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13주에 걸쳐서 강의를 하게 된다. 이 강의를 다 듣게 되면 진정한 교회는 무엇이며, 그 교회 속의 나는 누구이며,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진정한 교회의 의미와 교회의 명칭에 대해서 알아보고 끝으로 교회는 어떻게 구분되는지 전하고자 한다.
1. 교회의 의미
교회는 영어로 CHURCH다. 독일어로는 Kirche다. 이 말은 희랍어 Κυριακοσ(that which belongs to the Lord)란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한문으로 敎會란 뜻은 가르치고(敎), 모이는 것(會)을 말한다. 교회란 말은 마태복음에는 두 번 사용되었다. 그 후에 바울의 편지와 그 후에 기록된 편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집단을 교회로 공식화하였다. 교회란 말은 예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사용하신 말이다. 교회란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1) 어원적 의미
1) 구약에서
① 카할 - ‘카할’의 본 뜻은 “부른다”이다. 이 말은 “의논하기 위하여 소집된 공동체” “하나님의 계명을 듣기 위하여 모인 무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해서 부르신 선민 공동체다. 여호와의 총회 혹은 하나님의 총회를 의미한다. 시내산 기슭에서 모세가 전달해 준 하나님의 율법을 듣기 위하여 모인 그 모임이 곧 ‘카할’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회중’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처소에 모인 모임을 의미한다. 모임이 교회가 된다. 모이지 않는 것은 교회가 될 수 없다.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모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모임을 강조할 수는 없으나 조건이 주어짐에도 모이지 않는 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카할’은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는 주변의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사명감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들은 민족의 번영과 국가의 부흥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지만 선민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② 에다 - ‘에다’는 처음에는 ‘카할’과 함께 쓰여졌으나 ‘카할’보다 더 오래된 말로써 ‘택한다’란 뜻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택함을 받은 집단의 모임’이란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더 제한된 말로 사용이 되었으며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나 건물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약에서는 ‘쉬나고게’로 번역이 되었고 나중에 전적으로 유대인이 모이는 회당(집)을 의미하게 되었다. ‘카할’은 이스라엘의 모임(공동체)를 , ‘쉬나고게’는 모이는 장소를 더 강조하는 말로 바뀌었다.
2) 신약에서
① 쉬나고게 - 쉬나고게는 구약의 ‘에다’를 번역한 말로 문자적으로 「함께 온다」는 뜻을 지닌 말로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언젠가는 다시 모여서 타민족의 빛이 되어 나타날 것을 원하는 공동체적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 안에서는 파벌이 아닌 하나의 공동체적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회당이란 말로 번역이 되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 이후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그들은 앗수르 사람이 되어 스스로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의 포로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쉬나고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쉬나고게는 성전이 아니라 모여서 율법의 교훈을 배우며, 교제하며, 간단한 예식과 더불어 민족끼리 신앙 안에서 서로 단합을 이룬 장소다. 유대인들은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안식일 모임을 가졌다. 이것은 회당 교회의 시작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바울도 회당에서 가르쳤다. 초대 교회는 회당 교회와 같은 형식을 취하였다.
② 에클레시아 - 이 말은 ‘안으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에크」라는 말과 ‘빼내어 부르심을 입어 모인 무리’라는 뜻을 지닌 「카레오」라는 말이 모여진 말이다. 이 말은 ‘만남’ 혹은 ‘모임’인데 백성들이 함께 모인다든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소집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장소를 의미하지 않고 무인 무리를 의미한다. 교회는 죄악 세상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하여 빼내어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을 불신하는 ‘불신앙의 모임’과는 달리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을 인정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모임’이다. 장소를 의미하는 쉬나고게와는 다르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다. 진정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다. 그 속에 모인 무리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2) 신학적 의미
에클레시아의 신학적 의미는 첫째는 특수 목적을 위해 소집되어진 사람들의 모임(행 19:38)이나 특별히 기도회나 교육, 구원을 위해 모인 모임을 뜻한다. 둘째는 어떤 특정한 지역으로부터 모여진 신자의 집단을 뜻한다. 가령 고린도(고전1:2), 데살로니가(살전1:1), 에베소(계2:1), 마게도냐(고후8:1)등 한 그룹을 지어 모인 집단이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톨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여진 한 공동체의 뜻이다.넷째는 하나님의 종말적 백성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살아 있는 기초요 이스라엘에서 약속된 ‘메시야’다. 그런고로 이 메시야는 자기 백성을 모아 교회를 이룩하며 ‘에클레시아’는 강력한 종말 신앙을 내포한다.
(3) 정리되어진 의미
진정한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구속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며 이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주님되심과 자신들의 신앙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고백하는 그 모임의 장소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교회(예배당)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세례를 받고 진정한 신앙을 공언하는 피택자들의 집단이어야 한다.
2. 교회의 구분
교회의 본질을 논함에 있어서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구분되어지며, 교회의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로 구분되어진다.
(1)유형교회와 무형교회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마땅이 구분하여 설명되어져야 한다. 즉 유형교회와 무형교회의 구분이 그것이다. 유형교회라 함은 보이는 교회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공적으로 모여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하는 장소로서의 교회를 의미하며, 무형교회라 함은 보이지 않는 교회로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 고백 자체, 혹은 그들이 모이는 모임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형교회는 일정한 건물이 없어도 그 모임 자체가 교회가 됨을 알아야 한다. 무형교회가 되었든 유형교회가 되었든 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반드시 예배 행위가 있어야 한다. 예배가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다. 유형교회는 눈에 보이기에 가견적 교회라 하고 무형교회는 보이지 않기에 불가견적 교회라고 한다.
(2)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전투적 교회는 이 땅에 현존하고 있는 교회요 승리적 교회는 승리를 축하하는 천상의 교회다.
이 땅에는 아직까지 사탄의 세력이 있다. 사탄의 세력은 끊임 없이 지상의 교회를 공격한다. 악의 세력과 흑암의 세력은 끊이 없이 교회를 공격한다. 교회는 이들과의 전쟁에 소명되어졌으므로 현실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적 싸움이루어지며 영적 싸움이 있기에 전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천성에서는 더 이상 사탄의 세력이 존재하지 못한다. 이미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창검이 없고,승리의 종려나무가 있을 뿐이며 전투의 함성은 승리의 찬송으로 대체된 곳이다.
(3)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교회의 몸과 연관이 되었을 때는 유기체적이라 할 수 있다. 롬12:5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 것은 유기체적인 교회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건물, 성전, 집과 같은 것으로 표현될 때는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뜻한다. 엡2:21-22에서 볼 수 있는대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한 것은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3. 교회의 명칭
교회는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리워졌다.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름들이 여러가지다. 그 명칭을 보면 교회의 바른 의미를 알 수 있고,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명칭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과 함께 교회의 참 모습을 알아보기로 한다.
1) 그리스도의 신체
롬12장과 고전12장, 골1:8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다. 머리와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머리의 운명은 지체의 운명이요, 지체의 운명은 곧 머리의 운명이다. 함께 고난과 영광에 동참하여야 한다. 공생, 공사, 공영(共榮), 공욕(共辱)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사람은 죄와 하나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
골2:19에서는 머리와 지체 사이에 있는 동물학적 관계를 설명한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즉 그리스도께서 지배하는 교회를 말한다.
머리와 몸이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붙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도 아니다. 그리스도가 머리라 함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도 개입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의 다른 것이 전파되면 안된다. 몸은 머리의 지시를 따른다. 머리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몸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중풍병자이거나 지체부자유자임에 틀림이 없다. 신체인 교회가 머리인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중풍병자이거나 지체부자유자다. 성도는 교회의 개체이다. 성도가 모여서 교회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신체의 일부분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우리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다.
2) 그리스도의 신부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부부관계로 표현되었다(사54:5,6, 호2:19).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면 간음한 것으로 표현되었다(렢3:9, 5:7). 예수님은 신랑이요, 그의 교회는 신부다. 부부관계의 특별성을 알아야 한다. 마25:1이하의 10처녀 비유에서 신랑되신 예수님의 비유를 볼 수 있다.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계19:7-8).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교회는 신부로 단장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공중에서 신랑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한다. 신부된 교회는 신랑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살아야 한다. 결혼식을 기다리는 신부가 그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듯이 항상 준비하며 기다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교회
교회가 시끄러운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란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람의 교회가 될 때는 시끄러워질 수 밖에 없다. 설립자가 주인이 되고, 전세금을 낸 자가 주인이 되고, 헌금을 많이 내는 자가 주인이 되고, 많은 책임을 맡은 자가 주인이 될 때에 교회는 시끄러워질 수 밖에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만 하고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교회를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신성함,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
4)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은 영원하고 완전한 교회의 상징이다. 지금 실재로 존재하는 성은 아니지만 종말론적 교회의 최후의 영광을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사탄의 세력은 떨어질 것이며, 교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반드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질병이나 고통이나 눈물이 없는 곳이다. 죄악이 없으며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다. 죄의 유혹도 없으며 미움, 시기, 질투도 없는 곳이다. 사랑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곳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그 눈에서 눈물을 씻으시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없으며 처음 것이 지나간 곳이다(계21:3,4) 그곳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곳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다. 진정한 교회는 사람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그룹을 지어서 이끌어가는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포기한 교회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5) 진리의 기둥과 터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다. 고전 3:11은 교회의 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모퉁이 머리돌이 되신다(엡2:20). 이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다.
6) 성령의 전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은 지금도 교회에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령은 교회에 항상 계신다. 하나님 떠난 법궤가 더 이상 법궤가 아니듯이 성령이 떠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난 단체다. 이 속에는 항상 성령이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으로 연합된 교회여야 한다. 성령에 의해서 권능을 얻어야 하고(행1:8)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움직여져야 한다. 이런 교회에서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성령의 전은 성별되어져야 한다. 마치 지성소가 구별되었듯이 성령의 전은 구별되어져야 한다. 세상에 개방되어서는 안된다.
7) 하나님의 집
하나님께서 특별히 임재하시는 집이다(대상6:48). 하나님은 이 곳을 통해서 만나신다(출25:8, 29:43).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곳이다. 오순절 이후로 성령으로 지금도 역사하시는 집이다. 온갖 불안과 공포와 위협이 있는 곳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집이다. 이 집에는 잔치가 배설되어 있으며 청함을 받고 들어오는 자마다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이다. 이 집에서는 성도들에게 참된 안식을 제공해 준다.
4. 교회의 역사
참고적으로 교회가 형성되어지는 과정을 성경을 통해서 간략하게 간추려보기로 한다.
1) 제단
2) 장막(이동하는 교회)
3) 돌성전(솔로몬 성전,스룹바벨 성전,헤롯 성전) - 제사가 중심,법궤 중심
4) 성육신 성전(요2:19-21) - 교회의 모체,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와 부활하심으로 이룬 교회)
5) 공동체 성전(고전3:16,엡2:20-22) - 생명체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로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단체를 뜻함/제사가 없음,풍성한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산 예배가 중심,만인제사장,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산 공동체이다.
2.진정한 교회
주간 성경 공부 서리집사반
지난 시간에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교회의 의미와 명칭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오늘은 진정한 교회란 무엇인가를 다룸에 있어서 특별히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교회의 본질을 찾아보는 가운데 교회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근래에 들어서 교회가 찬양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중에 세상 사람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가 진정한 교회로서의 본질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본질을 회복하지 못한 교회는 맛 잃은 소금이요, 맛을 잃었기에 사람들의 발에 밟힐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을 회복했다 할찌라도 비본질적인 요소로 인해서 비난을 당할 수도 있다. 본질적인 것이 비본질적인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가 있다. 지성소에도 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비판을 받는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본질적인 것을 보면서 본질을 보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다. 본질과 비본질이 혼동되는 것은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본질이라 함은 교회의 바른 기초와 사명에서 나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를 말하며 비본질적이라 함은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의 잘못에서 나오는 것들을 말한다. 이렇게 본질과 비본질이 혼동되면 교회는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다. 교회는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와 비본질적인 문제를 잘 구분하고 본을 보여야 한다. 진정한 교회는 교회의 본질이 회복된 교회요 비본질적 요소를 제거하는 교회다.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며 본질이 회복된 진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에 대해서 강의 하고자 한다.
1. 삼위일체 교리가 회복되어진 교회 .
무엇보다 교회의 본질이 회복된 교회는 그 기초가 바로 서 있어야 한다. 그 기초는 바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그 계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역을 지금도 이루고 계시는 성령님의 온전한 사역이어야 한다.
1.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진 교회
먼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전에는 교회를 설립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설교로나 활동으로나 어떤 특수 집단을 특별대우한 일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교회는 설립되어졌다. 예수님의 생애가 없이는 교회가 설립될 수 없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교회의 근거가 된다(고전3:10-11절). 하나님의 설계도면에 따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재료를 사용하여 집을 지어야 하나님께 인정받고 그 공로가 상급으로 연결 된다. 예를들면 집을 지을 때 어느 시공업자가 설계도면을 무시하고 자기 나름대로 집을 짓고 나서 돈을 요구하면 누가 잘했다고 칭찬하고 돈을 건내 주겠는가? 집을 지을 때 주춧돌을 정확하게 놓고(십자가와 부활)하나님의 말씀인 재료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교회를 세울때 본질을 회복한 교회가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가 되며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지는 것이 교회임을 밝혀준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 되며 교회는 예수님을 기본으로 해서 지탱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유기적인 관계가 되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머리라면 교회는 몸이어야 하고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교회는 가지여야 한다. 예수님이 양분을 공급하는 뿌리라면 교회는 뿌리로부터 양분을 빨아들여 열매 맺는 가지여야 한다. 예수님이 신랑이라면 교회는 신부여야 하고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라면 교회는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연결되어지는 중간 돌들이 되어야 한다. 이런 교회는 본질이 회복된 교회요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다.
2. 성령의 피조물이 된 교회
두번째는 성령이 고백되어지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는 성령께서 지으신다. 하나님의 영은 교회를 채우신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지어져 간다. 교회의 모든 원천, 존재, 존속이 성령의 덕택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교회가 곧 성령은 아니다. 성령을 교회의 영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회를 신성한 존재로 믿어서도 안된다. 교회와 성령은 구분되어져야 한다. 다만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주관되어져야 한다. 오순절의 성령의 충만이 있어야 한다(행2:1-4). 성령 안에서 교회는 교회다워진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말씀과 기도의 권세를 주었건만 나약한 인간들에게 하나의 그림의 떡에 불과하자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과 기도로 승리하는 인생으로 살게 하셨다. 베드로의 변화는 그것을 증명해 준다.
3. 삼위일체 신의 사역 안에 있는 교회
하지만 교회를 성령의 단독 사역으로 구분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세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첫째는 선지자를 통해서 역사하셨으며, 둘째는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하셨으며, 셋째는 성령에 의한 역사로 지금 하시는 사역이다. 지금의 교회는 성령의 활동 속에 있다. 성령은 복음 전파의 주된 동인이 되며,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기억나게 하여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도록 하였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는 성령의 사역이 제한받지 않아야 된다.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일은 죄악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마음이다. 하지만 성령의 사역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의 공동 사역을 알아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첫째는 보내심 속에 있는 삼위일체로 사역하시고, 둘째는 영광 속에 있는 삼위일체로 사역하시고, 셋째는 삼위일체의 역사라는 형식으로 사역하신다. 이것을 발견한 교회는 본질을 회복한 교회다.
2.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 .
이러한 교회의 본질이 고백되어질 때 교회의 본질은 더욱 더 구체화되어진다. 먼저 개인적 고백이 있어야 한다. 마16:16에서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고백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진정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한다. 바른 신앙 고백이 교회의 근거가 된다(마16:15-19).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신앙고백이 단순한 입술에 박힌 주문을 외우는 차원에서 벗어나 삶의 신앙고백, 인격적인 신앙고백으로 성숙해야 한다(사도신경). 예수님은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고 음부를 이길 수 있는 권세와 천국의 열쇠를 교회에게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로 나심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속에서 구속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진정한 고백을 기초로 해서 교회는 세워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으며 영생이 있다. 고백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단독적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왜 고백해야 하는가? 첫째는 고백이 구원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외적인 표현으로 구원의 절대적 요소다. 둘째는 이 고백이 믿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단은 이것을 고백하지 못한다. 초대 교회의 이단 중에 영지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틀렸다. 셋째는 이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고백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이루는 증거다. 넷째는 이 고백이 있어야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의 도움을 입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지 않겠다고 했다(마10:32). 이 고백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며, 이 고백을 하는 교회는 능력이 나타나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영화롭게 된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터전이 있다. 물고기는 물을, 나무는 흙을 터전으로 하듯이 사람은 바른 영적 삶을 위해서 신앙의 터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는 신앙 고백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이 없는 터전 위에 세워진 단체는 아무리 고매한 가치관과 내용을 소유하고 있다해도 결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신앙고백을 전수 받아야 하고, 그 고백 안에서, 그 고백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3.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 .
성도의 교제는 사도신경에도 나온다. 성도의 교제로 번역된 라틴어는 Communio Sanctorum이다. 여기서 Sanctorum은 거룩하게 된 사람을 말한다. 성도는 일생을 복음과 교회를 위해 몸바친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택하시고 모으시고 미리 아시고 의롭게 만드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 땅에서 담당한 사람들이 성도다. 단지 등록되어진 사람이 전부 성도는 아니다. 나는 진정한 성도인가? 내 속에 성도의 삶이 있는가?
구약성경에는 성도의 교제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중요하게 나타난다. 주로 사용된 단어는 κοινονια이다. 38번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사를 다른 성도들과 나누어 가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죽고 부활하고 영광을 받으며 그리스도가 또한 그의 것을 우리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이노니아란 말은 “사귄다, 참여한다,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뜻이 있다. 교제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관계 유지를 위한 사귐이 있어야 한다. 수직적인 사귐으로 하나님과 사귐이요, 수평적인 사귐으로 성도들 간의 사귐이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는 우리와의 교제 안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이 없다. 또한 교제는 참여함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하는데 참여해야 한다. 지체는 참여할 때에 살아 있다. 몸의 어느 지체가 몸의 결정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 부분은 병들었음에 틀림 없다. 참여하지 않는 교회는 병든 교회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제는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주의 복음, 은혜가 무궁무진하다. 이것을 혼자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중적 교제를 가져야 한다. 하나는 수직적이고 하나는 수평적이다. 수평적 교제는 교인들 상호간의 교제로 사랑, 단결, 봉사, 동정이 있어야 하며, 수직적인 교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같이, 함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직적 교제는 수평적 교제와 동일한 것은 아니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수평적 교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수직적 교제가 성립되지 않거나 불확실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수직적 교제만을 고수하며 수평적 교제가 단절된 교회는 비본질적인 교회의 모습니다.
수평적 교제는 행2:44과 4:32에 기록되어 있다. 6:1-6과 9:36-39은 원시교회의 성도의 교제가 어떤가를 보여준다. 성도의 교제는 개인과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교회의 동참과 도움을 나누고 헌금을 나누는 것까지 연관된다. 성도의 교제는 인간 사회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신분제도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지상에서 가지고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교제다.
원시교회의 교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고 성화되어 멀지 않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때에 받을 그 축복이 이미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현세에서도 체험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교제를 확산하여 현실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굳은 믿음에서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있는 것고 같은 교제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다. 고로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인간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 되어야 한다. 에로스도 아니고 필로스도 아니고 스톨게도 아니다. 아가페적 사랑이어야 한다. 무조건적 사랑이요, 희생적 사랑이다. 조건이 있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대접하고 나중에 그 대접을 다시 받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는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교회이며,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하는 교회이며, 하나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다.
4. 공동체로서의 교회
1. 계약 성취 안에서 산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제 이 계약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며 살아야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계약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인격성을 볼 수 있고, 계시되어진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있고, 사랑을 확인할 수 있고, 계약의 준행 속에서 번성의 복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언약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인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다. 이것을 실천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다.
2. 집단적 신앙 공동체의 교회 .
교회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모이는 일이 중요하다. 모여서 서로 교제하며, 서로 기도하며, 서로 사랑하며, 마음을 같이 하여야 한다. 이러한 집단적 신앙 공동체적 삶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야 하며,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며, 의를 행한다.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올바른 교회다.
3. 증인으로서의 공동체를 이룬 교회 .
