 파이퍼의 거울은
죽음과 소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말을 상기시킨다.
종교적 열망이든 세속적 성취든 결국 모두가 유한한 인간의 일일 뿐,
영원한 건 없다.
파이퍼는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최상층 교육을 받았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만큼 암묵적인 인종차별을 경험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사회적 편견에 대한 분노와 열망을
강렬한 퍼포먼스로 풀어 놓던 그에게도
어느 날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언젠가는 이 또한 모두 사라지리라는 해탈의 순간이 왔던 모양이다.
우정아 /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출처] 조선일보 5분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