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통증과 고통
이 장에서는 통증과 고통의 경감이라는 주제를 다룰 것이다. 흔히들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둘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것이다. 또 몸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측면들 간의 관계도 살펴볼 것이다.
모든 병과 장애, 인간 삶의 문제들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것이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50년 넘게 내과의사로 일하면서 병의 신체적 측면을 이해하고,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정신적 요인들을, 의식과 영혼의 문제를 연구하고 경험하는 동안에는 영적인 차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영혼은 진정 무엇을 의미할까? 영혼은 단지 환상에 불과한 걸까?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실제적인 무엇일까?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나 쓸모 있는 것일까?
이 장에서는 급성통증과 만성적인 통증을 다루고 더욱 중요하게는 이 통증과 함께 하는 법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이야기할 문제는 두 가지다. 먼저 증상들을 다루는 구체적인 방법과 최면과 침술 같은 방법들이 통증의 완화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의식의 단계들과 이 단계들이 통증의 경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를 위해 의식지도를 다시 참조할 것이다. 이 지도에 수치로 표현한 에너지 단계들과 이것들의 상대적인 힘, 방향,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감정들과 의식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 이런 과정이 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미치는 영향, 신을 믿지 않을 때 문제를 푸는 방법이 모두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또 타인들은 물론이고 나도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통증의 임상적 예들을 소개하고 앞으로 설명할 기법들을 이용해서 이 통증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설명하겠다. 이 임상적 예들은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의식의 분명한 원칙들을 입증해준다. 특정한 예를 통해 배운 것을 다른 곳에도 적용할 수 있으므로, 여러분은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통증처럼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기는 것을 변화시키는 방법과 이 통증으로 오히려 덕을 보는 방법, 특정한 경험에서 얻은 지식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의식자체의 본질과 이런 본질이 우리의 삶에 전반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알아야 한다.
인간경험의 본질은 무엇일까?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하는 자리는 어디일까?
이 의문의 답을 풀려면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실제로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의심이 많고 실용주의자적인 내면을 갖고 있어서 과학자가 되었다. 그래서 실제로 효과가 있는 것에는 크게 감동을 받지만 가정이나 이론에 불과한 것에는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똑같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몸에는 자신을 경험하는 능력이 없음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모두들 몸이 곧 자신이라고, 자신의 몸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이런 말이 충격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몸을 어떻게 경험할까? 예를 들어 팔은 자신이 팔임을, 다리는 자신이 다리임을 경험하지 못한다. 몸 전체가 그렇듯이 이 부위들도 오감을 통해 경험된다. 우리는 몸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의 이 감각들은 어디서 경험될까? 감각을 경험하는 곳은 마음이다.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경험하지 못하고 몸에 대해 알려주는 오감도 느끼지 못한다. 몸에 대한 경험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다음으로 놀라운 점은 마음도 자신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각은 자신이 생각임을, 느낌도 자신이 느낌임을, 기억도 자신이 기억임을 경험하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면, 마음보다 더욱 큰 어떤 것 속에 있어야 한다.
더욱 큰 어떤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는 것은 의식 덕분이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내용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의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경험은 의식 속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벌어지는 일에 대한 자각이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한 예로 두뇌의 한 부위를 잘라내면, 정신의 이 부분도 더 이상 신체의 영역에서 작용하지 못한다. 잘라낸 부위가 감각을 담당하는 부분이면 몸의 한쪽을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두뇌를 통해 마음에서 경험된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을 제거하면 마음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마취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의식 자체도 훨씬 더 큰 영역에서 경험된다. 작은 영역은 언제나 이렇게 더욱 큰 영역에서 경험된다. 한층 더 큰 영역이 작은 영역의 경험을 포함하고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의식은 가장 큰 영역, 즉 자각도 포함하는 무한한 영역 안에서 경험된다.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각의 본질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이 의식의 본질이며, 오감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이 마음의 본질이고,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이 오감의 본질이다.
보통 이 모든 경험은 의식 안에서만 일어난다.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할 때 이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디서 이 의식을 경험할 수 있을까? 의식이 자리하는 분명한 장소가 있을까? 의식이 자리하는 특정한 공간이나 위치가 있을까?
의식은 특정한 공간이나 물리적인 영역,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이것도 분명하게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이다. 흔히들 “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경험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어디서 경험할까? 우리는 어디에서도 생각을 경험하지 않는다. 생각을 경험하는 특정한 공간이나 위치가 없다는 말이다.
의식의 본질은 특정한 형태가 없다는 것이다. 의식은 형태 없이 존재한다. 의식의 내용에는 형태가 있지만 의식 자체의 장은 특정한 자리가 없는 공간과 같다. 나중에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통증을 다루는 법을 이야기할 때 이점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다.