제자들은 모여서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명령을 하셨다. 요20:22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했다. 마28:19에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다. 막16:15,16에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다. 행1:8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제 제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복음을 증거해야 할 사명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령을 실천하기 위한 충성심이었다. 그들의 충성심은 로마 군인의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증인이란 말은 법적 목적에 쓰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증거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고 배우고 체험한 것들을 증거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인 증거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란 것, 모든 계획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어졌다는 것,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지는 것등을 증거하는 것이다.
4.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종말과 말세를 구분할줄 알아야 한다. 말세는 세상의 끝을 의미하면서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인다. 상식 밖의 큰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은 말세적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종말의 경우는 다르다. 종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어떤 사태나 시간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은 다시 시작하는 미래로 연결되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삶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삶임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3일만에 부활하는 것으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종말론적이다. 교회는 이런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줄 아나니”(고후 5:1)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집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했다(ξθδαμεν). 알기 때문에 더 힘이 된다. 확실한 미래적 보장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현재의 승리와 미래의 현존과 능력과 영광을 목격하면서 담대하게 살아간 종말론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5. 살아 있는 교회 .
1. 생명체를 간직하고 있는 교회
생명체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 벧후3:18절에 보면 은혜 안에서 성장할 뿐 아니라 저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야 할 것을 말한다. 성장에는 세 가지가 있다.첫째는 내적 성장이다. 벧전2:4-4에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본 받는 것, 회복하는 것, 성령의 9가지 열매로 표현되는 삶, 인격성숙으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마음과 자세,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계발되고 은사로 남을 섬길수 있는 인격과 성품을 말한다.
둘째는 외적인 성장이다. 행2:41,47절에 교회 성장, 세계복음화, 재 생산으로 복음이 확장해 나아가는 것, 숫자적인 성장을 말하고 있다. 셋째는 공동체적인 성장이다. 엡2:20-22에 개인주의 성장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향하는 성장이 이루어지어야 한다고 했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공동체의 화목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성장은 교회에서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2. 조직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아니라 은사를 중심으로 한 교회 .
조직을 중심으로한 교회는 카톨릭교회다. 조직은 은사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 울타리 역할을 해야 하는데 조직이 중심이 되고 은사와 개인의 특성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면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고 성령의 역사를 조직과 경험으로 제한하여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보다는 인간의 지혜와 경험이 중심이 되어 버리는 죽은 교회가 될 수 밖에 없다.
은사를 중심으로 한 교회는 개혁주의 교회다(엡4:11-12 ,고전12:4-11절). 은사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다양하게 공동체를 섬기고 활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려 주어야 한다. 은사가 개발되고 그 은사를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는 분위기,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야 교회가 교회다와 지고 교회가 생명력이 넘치고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를 만들 수 있다.
은사와 조직의 관계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은사 공동체가 중심을 이루며 조직과 행정은 은사를 잘 활용하고 질서를 세워주는 역할, 균형을 이루는 틀을 마련해 주어야 교만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3. 올바른 교회관이 있어야 한다.
먼저는 모이는 교회여야 한다(히10:24-25절,행2:42). 사막의 얼룩말의 생존법은 모이는 것이다. 교회가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며 승리하는 지름길은 모여서 무장을 하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모이는 교회는 첫째로 예배드리는 교회(공적인 예배)요, 둘째로 말씀으로 무장하는 교회요, 셋째로 기도로 무장하는 교회요, 넷째로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하는 교회요, 다섯째로 교제하는 교회다.
모여진 교회는 반드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행1:8,마18:18-20). 전도, 사회봉사, 선교활동, 세상변혁, 작은 예수의 삶, 올바른 가치관과 방향성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예배의 삶이 있어야 하며(롬12:1-2), 영혼 구원 사역을 해야 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마5:13-16).
4. 올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마6:33)
우리 교회는 올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몇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천국일꾼을 키워내는 교회, 둘째로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내적으로 성장하는 교회, 셋째로 세계비전을 간직한 교회, 넷째로 지역사회에 봉사는 교회다.
결론 .
지금까지 교회란 무엇인가를 본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진정한 교회의 본질을 알아서 교회된 우리 자신이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고 우리가 모인 이 교회가 본질을 회복한 교회가 되도록 하자.
3.교회와 하나님 나라
주간성경공부 서리집사반
교회란 무엇인가를 공부함에 있어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단지 신학교에서나 배우는 학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바로 알아야 교회를 바로 알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전에 말하던 것과 같이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 나라와 다른 저쪽에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바른 개념을 다루고 아울러서 하나님 나라가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 관계 속의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1. 하나님 나라의 개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 사상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본질과 사역을 이해하셨다.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첫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your hand)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육신하셨으며 그것을 위해서 수 많은 예화를 들려주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라고 하는데 바실레이아란 말의 본 뜻은 “존재”, “본성”, “상태”등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왕의 위엄, 또는 권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말은 자연적으로 왕이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한 장소의 필요성이 결부되어 바실레이아는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함께하며 위엄으로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는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역(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치에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 나라는 이 땅에 있는 것이 발전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의 개입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어느 지역이나 나중에 당도할 그 어떤 공간을 생각함보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를 향한 경건한 생활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한다.
통치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현세적인가, 미래적인가? 정치적 통치인가, 영적인 통치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적이면서 미래적이다. 유대인들의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임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나 예수님은 그 나라가 이미 당도했다고 선포하셨다. 눅11:20에 보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다(has come).
그러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not yet). 막9:1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오고 있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6:10에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고”라고 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현세적이며 미래적이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가라지비유, 양과 염소비유등).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의 歷史가 없다. 이 말은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의 정치적인 것이 아니란 말이다. 비록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기는 했지만 세상의 통치를 본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통치는 대비적 개념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포괄하면서 모든 자연법을 초월하면서 하나님의 본성인 영의 방법에 따라 사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있는 모든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자연과는 단절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나온다. 누룩비유, 감추어진 보화 비유, 가라지 비유등은 단절된 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적으로 나타나지만 예수님 자신의 출현으로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형태로 오는 것은 아니다.
누가 이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는가? 먼저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다. 그러나 이 자격만 가지고는 안된다. 그들은 반역과 타락의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은 이미 사라졌다. 이제는 이스라엘인 중 남은 자다. 이들은 새이스라엘의 핵이며 끝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사람이다. 이들은 참이스라엘이다. 이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이 될 수 있는 자들이다. 이 나라는 오직 회개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2.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
하나님의 나라는 몇 가지로 이해를 달리 하게 되었다. 첫째는 영지주의적 특징을 가지면서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는 조류가 있었고, 둘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 같은 사람들은 플라톤주의와 스토익적으로 이해했고, 셋째로 로마를 중심한 서방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 현현을 굳게 믿은 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관에 근거하여 지상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 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늘의 나라다”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로마 천주교회의 교리로 굳어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칼빈도 이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곧 교회라고 할 때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대행하기는 하나 그 자체는 언제든지 부족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개혁을 하면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개신교의 개념이 되었다.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기로 한다. 특별히 한스 킹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나라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교회가 본질을 회복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바실레이아와 에클레시아가 동일시 되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교회가 발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동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를 실현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그 안에 들어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거나 지상에 넓힌다거나 그 실현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다. 교회가 현재 발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연속성이나 동일성을 가질 수도 없다. 동일성이란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타당치 않음은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통치란 온 세계를 포괄하는 최종적, 결정적인 바실레이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상의 교회와 다른 것이다. 또한 연속성도 타당지 않음은 연속성이란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다는 것인데 하나님 나라는 조직의 발전이나 성숙 혹은 침투 과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새롭고 즉각적인 하나님의 완성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할 일이란 마음을 열고 순종하는 것이요, 정신을 차리고 기다리는 것이며, 믿고 회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거나 연관성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통치를 교회에 바로 적용시키면 부당한 교회찬양론이 나오게 된다. 교회의 부당한 찬양론은 하나님의 통치의 권능과 영광을 기다리지 않게 하며, 모든 약속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며, 교회가 안식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며, 교회의 말씀, 교회의 세례, 교회의 성찬이 완성된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교회는 현실적인 것이데 비해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것이면서도 미래에 되어질 것이기에 반드시 구분되어져야 한다. 에클레시아는 죄인과 의인을 동시에 안고 있는 반면에 바실레이아는 의인과 성인의 나라다. 에클레시아는 아래에서 부터 자라는 인간적인 것이요, 바실레이아는 위로부터 돌입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통치의 주재가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수 많은 비유는 이 땅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조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분리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쉽게 결단할 수는 없다. 이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느 하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통치와 교회와의 관련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다.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고 했다.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골4;11, 살전2:12). 그러므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서로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내다보고 기다린다. 그 나라를 바라보며 순례의 길을 간다. 순례 도상의 교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그 나라를 선포한다. 교회는 미래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지금 이미 시작한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다. 물론 교회는 아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로 다니고 있지만 영원한 부활을 기다리며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주님과의 연합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이 상태가 바로 주님의 통치 하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말씀의 전파로 인해서 죄가 사해지고 새로운 인간이 이루어지고 있다. 낡은 인간을 참회의 무덤에 뭍고 신앙에 의해서 새 인간으로 부활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있다.
성찬의 참여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성부의 영광 중에 나타날 종말의 구원의 잔치를 주께서 오실 때까지 선포하고 재현하고 참여하고 있다. 지금 교회에 성령이 계신다. 사역하고 계신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의 한 면모들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시작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연속성이나 동일성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통치의 전조임에는 틀림이 없다. 교회는 이미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실재의 표징이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리키는 전조다. 온전한 교회는 이것을 실현해 나가는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령이다.
교회는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아니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전령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서 온전히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봉사, 이것은 어떻든 교회가 짊어지고 나가야 할 주어진 의무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메시지의 선포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유감없이 선포하신 가장 본을 보이신 분이셨다.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범적으로 끝까지 실행하신 분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 안에 높여진 분이되셨다. 진정한 교회는 이것을 따르는 교회다.
하지만 이러한 선포는 먼저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항상 되풀이되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바가 되어서 말씀 속에서 거듭 새로와지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멧시지만이 신빙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장(場)으로서의 교회
직접 보이는 형태로 다스리지는 않지만 그 나라의 시민들이 역사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시민들을 통하여 사역한다. 그 사람들은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믿음의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場이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이 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회 밖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장이다.
하나님 나라의 유형체(有形體)로서의 교회
어거스틴은 로마제국을 지상의 나라로 보고 이에 대한 반정립으로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지상상적 구형체로 보았다. 그러나 지상에서 사람으로 구성된 교회는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될 수가 없다. 교회는 언제나 계혁을 거듭하면서 성화의 과정을 걸어야 할 뿐이다. 교회는 어느 한 시점에서 완성되거나 완전 성화되는 일은 없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대권을 지상에서 대행한다는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다만 하나님 나라의 유형체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유형체라 할 때는 말씀 중심으로 모일 때, 이적이 계속 일어나고 있을 때, 모든 교인이 다 제사장이 될 때, 교회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회복할 때를 가리켜서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 역사와의 중보자로서의 교회
하나님 나라와 인간 역사는 이중적이다. 하나님 나라는 아가페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인간 역사는 에로스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이 둘은 비교가 될 수 없다. 인간 역사는 하나님 나라에 비교도 될 수 없는 입장임에도 부구하고 계속 도전해 왔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에 의해서 침략받을 만큼 약한가? 아니면 인간 나라가 하나님 나라에 도전할 만큼 강한 것인가?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 섭리는 양자의 입장에 서 있는 교회가 양자를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선험적(先驗的) 공동체로서의 교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본질적 하나님 나라다. 또 하나 특이할만한 것은 現未的나라다. 그리스도 안에서 볼 때는 분명히 현재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미래의 것이 현재로 나타날 뿐이다. 이것이 선험적이다. 그것은 성취에로의 선불이며 오는 것을 미리 내다보는 것이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선험적이란 말보다 더 강한 선취(先取)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종말론적 기대라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선험적 가능성은 교회 안에서만 발견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향연장(饗宴場)으로서의 교회
행 2:43-47에서 성도의 완전한 삶을 보여준다. 그들의 삶은 하나의 거룩한 삶의 축제의 삶이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요, 하나님 나라의 모습니다. 교회는 축제가 있는 삶이어야 한다. 축제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첫째, 그리스도인은 변화된 신분을 가지고 세상과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변화산에서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과 승천하신 모습을 본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으므로 기쁨에 견디지 못하는 감사의 표출이 있어야 한다. 이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셋째,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있어야 한다. 갈2:20의 삶이 있어야 한다. 넷째, 희망의 샘터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가 된다. 다섯째, 교회는 이 세상에서 체험할 수 없는 신비성이 있어야 한다.
3.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는
지나가는 교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서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의 계시를 향해서 나가야 한다. 교회는 항상 진취적이어야 한다. 교회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가 아닌 하나님을 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와 관련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사람들이다. 성도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다. 교회는 다만 그 나라를 가기 위한 과정 속에 있는 일시적, 잠정적, 과도기적인 존재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런 개념을 망각하고 있는 교회는 미래가 없으며 곧 쓰러지게 된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삼는 교회는 어떤 풍랑 속에서도 버틸 수 있다. 교회가 결정적 존재가 되면 좌절할 수 밖에 없으나 교회가 일시적 존재에 불과하다면 그런 교회는 희망이 있다. 지옥의 권세가 감히 두드리지 못할 것이다.
신뢰하는 교회
그러므로 거듭 강조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교회는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신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신뢰하여야 한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추구하며 세계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무조건 신뢰하여야 한다. 자신의 능력이나 활동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며 성취한다고 생각하는 교회는 흩어지고 붕괴하는 교회다. 교회가 스스로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려고 하면 그런 교회는 좌절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가 교회의 행동과는 상관 없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교회는 신앙에서 오는 확신을 가지고 지금 이미 최선을 다할 수 있고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 교회에는 신앙이 있으면 산이라도 옮겨 놓을 수 있다는 약속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봉사하는 교회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교회는 교회는 결코 종교 정치적 신정 체제로 등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할 일은 영적 봉사다. 종의 모습으로 봉사해야 한다. 인간을 섬겨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 인간을 섬겨야 한다. 세상은 악하고 오히려 교회를 삼키려 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있다. 교회는 그 가운데 있다. 마치 양이 이리 가운데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교회가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섬겨야 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세상의 권력과 야합하면 불가능하다. 세상 권력과 함께 할 동안에는 강한 것 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것의 시녀가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과 야합해서는 안된다. 인간적 방법으로 안된다는 말이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을 때 가능하다. 약한 것을 통해서 강해지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죄인들의 교회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은 죄인을 위한 구속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죄인을 위한 구속 사역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하므로 불안을 조성해서는 안된다. 파멸의 경고가 아닌 구원의 소식을, 폭언이 아닌 복음을, 선전포고가 아닌 평화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경건한 의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경건한 죄인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용서해주고 고쳐주고 구원해야 한다. 교회는 티 없이 거룩한 독선적 계급이 아니다. 교회에도 완전한 것이란 없다. 모두가 위태롭고 연약하고 불안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 교회가 세상과 싸우는 전투적 교회요, 세상과 하나님의 통치가 싸우는 전선이 바로 교회 한 가운데를, 각 교회의 구성원들의 마음 한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회는 냉소적 교회요, 독선적이며 무자비해진다.
진정한 교회에는 자기 속에 항상 알곡과 가라지가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세상에 고상한 윤리를 창출해 줄 수 없음도 안다. 자기도 유혹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음도 안다. 그러므로 죄인을 멀리할 수 없음도 안다. 어떤 죄인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철저히 죄인들의 교회여야 한다.
순종하는 교회
교회는 세상의 메시지에서 돌아서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향하여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세상을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사랑의 순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내적 양심보다는 외적 합법성을, 시대적 징조바다는 고래의 전통을, 순수한 마음보다는 입에 발린 봉사를, 온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계율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은 순종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이런 교회는 인간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하며 노예화한다. 하지만 이런 것이 없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유로이 세상에 봉사하게 된다.
결론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자력으로 성취할 수 없다. 다만 은총으로 주어진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끊임 없이 순례하고 있는 교회는 모든 비본질적인 것들 속에서도 본질을 향하여 나간다.
4.변하는 교회
주간성경공부 서리집사반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세계는 변한다. 역사도 변한다. 교회는 그 변하는 세계 속에 있다. 그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산 속으로 가지 않고 마을로 가서 빛과 소금을 발하는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변해야 한다. 하지만 변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변해야 하며 무엇이 변해서는 안되는가?
1. 변하는 세상
세상은 변한다. 모는 것이 변한다. 과학도 변한다. 윤리도 변한다. 가치관도 변한다. 학문도 변한다. 기술도 변한다. 통신도 변한다. 교통도 변한다. 의학도 변한다. 물리학도 변한다. 생물학도 변한다. 화학도 변한다. 심리학도 변한다. 사회학도 변한다. 경제학도 변한다. 예술도 변한다. 영화도 변한다. 문학도 변한다. 세계는 변했고 변하고 있고 또 변할 것이다.
변하는 세상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색깔이다. 다양한 칼라를 가지고 있다. 둘째는 속도다. 신속히 변한다. 예날에는 십년이면 변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일 이년이 멀다하고 바귄다. 속된 말로 쌍둥이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말세가 되면 빨리 움직인다고 했는데 그것을 실감하게 한다. 며칠 전에 수원에 볼 일이 있어서 지금 출발한다고 전화하고 간 적이 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앞에 있는 수퍼에 약간의 다과를 준비하러 나갔다. 그런데 수퍼에 간 사람보다 서울에서 출발한 사람이 더 빨이 집에 당도했다. 실로 빠른 세대임을 알았다. 모든 것이 빨리 움직이므로 인내하지 못한다. 조급하다. 셋째는 변화다. 동일한 사건을 지속적으로 간직하지 못한다. 쉽게 싫증을 느낀다. 가정도 오래 간직하지 못한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이것이 변하는 세계의 특징이다.
이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불안이다. 이들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적응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불안해 하고 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고 심리학이 발달된다고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세상은 변한다는 것이고 변하는 세상 속에 있는 사람은 불안을 금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변하는 교회
1. 변하는 세계 속의 교회
시대가 변하고 역사가 변하는 동안 세계 속에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도 변했고, 변하고 있고, 변해갈 것임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시대가 변한만큼 교회는 변했고, 교회에 대한 자기 이해도 변했다. 교회는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같이 변할 수 밖에 없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 들이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변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교회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교회 밖의 세상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교회 안에 있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생기 잃고 경화된 모습으로 있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그들의 변화를 어떻게 지켜볼 것인가? 그 속에서 어떻게 그들의 변화에 대응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 속에서 변화해 나갈 것인가? 우리의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앞서 현대인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하는 가운데 다양하고 신속하고 변화가 급한 이 시대의 현대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도 불안의 씨는 존재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 교회는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겠는가?
2. 변질인가 변화인가?
이 세상에서 교회는 변할 수 밖에 없고 또 변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변한다고 할 때는 두 가지의 개념을 지녀야 한다. 변질인가, 혹은 변화인가의 문제다. 변화라 함은 그 내용은 변치 않고 모양만 바뀌는 것을 말하며, 변질이라 함은 그 내용 자체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style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변할 수 없다. 본질이 변하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변화를 말할 때는 본질은 항상 고수하되 그 모양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3. 역사 속의 교회
교회는 끊임 없이 변하는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이상 역사적이다. 교회는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언제나 역사적 형태 안에서 보아야 한다. 또한 역사적 형태는 언제나 본질을 출발점과 목표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변하는 역사 안에서 같이 변하거나 혹은 변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지금까지 왔다. 역사적으로 변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1) 초대 교회 시대
초대 교회시절에는 교회는 단지 교화를 위해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소용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졌으나 점차적으로 그 해석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변하여 왔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 속에서 교회가 평가되어졌으며 그 평가 속에서 교회가 변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 외적인 것과 내적인 변화가 있다.
