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숨은 올스타] 때론 성적보다 성격…베어스 통역원의 ‘인간극장’
밥을 먹자면 양식이 가장 좋았던 때가 있습니다. 정갈한 일식이 최고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먹고 또 먹어도 물리지 않는 것은 역시 한국 음식이죠. 야구도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야구에 새벽 잠을 설쳐보고, 일본야구를 보느라 한국야구를 살짝 외면하기도 했지만, 마음까지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네 입맛이 그렇듯 다시 한국야구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뚝심과 근성 그리고 허슬까지…. 두산 베어스의 수식어에는 한국야구의 색채가 잘 녹아있습니다. 한국의 맛을 가장 잘 내는 팀 두산의 야구를 한꺼풀씩 벗겨보고자 합니다.
*7월 14일~15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에서 2017 타이어뱅크 KBO 올스타전이 열릴 예정입니다. 10구단 칼럼에서는 올스타전에 출전은 못하지만 이번 시즌 다양한 영역에서 구단에 기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숨은 올스타’로 소개를 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두산 통역원 김용환씨가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 뒤 외국인투수 더스틴 니퍼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스포츠경향 안승호 기자] 요즘 말로는 ‘야알못(야구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미국프로야구 시애틀 매리너스 홈구장 세이프코필드 인근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야구장을 찾았던 것은 한두 차례 뿐이었다. 그것도 관중석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즐긴 기억만으로 남아있다.
더구나 중학교 2년 재학중 미국으로 이민을 간 터여서 한국프로야구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게 없었다. 두산 선수라고 해봐야 김현수와 홍성흔 정도의 이름만 알고 있을뿐 그들의 야구선수로서 특장점은 물론 포지션조차 깜깜했다.
김용환씨(34)가 두산 베어스 통역원으로 일하게 된 것도 사실 우연이었다. 전공인 검퓨터공학 관련 회사에서 일하던 2013년 말, 개인사정으로 미국을 떠나 한국에 들어와있던 중 대학 동기이기도 했던 두산 베어스 직원(남현 대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새 시즌 애리조나에서 스프링캠프를 하는데 한달만 통역을 해줄 수 있냐”는 얘기였다. “유명 선수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잠시 귀가 솔깃하기도 했지만 그때만 해도 유명 선수를 분간할 지식이 없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한달을 보낸 뒤 계약 만료일. 김씨는 어느새 인간적으로 친해진 이현승과 정재훈 등과 작별하며 “이제 나도 두산 팬이 되겠다”고 훗날을 기약했다. 그런데 이틀 뒤 두산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일본 미야자키 캠프에 합류가 가능하냐는 물음이었다. 김씨는 미국 이민 전 7살 때부터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유도를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일본에서 생활한 이력이 있다. 당시 두산 사령탑이 바로 재일교포 출신인 송일수 감독이었다. 일본인 코치까지 합류해있던 상황에서 영어에 일어까지 능통한 김씨가 적임자로 급부상한 것이었다. 그렇게 김씨는 베어스의 가족이 됐다.
■초심이 된, 볼스테드의 눈물
입사 첫해인 2014년 처음 만난 외국인투수 크리스 볼스테드는 정말 착했다. 그런데 마운드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김씨는 “볼스테드는 성실한 데다 한국 문화도 진심으로 존중했다. 그래서 여름에 떠날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눈물을 펑펑 쏟았다"며 "그때 인연으로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볼스테드는 키 207㎝의 장신 용병으로 기존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와 ‘트위 타워’를 꾸릴 것으로 기대됐으나 5승7패 평균자책 6.21을 기록하고 퇴출됐다.퇴출 전, 답답해하던 볼스테드와 따로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가볍게 반주도 곁들였다. 그때의 볼스테드는 외국인선수 아닌 오랜 친구 같았다. 볼스테드는 자리가 무르익자 “내가 이런 얘기까지 해야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가족은 나만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도 부양해야 하고 동생 대학도 보내야한다. 나도 정말 잘 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적어도 있는 힘껏 하고 있다느 얘기를 하고픈 것이었다. 사실, 당시 볼스테드는 ‘투구 습관’이 잡혀 집중타를 맞는 측면이 있었다. 그로 인해 한계에 부딪혔다.
