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65)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吾漢氏之甥
나는 한나라의 생질이다.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지역별로 당선자의 소속을 지도에 그려서 표시하였는데 동쪽은 국민의 힘을 표시하는 붉은색이었고, 서쪽은 더불어민주당을 표시하는 푸른색이었다. 동·서로 양분된 느낌을 받아 가뜩이나 남북으로 쪼개진 마당에 다시 동서로 나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섬뜩한 것은 나 하나만의 느낌은 아닐 터였다.
구체적으로는 야권은 192석, 여당은 108석으로 결정되어 84석을 더 많이 차지한 야권의 대승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체 투표를 보면 여당이 45.1%이고, 민주당이 50.5%였으니 두 당의 격차는 5.4%에 불과하였다. 거대양당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의 표 4.4%를 민주당에 다 준다고 해도 54.9%여서 국민의 힘과의 격차는 불과 9.8%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으로 당선자를 84명이나 갖게 되었으니 전체 의석수로 대비해 보면 이 9.8%의 몫이 28석이다. 그러니 이 9.8%에 해당하는 표의 가치는 보통 투표 가치보다 3배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 9.8%가 여야 승패의 캐스팅보트를 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도 있었다. 현재 야당이 0.73%를 져서 대통령 자리를 내 주었는데,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40년 전 박정희와 김대중 시대에도 이와 비슷하였으니 우리나라 선거란 여야가 줄곧 이 10%를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이었고, 이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다.
사실 이처럼 막상막하의 두 세력이 선의(善意)의 경쟁을 한다면 경쟁적으로 잘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나라가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워낙 치열하다 보니 조금만 부정하면 판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부정선거의 유혹받는다. 그래서 선거법이 정한 규칙은 스포츠 경기처럼 엄격하여야 하고, 이를 심판하는 심판관의 자질이 높아야 한다. 그래서 선거를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여 나라에 이바지하게 할 책임은 입후보자가 아니라 관리자와 심판관인 선거관리위원회와 법원의 관리와 심판에 달려 있다고 해도 된다.
그렇다면 그동안 선거의 관리와 심판 기능은 제대로 작동했을까? 지난 번 선거에서 당선자 중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람으로 임기를 거의 다 채운 시점에야 결론이 나서 물러난 사람, 심지어 임기가 다 끝나도 아직 결론을 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러하니 후에 제대로 판결이 내려진다 해도 판결문은 그냥 의미 없는 공문(空文)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래서 심판관인 사법부를 믿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중립적이어야 할 경찰, 검사, 판사가 옷을 벗고 바로 입후보하여 심판이 선수가 된 셈이니 이들이 과거에 중립적으로 일을 처리했을지 의심하게 된다.
이번에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과 경찰에서 입건한 수가 2,000명을 훌쩍 넘겼다는데, 혐의는 ‘허위 사실’이 제일 많고 역대 가장 많은 수라고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난번에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도 임기를 다 마칠 수 있었으니 심판관은 큰 의미 없는 장식품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심판은 외로우며, 공정한 판결을 위하여서 높은 교양과 철학, 도덕성이 필요하다. 높은 교양과 철학, 도덕성은 교육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일제 수탈기를 이어받았고, 뒤이어 북한의 남침으로 3년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당장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기에 교육에서는 어떻게 돈을 벌 것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 철학과 도덕, 교양교육은 구색 갖추기였다. 이른바 머리 좋다는 사람 가운데 대다수가 경영대, 공대, 의대, 약대, 법대로 몰려갔고, 큰 안목으로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교육인 문학, 역사, 철학은 뒷전이었다. 이러한 교육 분위기 속에서 교육받았던 판사인들 얼마나 인간과 사회를 이해할까?
제대로 된 인문학적 교양이 없어서, 심한 표현을 쓰자면 인간과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들은 인간과 사회를 놓고 결단해야 하는 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 판단에는 개인 취향에 따라 얻어진 편향적이고 부분적 지식을 전체로 착각하면서 인간과 사회를 평가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하면 편향된 판단을 하면서도 그것이 편향된 것인지도 모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무지(無知)와 무양심(無良心)은 좀 전까지 심판 자리에 있던 판사와 준 심판 자리에 있던 검사와 경찰이 제복을 벗고 바로 선수로 입후보하여 어느 한쪽 편에 속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얼굴을 드는 데서 짐작된다. 그리고 이 숫자는 지난번보다 더 많다는 것으로 현재 심판을 맡은 사람들 가운데는 여전히 양심 없이 제복을 벗고 바로 나온 사람과 비슷한 사람이 있으리라 추측된다. 사실 공정하지 않은 심판관이 섞여 있으면 규칙은 장식품이거나 심하면 경기의 흐름을 왜곡시킨다.