먼저 교회 외적인 변화를 보면 처음에는 국가와 대립되는 관계의 교회였다. 처음 3 세기 동안에 교회는 국가와 대립되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히폴리투스 같은 사람들은 로마 제국을 사탄의 나라로 보았다. 국가를 대적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레니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치프리아 누스같은 이들은 “교회는 이단을 대적하는 무기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때의 교회는 국가에 대항하는 전투적 교회였다. 당시의 교회의 입장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점차적으로 변하여 교회는 국가에 승리 혹은 조화를 이루는 관계로 발전했다. 교회는 승리적 열매맺는 국교적 교회일 때가 있었고 혹은 그리스도교적 교회로 국가와 조화를 이루는 때도 있었다. 유세비우스는 말하기를 로마 제국은 교회에 반대되는 사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닦아 주는 하나님의 뜻의 수행자라고 했다. 교회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이렇게 같은 사건을 놓고서도 교회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교회의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내적으로 진리의 도장이요, 영적 공동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희랍인의 신플라톤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해석이다. 이들은 진리의 순순한 직관과 이해및 성례전의 상징적 구원 능력을 중시했고, 포괄적인 세계관과 종교적인 문화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 교회라고 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이기에 질서 정연한 법적 단체를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의 성덕과 순종및 엄격한 참회 규칙과 명확한 생활 규범을 갖춘 교회 질서가 중시되었다. 교회의 존재의 의미가 변한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 안에서는 성도들의 일반 사제직이 강조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만인제사장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사제 중심적 교회가 그 모습을 바꾸어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인 것이다. 진리의 재발견이다. 오리게네스도 이것을 주장했다. 이제는 평신도와 사도의 구분을 없앴다. 그러나 한 가지 불완전한 성도와 지각 있는 완전한 성도는 구별을 하였다. 성경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당시에 성경 교육이 중요하기에 지각 있는 성도들이 우선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2) 중세 시대
중세 시대도 교회의 변화는 계속 있었다. 중세 시대에는 교회의 권위와 국왕의 권위 관계 속에서 교회의 모습이 변화되어졌다. 중세 시대의 교회는 세 가지로 변천 과정을 거쳤다.
첫째는 교회의 법적 구조를 중요시 하지 않을 때였다. 이 때는 교회의 지도권이 황제에게 있었다. 카알 대제의 시절에는 황제는 교회의 보호자요 지도자라 하였다. 주교는 황제를 통해 권리를 얻었고 종교 회의를 소집할 수도 있었다. 교황을 세우는 것도 황제의 입김이었다. 이 때 교회란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한 때였다. 자체의 변화를 시도할 수도 없었으며, 진리를 위한 목소리를 제대로 나타내지도 못할 때였다. 그 이유는 교회가 타락하였기 때문이었으며 종교가 정권의 하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교회로서의 구실을 다할 수가 없었다.
둘째로 왕권과 사제권이 조화될 때도 있었다. 그레고리 이전의 삭슨족과 살리족 때의 일이다.
그 다음은 교회의 법적 제도적 면을 특별히 강하게 하려는 때가 있었다. 주교의 권위가 강조가 된 때다. 이 때를 가리켜서 디오니시오는 주교를 신비력의 소유자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이 때는 교회의 조직을 천상의 위계 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세빌라의 이시도르는 주교를 가리켜서 모든 권리의 소유자라고 했다. 또한 교회를 열쇠의 권능으로 보고 이것이 주교와 결탁되었다고 했다. 교황 수위권이 주장된 것이다. 이 때 교회는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이 때는 교회의 전성기였다. 그레고리 7세의 출현은 중세의 암흑된 교회에 권위를 회복시켜준 시기였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카놋사의 굴욕” 사건으로 유명하다. 당시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사이에서 생긴 이 사건은 교회의 힘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보여준다. 당시 독일의 땅 반 이상이 감독과 회당장의 소유였다. 교황은 이것을 교회가 관리해야 한다고 하고 황제는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산권이 교황에게 돌아가면 국왕의 실권이 약해질 것을 염려해서 국왕은 교황의 반대파와 결탁하여 WORMS(1076년) 종교회의를 열어 교황을 폐위시키기로 결의했다. 그러자 교황은 바로 회의를 다시 소집하여 국왕을 파문하고 폐위할 것을 결의하고 국민은 국왕에서 충성을 다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때 국민들은 영원한 형벌을 두려워하여 교황의 편에 섰다. 국왕은 사태가 불리해진 것을 알고 화해하기 위해서 한 겨울에 알프스를 넘어서 카놋사로 갔다. 황제는 맨발과 참회자의 초라한 복장을 하고서 눈덮인 성문 밖에 3일을 서 있어야 했다. 4일째 되던 날 교황은 그를 받아 주었다. 황제는 자비를 간청하고 과오를 자백하면서 교황의 발 아래 겸손히 부복하여 사면을 받았다. 이것이 카놋사의 굴욕이며 교회의 권위가 극에 달할 때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때에 자체 변신을 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정치 싸움이 되었고 정치 싸움은 나중에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돌아갔고 교회의 권위는 다시 실추되기 시작했다.
교회 외적인 변화의 과정 속에서 교회는 자체적으로 변해야 하는데 그 변화의 촛점을 찾지 못하고 정치적 다툼이나 하므로 중세 교회는 암흑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변해야 할 때 변하지 못한 교회의 비참한 모습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들은 오직 사제 중심의 권위만 부르짖었다.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버리지 않으셨다. 이 때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되고 교회는 다시 한 번 변화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왈도, 위클리프, 후스, 루터, 쯔빙글리, 칼빈, 아나밥티스트, 소시니안, 앵글리칸등이 나타나서 당시의 유행하던 것 보다 순수하고 보다 참된 형식의 그리스도교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들이었다. 이 말은 원래는 “항거한다, 반대한다”는 뜻을 가지고 로마 카톨릭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루터의 95개 조항 발표 이후로 이 말의 의미도 바뀌었다. 단지 항거가 아닌 “공언하다, 공공연히 선언하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잘못된 것을 항거하고 순순한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라고 믿는 바를 회복시키고 재확인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과 달리 과거의 모든 전통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자기들 자신도 개혁의 여지가 있음을 밝혔다. W. E. GARRISON의 말대로 행위에 있어서나 신앙에 있어서 완전하고 결정적이고 불변의 종교를 원하는 사람은 벌써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진리의 재발견을 허락하고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의 진정한 변화는 시작되었다.
당시의 절대권을 누리던 교황 중심에서 이제는 평신도 중심으로 내려왔다. 첫째로 이들은 모두 이신칭의를 주장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수락하는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구원은 행위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밝혔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소명을 강조하였다. 종교적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성도는 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으며 사제만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셋째로 신자의 제사장직을 재삼 확인하였다.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중재자가 필요 없이 직고할 수 있음을 밝혔다. 넷째로 성경의 충족성을 주장했다. 교회의 신앙이나 행위의 규범은 성경으로만 충족한 것이며 교회의 전통을 주장하고 성경 위에 교회를 두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3) 근대
트랜트 회의 시대를 중심으로 교회도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 갈리아주의자들은 정치적 영향과 고대 교회의 영향을 받아 전통, 관습, 관례를 지닌 지방 교회를 육성할 것을 주장하였고, 교황지상주의자들은 교황의 권위론에 빠졌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연법을 주장하며 교회는 다양한 권리가 구비된 사회정도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끄는 교회는 단지 인간의 권리를 찾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J. M. 세일리의 경우는 종교면에서 산 信心의 산 매개체로 보았다.
불란서의 복고운동은 과거지향적으로 다시 돌아섰으며 절대 군주제도를 주장하고 교황의 절대권을 주장하였다. 반면 독일의 튜빙겐 학파는 미래지향적으로 돌아섰다. 그 중에 묄러는 직무와 제도를 중심으로 외면화된 성직주의적 교회론을 극복하려고 교회란 성령에 의하여 사랑 안에서 일치된 신앙인 공동체이며 교회의 모든 직무는 바로 이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진일보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회의 입장이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교회 내의 변화도 다양하게 일어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4) 현대
지금의 교회는 어떤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를 하고 있는가?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정교 분리 혹은 정교 구분의 자리에서 서로가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그러나 상호보완적 관계로 매듭이 지어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 가는 교회는 국가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이끌어 주어야 할 숙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자체적으로 또 변화되어져야 한다. 시대에 부응하는 긍정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
3.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 것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교회가 변하는 것은 좋으나 변해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이것은 본질과 형태와의 관계다. 형태는 변하되 본질은 변할 수 없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구분할 수도 없다. 형태 없는 본질은 꼴이 없으니 비실재요, 본질 없는 형태는 알맹이가 없으니 역시 비실재다. 이 둘은 분리되어 어느 하나를 중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것은 아니다. 볼질과 형태를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구별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한 형태는 없다. 영속하는 본질을 변하는 형태 속에서 찾아낼 때 비로소 현실 교회를 바로 볼 수 있다.
다만 가변적인 것들, 일시적인 것들, 현상적인 것들은 변해야 한다. 자기 이해적인 것들도 변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되풀이하는 것도 그 자체가 유익한 것도 아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리는 변화를 가져야 한다. 교회가 자신에 충실하려면 단순히 과거만 고수해서는 안된다. 역사성을 지닌 교회로서 항상 변하는 세계, 항상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사는 세계 속에서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 변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맞게 변형시켜 적용하여야 한다.
1. 변해야 할 것
(1) 권위주의
홀로 대제사장인 것처럼 행하는 것은 교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만인제사장직을 무시하는 행위도 사라져야 한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2) 일인 독재주의
교회는 파쇼가 아니다. 강력한 카리스마적 기질을 가지고 교회를 독단적으로 끌어가는 방법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장로교회는 독재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이제 탈피해야 한다. 이것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인데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또 다시 미련한 길을 걷겠다고 결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3) 회중제도
장로교회는 회중정치가 아니다. 사제의 독단적 행위에서 평신도의 만인제사장으로 내려온 것이 제1의 종교개혁이라면, 이제 평신도의 횡포에서부터 탈피해야 하는 제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4) 전통주의및 형식주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전통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개혁이 일어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이는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들의 특징 중의 하나다. 그러나 교회는 바리새인적 전통주의를 버려야 한다. 그들은 결례의식, 이혼, 기도 습관, 십일조등 모든 것이 전통에 사로잡한 것들이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형식이 우선이 되었으며 회칠한 무덤과 같았다. 의와 인과 신이 없는 형식적인 것들이었다. 교회는 이제 형식적인 것에서 탈피해야 한다.
(5) 인습주의
사람의 행위를 따르는 것이나 혈통 중심으로 운영하는 모든 제도는 이제 교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교회는 김일성 부자 체제도 아니며 이조 시대의 족벌체제도 아니다.
2. 변하지 말 것
선교지에서 문화를 접촉하는데 원칙이 하나 있다. 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의 문제다. 받아들이자니 바른 신앙을 형성할 수 없고, 배척하자니 복음을 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탈피하기 위한 것이 토착화라고 하는 미묘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이 더디 전해지더라도 교회는 양보하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이 곧 교회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의 변화의 흐름에 맞추어 변화되어야 하지만 교회의 근원이 되는 진리의 문제만큼은 절대로 변화되어서는 안된다. 아니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이라는 원초적 증언, 원초적 메시지는 변할 수 없다. 이미 결정된 근본적 본질은 변화될 수 없다.
4. 보수인가 개혁인가?
전통주의는 교회론 자체를 처음부터 영구불변한 것으로 생각하여 무비판적으로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매인다. 그러므로 이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보수주의라는 이름을 가진다. 낡아버린 과거를 보존하려고 새로운 현재의 요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반면에 급진주의는 살아 있는 과거를 무시하고 일시적인 새로운 현재의 새로운 변화를 지나치게 몰두한다. 현대주의자들은 현재의 시대와 문화에 적응한다고 하여 비판 없이 유해무익한 가변적 현실에 좌우된다.
현대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근본주의가 생겼다. 이들은 나름대로 기독교의 근본 원리를 파수하려고 9개의 항목을 가지고 현대주의를 대항한다. 이들은 첫째로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 둘째로 삼위일체, 셋째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 넷째로 인간 창조와 타락, 다섯째로 그리스도의 대속, 여섯째로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과 승천, 일곱째로 신자들의 중생, 여덟째로 그리스도의 개인적이고 임박한 재림, 아홉째로 부활과 영복 혹은 영벌을 기본 교리로 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비타협적이고 완고하고 일치를 주장하며 학적 자유를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유주의자들이 손만 대면 나빠진다고 하였다. 이들은 교리가 성경적이 아니면 이단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비성경적 행동 즉, 사랑 없는 행동은 느끼지 못한다. 문화와 철학의 일반적 흐름과 교회 전통에서 스스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아무 비판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독선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근본적이 아닌 것은 헛수고라 하여 자기와 일치하지 않으면 교제하지 않으려 하므로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이들의 특징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진보적 개선의 의지가 없다. 신학적인 신조 투쟁에 관계하여 성경의 일부분에만 매달려 전체적인 조화를 잃게 되므로 신앙과 행위의 균형을 상실한다. 대부분의 보수 교회가 이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변화를 꺼려한다.
교회는 전통주의도, 보수주의도, 급진주의도, 현대주의도 아닌 개혁주의가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란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가지고 항상 개혁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변하지 않되 주변적인 것은 항상 개선해서 변화의 과정을 거쳐 나가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 개혁주의의 정신을 잘 설명해 준다.
5. 우리의 나갈 길
보수는 변화되는 세계 속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을 추구한다. 우리 교회는 개혁주의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개혁교회로서의 우리 교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1. 진리는 불변하는 교회
성령의 사역과 이해, 교회의 본질인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교회, 하나님의 나라가 올바로 실현되는 과정에 있는 교회, 현실을 무시하는 타세적 신앙을 주장하는 이원론적 사상을 버리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2. 스타일의 변화를 추구하는 교회
새로운 것, 현실 감각에 맞는 것을 찾아가는 교회, 현대인의 생활에 맞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3.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교회
교회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신행일치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고 배우고 아는 일에 힘쓰는 교회, 바른 세계관과 교회관을 가지고 암송보다는 실천하는 삶을 사는 교회,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문화를 산출하는 교회, 시야를 넓혀 협조, 단합, 연결을 이루는 교회, 근시안적 사고를 버리고 아량을 가지고 서로 이해하는 교회로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교인수를 늘리려 하는 교회가 아니라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 구원을 이루므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교회, 축복 설교를 지양하고 사도적 선포가 계속되어지며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 선포되어지는 교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양성하는 교회, 목사의 사제화와 장로의 특권층화가 해소되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 겸손히 서는 교회, 성도의 교제를 회복하는 교회,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교회, 평신도가 살아서 움직이는 교회로 변화되어져야 한다.
4. 성숙되어 가는 교회
이제는 성숙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성숙한 교회는 가진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교회다. 구제와 선교는 환원 중의 으뜸이다. 자기 발전만 꾀하면 터질 수 밖에 없다. 모이는 교회는 반드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빛과 소금이 되어 침투하는 교회가 바로 성숙되어지는 교회다.
결론
역사 속의 교회는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변해야만 한다. 그러나 변화에 급한 나머지 유해무익하며 본질을 왜곡시키는 선택 속에 변화를 이룰 수는 없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개혁주의의 원리가 살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부동성이 중대한 것이 아니라 적응성이 중요하다. 교회는 항상 새로이 새로운 날에 참예하여야 하고 항상 새로이 역사의 변화와 인간 생활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항상 새로이 개혁과 쇄신 속에 변화를 해야 한다.
5.교회의 속성및 특성
주간성경공부 서리집사반
교회의 성질을 말함에 있어서 속성과 특성을 빼놓을 수 없다. 속성은 무엇이며 특성은 무엇인가? 속성이란 교회가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성격을 말하며 특성이란 교회의 속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지니고 있는 특징을 말한다. 본 강의는 박형룡 박사의 교회론을 대략 정리하며 다른 신학자들의 견해를 첨가하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기술하였다.
1. 교회의 속성
교회의 속성이나 특성을 말할 때는 유형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무형교회에 속한 것이다. 외형교회는 무형교회의 속성들을 반영하는 교회일 뿐이다. 반면에 로마 캐톨릭에서는 교회의 속성을 그들의 교직적 조직체(敎職的 組織體)에 두고 있다. 개혁교회(프로테스탄트)에서는 세 가지 속성을 말한다.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는 영어로 “an(one) holy catholic”인데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통일성(unity), 성성(holiness), 공동성(catholicity or universality)이다.
1. 통일성(one)
통일성은 단일성이라고도 한다. 교회의 통일성이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어느 민족으로 구성되었든지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 모양은 다양하다고 할찌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조직된 신체이기 때문이며, 교회에 내주하는 성령도 하나이며, 신앙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통일의 배경에 세상 만물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롬12:5, 고전12:12,13, 엡1:22,23). 초창기의 교회는 분열의 위험성을 내포하고는 있었으나 지금과 같이 다양하게 나누어지지는 않았다. 교리적 불일치 속에서 나오는 갈등 속에서도, 국가의 분열에 따르는 교회의 갈등 속에서도 교회는 나누어지지 않았다. 교회의 단일성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교회가 분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단일성은 지켜지지 못했다.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리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거듭되면서 분리되어졌다. 로마교회는 분리되지 않았으나 프로테스탄트는 수 없이 많은 분열을 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1) 로마 교회의 견해
로마 교회는 교직단으로 조직한 에클레시아만을 교회로 인정하면서 세계적 조직에 교회의 통일성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교회의 중심을 성도들에게 주지 않고 동심원(同心圓)들을 가진 교직단에 둔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제 1에 사제들과 기타 직원들로 구성되는 하급 교직의 넓은 원이 있고, 다음에 감독들의 보다 좁은 원이 있고, 또 그 위에 대감독들의 좁은 원이 있고, 최종에 주교들의 가장 좁은 원이 있고, 그 금자탑의 절정에 교황이 관(冠)으로 되어 전조직의 유형적 원수(有形的元首)로서 하층의 모든 원들의 모든 교직을 절대적으로 관할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같이 매우 엄장한 외면적 통일의 기구를 제시한다.
(2) 프로테스탄트의 견해
프로테스탄트는 교회의 통일성을 말할 때 기본적으로 내면적이고 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차적으로는 외면적이면서 유형적인 통일도 포함하고 있다. 먼저 내면적 통일을 살펴보고 아울러서 외면적 통일을 살펴보면서 외면적 통일의 한계성을 알아 보고자 한다.
1) 내면적 통일
내면적 통일이란 신체적 통일을 말한다. 신체적 통일이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가 신비적으로 연합되었다는 뜻이다.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이 하나가 되었고, 세례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영적인 연합체가 되었다. 몸은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할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유일한 성령에게서 생기를 받는다. 이 통일은 교회에 속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신앙에 참여하며 성도가 서로 연합하며 동일한 영광스런 장래의 희망을 품는 것을 말한다. A.A.하지는 그리스도의 신체라는 말을 성령의 임재와 권능에 의하여 중생되고 그리스도와 직접 연합되어 있는 영혼들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2) 유형적 통일
교회의 내면적 통일은 곧 외면적 통일을 가져다 준다. 성도들의 신앙고백, 그리스도인의 행위, 동일 하나님께 대한 공예배, 동일 성례의 참여등은 자연히 외면적 표현을 추구하며 얻는다. 그래서 장로를 세우며, 집사를 두어 조직을 구체화한다. 무형교회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만큼 유형교회의 통일성도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4-16절에서 바울은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직원들의 임명과 교회의 이상적 통일을 위한 노력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형교회의 통일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을 밝혀준다. 교회의 통일성 때문에 한 지교회는 다른 지교회의 수요를 공급하기로 권고를 받았으며 예루살렘 회의는 안디옥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도록 착수하였다. 무형교회의 통일된 모습을 유형교회에서 이루고자 하는 결론이다. 유형교회는 연합의 유대관계를 가져야 한다.
3) 한 개 조직체의 한계성
무형교회의 통일을 본받아서 유형 교회가 통일을 이룬다고 할 때 유형교회가 하나의 조직체가 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룬다 할찌라도 무리가 있다. 이것을 시도한 로마 교회는 좋은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고 형식주의, 의식주의, 율법주의등 많은 폐단을 낳았을 뿐이다. 인간이 모여서 힘을 합치려 했던 바벨탑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곳으로 흘렀을 뿐이다. 교회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주의의 특징인 교회의 다양성은 하나님의 섭리적 지로로부터 합법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교파가 늘어나는 것은 같은 교회를 강조하는바 예배와 신앙의 자유로부터 온 자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이것은 동일한 주님과 산 유기체의 관계를 지닌 분립이기 때문에 분화(分化)의 법칙과 일치를 이룬다. 조직체의 다양화에 따른 분화는 유기체의 내부가 더욱 풍성하도록 해준다. 물론 너무 세분화 되는 것은 오히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는 입장에서 더 큰 분량의 외면적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완전한 통일이란 이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통일이냐 분립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예수님 안에서 동질을 찾아 최선을 다하여 가는 것이다.