김씨는 볼스테드에게 퇴출 얘기를 전하는 임무도 받았다. 그런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다른 직원한테 부탁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김씨는 “작별하려니 눈물이 나와 오래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볼스테드가 오히려 내게 다가와 등을 두드려주며 ‘괜찮다’며 위로해줬다. 그 뒤로 외국인선수가 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먼 나라에 와서 대화할 사람이 나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환씨가 외국인선수 보우덴(가운데), 에반스와 함께 식사하고 있다.
■만능 해결사…통역원은 바쁘다
외국인선수 누구라도 급한 일이 생기면, 담당 통역원이 우선 떠오를 수밖에 없다.
외국인선수로부터 상상 밖의 전화를 받는 경우도 있다. 몇해 전 한 외국인선수로부터는 ‘집 화장실 변기가 막혀있다’는 전화를 받고 해결사로 달려가 막힌 곳을 뻥 뚫고 오기도 했다. 또 다른 한 선수로부터는 ‘윗층 소음 때문에 힘들다’며 항의를 해달라는 전화를 받고 해당 호를 방문해 전후사정을 설명하며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야구선수의 컨디션 관리는 가정생활로부터 나온다. 그러다 보니 생활 관련 요청도 때로는 해결해줘야한다. 먼 나라로 날아온 외국인선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성심껏 할 수 있는 일이다.
더스틴 니퍼트와 마이클 보우덴, 닉 에반스 등 외국인선수 셋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지난해 이후로는 종종 함께 식사를 한다. 원정경기를 하자면 해당 지역별로 잘 가는 ‘단골집’이 있다. 부산 원정을 가면 ㄴ호텔 인근 ㄷ 돼지갈비 집을 자주 간다. 광주 원정을 가면 한 삼겹삽 집을 즐겨 간다.
그런데 외국인선수들은 불판을 가운데 두고 수시로 뒤집기를 해야하는 한국식 고기 굽기에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 ‘희생’을 해야한다. 그 ‘누군가’는 언제나 김씨가 된다. 김씨는 고깃집에 가면 선발투수처럼 집게와 가위를 들게 된다. 어떤 날은, 20분 가까이 고기를 구으며 한점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의도하지 않아도, 인간 본능에서 피어나는 애처로운 눈빛을 선수들에게 보내게 된다.
그때 가장 바쁘게 반응하는 선수가 바로 ‘맏형’ 니퍼트다. 김씨는 “니퍼트가 먹다가 미안한지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는데 받아먹으면서 웃음이 나다”며 “살짝 서운하기도 하지만, 쌈을 씹으면 그런 마음이 싹 녹아내린다. ‘맛있다’는 뜻으로 미소로 살짝 답하기도 한다”고 웃었다.

김용환씨가 에반스와 식사하고 있다. 오른쪽은 전력분석팀 김영재씨.
■외국인선수와 친구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 외국인선수와 통역원간 끈끈함이 생긴다. 김용환씨는 지난해 9월초, 서울 삼성동 숙소에 사는 에반스의 초대를 받았다. 에반스의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였다. 김씨의 아내 역시 먼 나라로 출장을 떠난 날이었다.
에반스는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스테이크를 함께 먹은 뒤 집까지 가자고 해 따라올라갔다. 그런데 에반스가 불쑥 반바지와 짧은 티셔츠를 꺼내와 김씨에게 내밀었다. “갈아 입은라”는 것이었다. 김씨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에반스의 의도를 알아채고 감동을 받았다.
에반스는 김씨에게 생일 선물을 하고 싶어했다. 나름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한 것도, 건물 아래쪽 스포츠마사지샵에서 함께 피로를 풀자는 뜻에서였다. 김씨는 “따라가보니 마사지샵인데 나란히 누워 커플 마사지를 받았다”며 “식사나 함께 하자는 마음으로 갔는데, 세심하게 신경써주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고마웠다. 곁에서 지내다 보면 그렇게 마음을 주고 받게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에반스의 한글 선생님이기도 하다. 에반스는 요즘 길거리 간판을 읽고 다닌다. "예를 들면 '비빔면'이나 뭐냐고 띄엄띄엄 물으면 그 뜻을 설명해준다. 에반스는 한글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웃었다.
