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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큰물’에서 놀자. 관심이 ‘의미’를 만든다 [필링을 위한 힐링]
ysoo 추천 0 조회 76 16.06.18 23: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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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링을 위한 힐링] #71.


 ‘큰물’에서 놀자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


여느 사람에 비해 이런저런 면에서 비교 우위에 있는 사람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난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 재주를 발휘해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든 사람은 주로 지식이나 학문 등에서 우러러볼 만큼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일컫습니다.

된 사람은 사람 됨됨이, 즉 성품과 언행이 모든 이의 귀감이 되는 생활을 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요즘처럼 복잡다단한 세상에선 세 유형 가운데 어느 삶이 가장 바람직한가 하는 구분은 별 의미 없어 보입니다.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된 사람의 가치나 의미를 난 사람, 든 사람에 비해 더 바람직하게 여기는 시각이 있기는 하지요. 하루하루 내 몸 하나 추스르며 지내기 바쁜 보통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셋 중 무엇이건 죄다 ‘먼 나라’의 일들로 비칩니다. 또한 어느 한 축에라도 드는 삶을 일궈냈다면 그건 한편으로 ‘축복 받은 인생’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기계적인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너나없이 웬만큼 그 매뉴얼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다다르게 되는 성과에 불과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굳이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 하며 여느 사람의 삶과 차별화하거나 구분하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기계적인 매뉴얼이 아닌, 남다른 노력과 성찰에 따른 경지로 일반화되기에 이들 유형을 세상은 삶의 지표로 삼기도 합니다. 통상적인 정의만큼이나 이들 유형의 차이점은 분명하지만 공통분모라 할까, 이들을 아우르는 게 있습니다. 이른바 ‘큰물’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충고, 당부도 그 맥을 같이하는 말입니다.

예전엔 이 가르침을 그냥 ‘당연한 말씀, 좋은 말씀’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아, 누가 몰라서 안 하나.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은걸” 하며 그렇지 못한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개인적으로 버겁거나 거부감이 일지 않는다면 이것을 삶의 중심을 여기에 두는 것도 의미 있다 여깁니다. 이 속에서 개인적 성취나 사회적 성공을 얼마나 이룰 수 있느냐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배워나가는 자신의 노력 못지않게,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환경 또한 그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에.




워낙 복잡다단한 세상이다보니, 때로는 ‘큰물’보다 ‘작은물’이 더 나은 듯 말하기도 합니다. ‘큰물’에서 이리 휩쓸리고 저리 끌려다니느라 체력 소진하느니, ‘작은물’에서 갈피를 잡고 물길을 끌고 나가는 게 더 낫다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봐도, ‘큰물’에서 큰 고기가 나오고 ‘작은 물’에선 작은 고기가 자랍니다. “모름지기 큰물에서 놀아라”는 어른들의 훈계는 이런 세상 이치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겠지요.


비록 겉으로는 거창하지 않더라도 내 배움에 더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배움을 기대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큰물’로 여겨도 무난할 것입니다.

어떠하든 굳이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 따위가 아니어도 자신 삶의 환경으로서 ‘큰물’은 중요합니다. 도자기를 빚을 때 어느 도요(陶窯)에서 작업하느냐에 따라 자기(瓷器)가 되느냐 옹기(甕器)가 되느냐, 갈리듯이.





[필링을 위한 힐링] #70.


관심이 ‘의미’를 만든다




이른 아침, 그날도 늘 다니던 길을 따라 습관처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 시간 뒤쯤이면 오가는 사람들로 붐빌 길이지만 이 시각엔 한가합니다. 차량 출입이 안 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흔한 자전거조차 잘 다니지 않아 더욱 한갓진 길이 됩니다. 때 되면 오로지 오가는 보행자들로만 북적이는 곳. 상가도 없고 주택도 없습니다. 길 주변엔 오래된 나무들과 잘 가꿔진 화초들만 도열하듯 이어집니다.


길이 차분하니 눈이 편하고, 눈이 편하니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하루 중, 일상의 군더더기 같은 상념에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시간도 이때 맞이합니다. 비록 이른 아침, 그 시각 때에 불과한 ‘여유’지만, 매일처럼 짧게나마 누리는 나만의 ‘호사’인 양합니다.





이른 아침, 그날도 마찬가지였지요. 한갓진 상태는… 가려는 길 저만치에 한 여자가 가만히 서 있는 것 말고는 말이죠. 주변에 그녀 말고는 인적이 없었기에 차츰차츰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치기엔 괜스레 궁금증을 일으키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멀찌감치 눈에 띄었을 때부터 가까이 갈 때까지 그녀는 한 모습, 같은 자세였습니다. 꼼짝 않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입을 반쯤 벌린 상태도 변함없이.


매일 지나다녀 주변 풍광을 외우다시피한 터라, 뭐 새로울 게 없을 텐데 하면서도 그녀가 응시하는 쪽을 살폈습니다. 내친 김에 말도 건넸습니다.

“뭐, 있나보죠?”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나지막하게 읊조렸습니다.

 “저~어~기.”


그녀가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가리킨 ‘저기’엔 ‘별다른 게’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더 자랄지 알 수 없는 소나무들, 그 사이로 여백처럼 비어 있는 자리에 화사하게 피어난 철쭉들, 그리고 잘 다듬어놓은 키 작은 소철나무… 굳이 있다면, 그 빈틈에 자리 차지하고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 이른 아침부터 일광욕이라도 하는 양 꽤나 편안한 모양새였지요.





풍광은 뻔한 거고, 해서 이어붙인 말이 “아, 고양이를 좋아하시나봐요?”

“아니!”

여전히 눈길은 그대로 둔 채 그녀는 제 짐작의 오류를 일러주었습니다.

“그냥 보기 좋아서. 철쭉이랑 소철이랑, 그 속에 같이 어울린 고양이까지…”

“아! 네…”

알 듯 모를 듯, 더 이상 아침부터 ‘헛갈리기’ 싫어서 가던 길로 발걸음을 뗐습니다. 그러는데, 그녀의 말이 내 뒷발치에 걸렸습니다.

“관심을 가지면, 아무것도 아니던 것이 별 게 됩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닌 두 사람이 어느 한 날, 아침 시각에 짤막하게 나눈 ‘관심’.

그 덕에 초로의 그녀에게 인상 깊은 말을 ‘얻었습니다’. ‘관심을 갖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던 것이 별 게 된다.’ 길 가며, 김춘수 시인의 <꽃>이 자꾸 되새겨졌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 외부 필진 칼럼은 본 블로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상상

대기업 사보편집자로 사회생활을 시작, 좋은 선배와 동료들 덕분에 이 일에 재미를 들여 커뮤니케이션 업무 분야에서 오롯이 15년을 일했다. 지금은 잡지 등에 자유기고가로 글을 쓰며 그간의 경험과 이력을 반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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