4) 교회 합동 운동의 한계성
교회 통일 운동은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데 통일된 행동을 취할 필요를 역설함에 있어서는 긍정적 평가를 가지지만 이 행동 통일에 따르는 행동을 취할 때 따르는 폐해와 희생은 막대하다. 내면적 정신적 통일이 없는데 외면적 조직적 통일을 이루려 하는 것은 무리다. 내면적 통일이 없이 외면적 통일을 강행하려면 신앙의 최소 공통분모를 찾게되는 막대한 영적 희생이 요구된다. 같은 장로교 안에서도 이단으로 규정되는가 하면 동일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가운데서도 이단으로 규정되는 이 시점에 있어서 상대를 인정하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과 진리를 희생하며 더 큰 외면적 통일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므로 이것은 분명 희생 아니면 변절된 것이다. 이것은 참된 통일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의 형태의 교회일 뿐이다.
5) 다양성 속의 통일성
영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교회가 이형에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오히려 고도의 미와 질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A.A. 하지의 말과 같이 교회가 성령의 내주하심 속에서 구성되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본질상 하나의 큰 영적 단체라면 조직으로부터의 일탈은 분파의 정신의 저촉을 받지 않는 한 교회에 유해하지 않은 것이다. 최고의 미와 최고의 질서는 통일의 다수이며, 다수의 통일에 있다. 통일의 등급이 높을수록 다수성이 더 크다. 교리가 다양하면 하나님에 대한 표현도 다양하지 않겠는가? 장로교만 진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정도 중요하지만 자유의지도 무의미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서는 이러 저러한 이유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제각기 나름대로 변을 토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것이 핑계가 되어서 교회의 분열을 정당화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제 교회는 완전히 동의하며 서로 조화되어 평화의 매는 줄로 영적으로 연합되는 완전한 통일의 참된 교회가 장래 그리스도의 날에 나타날 것을 신앙하고 추진해 나가야 한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고 했다. 그러므로 기구적 하나를 만들려 하지 말고 신앙적 하나를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앙적 하나를 기구적 하나로 오해하면 결실을 맺을 수 없다.
2. 성성(聖性, holy)
거룩은 교회의 중요하고도 가장 특징적인 덕성이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돗’이다. 이 말은 ‘벤다’는 뜻이 있다. 칼로 무엇을 베면 둘로 갈라지듯이 세상의 것과 갈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은 구별되는 것이다. 구별된 것은 거룩하다. 하나님께만 사용하던 거룩을 교회에 사용한 것은 교회의 입장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세속으로부터 구별되어진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서 특별히 소집되어지고 짜여지고 살게 되고 움직이게 되어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항상 현존하고 그의 말씀과 예전이 의탁되고 그의 뜻에 따라 모든 프로그램이 짜여지고 삶의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계와 충돌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통으로서 다른 모든 자연적 교제들과 판이하게 다르며 그것들을 초월하여 뚫고 지나가며 높이 서야 한다. 이 영적 덕성 때문에 교회는 또한 세상과 충돌하여 세상에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성성에 대한 견해도 각기 다르다.
(1) 로마 카톨릭의 견해
카돌릭은 교회의 거룩을 외면적 성격으로 규정짓는다. 그들은 성령의 성화로 말미암은 교회원들의 내면적 성결이 아니라 외면적 의식적 거룩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획득된 구원을 그로부터 받아 성례전을 통해서 모든 신자들에게 현재적인 것으로 전달해 줌으로써 신자들이 성화되고 신화(神化)된다고 하면서 교회는 시작될 때부터 현재까지 거룩한 신적 기관이요 구원을 취급하는 기관이라고 한다.
카톨릭은 성성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두며 현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넘겨준 신적 권위를 그대로 받아 지상에 완전한 신적 사회인 교회를 세워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미하는 성례전을 집행하므로 교회 자체가 거룩한 기관이 되며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부여받은 신자들은 성화되고 신화된다고 한다. 그러한 뜻에서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이다.
(2) 프로테스탄트의 견해
성경은 교회가 거룩한 유일의 원인은 그것이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성령이 임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제일 되는 원인이요, 제이 되는 원인은 교회는 성삼위 하나님과 매순간 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는 허수아비가 된다. 프로테스탄트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를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첫째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며, 둘째는 성령의 갱신 때문이며, 셋째는 하나님께 성헌함 때문이라고 한다.
1) 객관적 거룩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고찰되므로 객관적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거룩하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의의 전가의 효력으로 그 의를 입음으로(벧후 1:1) 교회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로 인정된다.
2) 주관적 거룩
상대적 의미에서 교회를 주관적으로 거룩하다고 본다. 이것은 교회의 내면적 원리에서 성령의 갱신과 성화를 받아 현실적으로 거룩하고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완전한 거룩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진정으로 성도들의 집단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2, 6:11, 고후 5:17, 6:17, 7:1, 엡 5:26,27).
3) 성별적 봉헌적 거룩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성별되어 하나님께 봉헌되었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교회의 기물들이 귀중히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성별되어 드려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도덕적 거룩이 따라옴이 물론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면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다(출19:6). 사도 베드로는 신약교회에 대하여 말하되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였다(벧전2:9).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셨다(고전 3:16,17).
(3) 거룩의 의무
교회는 그 자체가 이미 거룩하다는 사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거룩을 파괴하려는 대적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므로 그것을 보전하며 유지하여야 한다. 또한 교회는 현재의 거룩의 정도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높은 정도의 거룩을 향해 승진하기를 노력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며, 둘째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도록 선택받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리스도의 의로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거룩은 교회의 영광스러운 속성인 동시에 장엄한 의무다. 교회의 거룩을 파괴하려는 대적은 흔히 세상, 마귀, 정욕으로 묘사된다. 이것들은 항상 교회를 세속화시키려고 한다.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구별되어지는 거룩을 더욱 더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는 거룩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3. 공동성(catholic)
공동성은 보편성이라고도 한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가는 도중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용한 말인 “카톨리카”(catholica)란 말은 어떤 권위나 정통성이나 배타성을 가진 말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의 이름으로모이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의 통일성이 한 그리스도에 뿌리를 박은 것 같이 교회의 공동성 역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스도는 엄밀히 공동적(catholic)이시다. 성경적 근거로는 로마서 10장 12,13절에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
주님은 지상 만민에게 구원으로 풍성하신 분이시다. 갈라디아 3장 28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공동적이시며 보편적이시어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셨다”(골 1:19,20). 공동적인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니 그 안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공동성을 아는 것은 교파를 극복하여 하나로 나갈 수 있게 해주며 인종, 문화, 언어, 신분을 초월해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도록 만들어 준다.
(1) 로마 카톨릭의 견해
공동의 속성은 로마 교회가 전용하여 자기들만이 공동적이라 칭할 권리를 가진 것으로 여기며 이것도 역시 유형적 조직에 적용한다. 종파들은 오고 가며 교회의 구성원은 수시로 바뀌나 교회는 처음부터 존재하여 항상 신실한 자녀들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소유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이들에 의하면 교회가 전 인류의 중심이며 통일의 원리와 근원의 확실한 기원은 사도들의 머리인 성 베드로와 로마의 성좌에 앉은 그의 후계자로서의 최상의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황제야말로 교회가 보편적 교회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은 카톨릭이란 말이 진정 보편적인 것일진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세례받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2) 프로테스탄트의 견해
개혁교회는 카톨릭이란 말에 참 의미를 부여한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에 기록하기를 “유형교회는 역시 공동적 혹 보편적인 것으로서 ...... 전 세계에서 참 종교를 신앙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 자녀들로 구성된다”고 했다. 보편성은 어떤 특정 사람이나 단체나 민족에게 국한되거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경우에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가 되고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테스탄트는 공동성을 기본적으로는 무형 교회에 적용하고 그 다음에는 유형교회에 돌린다.
1) 무형교회의 공동성
유형교회보다 먼저 무형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은 어느 외면적 조직체보다 훨씬 더 참된 의미에서 공동적이라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형교회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지는 못하지만 무형교회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고 있다. 모든 인생의 모든 방면에 관여하는 진정한 공동교회가 된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가 이 속성을 자기들만의 조직체적 교회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2) 유형교회의 공동성
무형교회에 부여된 공동성은 이차적으로 유형교회에 돌려진다. 하지만 유형교회의 공동성을 말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바로 어느 곳에 유일 공동적 유형교회가 있다고 정확히 지적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한 교파가 전 기독교회로 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미를 유형교회에 부여하는 것은 공동적 유형교회를 믿는 신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상 모든 나라들과 종족들에게 전하며 어떤 인종이든지 믿는 자들이면 세례를 주어 교회에 받아들이는 엄격한 의무 이행에서 민족과 인종의 차별없이 공동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4. 사도성(APOSTOLICITY, APOSTOLIC SUCCESSION)
교회가 사도성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들은 목격자로서의 증거를 간직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을 토대로 해서 시작된 종교이며 그 객관적 사건을 증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다. 이런 것을 기초로 해서 381년 콘스탄티노플에 모였던 교회 대표들은 교회의 사도성을 주장하였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사도성을 설명하였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이것이 이레니우스가 직무와 은사에 대한 논쟁을 할 때에 감독들을 사도들의 참 계승자로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변형되어서 사도성은 복음의 계승이 아닌 사도직의 계승이 되고 말았다. 사도직을 사도권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사도성 혹은 사도적 계승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기원이 사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교황과 감독들에게 합법적으로 물려졌다고 생각한다. 이 계승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교리의 사도적 계승이요, 다른 하나는 조직의 사도적 계승이다.
(1) 조직의 사도적 계승
로마교회와 헬라 정교회와 영국교회는 자기들의 교회의 근원과 권위가 직접 사도들에게서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부들만이 사도 때부터 안수로 말이암아 직접 “사도적 계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도 각기 다르다. 영국교회는 생각하기를 로마교회나 헬라 정교회도 사도성을 가졌다고 하고, 헬라 정교회는 영국교회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고, 로마교회는 자기만의 사도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주장은 무리한 것이다. 영국교회의 일류학자들도 스스로 말하기를 1세기 말 이전에 감독제 같은 것이 없다고 시인하였다. 사실 12사도의 직임은 본질상 이전이 불가능하다. LIGHTFOOT 감독도 지금의 제도가 초대 교회에는 없었다고 시인하였다. 교회가 사도적 계승이라 할 때에는 그것이 성경의 기록 곧 계시된 말씀에 직접 호소하여 결정된 것일 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사도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2) 교리의 사도적 계승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사도적 계승의 기본은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말씀이다(마16:18). 여기서 말하는 “이 반석”이 사도 베드로요,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로마교회의 첫째 교황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개인의 것이 아니요 사도들의 대표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반석”이 사도라면 개인이 아닌 모든 사도를 말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 보면 교회의 기초를 말하면서 “사도들”(복수)의 터 위에 세운다고 했다.
그리고 “이 반석”이 모든 사도들을 의미하는 때에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은 그들의 인물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베드로가 대신 고백한 그 신앙임을 알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교리를 기초하여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사도들”도 역시 인물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친 교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자신들의 독특한 사도적 계승을 주장하면서 사도의 인물에 치중하여 조직의 계승이나 교리의 계승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로마 교회는 교리의 계승을 주장하면서도 이신칭의를 부인함으로써 자체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회의 사도성을 교회의 속성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사도의 권위는 이전될 수 없는 것이며 사도직은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도직의 표준으로서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으므로 그들이 죽은 후에 교회와 성도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될 뿐이다.
5. 무오성
로마 교회에 의하면 교회는 기독교 신앙과 행위의 모든 사건에서 절대적으로 무오하며 하나님이 임명하신 신앙의 법칙의 보관자와 해석자라고 한다. 교회의 직무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이 오는 계시를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들을 통하여 전달된 본래적 계시를 전파함에 있어서나 해석하는데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 위에 있다. 교회가 성경을 풀고 결정한다. 권위 부여도 교회가 한다. 이 권위는 교황에게 주어진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성경 구절들을 제시한다. 첫째로 사도들과 그들의 공직적 후계자에게 그들의 무고와 그것의 결과인 권위를 보증하는 그리스도의 약속들(마16:18, 18:18-20, 눅24:47-49), 둘째로 교회에게 세계의 선생으로서의 사명이 수여된 것(마28:19,20, 눅10:16), 셋째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선언되었으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한 것, 넷째로 교회에게 매며 푸는 권세가 부여되었고 교회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고 한 것(마16:19, 18:15-18), 다섯째는 교회에게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것과 그렇게 할 자격을 가질 것이 명령된 것(살후 3:6, 롬 16:17, 요이 1:10), 여섯째는 보편적 유추에 의하면 인간 집단마다 성문율법과 함께 산 재판관을 가지는 바 재판관이 없으면 성문율법이 무가치하다는 것, 일곱째는 이 권세는 모든 사람들이 참 교회의 근본적 속성들로 인정하는 통일과 보편을 획득함이 필요하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약속들은 그의 교회의 멸절과 오류로부터 보전하기 위한 것이지 이것의 무오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의 약속들은 교회의 직원에게 한 것이 아니라 참 신자들의 단체에게 한 것이다(요20:23, 눅24:33, 47-49, 요일2:20,27비교). 또한 성경의 약속들이 보증한 교회는 영구히 계승하는 사도들의 손에 권위가 위임되어 있는 외면적 유형적 교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무오한 인물이 아니다. 베드로는 교리상 오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바울에게도 꾸중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영감된 사도와 성경 저자로서 특권을 가질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지금까지 제시한 것들로는 베드로의 무오류를 증명할 것들이 못된다. 로마교회는 성경무오의 곁에 교황과 감독회의의 무오류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의 충족성을 부정하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성경을 산출하였다고 말하며 교회를 성경 이상에 두는 그들의 논법의 본색을 드러낼 뿐이다.
2. 교회의 특성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광스러워야 한다. 요즈음의 교회가 영광스럽기 보다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에서는 R.B. Kuiper의 견해 속에서 교회의 영광스러운 특성을 소개하도록 한다.
1. 진보성
교회는 보수성만 가지고 지속되지 않는다. 참된 교회는 보수적임과 동시에 진보적이어야 한다. 진보성은 보수성 못지 않게 중요하다. 교회의 진보성은 교회의 영광스러운 면 중의 하나다.
(1) 성경 시기의 진보성
신구약에 기록된 표현들을 보아도 교회는 진보적이었다. 이것은 교회 자체의 선택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보적 계시를 주시므로 되게 하신 것이다. 성경이 16세기에 걸쳐서 기록되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진보적으로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는 세계주의적 성격이 있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고 하였으나 구약의 교회는 거의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국한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세계주의는 점차적으로 싹트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끌게 되었다(요12:32). 부활 후에는 그의 사도들과 교회에게 선교 명령을 하셨다(마28:19). 오순절에는 각국에서 와서 복음을 받았으며(행2:5), 베드로는 로마인 백부장을 전도하였고(행10장), 예루살렘 회의에서 증언함으로 세계주의의 문호를 크게 열어 놓았다(행15장). 교회의 진보적 모습을 보여준다.
(2) 후대 교회의 진보
특별계시는 성경에서 완성되었지만 교회의 진보는 끝나지 않았다. 성경을 이해하는 모든 교회는 매 시대마다 진보하여 왔다. 성령께서는 교회로 하여금 보다 더 낫게 보다 더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어느 시대에는 진보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때도 있었으나 성령에 의해 조명되어지는 것은 진보적이었다. 성령은 여러 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동안 교회를 진보적으로 조명해 주었다. 교리의 발전은 그 좋은 예가 된다.
5세기의 어거스틴에 의해서 잘못 주장되어진 성직주의는 수 세기동안 계속되어 왔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죄인을 구원하는 은혜를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 성직주의는 오류인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교회에 의하여 전파된 복음을 방편으로 사용하시기는 하지만 구원하는 은혜의 현실적 부여는 교회의 매개 없이 당신이 직접 수행하신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성되어진 교회는 구원의 정상적인 결과이지 구원을 위한 선재 요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교회가 진보되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3) 현재 교회의 진보
현재의 교회는 보수성과 함께 진보되어져야 한다. 보수를 중지하면 기독교적 성격을 잃게 되고 진보하지 않으면 멸절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여 진리를 보다 더 풍부히 찾아내는 것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교회의 임무다. 교회는 변천하는 시대의 특이한 난제들과 수요들에 적용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조 시대의 방법으로 컴퓨터 시대에 적응할 수는 없다. 교회가 스스로 개혁되지 않으면 개혁교회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 Reformed church is always to be reformed).
2. 불멸성
교회는 세상의 통치 세력들보다 훨씬 적게 영광스러운 것 같으나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영광스럽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불멸성(항구성)이다. 세상의 나라들은 아무리 강하다고 하나 곧 소멸되고 다시 생성된다. 그러나 교회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1) 불멸성의 의미
이사야 54장 10절, 마태복음 16장 18절은 교회의 불멸성을 확증해 준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란 말은 교회의 불멸성을 말한다. 이것은 지교회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다. 지교회 교파는 종종 멸절되나 교회 전체로서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끝까지 지상의 성도들은 교통이 있을 것이다. 유형교회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2) 보전의 양식
교회는 자동적으로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전하신다. 핍박 중에 보호하시므로 보전하신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시절에 수 많은 박해 속에서도 보전되었다. 보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오히려 더 성장하게 하신다. 핍박을 통한 흩어짐은 복음의 확산이 되었다. 순교의 피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다. 이단이 생길 때에도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다. 자유주의 신학 사조 속에서도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도록 하신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통해서 교회를 보전하신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따른 것이다. 복음 전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계속 보전되어진다.
3. 초월성
교회의 영광스러운 것 중에 하나가 초월성이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많은 조직체 중의 하나가 아니다. 다른 모든 조직체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훨씬 높이 초월해 있는 존재다. 그 이유는 교회가 신적 기원을 가졌기 때문이며, 초자연적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신적 기원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설립되어졌다. 사람의 생각대로 구성되어진 단체가 아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 것인데 여기에는 사람의 방법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사람은 그 부르심에 기쁨으로 나아올 뿐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피를 주고 사셨다고 했다(행20:28). 그리스도가 모든 시대에 교회를 세우신 분이다. 교회에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분도 바로 주님 자신이시다(행2:47).
(2) 초자연적 본질
가족(창2:18)이나 정부(롬13장)도 신적 기원을 가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와 동등한 영광을 가지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립되었기 때문이다. 창조시에 예수님의 사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교회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만 “내가”라고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정부는 자연의 영역에 속하기에 중생하지 못한 자도 이룰 수 있지만 교회는 위로부터 나고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은 자들에 의해서 구성되기에 세상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란 점에서도 초자연적 본질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면에 있어서도 교회의 머리요, 유기적 관계에 있어서도 교회의 머리요, 통치의 면에 있어서도 교회의 머리다.
4. 밀접성
교회의 영광스러운 특성 중에 하나가 교회는 진리와 밀접해 있다는 것이다. 진리와 밀접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밀접해 있다는 말이다. 진리에 무관심한 교회는 탈선해 나간다. 많은 회원, 많은 건물, 웅장한 시설, 정교한 의식, 능률 있는 조직을 갖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진리와 밀접되어 있지 않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반면에 보잘 것 없는 회중, 초라한 건물, 단순한 예배 순서, 처저의 조직, 의장을 갖추지 못한 성직자가 있다고 할찌라도 진리에 충성하는 교회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다. 그 이유는 교회가 진리와 밀접해 있기 때문이다.
(1) 진리의 산물
교회는 계시에 의해서 생겨났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최초의 복음인 창세기 3장 15절을 통해서 이미 교회를 구성하셨고,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통해서 교회를 구성하셨다(창17:7, 롬4;11). 오순절에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추가되었는데 모두 진리의 계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교회는 철저히 진리의 산물이다.
(2) 진리의 절달자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전달하기도 하지만 통상 사람을 통하여 전달하신다. 구약에서는 이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선지자라 하였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을 전달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에 의해서 전달되었다. 사도들은 주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함께 다니면서 받은 것들을 전했다.
(3) 진리의 수호자
구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롬3:2). 그 임무는 특별계시를 지키며, 보호하며, 보전하는 것이다. 신약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딤전 3:15) 그 임무를 다하므로 교회가 설 수 있도록 하였다. 교회의 작용은 진리를 받쳐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는 타락하면 안된다. 진리를 받쳐주지 못하면 교회는 무너진다.