■때로는 ‘119’처럼 달린다
통역원의 역할은, 의사 소통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대한 마음 편히 운동에 전념하도록 도울 수 있다면 통역원 입장에서는 팀공헌도를 높일 수 있다. 지난해부터 함께 하고 있는 외국인투수 마이클 보우덴은 아이들에게 섬세하게 신경을 쓰는 편이다. 지난해에는 세살배기인 쌍둥이가 자주 아파 병원 가는 일이 잦은 탓이기도 했다. 서울의 미세먼지 때문인지 이란성 쌍둥이 중 아들인 마이카와 딸 나디아는 감기에 자주 걸렸다.
아이들을 보살펴야할, 보우덴의 아내 입장에서 기댈 언덕이라면 한국 사정을 잘 아는 통역원이었다. 김용환씨는 쌍둥이가 아프다 싶으면 병원으로 동행했다. 그리고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외국인이 찾기 좋은 병원도 찾아냈다. 영어로 의사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병원이다.
김씨는 “아무래도 전문 용어는 정확한 의미 전달이 어려울 때가 있다. 영어 사용이 가능한 병원이다 보니 만족도가 높았다”고 말했다.
그 뒤로 보우덴의 집에서 김씨는 인기 1위의 한국인이 됐다. 특히 보우덴의 아내에게 점수를 많이 땄다. 아내는 틈만 나면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 뒤로 보우덴이 잠실구장으로 나오는 길이면 도시락이 하나 따라 나왔다. 김씨 앞으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김씨는 “쿠키가 맛있다고 했더니 몇 차례 더 쿠키를 보내왔다.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마음을 표현하려는 게 느껴졌다. 이제 맛있다는 말도 조심스럽다”며 웃었다.

김용환씨(가운데)가 니퍼트와 시간을 보내던 중 찍은 사진. 왼쪽은 두산 구단 사진을 제공하는 신주영씨.
■니퍼트는, 니선배 또는 퍼트형
역시 두산 외국인선수 가운데 으뜸은, 2011년 입단 이후 벌써 7년째를 맞고 있는 더스틴 니퍼트. 김용환씨는 “솔직히 니퍼트는 대하기 조금 어렵다”고 했다. 니퍼트 스스로 보통의 외국인선수와는 다른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니퍼트는 두산 유니폼을 오랜 시간 입으며 한국식 형·동생이나 선후배 문화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니퍼트는 김씨보다 2살이 많다. 스스로 형이라고 생각하고 김씨를 대한다.
김씨는 “나는 ‘니선배’ 또는 ‘퍼트형’이라고 부르고, 니선배는 나를 ‘용(yong)’이라고 부른다. 선후배 관계 비슷하게 됐다. 다른 외국인선수를 대할 때처럼 미국식 마인드로 접근하면 혼난다”고 했다.
실제 니퍼트는 두산 투수진의 리더가 돼있다. 후배투수를 불러놓고 조언을 하는 등 보통의 토종 베테랑 투수 모습과 다름 없다.
두산 통역으로 니퍼트 얘기를 하자니 참 할 많이 많은 모양. ‘일복’도 니퍼트로부터 나온다. 니퍼트는 지난해 22승을 올리는 등 투수 3관왕으로 시즌 최우수선수(MVP)이 됐다. 인터뷰도 참 많이 했다.
김씨는 지난해 한국시리즈 1차전 뒤 공식 인터뷰 장에서 니퍼트의 말을 받아적어놓고 전달하는 장면이 영상으로 나가며 따라붙은 인터넷상 반응을 흥미로워했다. “외국인선수들이 잘 해 인터뷰가 잦다 보니 어느 댓글에 ‘두산 통역은 극한직업’이라는 말이 붙어있어 재미있었다”며 “더욱 극해져도 좋으니 외국인선수들이 잘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는 니퍼트가 통산 87승으로 100승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도 언급했다. “신명나게 인터뷰할 마음의 준비는 벌써 돼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