역사에서도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이른바 모충(冒充)하는 일, 즉 시쳇말로 ‘허위사실’을 주장하는 일이 많다. 서기 304년에 유연(劉淵)이 한(漢, 후에 趙로 바꾼 前趙)을 세운다. 그런데 유연은 흉노의 도각부(屠各部) 출신이고, 그의 어머니도 호연씨(呼延氏)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흉노족이다. 그런데 후한과 촉한이 망하고 사마씨의 진(晉)이 건립되자 거기에서 벼슬을 하면서 세력을 키우더니 왕조를 세운다. 그런데 그는 흉노국을 세운다 하지 않고, 나는 한(漢)나라의 생질(甥姪)이니 외가의 한왕조를 재건해야겠다고 하며 한(漢)을 세운다. 한 유방 시절에 한의 공주와 흉노의 선우(單于)가 통혼하였으니 한은 자기의 외가(外家)라는 것이다.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족(漢族)을 모충(冒充)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수(隋)왕조를 건국한 양견(楊堅)은 선비족(鮮卑族)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보육여견(普六茹堅)이고 자(字)는 나라연(那羅延, nārāyaṇa)인데 중원을 쉽게 삼키려고 원래의 성(姓)인 보육여를 양(楊)으로 바꾼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한족(漢族)이 아닌데, 한족 성으로 모충한 것이다. 또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은 수문제 양견의 황후인 독고가라(獨孤伽羅)의 생질(甥姪)이니 그의 외가는 선비족이 분명하다. 이연 본인에 대하여서는 일반적으로 흉노와 한인의 혼혈로 보지만, 유반수(劉盼遂)나 왕동령(王桐齡) 같은 사람은 탁발씨(拓拔氏)의 후예로 보니 이연은 이씨(李氏)를 모충(冒充)한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모두 한족 통치를 쉽게 하려고 혈통을 속여 한족(漢族)이라 속인 것이다.
역사의 심판자라 할 역사가는 직필(直筆)을 사명으로 하기에 아무리 숨기려 했다고 하여도 이처럼 밝혀내고 속지 말라 한다. 이번 선거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담당하는 판사도 지난번 선거재판처럼 질질 끌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편파적 판결, 질질 끄는 판결은 바로 힘자랑이다. 재판하는 엄중한 자리에 있으면서 재판을 질질 끄는 힘자랑을 해 본들 몇 년이나 할 수 있겠는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으니 그런 판사의 힘자랑도 10년 지나면 끝날 것이고, 그 후로 1백 년, 1천 년 동안 역사의 심판을 받아 편파적 판결을 했다는 오욕(汚辱)을 받을 것이고, 그 후손은 간접적으로 선조(先祖)의 오욕을 뒤집어쓰고 살터이니, 대대로 내려가면서 후손 지신은 아무 잘 못한 게 없는 데도 이 천형(天刑)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이번만은 법 규정대로 6개월 안에 심판을 끝내어서 2024년도의 사법부의 판단은 공정하였고, 엄격하였으며 추상같아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지켜 준 기둥이 되었다는 칭송을 듣기 바란다. 역사책에 기록된 한 줄의 칭찬은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한 마디의 폄론(貶論)을 받는 것은 목에 부월(斧銊)을 댄 것처럼 무섭다는 옛사람의 말을 새겨 봄 직하다.
첫댓글 매달 1일에 게재되는 원고인데, 미리 올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꾸준히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총선에서 씀쓸한 것은 바람따라 투표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바람은 태풍과도 같습니다. 이에는 후보자의 잘잘못에 대한 구분이 없이 마구 휩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무엇인 지를 물을 필요가 있는 가요? 많은 사람이 역사는 지나간 옛 자료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굴러갈 지 걱정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교훈적인 역사를 중단없이 강조하여 많은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으니 권교수님의 집념과 노력에 경탄할 뿐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4.20 00:28
시대가 바뀐다는 것은 혁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법이 활개를 친다는 말은 과거의 법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같다는 것이지요. 좋던 싫던 시대가 바뀐 것입니다. 총을 든 혁명이 아니라 중우정치, 선동정치를 통한 혁명 같은 것이지요. 그것은 박근혜 탄핵 데모때부터 그 싹을 보았고, 이러한 혁명은 바라지 않지만 사회가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입니다.역사에서 중세적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민주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우리 사회의 이러한 변화를 역사가는 시대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 가는 것ㅇ라고 보아야 하나요?
중우정치, 선동정치가 주류를 이룬 것은 모택동과 장개석의 싸움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장개석은 모택동의 중우정치, 선동정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장개석은 공산주의 혁명방법을 너무 모른 것입니다. 이건일 교수의 모택동vs장개석의 일독을 권합니다. 중국에서 모택동은 그것으로 1949년에 공산정권을 수립했는데, 지금 2020년대에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이러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중국보다 우리가 잘 산다고 하지만 80년 전 중국의 상황을 따라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요? 대중은 몰라서 지식인은 알아야 하는데....국민의 힘은 꼭 장개석 정권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질 수 밖에 없지요. 지금이라도 깨닫고 전략을 세울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백전백패일 것입니다.
대파를 흔들면서 대통령의 말을 거꾸로 해석하며 선동하였지요. 윤석열대툥령은 대파 한단의 값이 780원이어야 합리적이라고 한 말을 대통령은 물가를 너무 몰라 3000원하는 대파를 780이라고 한다고 선동했지요. 이 선동이 얼마나 먹혔을까요? 모택동의 전략이 그대로 재현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한둘이 아니었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경제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인구가 절감되어 한국 문명이 살아진 대요. 우리는 침몰하는 배에 탄 세대입니다.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권 교수님의 뜻을 지지합니다. 역사학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