(4) 진리의 해석자
로마교회는 특별계시가 성경에서 완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에 추가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요, 특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훈들을 성경과 동등 지위에 두거나 혹은 성경 위에 둔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과 같이 마리아의 숭천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의 충족성을 인정하고 교회는 그 말씀을 해석할 뿐이라고 하였다. 오직 이 말씀을 옳게 분변하기 위해서 진리의 성령을 받았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들은 다 모아놓아도 성경의 진리를 넘을 수는 없음은 물론이요, 거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5) 진리의 전파자
교회의 임무 중에 말씀의 전파는 중요하다. 개인이 전파하는 것도 있을 수 있으나 특별계시를 전파하는 것은 교회의 공식적 임무다. 전도는 중대한 임무다. 교회는 진리를 분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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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참된 교회에 속할 신성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참된 교회가 어느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교회의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표지의 문제가 일어난다. 표지는 표시 혹은 기호라고도 한다.
교회가 하나로 있는 동안에는 표지를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단들의 출현과 교회의 분열로 인해 교회에는 표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중세 이후에 이 현상은 더욱 더 강하게 일어났다. 그런 과정에서 교회는 반드시 적응해야 할 진리의 표준이 존재함을 추상하고 참된 교회는 구별되는 표지들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교회의 진정성은 역사로 되는 것도 아니고 숫자로 되는 것도 아니다. 정통성만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다. 참 교회의 구별되는 표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것이 세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어디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히 전파되고 청취됨을 보며 성례들이 그리스도의 규정대로 거행됨을 보는 곳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존재를 가진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권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교리는 교회의 생명임과 같이 권징은 말하자면 교회의 힘줄이다”고 하였다.
1. 말씀
교회에는 말씀의 진정한 전파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다른 두 가지는 여기에 포함된다. 말씀의 전파 없이는 다른 것들은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말씀의 진정한 전파는 교회를 유지하도록 하며 교회로 하여금 신실한 자들의 어머니가 되도록 한다. 성경적 근거로는 요 8:31, 32, 47, 14:23, 요일 4:1-3,등이 있다. 이 말은 곧 교회에서 진정한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어야만 교회가 된다는 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구성된 곳에서는 완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말씀은 신앙의 근본적 조항들이 부정되고 그 교리와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의 관할 아래 있지 않는 때에 그 교회는 거짓교회로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참 교회로 구별되는 오직 한 가지의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전파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청취되는 곳에 진정한 교회가 있다.
2. 성례
진정한 교회는 성례의 정당한 거행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성례전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성례전이 로마천주교회나 동방 정통교회처럼 지나치게 강조가 되어 교인 지도를 위한 중요한 의식으로 생각하고 강조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성례전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성도들을 지도해 나가야 한다. 성례도 말씀에 기초해서 행해져야 한다. 성경적 근거로는 마 28:19, 막16:16, 행 2:42, 고전 11:23-30등이다. 성례를 요술적 효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1) 로마 캐톨릭의 견해
로마 천주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을 재현하는 미사를 중심으로 하는 예전론을 발전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이 제단 위에 바쳐질 때마다 구속사역이 완성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몸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될 때에 가능하다고 한다.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7성례를 주장한다. 이것을 주장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제정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는 이렇게 분류된다. 첫째는 주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의 만찬이 있고, 둘째는 주의 은총을 받는 방편으로 세례, 견신, 고해, 종유가 있고, 셋째는 신분에 관한 것으로 결혼, 안수가 있다.
구체적으로 세분해서 설명하면 첫째는 주의 만찬(유카리스트)이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살로 변한다고 한다. 이것이 미사로서 사제에 의해 매일 제단에서 집행되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다고 한다.
둘째는 세례와 유아세례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 들어가는 입문이라고 한다. 죄를 완전히 용서받기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다고 한다. 세례를 받아야 은혜가 주입된다고 한다. 구원을 위해서 세례는 필수적이라고 한다. 세례가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저주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셋째는 견신례다(CONFIRM!ATION). 견신례는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 은총을 입어 세상의 모든 죄로부터 보호받도록 하는 성례로 이것은 성장한 후 그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에게 베푼다. 견신성사는 세례성사를 완결시키는 것이다. 견신성사는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나 그것이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한다. 견신성사를 받는 사람에게는 감람유를 앞이마에 발라주기도 하고 빰을 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뜻이다.
넷째는 고해성사다. 고해성사는 세례를 통해서 받은 은총을 상실했을 때 받는 성사로서 세례은총회복의 성사라고도 한다. 때로는 죽음의 예전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세례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주는 예전인가 하면 고해성사는 죽음의 죄를 범하므로써 또 다시 죽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예전이기 때문이다. 고해성사를 해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가져오는 모든 흐름을 막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고해성사다. 고해성사를 위해서는 참회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반드시 신부에게 해야 한다. 신자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범한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한다.
다섯째는 종유(終油)다. 종유(종부)는 고해성사를 완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종유성사는 죄를 깨끗하게 씻어준다. 죽음을 준비하게 하는 행위다. 이것은 야고보서 5장 14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다. 종유성사의 목적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은총을 나누어 주어 그의 영혼을 강하게 하는데 있다. 영혼구원의 한 방편이 된다면 육체의 병도 고쳐준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말씀은 병든자를 위한 기도이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기도는 아니다. 이들은 종유로서도 해결되지 않는 죄는 연옥에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여섯째는 결혼성사다. 결혼은 은총을 더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실제로 그에 해당하는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결혼을 예전(성사)로 결정한 이유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개혁자들이 반대했다. 결혼은 공인된 사제와 두 세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성립되며 결혼보다는 독신을 더 우선에 둔다.
일곱째는 안수(임직)다. 안수를 받는 것은 단지 어떤 임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내려오는 은총의 강물의 한 부분이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안수를 통해서 은총이 인류에 전달된다. 이것을 통해서 받은 은총은 지워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준다. 안수받으면 평신도와 구분된다. 안수받은 이들이 없이는 구원이 전달될 수 없다. 안수는 두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하급성품이고 하나는 고등성품이다. 하급성품은 수문(守門), 독사(讀師), 추마(追魔), 시제(侍祭)의 네 가지다. 이것은 예전(성사)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고등성품은 부집사, 집사, 사제직이다. 현재는 감독직을 첨가하여 여덟 성품을 인정한다. 이 중에서 집사와 사제에 서품할 때만 그 식을 예전으로 취급한다. 최근에는 감독직 서품도 예전으로 인정한다. 집사는 사제가 되는 예비적 단계에 있는 직무다. 보조집사 때부터 독신이 요구된다. 이렇게 일곱 가지의 예전을 중시하면서 그 중에서도 만찬과 세례는 다른 다섯 가지 보다도 더 중요한 위치에 두고 있다.
(2) 개신교의 견해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는 다르다. 카톨릭처럼 7 성례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무교회주의자들처럼 무성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더욱 더 성경적 입장을 발견해야 한다. 개혁교회의 입장으로 보면 예전은 하나의 징표다. 이것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고 그 일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다. 예전은 하나의 그림이며 도장이요 은총의 수단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에서는 “예전은 보이는 거룩한 징표요 도장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것들을 사용하므로 복음의 약속을 우리에게 더 충분히 선포하고 인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되었다”고 했다.
개신교에서 성례를 말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으로서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받으시고 집행한 것으로 예전으로서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자들 중에서도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1) 세례
세례는 물을 가지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성례인데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됨과 은혜 언약의 모든 유익에 참여함과 주님의 사람이 되기로 하는 우리의 약조를 표시하며 인치는 것이다(소요리문답 제 94문). 세례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해져야 하며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세례를 주었던 요한의 세례와 제자들의 세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성경이 가르치는 세례의 의미를 정리하면 첫째로 삶의 한 전환기를 가지는 것, 둘째로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삶을 의미하는 것, 셋째로 삼위일체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받는 것, 넷째로 그것은 구속적 의미가 강하다는 것, 다섯째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가입을 의미한다는 것, 여섯째로 할례를 대신하는 것등이다. 세례는 우리가 영적으로 우리의 죄로부터 씻음을 받음과 같이 육체적으로도 물로써 우리의 씻음을 받는 것을 확증해 준다.
세례의 형식에 있어서 개혁파는 세례의 상징에 본질적인 사물에 관하여 정화의 관념을 가진다. 성경은 세례가 영적 씻음, 혹은 정화를 상징한다고 지시한다(행2:38, 고전6:11, 딛3:5). 때문에 개혁파는 침수, 관수, 쇄수등을 시인한다.
하지만 침례파의 주장은 다르다. 그들은 침수를 유일한 양식으로 주장한다. 그들은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을 본질적 요의로 한다는 원리를 강조한다. 이것은 세례의 어원적 해석과 역사적 관계에 근거한다. 그들은 세례를 뜻하는 βαπτιζω는 “담근다”는 뜻이고 성령의 세례가 다 침수의 형식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원적 해석에서 볼 때 “밥티조”는 “씻는다, 목욕하다, 씻어 정결케 한다”는 의미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는 세례가 침수뿐만 아니라 관수, 쇄수의 형식도 있다(행2:38-41, 9:18, 10:44-48, 16:32-34).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피를 우슬초에 뭍혀서 뿌렸는데 이 때 쓰인 단어도 밥티죠다.
세례에는 영아 세례가 있다. 침례파에서는 영아 세례의 정당성을 부인한다. 그 이유는 영아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신약에 영아를 명한 곳이 없고 실례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영아 세례에 관계된 부분들이 있다.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영아 세례로 대체된다(행2:39, 골2:11, 12). 또한 전 가족이 세례를 받은 곳도 있다. 고넬료와 옥사장의 가족의 예가 그렇다(행6:15, 15:33, 고전 1:16). 영아 세례는 성도의 가족에서 축복에 동참함과 주의 사람이 되기로 약조하는 표시이며, 하나님이 뜻대로 양육하도록 책임지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선택된 자라고 할 수는 없다. 단 부모가 약조한대로 준행할 때에 큰 효과가 있다.
2) 성찬
성찬의 유래는 만찬이다. 만찬은 예수님이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실시해 온 유월절 식사에서 유래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배 후에 전통에 따라 만찬을 가지게 되었다. 만찬은 언제든지 자격이 없는 자들이 먹어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하기 때문이다(고전 10:21, 11:20). 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와 살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먹으면 죄를 짓는 것이 된다.
(3) 성찬식에 대한 여러 견해들
성찬식에 대한 견해도 각기 다르다. 성찬이 신적인 능력을 소유한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 때문에 각기 다양한 의견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으로 주장되고 있는 견해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1) 화체설
카톨릭의 견해다. 1439년의 결정에 따라 사제가 성별한 순간에 주의 참 몸과 그의 참 피가 떡과 포도주의 밑에 말씀의 힘에 의해서 있게 된다고 했다. 사제의 기도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신 말씀을 반복하므로써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만찬 안에 그리스도 자신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영과 신성과 함께 참으로, 실제로, 실체로 그리스도 전체가 포함된다고 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실제로 변한 것이라 한다. 트렌트 회의에서 이것을 실체 전환설 혹은 화체설이라고 규정하였다.
2) 공재설
루터파의 견해다. 화체설과 비슷하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밑에 있다. 이 예전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떠나버리면 그 후로는 단순한 떡과 포도주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과 함께 있으면 그 말씀의 연고로 참 몸과 피가 된다고 한다. 루터는 해석하기를 참여자는 눈 앞에 놓여 있는 그 물체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죄의 용서에 대한 약속으로 주어진다고 믿었다. 그는 만찬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것으로 믿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만찬에 임재하신다고 했기 때문에 거기 임재해 계신다고 설명을 한다.
3) 기념설
쯔빙글리의 견해다. 이것은 상징설이라고도 한다. 그의 견해에 다르면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면 본체나 실체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면 상상의 방법으로 또는 믿음의 회화적 힘으로 임재한다. 주의 만찬은 고백의 행위다. 그것을 하므로써 주님의 지체됨을 고백하고 그를 따르기로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나타내는 행사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기념적인 것이다. 실제로 몸이 변하고 피가 면하는 것이라면 그는 식인종일 뿐이다.
4) 영적 임재설
칼빈의 견해다. 칼빈은 세가지로 분리해서 설명한다. 의의, 물체, 효력으로 나눈다. 의의란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물체란 그리스도다. 여기에는 죽음과 부활이 포함된다. 효력이란 구속과 의와 성화와 영생과 축복이다. 만찬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동참하므로 그의 은총을 누리며 그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셨다. 칼빈은 이러한 임재를 떡덩이에 제한시키지 않았다. 그 임재는 신비적인 것이기에 설명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었다. 그러나 육체적인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성령의 사역으로 연결시켰다. 물체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그러나 그 물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상징물이 그리스도의 본체와 연결이 되고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받아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합이 되어 그가 하신 모든 은사가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찬의 집행자는 성령이 되신다. 그래서 떡과 포도주를 먹는 행위를 ‘영적 먹음’이라 했다. 근는 삼위일체적 개념을 가지고 성만찬을 이해하였다.
(4) 말씀과 성례는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견해도 각기 다르다. 먼저 카톨릭의 견해를 보면 은혜의 방편을 논할 때 성례와 말씀 중 성례를 높인다. 루터파는 말씀에 치중한다. 신비가들의 견해를 보면 그들은 은혜의 방편에 매이지 않는다. 이성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도덕적 효능에 치우칠 뿐이다. 하지만 개혁파의 견해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원천이며 은혜의 방편으로 특별 공작이 있다고 한다.
3. 권징
참된 교회의 세 번째 표지는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다. 교회는 말씀의 선포에 따르는 신실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 건전한 윤리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권징이 필요하다. 이것은 교리를 순전히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성례의 신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권징에 등한한 교회는 진리를 소멸시키게 된다. 참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징이 실시되어야 한다. 이를 시행할 때는 반드시 근실하며 양심적이어야 한다. 성경적 근거로는 마 18:18, 고전 5:1-5, 14:33,40, 계 2:14,15,20등이다. 참된 기독교 권징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의 순수한 전파에 있다.
2. 교회의 권세
앞서서 권징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바로 유지하기 위해서 권징을 시행하도록 하시고 이를 위해서 권세를 부여하셨다. 교회는 이 권세를 바로 사용하여 참된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1. 권세의 원천
교회 권세의 유일한 원천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마16:18). 예수님은 유기적 행정의 머리이시기에 교회는 그의 권세 하에 복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세를 가지고 임하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다. 사람의 집단에 의해서 이 권위가 잠식되어지면 참된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권세를 교회에 부여하셨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부여하셨다(마16:18). 베드로에게 천국 열쇄를 주셨다(마16:19). 그러므로 여기서 결정되어진 것은 하나님의 재가를 얻을 수 있다. 예를들면 술과 담배를 금지하도록 한 것은 땅에서 묶은 것으로 하나님의 재가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에게 준 권세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요 20:23의 말씀은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행15:23-29, 16:4, 고전 5:7, 13, 6:2-4, 12:28, 엡 4:11-16).
2. 권세의 성질
1) 신령성
이는 영적 권세로서 성령에 의해 부여된다(행20:28). 그러나 이것이 신령한 것이라 하여 내면적이고 무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항상 신체를 가진 사람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신령적이라 할 때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부여하신 바 되고(마 16:19, 행 20:28), 그리스도의 명의와 성령의 능력으로만 능히 행사되고(요 20:22,23, 고전 5:4), 성도들에게만 독점적으로 관계를 가지고(고전 5:12), 도덕적 영적 방식으로만 능히 실시되는 때문이다(고후 10:4).
이것은 국가 권세와는 다르다. 국가적 권세는 외면적이고 현세적인 것이기에 외면적이고 세속적 권리들의 소유와 누림을 보장하지만 교회는 사람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에 하나님의 정치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악령에 반대하여 사람 안에 진리의 지식을 부여하며 영적 미덕을 양성하며 신적 교훈에 순종하는 생활을 일으킬 목적으로 수립된 것이다. 교회는 인생의 마음과 그 태도 특히 믿음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에 대해 영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폭력적이다. 종교가 폭력을 사용하여 싸움을 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교회의 치리권은 육신의 사건에 대하여 치리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법과 사람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관계되는 일만 관여해야 한다. 도덕적이고 신령한 것에만 관여해야 한다.
2) 사역성
이는 목회적 권세로서 성경을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롬 10:14, 고전 5:4). 교회의 권세는 독립적이고 주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온 것이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도록 주어진 권세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권세는 대신이나 사신 혹은 하인과 같은 권세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사역을 허락하실 때에 최종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오직 교회의 건덕과 확립을 위하여 그의 율법을 시행시키는 보좌관이나 선전관일 뿐이다. 모든 일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겸임하여 계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명의로 행해져야 한다.
모든 권세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법전이 시행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경이 제시하는대로 선포하며 시행하며 강행해야 한다. 금지된 것을 시행해도 안되고 지시하신 것을 금지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주어진 권세는 조건적이다.
3. 권세의 종류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관련하여 교회에도 삼중직이 있다. 교리권, 치리권, 사역권이다.
(1) 교리권(교훈권)
교리권은 그리스도의 선지직의 반영으로 진리의 수호와 전달을 목표로 주어진 것이다. 교회는 어떤 악의 세력에 의해서 침몰되지 않도록 진리의 보고인 성경이 순전히, 완전히 보존되도록 신실히 수호해야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진리가 세상에서 멸절되는 대신에 손상 없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신실한 수호자로 가지신 때문이니 교회의 조력과 사역에 의하여 진리가 유지된다”고 했다.
또한 교회는 진리를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말씀을 전파하여 성도의 회심과 건덕을 도모하도록 해야 한다. 딤전 4:13에 보면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다. 말씀을 바로 전파하기 위해서 신경과 신도게요를 작성하는 일도 필요하다.
(2) 치리권(입법권과 사법권)
치리권은 그리스도의 왕권의 반영으로 입법권과 사법권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존재한다.
1) 질서 유지를 위해
하나님은 교회 일의 적정한 정리를 위하여 규율을 정하셨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14:33).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적정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기를 원하신다(고전 14:40). 질서를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하다. 주께서는 완전한 율법으로 통치하신다. 교회는 율법을 새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규정을 정하여서 교회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하다가 신령한 것이 무너져서는 안된다.
2) 순결 유지를 위해
교회는 교리적 도덕적으로 순결을 유지하여야 되므로 이단자와 범죄자를 거절 또는 배제하는 권세를 행세한다. 이 권세는 상당한 시험에 합격한 자들을 교회의 회원과 직원으로 받아들이고 그 중에 진리를 떠나거나 불명예의 생활을 하는 자들을 배제하여 교회의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성경적 근거로는 출 30:33, 스 10:8, 눅 6:22, 요 9:22, 12:42, 16:2등이다. 순결 유지는 권징의 목적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적으로 되지 않는다. 회원들의 협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권징을 실시할 때는 온화한 정신을 가지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
(3) 봉사권(사역권)
이것은 긍휼권이라고도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직의 반영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하여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까지 최대의 긍휼을 행하신 일에 유추를 가진 일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도와서 교인들에게 행하는 사역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1) 병자 위문과 신유를 위해
말씀과 기도로 위안해야 한다. 평상시에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도 병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교회는 심령의 병부터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병 낫기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병고침의 사역이었다.
(2) 자선 사역을 위해
구제는 교회의 사역 중에 꼭 필요한 사역이다. 선교도 구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했다. 초대 교회는 빈민을 구제하였다. 일곱 집사를 뽑은 것도 결국은 구제를 위한 것이다. 교회는 금전을 분배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단 구제는 영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먼저 신앙의 가정을 돌아보도록 해야 한다. 교인의 구제를 세속적 단체에 맡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7.교회의 사명
주간성경공부 서리집사반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신 사역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된다. 그것은 마 4:22에 나오는 Healing, Teaching, Preaching이다. 이것은 지금의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이 세가지의 사역을 구분해서 Preaching에서는 예배, 전도, 선교를, Teaching에서는 교육을, Healing에서는 봉사와 구제를 설명하려고 한다.
1. 예배의 사명
교회의 사명 중에 최고로 중요한 것은 역시 예배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바로 예배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도 예배에 참석할 때 있게 된다.
