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가 이만큼 발전한 이면에는 재벌그룹들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88서울 올림픽’ 유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다. 정 회장은 당시 현대그룹의 모든 역량을 동원, 정부와 함께 유치에 나섰다. 경쟁상대는 일본의 나고야였다. 1980년대 초반 한국의 위상은 초라할 대로 초라한 상태였다. 남북 분단과 연일 일어나는 데모 등으로 치안도 어수선해 절대 불리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당당히 올림픽 주최국이 되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고, 국민의 삶과 질도 한층 상승됐다. 재벌들이 스포츠에 직간접으로 투자에 나선 것은 권위주의 정부시절 실권자들의 권유에 의한 것 또한 숨김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재벌 총수들은 스포츠를 통해 기업 브랜드를 높이고 해외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축구협회장을 한동안 역임했다. 80년대만 해도 동구라파와 중국 등 제3세계는 대부분 한국과 미수교국인 상태였다.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처지였다. 이때 김 회장은 축구협회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동구와 아프리카 중국 소련 등을 드나들었다. 대우그룹이 제3세계에서 한발 빠른 교두보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스포츠 마케팅의 결과나 다름없다. 그러나 IMF때 대우그룹이 패망하면서 선점했던 동구라파의 거점도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정주영 회장은 작은 공을 싫어한 것으로 유명했다. 80년대 초반 프로야구가 창단될 때 한국 최고 재벌인 현대그룹이 참여하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축구와 배구 농구 등의 구단은 있어도 탁구와 야구와 같은 작은 공을 갖고 하는 스포츠 구단은 없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2세인 정몽헌 회장이 현대야구단을 창단하면서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정몽구 회장은 해태타이거즈(현 기아)를 인수, 작은 공 배제 원칙이 깨지고 말았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6년 6월 21일 오후 성남상무체육관을 시찰한 자리에서 삼성그룹 부회장인 이건희 레슬링협회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레슬링 사랑은 잘 알려진 일이다. 학생 때 레슬링 선수를 할만큼 매니아이다. 올림픽에서 한국 레슬링이 맹위를 떨친 이면에는 삼성그룹의 든든한 재정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회장은 또한 빙상에 관심을 가져 삼성그룹에서 빙상 종목에 대규모 투자를 하도록 했다. 이 결과 피겨스케이팅은 이미 세계 최정상에 올랐고, 스피드 스케이팅마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스포츠 사랑이 이 회장을 IOC위원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2012년 런던올림픽 유도대표팀의 왕기춘이 런던의 엑셀 런던에 위치한 올림픽 유도 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73kg급 동메달 결정전에서 우고 르그랑(프랑스)과 대결하는 가운데, 박용성 대한체육회장(뒷줄 흰옷)이 관계자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도 탁구사랑이 남달랐다. 한때 한국 탁구가 세계 제패를 하는 등 승승장구할 때가 최 회장이 탁구협회 회장 시절이다. 탁구계에선 지금도 최 회장의 헌신을 숭모하고 있다. 박용성 두산 회장은 유도회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공헌을 배경으로 IOC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현대차 그룹 정몽구 회장은 양궁에 온 정열을 쏟았다. 한국 양궁이 이처럼 세계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정 회장의 헌신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88서울올림픽 때부터 양궁협회장을 맡은 정 회장은 물심양면으로 양궁을 후원, 오늘의 한국 양궁을 만들어낸 숨은 주역이다. 현재는 2세인 정의선 부회장이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1996년 8월 4일(현지시간) 열린 애틀랜타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복싱 시상식에서 세계복싱연맹의 김승연 부회장이 은메달을 차지한 한국의 이승배(25) 선수에게 메달을 수여한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스포츠 사랑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투어 복싱연맹 회장을 직접 맡을 정도로 복싱매니아다. 또 최근에는 승마에도 관심을 가져 한동안 한화그룹에서 승마를 후원하기도 했다. 둘째 아들이 국가 대표 승마선수로 아시안게임에 참가, 금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보이기도 했다. 김 회장의 지나친 자식 사랑이 때로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지난 인천 아시안게임 승마 경기장에 아들의 경기를 보려고 운동장을 찾았다가 한동안 일반인들에게 회자되기도 했다. 불과 몇 달전 재판을 받을 때만해도 앰뷸런스를 타고 법정에 들어가는 모습이 비쳐졌는데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몽준 전의원은 축구를 매우 좋아한다. 축구협회장으로 오래 재직하며 국제 스포츠계에도 거물로 통한다. 지금도 90분을 풀타임으로 뛸 만큼 축구에 열정적이다. 현재의 축구협회는 사촌 동생인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맡고 있다. 얼마전 타계한 코오롱 그룹의 이동찬 명예회장은 마라톤에 정열을 쏟았다. 한때 한국 마라톤이 세계를 제패한 이면에는 이 회장과 코오롱 그룹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이 2008년 9월 24일 국회 잔디구장에서 열린 피스스타컵 올스타팀과의 친선 축구대회에서 한나라당 황영철 의원의 패스를 받고 있다.
재벌총수들이 스포츠에 투자하면서 한국의 엘리트 체육이 엄청나게 발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도 있다. 현 재벌 2세 총수 중 체육특기생으로 K대에 입학한 사람도 여럿 있다. H그룹 창업주의 조카는 요트선수로 K대에 입학하기로 결정됐는데 한 일간지의 보도로 무산돼 유학으로 방향을 전환한 케이스다. 재벌가의 자식들이 유독 K대 출신이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도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벌그룹들이 1년에 스포츠에 투자하는 금액은 무려 4천억원이 넘는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이 있는 해는 투자금액이 더 불어난다. 현재 재벌그룹에서 갖고 있는 스포츠 구단은 전체의 50%에 달할 만큼 절대적이다. 재벌과 스포츠는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증명하는 수치다. 어쩌면 스포츠를 통한 부의 사회 환원을 하고 있는 셈인지 모른다. 그러나 재벌그룹들이 엘리트 스포츠에만 너무 치중한다는 사실은 음미해 봐야할 대목이다. 비인기종목이나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생활체육에도 더 많은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