통증과 그 구체적인 감각, 이것에 대한 경험을 다루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신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가에 따라 통증이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통증과 고통은 별개의 것이다.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은 통증과 고통이 같다는 믿음체계다. 이런 믿음체계가 일련의 프로그램들을 심어놓기 때문이다. 통증과 고통은 별개의 것이다. 통증을 안고 있으면서도 통증에 완전히 무심할 수 있다. 몸에 통증이 있어도 최면에서 나타나는 것 같은 무통성 혹은 변성된 의식 상태로 인해 통증으로 인한 고통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끼거나 전혀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통증이 여전히 존재해도 통증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통증은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통증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증의 희생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통이나 모종의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고도 통증과 함께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함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통증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통증과 고통이 같은 것이라는 믿음체계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치과에 가면 반드시 통증을 경험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도 몇 년 전까지는 치과에 가기가 괴로웠다. 통증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분계점인 동통역치가 낮아서 언제나 치과진료를 연기했다. 스케일링을 받을 때도 마취를 해야만 했다. 통증에 그만큼 취약했던 것이다.
통증역치나 기꺼이 통증을 겪어 내겠다는 자세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몇 년 동안 영혼과 의식의 다양한 기법들을 배운 후 통증에 이것들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통증의 경험이 줄어들고 치과에 가서도 놀랍게도 극도의 괴로움 대신에 적정수준의 통증만 느끼게 되었다. 서서히 통증이 약해지더니 살짝 불편할 정도로만 느껴졌다. 지금은 치과에 가면 불편을 아예 느끼지도 않는다. 의자에 엉덩이를 잠깐 붙였는데 금세 치료가 끝나서 오히려 이렇게 소리친다. “벌써 다한 거에요? 이렇게 빨리 치료가 끝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이 장의 끝에서는 스스로를 위해 변성된 의식 상태를 이용하는 방법이나 영향을 받기 쉬운 공간에서 벗어나 변성된 의식 상태를 더욱 신속하게 익히는 법, 통증을 완화하는 법 등 자기암시의 일종인 자기 최면기법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 기법은 우리가 배운 것들을 더욱 강화시켜 줄 것이다. 또 자기최면기법이 어떻게 신속한 자기수양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도 설명할 것이다. 다음에 치과에 가기 전까지 이런 기법을 익힐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이것을 빠르게 익힐 방법도 몇 가지 소개하겠다.
가장 먼저 이야기할 것은 극심한 통증을 다루는 방법이다. 잘 돌아다니다가 발목이 갑자기 접질려 괴로운 통증에 시달릴 수 있다. 혹은 다리가 부러지거나 담낭이 갑자기 아프거나 콩팥산통이 일어나거나, 심장동맥 질환이 생길 수도 있다. 아니면 정강이 살갗이 벗겨지거나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 같은 일상적인 사고로 기절할 것처럼 통증에 시달리는 순간들도 있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급성통증과 만성적 통증을 포함한 다양한 병들을 다루는데 이용할 수 있는 기법을 설명하겠다.
뜨거운 물이 쏟아져 손을 데거나 난로에 화상을 입는 사고를 갑자기 당하면 물론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때 유용한 기법은 저항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려놓음이 주는 이득들과 우리의 마음이 흔히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비교해보자.
마음은 보통 고통을 예상하고 경험에 저항한다. “통증은 곧 고통을 의미해. 그러니까 난 통증에 저항할거야.”라는 프로그램이 이미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항하면 사라지리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점은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나가야 통증과 고통을 신속하게 덜 수 있다는 것이다. 항복하고 통증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 일상에서는 이런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까? 보통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이 흔히 사용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법을 적용해서 신속하게 치유된 몇 가지 임상적 예들을 이야기해주겠다.
저항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사건과 완전히 함께하면서 감각에 전적으로 순응한다는 의미다. 또 사건이나 감각에 일어날 수도 있는 생각들을 무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대신 감각을 즉시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이 감각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사고로 화상을 입었을 때 감각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으면 처음에는 통증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내려놓음의 문을 여는 순간 통증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통증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저항을 내려놓는다. “더, 더, 더 아파도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경험이든 그만큼의 통증이 있음을 알면, 이점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제 문을 열고 통증이 빨리 흘러나가게 한다. “통증과 함께 하는 것과 통증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는다. 생각은 전혀 도움이 안 되므로 무시한다. 그 대신 완전히 순응해서 통증을 경험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치 문이 열리면서 통증이 밀려들었다가 완전한 경험으로 통증이 곧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것이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내려놓아라하고 일맥상통하네요
제 인생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항할 수록 더욱 괴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보기 싫은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의 지속도 이와 다를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놔버려야 하는데...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더 내 딛으라는 선사들의 말씀...
나무아미타불
삶을 마감할 때는 그 의식세계까지 내려놓아야 합니다...나무아미타불...()()()..아니면 죽어서도 영가는 몸이 있고,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그리고 간절하게 일러주는 스님의 말씀에 '공'임을 깨닫고, 비로소 내려놓게 된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