1.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이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대화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임재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인간의 죄를 제거하시므로 신령한 교통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2.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예배의 대상은 오직 성삼위 일체 하나님이시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더욱이 물질에 대한 예배는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돌이나 나무나 그 외의 어떤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현었다 할찌라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느후스단을 섬겼던 이스라엘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 된다. 인격적인 예배가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물질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식이 예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을 신으로 섬겨서 절하고 경배하는 것은 아니나 그 위치가 신적인 자리에 있는 것은 분명 예배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보다 우선으로 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역시 그것을 섬기는 것이요, 이것은 잘못된 예배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은 바른 예배의 완성을 위해서 친히 희생 제물이 되셔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길을 열어 놓으신 후에는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도록 하셨다. 이제는 담대히 나가기만 하면 된다(히10:19-25).
3.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바른 예배다. 로마서 12장에서는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라고 했다. 이것은 예배 시간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 삶이 드려져야 한다. 전 삶이 거룩하고 진실되게 행해진 후에 그것들이 예배의 형태로 결집되어져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배 도중에는 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야 하며 잡다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주위를 산만하게 하여 마음이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바른 예배가 아니다.
4. 예배의 순서
예배의 순서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셋째는 성도의 교제다.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로는 찬송과 봉헌과 신앙고백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는 성경봉독과 설교가 있다. 성도의 교제로는 서로의 사정을 알리고 축하하며 격려하며 위로하는 것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5. 예배에서 말씀의 위치
예배의 순서에 있어서 말씀의 위치는 무엇인가? 중세 교회의 타락에서 개혁을 하는 과정 속에서 예배 속에서 말씀의 권위를 높였다. 로마 캐톨릭에서는 말씀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 아래 있었고 교회의 권위는 교황이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의 권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견해는 달랐다. 무엇보다 예배의 중심은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개혁 운동의 한 구호로서 “sola scriptura"라고 했다. 그래서 말씀 위주의 예배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보다 더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오직 성경이라 할 때는 계시된 말씀의로서의 그리스도, 쓰여진 말씀으로서의 성경,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설교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1)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에서는 그리스도와 말씀을 동일시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과 중보자성과 구주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도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념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문화적 도구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본질적으로는 신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기능적으로는 중보자적 역할과 구속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시간적 존재이므로 인류 역사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모든 것의 목적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몸된 교회이기에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없이는 안된다.
어디든지 말씀이 선포된 곳에는 교회가 있고, 교회가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선포되어져야 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 그러므로 그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고 했듯이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와 모든 존재에 현존하는 분이므로 교회는 이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감사하며 이 사실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전하고 증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교회의 전부요 신학의 전부요 세계의 전부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곧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것이 교회가 하는 하나님 말씀 선포의 첫 일이다.
2) 쓰여진 말씀으로서의 성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해서는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정식으로 Canon으로 결정된 이후로 계속해서 문제시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인물에 의해서 쓰여진 순순한 인간의 종교적 신념의 작품이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안에는 모든 인간적 종교 작품이 불가피하게 가지는 인간적 과오가 있다고 비판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절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칼빈은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의 구수(口授)를 기계적으로 옮겨 썼다고 하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성경이 문학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이나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서 필사되어 전달되면서 인간적이고 시대적인 제한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성경은 순전히 인간적인 동기에서 인간적인 능력에 의해서 인간적인 소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초인간적 사태에 직면하여 불가항력적으로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진적 힘에 의해서 말해야 했고 써야 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성경을 단순한 종교적 문헌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성경 없이는 교회가 성장할 수 없으며 영의 양식을 계속 공급받을 수 없다. 이와같이 교회는 성경을 쓰여진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선포하고 전하고 있다.
3)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설교
개혁교회는 설교 없이 교도권을 위주로 한 로마 카톨릭 교회나 또한 설교 없이 사크라멘트를 위주로 한 동방 정교와는 다르다. 개혁교회는 예전 집행을 중시하면서도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설교도 많이 변질되었다. 듣는 사람들의 취향을 따라 설교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의 취향을 맞추려는 것도 잘못이지만 복음 자체를 듣는 것보다 현대적 복락을 좋아하는 성도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설교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서 이를 증명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설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을 직접 지시하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이 교회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다. 설교는 개인적 체험을 중시하는 영감에 치우쳐서는 안되고, 자파의 교리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를 해서도 안된다.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 되어서도 안된다. 케리그마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경이 주해되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 번 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좋으나 드려지는 예배의 개념이 약해진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드려져야 하는데 드려지는 예배로 참여하는 자세가 약하다. 이것은 시정되어져야 한다. 말씀에 은혜받기 위해서 참여하는 예배보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참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참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2. 전도의 사명
전도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사명이기도 하다. 주님은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모두 복음의 빚진 자들이다(롬 1:14,15).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것을 강권하고 있다(고후 5:14). 그리스도는 이를 이루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종의 삶을 살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전도는 시급하다.
1. 전도는 가장 귀한 일이다.
좋은 것(the good)은 더 좋은 것(the better)의 적이고, 더 좋은 것은 가장 좋은 것(the best)의 적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가장 귀중한 것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은 인간이다. 주님은 인간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이 인간을 구원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2. 전도의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은 후에 전할 수 있다(행 1:8). 예수님의 제자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만 했다. 이 말은 역으로 풀이하면 성령받은 사람은 전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성령은 복음의 확신을 갖게 하고 전해야 할 열심을 더하게 하므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한다.
3.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전도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은혜를 체험한 자는 복음을 전하게 된다.
4.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때에 따라서 성공적으로 전도한 사람들의 간증을 듣게 된다. 그들의 말을 들을 때에는 감격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성공적 전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의 기도가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한 영혼을 위해서는 많은 기도의 눈물이 있어야 한다. 남자가 여자의 눈물에 약하듯이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에 약하다. 눈물에 약한 이유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의 심한 눈물은 그의 생명을 15년을 연장받는 은혜를 입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심정으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애타는 심정으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며 드려지는 기도는 성공적 전도의 비결이 된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10개월의 기간이 필요하듯이 한 영혼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수 많은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다. 이런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자만이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5. 전도의 유무에 따라 상급과 화가 있다.
하나님은 전도와 관련하여 상급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단 12:3에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다. 아울러서 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화를 당하게 된다고 하셨다. 왕하 7장 9절에 보면 나환자들의 대화 중에서 “오늘날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했다. 전하지 않으면 벌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9:16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 했다.
6. 구체적인 전도의 방법
이 부분은 전도 훈련에서 다루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피하기로 한다. 하지만 몇 가지만 소개하도록 한다. 우선 와보라고 전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 방법이나 제자들의 전도 방법,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 방법이다. 그 다음은 간증도 있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 요 9:25의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고침 받은 후에 간증하며 전하는 내용은 이런 전도 방법에 속한다. 전도 대상자를 찾는 방법은 사회적 관계망, 즉 친척이나 친구등을 전도하는 방법이 있고 구역을 중심으로 전하는 방법이 있다. 전도 훈련을 통하여 가르쳐진 것들이 지식으로 남지 않고 실천에 옮겨질 때 교회의 사명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3. 교육의 사명
가르치심은 예수님의 주요 사역 중의 하나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셨다. 뿐만 아니라 배운 것들을 또한 가르치라고 하셨다. 마 28:18-20에서도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교회의 사명 중 하나다. 바른 교육이 이루어진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다.
1. 교육을 통해서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계 3:1-3의 말씀을 보면 사데 교회는 중병을 앓고 있는 교회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한 교회였지만 속으로는 그 행위가 온전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한 때 제대로 배웠던 말씀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 교육은 평생 교육이다. 목사도 계속 교육을 받지 않으면 고갈되어진다. 교육을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배우고 섬김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바른 교육이 없으면 그 신앙은 쓸모 없는 신앙이 된다.
반면에 안디옥 교회는 건강한 교회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행 11:25-26에 보면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통해서 안디옥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으면서 칭찬을 듣는 교회가 되었다.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교육받는 성도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2. 교육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명령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해야 한다. 예수님의 명령이라 할 때는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은 명하시기를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지켜 행하라고 하셨다(마 28:19-20). 이 교육은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3. 교육의 목표
교육의 목표는 엡 4:12-13에 있다. 이 부분은 우리 교회의 94년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는 성도로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는 말씀은 교육의 목표를 설정해 준다.
첫째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신앙 인격에까지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성화의 길을 걸어가서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자신감을 갖게 하고 의욕을 갖게 한다. 장애인들은 교육을 통해서 자신들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다. 교육은 힘을 더하여 준다.
둘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봉사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봉사하셨는데 이것은 곧 우리도 그러한 봉사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교육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를 본받아 섬기도록 하는데 있다.
셋째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역자가 되게 하는데 있다.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있다. 전도하여 들어온 자들을 교육하여 세우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가 없다. 교육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역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육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4. 봉사의 사명
봉사는 디아코니아인데 이 말은 누구나 즉시 굴종을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하나의 행동, 식사 시중을 의미한다. 식사 때는 주인과 종이 구별된다. 상전이 식사를 하는 동안 하인은 띠를 두르고 시중을 들어야 했다. 비록 이 말이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식사, 부양, 생계를 돌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찌라도 역시 열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이 정치가들에게 사용될 때에만 열등의 의미가 없다.
봉사는 예수님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라니라 섬기러 오셨다(막10:15). 특별히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빌2:6). 주님의 사역은 철저히 죄인을 섬기는 봉사의 사역이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도 낮아지심 속에서의 봉사의 자세였다(요 13:14-15). 하나님 나라의 으뜸되는 삶의 태도는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막 10:42-44). 봉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남을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온전히 자기 인격을 다 바쳐 타인을 지향하여야 한다. 제자의 삶은 봉사가 있어야 한다. 제자의 성립 요건은 권리, 권력, 학식, 위엄이 아니라 봉사에 있기 때문이다. 봉사의 뿌리와 목표는 사랑이다.
심하게 말하면 봉사하지 않는 사람은 성도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벧전 4:10에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처럼 서로 봉사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봉사는 사명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소명이다. 그러므로 드러나게 앞서서 일하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봉사야말로 가치가 있는 사역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은사를 주셨다. 봉사를 하지 않으면 받은 은사를 썩이는 격이 된다.
하나님은 주지 않은 것으로 봉사하라고 하지 않았다. 은사를 주신 후에 그것에 맞게 봉사하라고 했다. 샘물은 퍼내지 않으면 이끼가 끼기 마련이다. 물은 퍼내야 하고 물을 퍼내면 물은 다시 차게 되어 있다. 봉사의 원리도 이와같다. 내가 받은 은사를 활용하면 하나님께서 더 나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봉사는 선한 청지기 같이 해야 한다. 선한 청지기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여 봉사한다. 우리의 봉사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된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물 한 잔을 대접하는 것은 곧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했다.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자들은 주님의 상을 받을 것이다. 봉사는 성도에 대한 봉사로서 교육, 양육, 심방, 구제등이 있고, 이웃에 대한 봉사로서 전도, 선교, 구제, 자선등이 있다.
5. 구제의 사명
복음은 물질을 통해서 전파된다. 국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도 어려운 이웃들을 구제해야 하지만 특히 선교는 구제와 구분해서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지역이나 중국 지역, 중국에 나온 북한 사람들 모두에게 물자를 공급해 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과부나 고아를 불쌍히 여기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은 가난한 자를 구제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려준다.
6. 선교의 사명
복음은 내 집 근처에서만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 땅 끝이 어디인가의 문제는 학자마다 달리 해석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장애인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제 3세계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북한이라고 하기도 한다. 다시 정리하면 복음이 전파되기 힘든 곳이 땅 끝이라고 한다. 그 곳이 어디든지 간에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1. 선교의 목적
선교는 인간의 개인 구원에 첫 목적을 둔다. 선교는 개인에게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여 그 전도를 받아 그 사람이 구원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제 뿌려진 씨가 열매를 맺게 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곧 복음을 받은 자를 성도로 만드는 일이다. 전도받은 사람이 성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개교회의 구성원을 만들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을 만들어야 한다.
2. 선교의 동인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성령께서 선교에 동참하신다. 선교의 동인은 성령이시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를 보면서 선교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성령은 마게도냐 환상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선교의 동인이 바로 성령이신 것을 보여준다.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선교하게 하신다. 성령받은 교회는 선교하지 않을 수 없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성령받지 않은 교회다. 이 교회는 본질이 없는 비본질의 교회다. 성령은 선교하도록 하신다. 선교하지 않으면 찢어서라도 선교하도록 하신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교회는 선교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도 선교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성령받지 못한 자다. 선교사도 성령께서 세우신다. 선교의 사명은 어느 특정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3. 선교의 주된 내용
선교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이 주제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복음 선교는 사회적 봉사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복음화운동이 사회화운동이 아니다는 말이다. 인권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그리스도 침투운동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선교는 성경을 사용해야 한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넷째로 구원받은 자로서의 사회활동은 민주주의적 국가를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건설과 추진의 임무를 맡아 그 나라의 완성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선교는 인간답게 대우받는 인간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과 본래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회복하는데 있다. 여섯째로 선교는 듣는 자로 하여금 회개한 후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일곱째로 선교는 시대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대담하게 취급해야 한다. 특히 제 3세계에 있는 젊은 교회들의 시대적 문제를 과감하게 취급해 주어야 한다. 소금이 녹아지듯, 빛이 타듯 교회는 자기 희생을 무릅쓰고 주어진 환경에서 던져지는 도전적 사건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자유로써 그 문제를 진지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선교는 선포적이다.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선포되어진다.
4. 선교의 방법
선교의 방법 중에 하나는 미전도 종족을 입양하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는 2만개의 부족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듣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중국에 1만 2천 부족이 복음을 전혀 듣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종족을 입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을 입양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로 시작해서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그들을 전도해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교구별로 미전도 종족을 입양한다면 23개 종족을 입양하여 전도할 수도 있고, 전도회별로 입양한다면 161개 종족을 입양할 수가 있다. 2만개 부족 중에서 일부분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한 선교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때 선교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된다.
5. 성경에 기록된 선교 실례
1)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선교와 관계가 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선교는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방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도록 하셨다. 아브라함을 불러 택한 백성의 시초가 되게 하신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말씀하시면서 선교의 지표를 세워주셨다.
2) 요나의 선교
구약에서 선교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요나서다.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앗수르의 도성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방 선교다. 편협한 사상이나 자민족주의적 정신을 벗어나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의 뜻을 보여준다.
3) 바울의 선교
바울의 첫번째 선교 원칙은 복음의 절대성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인도 마드라스시의 간디 기념 공원에 가면 간디 동상 옆에 부처의 동상이 있고 그 옆에 십자가의 예수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예수님을 여러 위인 중의 한 분으로 보는 것은 선교의 개념이 아니다. 둘째는 긴박성이다. 복음 전도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구원하는데는 긴박성이 필요하다. 셋째는 개척 정신을 가진 선교다.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세우지 않는다(롬 15:20).
넷째는 교회 중심의 선교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한 곳에서는 교회를 세웠다. 다섯째는 기회를 최대한 선용하는 선교였다. 복음을 잘 받는 곳에서는 집중적으로 선교하였고 받아들이지 않고 핍박하는 곳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피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발의 티끌을 털고 일어났다(행 13:50-51). 하지만 에베소에서는 이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행19:10). 여섯째는 동역자들과 함께하는 선교였다. 바나바와 함께(행11:24-25), 디모데와 함께(행 16:1-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마가와 함께(딤후 4:10) 사역하였다. 일곱째로 바울의 선교는 도시 중심적 선교였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도시를 선택했다.
6. 우리 교회의 선교 방향
우리 교회의 선교의 우선 순위는 북한 선교에 있다. 그래서 북한 선교를 교회의 4대 목표 중 하나로 정해놓고 기도하고 있다. 95년도에는 정식으로 북한 선교회가 출범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통일을 앞에 놓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하여 준비해야 한다. 북한 선교를 위해서는 중국을 집중적으로 목표로 삼아 선교에 동참하려고 한다. 이번에 당회장 목사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도 그 이유에서다. 하지만 북한 선교를 위해서 다른 선교를 포기할 수는 없다. 동시적으로 세계 선교에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선교의 제 2 순위를 회교권으로 정해놓고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 그 다음을 아프리카 지역으로 정하고 그 다음은 특별한 상황에 따라서 우선 순위를 두기로 하고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 제직들은 이를 위해서 기도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8.교회의 정치와 회의
주간성경공부 서리집사반
정치
A. 총론
역사상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정치 체제는 감독정체, 장로정체, 회중정체라는 3개의 정치 체제가 있다. 감독정체는 교직자에 치중되는 정치이고, 장로정체는 모든 교직자들이 동일한 수준에 있고 권위는 성도들의 선거를 받은 대표자들에게 있는 정치체제이고, 회중정체는 교직자들의 단일 서열을 인정하는 면에 있어서는 장로정체와 같으나 권위가 피선된 대표자에게 있지 않고 성도들의 직접 결의에 있다. 이러한 3대 정치체제가 여러가지로 변형되었다.
1. 감독정치
이 정치는 감독이 교회를 주관하는 정치인바 감독교회와 감리교회에서 쓰고 있는 정치이다.
2. 교황정치
이 정치는 주로 로마 카톨릭교와 희랍정교의 정치인바 교황 전제로 산하 전 교회를 관리하는 정치다.
3. 장로회 정치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 3심제의 치리회가 있다. 처음은 당회로 치리장로와 목사인 강도 장로의 두 반으로 조직되어 지교회를 주관하고 그 상회로 노회및 총회가 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기초한 것이다.
4. 자유 정치
이 정치는 다른 회의 관할과 치리를 받지 아니하고 각개 교회가 자유로 행정하는 정치다.
5. 조합정치(회중정치)
독립성의 정치라고도 한다. 이 정치는 권위를 선택된 대표자들에게 있지 않고 성도들의 직접적 결의에 있다. 이 정치는 자유 정치와 방불하나 다만 각 지교회의 대표로서 조직된 연합회가 있어 피차 유익한 문제를 의논하나 산하 교회에 명령하거나 주관하는 권한은 없고 모든 치리하는 일과 권징과 예식과 도리 해석을 각 교회가 자유로 하는 정치다.
6. 에레스티안 정치
교회를 국가의 한 국면으로 보는 정치다. 국가는 신적 조직체로서 사람들의 현세적 신령적 모든 궁핍을 채워주기로 의장된 것이므로 순순한 교리의 전파와 성례와 권징의 상당한 시행을 위한 의무를 갖고 있으므로 교회의 재정을 후원하며 이것의 직원을 임명하며 법규를 정하며 행정을 감당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한다.
7. 전국교회 정치
이들은 개별적 교회들은 한 개 전국적 교회의 작은 부분들이라는 주장한다. 기원적 권력은 전국적 조직체에 있는 바 그 조직체는 지교회들 위에 치리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기원적 권력이 지교회의 당회에 있다고 하는 장로교회 정치와 반대가 된다.
8. 무교회주의
유형교회를 부인하는 정치다. 이 견해에 의하면 교회는 외적 결속으로 논하면 격리한 개인들의 총합 뿐이다. 특수한 처소에 회집하게 되거나 특수한 시간에 생활하게 된 신자들이 그 처소와 시간의 교회를 구성한다. 이들이 교회의 조직을 싫어함은 그것이 기계가 될까 두려워함이요, 목사를 싫어함은 그들이 감독화할까 두려워함이다. 윌리엄 리드같은 사람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는 교회가 오순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둘째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동일하다. 셋째는 유일한 하나님의 총회다. 넷째는 성령의 총재직 때문이다. 다섯째는 한 사람 또는 인조의 성직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교회는 정치 없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B. 장로회주의의 근원과 발전
1. 성경적 근원
1) 명칭
장로회란 장로란 말을 어근으로 하였다. 장로란 말은 신약에 약 60회, 구약에 약 100회 나타난다. 장로는 προσβυτεροσ이고 장로회는 προσβυτεριον으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로교회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장로에 의하여 정치하는 교회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민선장로들에 의하는 대의형(代議形)의 정치를 하는 교회다.
2) 상고적 기원
장로주의의 기원은 성경 역사의 上古代로 돌아간다. 아브라함 때에 있었고(창50:7), 모세 때에 있었고(출18:21-25), 그 후 유대 역사에도 있었다(마5:22, 26:3). 신약시대에도 있었다(행14:23, 20:17, 딛1:5). 장로의 자격을 묘사해 놓기도 하였다(딤전 3:1-7).
3) 다른 이름들
신약에 감독이란 말로 5회가 사용되었다(행20:17,28, 딛1:5,7).
4) 민선과 대의(代議)
신약의 장로들은 민선을 받아 취임되었다. 맛디아의 선택에 회중이 참관하였고(행1:23-26), 7집사의 선택에 회중이 주동하였다(행6:3,5). 행14:23에는 “각 교회 장로들을 택하여”라고 하였다. 성경 뿐아니고 초기 기독교 문서에도 전교인이 승락하여 그들이 직임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이 민선에 의하여 선택된 후에는 대의정치를 하였다. 할례의 문제로 안디옥 교회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준 행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는 그것을 부여준다.
2. 역사적 발전
1) 장로정치의 매몰기
사도 요한의 별세로부터 죤 칼빈의 종교개혁까지 14세기 동안은 성경적인 장로 정치의 매몰기였다. 여러 장로 중에 유능한 사람이 선택되어 감독이라는 명칭을 독점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교황권이 자라서 그레고리 7세(힐레브란트)에 이르러서는 최고의 권한을 갖기도 하였다.
2) 독립적 항의적 개혁적 운동
교회의 정치, 교리, 예배, 생활이 신약적 표준을 떠나서 미로를 헤메고 있을 때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들이 일어났다. 3세기의 몬테니스트파, 5세기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켈틱 기독교도들, 8세기에 시작한 스코틀랜드의 컬디스, 이태리의 왈덴시교도들이다. 이런 운동들은 영국의 위클리프, 보헤미야의 허스를 불렀으며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루터에 의해서 95개 조항과 함께 종교개혁의 성공에 이르게 되었다.
3) 칼빈의 공적
죤 칼빈은 이 모든 역사적 변천을 조사하고 장로회적인 교리들과 원리들을 부활시켜 근대 장로교회를 조직하였다. 칼빈은 파렐과 함께 신도게요와 要理問答을 준비했다. 칼빈의 정치조직의 우수한 대의적 체제는 세속적 민주정치에도 큰 감화를 주었다.
C. 개혁파 정치의 근본적 원리
1. 구주(화란) 개혁파 5원리
1)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와 권의의 원천이다.
2) 말씀은 권위 행사의 방편이다. 교회는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3) 교회에게 권세를 부여하였다. 직원들은 교회에게 부여된 기원적 권세에 참여한다.
4) 대표적 기관들에 의해 권세를 행사한다.
5) 지교회 치리회로부터 권세가 확장된다. 지교회의 치리권이 광대회의에 확대된다.
2. 영미 장로파의 정치 8원리
1) 양심의 자유
양심의 주체는 하나님 뿐이시다. 그가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위배되거나 과눕ㄴ한 교훈과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나니 그러므로 일반 인류는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즉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2) 교회의 자유
첫째, 개인의 자유의 일례로 어느 교파 어느 교회든지 각기 교인의 입회 규칙과 입교인 및 직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일체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할 자유권이 있다.
둘째, 교호는 국가의 세력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국가에서 각종교의 종교적 기관을 안전 보장하며 동일시함을 바라는 것 뿐이다.
3) 교회의 직원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체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직원을 설치하사 다만 복음을 전파하며 성례를 시행하게 하실 뿐 아니라 신도로 진리와 본분을 준수하도록 관리하게 하신 것이라. 이러므로 교유 중에 거짓 도리를 신앙하는 자와 행위가 악한 자가 있으면 교회를 대표한 직원과 치리회가 당연히 책망하거나 출교할 것이라. 그러나 항상 성경에 교훈한 법례대로 행한다.
4) 진리와 행위의 관계
진리는 선행의 기초라 진리가 진리되는 증거는 사람으로 성결하게 하는 경향에 있으니 주 말씀하시되 “과실로 그 나무를 안다” 하심과 같으니 진리와 허위가 동일하며 사람의 신앙이 어떠하든지 관계 없다 하는 이 말보다 더 패리하고 더 해로운 것은 없다. 신앙과 행위는 연락하고 진리와 본분은 서로 결탁되어 나누지 못할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리를 연구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다.
5) 직원의 자격
제 4조의 원리에 의지하여 교회가 당연히 직원을 선정하되 교회의 도리를 완전히 신복하는 자로 선택하도록 규칙을 제정할 것이다. 그러나 성격과 주의가 다 같이 선한 자라도 진리와 교규에 대한 의견이 불합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 교유와 교회가 서로 용납하여야 한다.
6) 직원 선거권
교회 직원의 성격과 자격과 권한과 선거와 위임하는 규례는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어느 회에서든지 그 직원을 선정하는 권한은 그 회에 있다.
7) 치리권
치리권은 치리회로나 그 택해 세운 대표자로 행사함을 묻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준봉전달(遵奉傳達)하는 것 뿐이다. 대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한 법칙인즉 어느 교파의 치리회든지 회원의 양심을 속박할 규익을 자의로 제정할 권리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에 기인한다.
8) 권징
교회가 이상 각 조의 원리를 힘써 지키면 교회의 영광과 복을 증진할 것이니 교회의 권징은 도덕상과 신령상의 것이요, 국법상의 시벌이 아닌즉, 그 효력과 정치의 공정과 모든 사람의 공인과 만국 교회의 머리되신 구주의 권고와 은총에 있다.
3. 양면적 성격
장로회 정치는 장로에 의한 대의적 정치라는 것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치는 권위와 자유의 양면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즉 권위적 제도인 면과 자발적 結社인 성격을 겸하고 있다. 이 둘 중에 어느 한 편만 강조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와 사랑이 같이 있어야 함과 같다.
회의
교회를 치리함에는 명백한 정치와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전14:40). 이 조직에 있어서 교회는 다스려져야 한다. 장로교 정치는 주권이 교황이나 감독등 성직자에게 있지 않고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다. 주권의 행사는 주권자인 교인에 의해 선택된 목사와 장로들로 조직된 치리회인 당회, 노회, 대회, 총회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정당한 사리와 성경 교훈과 사도 시대의 교회의 행사에 의지한즉 교회 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와 같은 치리회에 있다(행15:6).
1. 공동의회
1) 회원
본교회 무흠 입교인은 다 회원 자격이 있다.
2) 소집
당회가 필요로 인정할 때와 제직회의 청원이나 무흠 입교인의 3분의 1 이상 청원이나 상회의 명령이 있는 때에 당회의 결의로 소집한다.
3) 임원
지교회의 당회장과 당회 서기는 공동 의회의 회장과 서기를 겸한다. 당회장이 없을 경우는 그 당회가 임시 회장을(본 노회 목사 중) 청할 것이요, 회록은 따로 작성하여 당회 서기가 보관한다.
4) 회집
당회는 개회할 날짜와 장소와 의안을 1주일 전에 교회에 광고 혹은 통지하고 그 작정한 시간에 출석하는 대로 개회하되 회집 수가 너무적으면 회장은 권하여 다른 날에 다시 회집한다.
5) 회의
연말 정기 공동 의회에서는 당회의 경과 상황을 들으며 제직회와 부속 각 회의 보고와 교회 경비 결산과 예산서를 채용하며 그 밖에 법대로 제출하는 사건을 의결하나니 일반 의결은 과반수로 하되 목사 청빙 투표에는 두표수 3분의 2의 가와 입교인 과반수의 승락을 요하며 장로, 집사및 권사 선거에는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로 선정한다.
2. 제직회
1) 조직
지교회 당회원과 집사를 합하여 제직회를 조직한다. 회장은 담임 목사가 겸무하고 서기와 회계를 선정한다. 당회는 각각 그 형편에 의하여 제직회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서리 집사와 전도사와 권사, 전도인들에게 제직회원 권리를 줄 수 있다.
2) 미조직 교회 제직회
미조직 교회에서는 목사, 전도사, 권사, 서리집사, 전도인들이 제직회 사무를 임시로 처리한다.
3) 재정 처리
① 제직회는 교회에서 위임하는 금전을 처리하고 부동산은 노회 소유로 한다.
② 구제와 경비에 관한 사건과 금전 출납은 모두 회에서 처리하며 회계는 회의 결의에 의하여 금전을 출납한다.
③ 제직회는 매년 말 공동 의회에 1년간 경과 상황과 일반 수지 결산을 보고하며 익년도 교회 경비 예산을 편성 보고하여 회에 통과하며 회계는 장부의 검사를 받는다.
4) 제직회 개회 성수
회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개회 성수가 되나 통상적인 사무 처리는 출석하는 회원으로 개회하여 처리할 수 있다.
5) 정기회
매월 1회 또는 1년에 4회 이상 정기회를 정함이 편하다.
3. 당회
1) 조직
당회는 지교회 목사와 치리 장로로 조직하된 세례 교인 25인 이상을 요하고(행14:23, 딛1:5) 장로의 증원도 이에 준한다.
2) 당회의 성수
당회에 장로 2인이 있으면 장로 1인의 출석으로 성수가 되고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와 목사 1인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 장로 1인만 있는 경우에도 모든 당회 일을 행하되 그 장로 치리 문제나 다른 사건에 있어 장로가 반대할 때에는 노회에 보고하여 처리한다.
3) 당회장
당회장은 그 지교회의 담임 목사가 될 것이나 특별한 경우에는 당회의 결의로 본 교회 목사가 그 노회에 속한 목사 1인을 청하여 대리 회장이 되게 할 수 있으며 본 교회 목사가 신병이 있거나 출타한 때에도 그렇다.
4) 당회 임시 회장
당회장은 목사가 되는 것이므로 어떤 교회에서든지 목사가 없으면 그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노회가 당회장 될 사람을 파송할 것이요, 노회의 파송이 없는 경우에는 그 당회가 회집할 때마다 임시 당회장 될 목사를 청할 수 있으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회장될 목사가 없을지라도 재판 서건과 중대 사건 외에는 당회가 사무를 처리할 수 있다.
5) 당회의 직무
① 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총찰한다. 교인의 지식과 신앙 행위를 총찰한다.
② 교인의 입회와 퇴회를 관리한다. 입교, 세례, 학습, 이명증서, 제명
③ 예배와 성례 거행
④ 장로와 집사 임직
⑤ 각 항 헌금 수집하는 일을 주장한다.
⑥ 권징하는 일 - 권계, 견책, 수찬 정지, 제명, 출교
⑦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며 각 기관을 감독
⑧ 노회에 총대 파송하며 청원과 보고한다.
6) 당회의 권한
당회는 예배 모범에 의지하여 예배 의식을 전관하되 모든 회집 시간과 처소를 작정할 것이요, 교회에 속한 토지 가옥에 관한 일도 장리한다.
7) 당회 회집
당회는 1년 1회 이상을 정기회로 회집하며 본 교회 목사가 필요한줄로 인정할 때와 장로 반수 이상이 청구할 때와 상회가 회집을 명할 때도 소집하되, 만일 목사가 없는 경우에는 필요에 응하여 장로 과반수가 소집할 수 있다.
8) 당회 회록
당회록에는 결의 사항을 명백히 기록하고 회록과 재판 회록은 1년 1차씩 노회 검사를 받는다.
9) 당회는 각종 명부를 비치한다.
학습인 명부, 입교인 명부, 책벌및 해벌 명부, 별명부(1년 이상 실종된 사람), 별세인 명부, 이전인 명부, 혼인 명부, 유아세례 명부
4. 노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나뉘어 여러 지교회가 있으니 서로 협의하며 도와 교회 도리의 순전을 보전하며, 권징을 동일하게 실시하며, 신앙 지식과 바른 도리를 합심하여 발휘하며, 배도함과 부도덕함을 금지해야 한다.
1) 노회의 조직
일정한 구역 안에 있는 모든 목사와 각 당회에서 총대로 선출한 장로로 구성된다. 장로 총대는 세례 교인이 200명 미만이면 1인, 200명 이상 500명 미만이면 2인, 500명 이상이면 3인을 파송한다. 단 21 당회 이상을 요한다.
2) 회원의 자격
각 지교회 시무 목사와 원로 목사와 공로 목사와 총회나 노회가 파송한 기관 사무를 위임한 목사는 회원권을 구비하고 그 밖에 목사는 투표권이 없고 위원회에서는 투표권과 상회에 총대권도 있다.
3) 노회의 직무
① 그 구역에 있는 당회, 지교회, 목사, 강도사, 전도사, 목사 후보생, 미조직 교회를 총괄한다.
② 당회에서 상소된 안건을 처리한다. 상소건은 접수하여 상회에 보낸다.
③ 목사후보생을 고시한다. 강도사를 인허한다. 장로고시, 전도사고시, 목사의 임직, 위임, 해임, 전임, 이명, 권징을 관리한다. 당회록과 재판회록을 검열하여 처리 사건에 찬부를 표하며 도리와 권징에 관한 합당한 문의를 해석한다.
④ 교회의 신성과 화평을 방해하는 언행을 방지하며 각 지교회를 시찰한다.
⑤ 지교회를 설립, 분립, 합병, 폐지및 당회를 조직하는 것과 지교회와 미조직 교회의 목사의 청빙과 전도와 학교와 재정 일체 사항의 처리 방침을 지도한다.
⑥ 상회에 올려보내는 공문을 접수하며 상회 총대를 파송한다.
⑦ 목사고시를 행하되 그 과목은 신조, 권징 조례, 예배 모범, 목회학, 면접이다.
⑧ 지교회의 토지, 가옥 사건에 대하여 변론이 나면 노회가 처단한다.
⑨ 감독하고 치리하기 위하여 목사 장로 중에서 시찰 위원을 둔다.
4) 지역노회와 무지역노회
지역 노회는 특정 지역을 경계로 해서 조직된 노회이고 무지역노회는 지역을 초월하여 조직된 노회다. 무지역노회는 통일될 것을 염두에 두고 조직된 것으로 평양노회, 평북노회, 용천노회, 황해노회등이 있다. 우리교회는 수도노회에 가입되어 있으나 이제 강남으로 이사함에 따라 이번 가을 노회부터는 지역노회로 옮길 예정이다. 옮기게 될 노회는 동서울노회다. 노회는 봄 가을로 일년에 두 차례씩 열린다.
5) 노회 회집
노회는 예정한 날짜와 장소에 회집하고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경우에는 가 다른 지교회 목사 3인과 각 다른 지교회 장로 3인의 청원에 의하여 회장이 임시회를 소집할 수 있다. 회장이 유고한 때에는 부회장 또는 서기가 대리로 소집한다. 회장이 임시회를 소집할 때에는 회의할 안건과 회집 날짜를 개회 10일 전에 관하 각 회원에게 통지하고 통지서에 기재한 안건만 의결한다. 정기 회의는 일년에 두차례 실시한다.
5. 총회
1) 명칭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모든 지교회및 치리회의 최고회다. 그 명칭은 대한에수교장로회 총회라 한다.
2) 역사
한국 장로회 총회는 1912년 조직되어 평양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창립 총회에는 목사 96명(선교사 44명, 한국인 52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모였다. 당시 교세는 안수받은 목사 128명, 장로 225명, 교인이 127,228명이었다. 1912년 창립총회의 명칭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였으나 194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 바뀌었다. 1951년 5월 36회 총회에서 고신측이 분리되었고 1953년 38회 총회 때에 기장측이 분리되었다. 1959년에는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리되었다. 우리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합동측이다.
3) 조직
총회는 각 노회로부터 선출된 같은 수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총대는 가 노회 지방의 매 7 당회에서 목사 1인, 장로 1인씩을 파송하되 노회가 투표하여 개회 2개월 전에 총회 서기에게 송달한다. 차점순으로 부총대 몇 명을 정해둔다. 단 7당회가 못되면 4당회 이상에서는 목사 장로 각 1인씩을 더 파송할 수 있다. 3당회 이하 되는 노회는 목사 장로 각 1인씩 언권 회원으로 참석한다.
4) 직무
총회는 소속 교회및 치리회의 모든 사무와 그 연합 관계를 총찰하며, 하회에서 합법적으로 제출하는 헌의와 청원과 상고와 소원과 고소와 문의와 위탁 판결을 접수하여 처리하고 각 하회록을 검열하여 찬부를 표하고 산하 각 교회 간에 서로 연락하여 교통하며 신뢰하게 한다.
4) 권한
① 교회 헌법을 해석, 교리와 권징에 관한 쟁론을 판단, 지교회와 노회의 오해와 부도덕한 행위를 경책하며 권계하며 변증한다.
② 노회, 대회를 설립, 합병, 분립하기도 하며 폐지하기도 한다.
③ 강도사 지원자를 고시하며 전국 교회를 통솔하며 다른 교파와 교통한다.
④ 교회를 분열하게 하는 쟁단을 진압하며 덕을 실행하게 한다.
⑤ 교회 재산에 대하여 쟁론이 있어 노회에서 상고하면 이를 접수하여 판결한다.
⑥ 내외지 전도 사업이나 기타 중대 사건을 주관할 위원을 설치할 수 있으며 신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할 수 있다.
5) 회집
총회는 매년 1회 정례로 회집하되 예정한 날짜에 회장이 출석하지 못할 때는 부회장이 혹 전 회장이 개회하고 신회장을 선거할 때까지 시무한다. 각 총대는 서기가 천서를 접수 호명한 후부터 회원권이 있다.
9.교회의 직원
주간성경공부 서리집사반
아담의 범죄 이후로 구속을 허락하시면서부터 교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 모양은 다양하게 나타났으나 교회는 여전히 조직 속에서 발전되었다. 구약에서는 족장을 중심으로 제사제도로 있었으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존재해 왔다. 교회는 오순절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스데반은 그가 순교하기 전에 한 설교에서 광야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오순절 성령 임재 사건을 통해서 교회는 더욱 구체화 되었고 그 조직도 다양화 되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체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전하기 위한 조직체이다. 이 조직이 원만히 이루어지기 위해서 직원을 두고 있다. 교회의 직원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우선 그 특성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어진다.
1. 교회 직원의 구분
1. 교회의 창설 직원
창설직원은 비상직원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에만 있었던 직원들이다. 이들은 우리 주 예수께서 최초에 이적을 행할 권능을 주신 자들로 각 나라 중에서 선발하여 한 몸이 되게 하신 자들이다. 이 이적적 은사를 받은 인물들이 시도 시대의 비상직원의 핵심을 구성하였다. 칼빈은 엡 4:11에 열거된 다섯 가지의 직원 중에서 처음 세 가지가 비상직원이라 했다.
첫째는 사도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12사도와 바울 뿐 아니라 바울의 사역에 조력하고 사도적 은사와 은혜를 받은 어떤 사도적 인물들에게도 적용되었다(행 14:4, 고전 9:5-6, 고후 8:23, 갈 1:19).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를 설치할 특별 직무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들은 교회의 설립을 위해서 전 세계로 파송된 자들이다.
사도들은 특별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그 사명을 직접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혹은 에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아야 하며(막 3:14, 눅 6:13, 갈 1:1), 둘째로 그리스도의 생애, 특별히 부활의 증인이었으며(요 15:27, 행 1:21-22, 고전 9:1), 셋째로 그들이 말하고 기록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영감을 의식하였으며(행 15:28, 고전 2:13, 살전 4:8, 요일 5:9-12), 넷째로 이적 행하는 권능을 가지고 여러 시기에 그것을 사용하여 그들의 사신(使信)을 확증하였으며(고후 12:12, 히 2:4), 사람에게 안수하여 성령받게 하였으며(행 8:17-18), 다섯째로 그들의 사역이 풍부히 복주심을 받아 그들의 노력을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표적을 보였다(고전 9:1-2, 고후 3:2-3, 갈 2:8). 사도들을 후계하여 직분을 받은 자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가 없고 사도들과 같이 특별한 권능을 받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지자다. 신약 시대에도 선지자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행 11:28, 13:1-2, 고전 12:10, 13:2, 엡 2:20, 3:5, 딤전 1:18, 계 11:6). 이 선지자들은 교회의 건덕을 위한 말씀의 은사를 비상히 많이 받은듯 하고 이따끔 신비를 계시하며 미래 일을 예고하였다. 그들은 특별한 영감 아래서 발언하는 점에서 일반적 성직자와는 달랐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들은 특별한 계시로 뛰어난 자들이며 지금은 이런 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 선지자의 직분이 폐지된 것은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 선지자의 직분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전도인이다. 사도와 선지자 외에도 전도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행 21:8, 엡 4:11, 딤후 4:5). 빌립, 마가, 디모데, 디도는 이 반열에 속하였다. 칼빈은 사도들의 반열 다음에 70인 제자들도 이 반열에 속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눅 10:1). 전도인에 대한 기록은 적으며, 이들은 사도들을 수행하여 조력하였으며 혹시 사도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받아 파송되기도 하였다. 전도인은 직위에 있어서는 사도들보다 낮고 직무에 있어서는 대리인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사역은 전도하고 세례 베푸는 것이었으며 장로들을 장립하여(딛 1:5, 딤전 5:22) 권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딛 3:10). 그들의 권위는 일반적 성직자보다 우월하였다. 그들의 직분이 사도들을 보좌하는 것이었으므로 사도직의 폐지와 함께 폐지되었다.
2. 교회의 항존 직원
교회의 창설직원 이외의 직원은 통상직원이다. 통상직원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항존직원이고 하나는 임시 직원이고 하나는 준직원이다. 항존 직원은 장로(감독)(행 20:17, 28, 딤전 3:7)와 집사다. 장로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눈다.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하고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하는데 이는 교인의 대표자이다. 교회의 항존직의 시무 연한은 만 70세로 한다.
3. 교회의 임시 직원
교회의 사정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직원을 안수 없이 임시로 설치한다. 단 교회의 모든 임시직의 설치 연한은 70세로 한다.
첫째로 전도사가 잇다. 남.녀 전도사를 당회의 추천으로(당회가 없는 곳은 지방목사) 노회가 고시하여 자격을 인가하면 유급 교역자로 당회나 목사의 관리하는 지교회 시무를 방조하게 한다. 전도사는 신학생과 신학 졸업자로 노회가 고시 인가하되 특별한 경우에는 이 한도에서 벗어난다. 단, 다른 노회에서 전도사 고시 받은 자와 총회 신학교를 졸업한 자는 필답 고사를 면제한다. 전도사는 그 당회의 회원은 되지 못하나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언권 방청이 되고 미조직 교회에서는 당회장의 허락으로 제직회 임시 회장이 될 수 있다.
둘째는 전도인이다. 남.녀 전도인은 유급 사역자로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자니 그 사업 상황을 파송한 기관에 보고하고 다른 지방에서 전도에 착수할 때는 그 구역 감독 기관에 협의하여 보고한다.
셋째는 권사다. 권사는 여신도 중 만 50세 이상된 입교인으로 무흠히 다년간 교회에 봉사하고 공동 의회에서 투표하여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은 자로 한다. 권사가 하는 일은 당회의 지도대로 교인을 방문하되 병환자와 곤난을 당하는 자와 연약한 교인을 돌보는 것이다.
넷째는 남녀 서리집사다. 서리 집사는 교회 혹은 목사나 당회가 신실한 남녀로 선정하여 집사 직무를 하게 하는 자로서 그 임무는 1년이다.
4. 준직원
강도사와 목사 후보생은 준직원이다. 강도사는 당회의 추천에 의하여 총회의 고시로 노회에서 강도할 인허를 받고 그 지도대로 일하되 교회 치리권은 없다. 목사 후보생은 목사직을 희망하는 자로 노회에서 자격 심사를 받고 그 지도대로 신학에 관한 학과로써 수양을 받는 자다. 강도사오 목사 후보생은 개인으로는 그 당회 아래 있고 직무상으로는 노회 관리 아래 있다.
2. 교회 직원의 자격과 직무
1. 목사
1) 목사의 의의
목사는 노회의 안수로 임직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자로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직분이다(롬 11:13). 성경에 이 직분 맡은 자에 대한 칭호가 많아 그 칭호로 모든 책임을 나타낸다.
② 종 -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의 종이라, 그리스도의 사역자라 하며 또 신약의 집사라고도 한다(빌 1:1, 고전 4:1, 고후 3:6)
③ 장로 - 엄숙하고 지혜롭게 하여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고 그리스도의 집과 그 나라를 근실히 치리하는 자이므로 장로라고도 한다(벧전 5:1-3).
④ 사자 -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이므로 교회의 사자라 한다(계 2:1).
⑤ 사신 -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죄인에게 전파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라 권하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의 사신 혹은 복음의 사신이라 한다(고후 5;20, 엡 6:20).
⑥ 교사 - 정직한 교훈으로 권면하며 거역하는 자를 책망하여 각성하게 하는 자이므로 교사라고도 한다(딛 1:9, 딤전 2:7, 딤후 1:11)
⑦ 전도인 - 죄로 침륜할 자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이므로 전도인이라고도 한다(딤후 4:5).
⑧ 청지기 - 하나님의 광대하신 은혜와 그리스도의 설립하신 율례를 시행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오묘한 도를 맡은 청지기라 한다(눅12:42, 고전 4:1-2). 이는 계급을 가리켜 칭함이 아니고 다만 각양 책임을 가리켜 칭하는 것일 뿐이다.
2) 목사의 자격
목사될 자는 신학을 졸업하고 학식이 풍부하며 행실이 선량하고 신앙이 진실하며 교수에 능한 자가 해야 한다. 그의 모든 행위가 복음에 적합하여 범사에 존절함과 성결함을 나타내야 하며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며 외인에게서도 칭찬을 받는 자로 연령은 만 30세 이상자로 한다. 단, 군목과 선교사는 만 27세 이상자로 한다(딤전 3:1-7).
3) 목사의 직무
하나님께서 모든 목사되는 자에게 각각 다른 은혜를 주사 상당한 사역을 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저희 재능대로 목사나 교사나 그 밖에 다른 직무를 맡길 수 있다(엡 4;11).
목사의 직무 중 첫째는 지교회를 관리하는 것이다. 지교회를 관리할 때는 양무리 된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하며 강도하며 찬송하는 일과 성례를 행하여야 한다. 목사는 종교상 도리와 본분을 교훈해야 하며 이 일을 할 때는 목자 같이 돌아보며 구원하기 위하여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성경의 씨를 뿌리고 결실되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대표하여 축복하고 어린이와 청년을 교육하며 고시하고 교우를 심방하며 궁핍한 자와 병자와 환난 당한 자를 위로하고 장로와 합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한다.
둘째는 선교사의 직무다. 목사는 선교사로 외국에서 선교할 수 있으며 선교할 때에는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설립하고 조직할 권한이 있다.
셋째는 기관 사역이다. 목사는 기독교 신문이나 서적에 관한 사무를 시무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교회에 덕의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하도록 힘써야 한다.
넷째는 기독교 교육 지도자 직무다. 목사가 노회나 지교회나 교회에 관계되는 기독교 교육 기관에서 청빙을 받으며 교육하는 일로 시무할 수 있다.
4) 목사의 칭호
목사는 그 담임한 시무와 형편에 따라 다음과 같은 칭호가 있다.
첫째로 위임목사다. 한 지교회나 1구역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 위임 목사가 본교회를 떠나 1년 이상 결근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위임이 해제된다.
둘째로 임시목사다. 임시 목사는 공동 의회에서 출석 교인 3분의 2 이상의 가결로 청빙을 받으나 그 시무 기간은 1년간이다. 조직 교회에서는 위임 목사를 청함이 원칙이지만 부득이한 형편이 되면 다시 공동의회에서 3분의 2의 가결로 계속 시무를 청원하면 1년 간 더 허락할 수 있다. 단, 미조직 교회에서 임시 목사 시무 연기를 청원할 때에는 공동 의회의 3분의 2의 가결로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한다.
셋째로 부목사다. 부목사는 위임 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다.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하게 하려면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락을 받는다.
넷째로 원로 목사다. 원로목사는 동일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목사가 만년에 이르러 노회에 시무 사면을 체출하려 할 때에 본 교회에서 명예적 관계를 보존하고자 하면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봉급을 작정하여 원로 목사로 투표하여 결정한 후 노회에 청원하면 노회의 결정으로 원로 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다섯째로 공로 목사다. 목사가 동일한 노회에서 25년 이상 목사로 목회하고 현저한 공적이 있는 자에게 연로하여 목회할 수 없는 때에 노회는 그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노회원 투표 3분의 2의 가결로 공로 목사의 명예직을 준다. 단, 원로 목사와 공로 목사는 지교회의 직무와 치리권은 없으나 노회의 정회원이 되고 다시 시무를 담당하게 되면 원로 목사와 공로 목사 명부에서 시무 목사 명부로 옮긴다.
여섯째는 무임 목사다. 담임한 시무가 없는 목사를 말하며 노회에서 언권은 있으나 가부권은 없다.
일곱째는 전도 목사다. 교회 없는 지방에 파견되어 교회를 설립하고 노회의 결의로 그 설립한 교회를 조직하며 성례를 행하고 교회의 부흥 인도도 한다. 단 노회의 언권회원이 된다.
여덟째는 교단 기관 목사다. 노회의 허락을 받아 총회나 노회및 교회 관계 기관에서 행정과 신문과서적및 복음 사역에 종사하는 목사다.
아홉째는 종군 목사다.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배속된 군인 교회에서 목회와 전도를 하며 성례를 행한다.
열째는 교육 목사다. 노회의 허락을 받아 교육 기관에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교수하는 목사다.
열한째는 선교사다. 다른 민족을 위하여 외지에 파송을 받은 목사다.
2. 장로
율법 시대에 교회를 관리하는 장로가 있음과 같이 복음 시대에도 목사와 협력하여 교회를 치리하는 자를 세웠으니 곧 치리 장로다. 장로는 강도와 교훈은 그의 전무 책임은 아니지만 각 치리회에서는 목사와 같은 권한으로 각 항 사무를 처리한다(딤전 5;17, 롬 12:7-8). 장로의 자격은 만 35세 이상된 남자 중 입교인으로 흠 없이 5년을 경과하고 상당한 식견과 통솔력이 있으며 딤전 3:1-7에 해당한 자로 한다.
장로의 직무는 첫째로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하는 것이다. 치리 장로는 교인의 택함을 받고 교인의 대표자로 목사와 협동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 지교회 혹은 전국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둘째로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 주께 부탁받은 양무리가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당회로나 개인으로 선히 권면하되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당회에 보고한다. 셋째는 교우를 심방하며 위로, 교훈, 간호하는 일이다. 교우를 심방하되 특별히 병자와 조상자를 위로하며 무식한 자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간호해야 한다. 평신도보다 장로는 신분상 의무와 직무상 책임이 더 중요하다. 넷째는 교인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장로는 교인과 함께 기도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교인 중에 강도의 결과를 찾아 본다. 다섯째는 특별히 심방할 자를 목사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병환자와 슬픔을 당한 자와 회개하는 자와 특별히 구조 받아야 할 자가 있는 때에는 목사에게 보고한다.
장로 중에는 원로 장로가 있다. 원로 장로는 동일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하던 장로가 노후에 시무를 사임할 때 그 교회가 그의 명예를 보존코자 하면 공동의회의 결의로 원로 장로로 추대할 수 있다. 단 당회의 언권회원이 된다.
3. 집사
집사직은 목사와 장로직과 구별되는 직분으로 무흠한 남교인으로 그 지교회 교인들이 택함을 받고 목사에게 안수 임지긍ㄹ 받는 교회 항존직이다. 집사는 선한 명예와 진실한 믿음과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 존숭을 받고 행위가 복음에 합당하며, 그 생할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만한 자 중에서 선택한다. 봉사적 의무는 일반 신자의 마땅히 행할 본분인즉 집사된 자는 더욱 그러하다(딤전 3:8-13).
집사의 직무는 목사 장로와 합력하여 빈핍, 곤궁한 자를 권고하며 환자와 갇힌 자와 과부와 고아와 모든 환난당한 자를 위문하되 당회 감독 아래서 행하며 교회에서 수급한 구제비와 일반 재정을 수납 지출한다(행 6:1-3).
3. 직원의 소명
사도와 같은 비상직원들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직접호출하신 것이었다. 그들은 직접 소명을 받아 직분을 감당했다. 그 외의 직원의 소명은 이중으로 본다. 하나는 내소이고 하나는 외소이다. 내소는 하나님의 비상한 지시, 일종의 특별 계시로 구성된다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사고는 아니다. 내소는 하나님이 주신 어떤 통상적 섭리적 지시로 구성되어지며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기로 강요되는 의식, 둘째는 그 직임에 해당하는 일정량의 은사가 있다는 확신, 셋째는 하나님이 그 목표에 향하여 길을 열어주신다는 경험이다. 외소는 교회의 매개를 통하여 오는 소명이다. 이것은 지교회 전체 즉 그 직원들과 신도들이 발하는 것이다.
4. 직원의 선거및 임직
1. 장로 집사 선거및 임직
교회의 직원은 선거를 통하여 임직식을 거행한다. 치리 장로와 집사는 각 지교회가 공동 의회 규칙에 의하여 선거하되 투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요한다. 단 당회가 후보를 추천할 수 있다. 치리 장로 혹은 집사를 선거하여 노회가 고시 승인하고(집사는 제외) 선거된 본인도 승락한 후에 당회가 임직한다. 임직하는 순서는 교회가 당회의 정한 날짜와 장소에 모여 개회하고 목사가 강도한 후에 그직(장로 혹은 집사)의 근원과 성질의 어떠한 것과 품행과 책임의 어떠한 것을 간단히 설명하고 교회 앞에서 피선자를 기립하게 하고 서약을 한다. 서약의 내용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의 신종,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의 승락, 직분을 감당할 헌신적 자세, 화평을 위한 사역이다. 또한 교인들은 임직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복종하기로 서약을 한다. 임기는 만 70세까지다. 단 3년에 1차씩 시무투표할 수 있고 그 표결수는 과반수를 요한다.
장로(집사)가 노혼(老昏)하거나 신병으로 시무할 수 없든지 이단이나 악행은 없을지라도 교회원 태반이 그 시무를 원하지 아니할 때 본인의 청원에 의하여 휴직과 사직을 당회의 결의로 처리한다. 장로나 집사가 범죄는 없을찌라도 앞에서 설명한 사건과 방불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 경우에는 당회가 협의 결정하여 휴직 혹 사직하게 하고 그 사실을 회록에 기록한다. 본인이 원하지 아니하면 소원할 수 있다.
2. 목사 후보생과 강도사
목사의 중임을 연약하고 부적당한 자에게 위임하므로 성력이 사람의 멸시됨을 면하기 위하며, 또한 교회를 교도 치리할 자의 능력을 알기 위하여 성경에 명한대로 목사 지원자를 먼저 시험하는 것이 가하다(딤전 3:6, 딤후 2:2). 이러므로 총회가 신학 졸업생을 고시하고 노회가 강도사로 인허한 후 그 강도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총회 고시 합격 후 1개년 이상 노회 지도 아래서 본직의 경험을 수양한 후에야 목사 고시에 응할 수 있다.
목사 후보생 지원자는 소속 본 노회에 청원하여 그 노회 관하에서 양성을 받는다. 대한예수고 장로회 노회의 지도 아래 후보생으로 1년간 총회 신학교에서 신학과 교회 헌법을 수업한 후에 강도사 고시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강도사 인허를 청원하는 자는 반드시 총회가 그 덕행이 단정함과 지교회의 무흠 회원됨을 증명하는 당회 증명과 노회 추천서및 지원서와 이력서를 제출하게 할 것이요, 총회는 그 사람의 신덕과 종교상 이력을 물어서 성역을 구하는 이유를 묻되 그 고시는 신중히 하고 인허는 노회가 한다.
고시는 구두와 필기 두 종류가 있으며 그 과목은 조직신학, 교회 헌법, 교회사, 논문, 주해, 강도다. 고시 부장은 논문, 주해, 강도에 있어서는 5개월 전에 고시 문제를 준다. 노회는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 말씀임,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의 신봉, 교회의 화평을 위한 사역, 노회의 치리에 대한 복종을 서약한 후에 인허를 받는다. 강도사가 4년간 강도하는데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에는 노회는 결의에 의하여 인허를 취소할 수 있다.
3. 목사 선교사 선거및 임직
목사는 신학 졸업 후 총회에서 시행하는 강도사 고시에 합격되어 1개년 이상 교역에 종사하고 노회 고시에 합격되고 청빙을 받은 자라야 한다. 지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당회의 결의로 공동 의회를 소집하고 임시 당회장이 강도한 후 공포하기를 교회에서 원하면 목사 청빙힐 일에 대하여 투표할 것이라고 그 의견을 물어 과반수가 찬성하면 즉시 투표한다.
투표하여 3분의 2가 찬성할지라도 반대하는 소수가 심히 반대하는 경우에는 회장은 교우에게 연기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가하다. 투표가 일치하든지 혹 거의 일치하든지 혹 대다수가 양보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회장은 합동하도록 권면한 후 규칙대로 청빙서를 작성하여 각 투표자로 서명 날인하게 하고 회장도 날인하여 공동 의회의 경과 정형을 명백히 기록하여(반대자의 수와 그 사람들의 형편도 자세히 기록한다) 청빙서와 함께 노회에 드린다. 단 청빙서는 투표자뿐 아니라 무흠 입교인 과반수의 날인을 요한다.
어느 목사나 강도사에게든지 청빙서를 드리면 그 교회가 원하는 줄로 인정할 것이고 그 목사나 강도사가 그 청빙서를 접수하면 승락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강도사가 청빙서를 받아 목사로 임직하게 될 경우에는 노회는 구애되는 것이 없으면 동시에 위임식까지 행한다. 목사 혹은 강도사가 노회를 경유하지 아니하고 직접 청빙서를 받지 못한다. 청빙할 때 조건이 변경되면 그 사유를 노회에 보고하되 반드시 정식으로 공개한 공동 의회를 경유한다.
노회는 청빙 받은 자가 성직을 받을만한 자격자인줄 확인하면 편의를 따라 임직식을 교회나 노회 당석에서 행하고 위임식은 그 시무할 교회에서 거행하되 그 교회 교인들은 이것을 위하여 기도로 준비를 할 것이다(행13:2-3).
임직식에 있어서는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 말씀임,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의 신종, 권징조례와 예배 모범의 승락, 주 안에서의 협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 진리 수호와 화평을 위한 도모, 교회 앞에서의 경건을 서약한다. 교회는 목사를 받아 섬기고 복종하기로 승락을 한다. 그 후에 노회의 대표자들이 안수하고 회장이 기도하고 악수례를 한다.
목사는 노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다른 지교회로 이전하지 못하고 직접 청빙서를 받지도 못한다. 목사직을 그만두게 되는 겨우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유 사면이다. 목사가 본 교회에 대하여 어려운 사정이 있어 사면원을 노회에 제출하면 노회는 그 사정을 알아보고 사면을 허락한다. 둘째는 권고사면이다. 지교회가 목사를 환영하지 아니하여 해약하고자 할 때는 노회가 목사과 교회 대표자의 설명을 들은 후에 처리한다. 셋쩨는 자유사직이다. 목사가 그 시무로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줄로 각오할 때는 사직원을 노회에 제출할 것이요 노회는 이를 협의 결정한다. 넷째는 권고 사직이다. 목사가 성직에 상당한 자격과 성적이 없든지 심신이 건강하고 또 사역할 곳이 있어도 5년간 무임으로 있으면 노회는 사직을 권고한다.
5. 여자의 교권 문제
사도 바울의 고전 14:33-34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조용히 하라”고 하는 말씀에 대한 해석이 각양 각색이다. 또한 딤전 2:12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에 대한 해석도 각양각색이다. 여권 신장을 주장하는 자들의 해석이 또한 다르다. 그러나 이 본문을 시대 사조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부분들이다.
여자에게 교권을 주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여자가 남자보다 뒤졌다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후에 지어졌는데 그녀는 협력자로 지어졌다. 협조자는 종속의 위치다. 둘째는 여자가 남자보다 교도의 재능이 결핍하기 때문이다. 하와가 아담보다 먼저 유혹과 죄에 빠진 것은 그것을 증명해 준다.
그런데 이것은 여자의 종교적 재능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여자가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교회 일을 협조하며 여러 종류의 교훈을 잘 할 수 있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자가 여러 방면으로 교회 일을 협조하며 여러 종류의 교훈하는 일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남녀를 총괄하는 전 교회에 대하여 법적 교권을 가지고 가르치며 치리하는 것은 성경의 질서에 위배된다. 그래서 목사직과 장로직과 기타 안수받아 임직되는 교직은 여자로서 받을 수 없으며 남녀가 공동회집한 예배석에서는 여자가 가르칠 수 없다. 드보라의 사건을 통상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런 것들은 비상 섭리다. 다른 말은 다 고사하고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여자는 없었고, 일곱 집사 중에도 없었다. 교회에서 남녀의 지위와 직무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비인도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