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후원한' 교회의 변질된 모습이 신자들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교세를 퇴보시킨 게 아니라, 교회는 그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몸부림쳤던 것이다"라고 하면서, 노기남 대주교로 상징되는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의 친일행적에 대해 "일제의 폭압 아래서" 교회를 유지 온존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하소연이 다시 터져나왔다.
지난 10월 15일 명동성당 코스트홀에서 열린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주최한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 심포지엄에서 나온 말이다. 이날 쟁점이 되었던 노기남 대주교의 일 식민지시대 말기 행적에 대한 발제에서 이장우 연구실장(한국교회사연구소)은 발제 서두에 <경향신문>과 최석우 몬시뇰(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 말을 빌어, 노기남 대주교를 "한국인 주교로 한국 가톨릭 자립화와 토착화의 기틀을 다진 한국 가톨릭의 대부"라고 소개하며, 이게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적합한 평가"라고 밝혔다.
덧붙여 이장우 실장은 노기남 대주교는 "단순히 '많은 사제들 가운데 한 명의 사제'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회를 상징하고, 더 나아가 식민 조선인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매김되면서 고난과 오욕이 자욱한 역사의 행로 한가운데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고 칭송했다.
노기남 대주교, '민족'을 절대적 판단잣대로 보면 안돼.. 천주교회 입장에서도 봐야
그럼에도 한국사회 안에서 노기남 대주교를 "당위론(當爲論)이나 시비론(是非論)의 입장에서" 다루고, 심지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노 주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것은 "하나같이 '민족'을 절대시하여 '도덕적 심판의 준거이자 역사적 판단의 잣대'로 삼았던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비판하며, '일제'라는 외부의 강압과 간섭과 통제 아래서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지켜나고자 어떻게 반응했는지 "당시 천주교회의 입장"에서 살피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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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우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
이장우 실장에 따르면, 1942년 12월 10일 노기남 대주교의 서품식 때, 노기남 대주교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추측했다. 이어 <대조봉대(大詔奉戴)와 교구장 취임에 제하야>라는 노기남 대주교의 서품식 답사에서, 노 주교가 "이제 우리 손으로 우리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신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협력하야 무언복종하라."고 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아무런 말 없이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히면서, "이처럼 표면상으로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따를 것을 천명하였고, 교구장으로 착좌한 직후에는 미나미 지로 총독과 경기도지사, 헌병 사령관을 차례로 찾아가서 굴욕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취임인사"를 한 것은 "그들이 천주교회에 위해를 가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한편 이장우 실장은 조선총독부의 천주교회에 대한 강압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1942년 서울교구에 프랑스인 대신 일본인 교구장을 앉히려던 조선총독부가 노기남 대주교의 교구장 임명 사실을 알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으며, 천주교회를 압박하기 위해 미인가 상태로 있던 용산신학교를 폐쇄한 사례를 들었다. 또한 노기남 대주교가 군대용으로 징발하려던 대신학교 건물을 일제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대신학교 건물에 재빨리 성모병원 분원을 개원한 사실을 들어 "이처럼 노기남 대주교는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마냥 순응하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강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천주교회의 존속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묘책을 짜내고, 차선책이라도 찾아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조선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다"고 변명했다.
교회 정체성 유지 위해 일제에 순응했다고..
그러나 이장우 실장의 발제에 앞서 발표한 같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양인성 연구원이 '노기남 신부의 경성대목구장 착좌에 관한 연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원 라리보 주교 대신에 서둘러 한국인인 노기남 신부를 교구장으로 임명한 것 역시, 본방인 성직자를 양성해 자치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제1 목적에 따른 것이며, 일본인보다 파리외방전교회에 호의적인 한국인 신부를 선택한 것이고, 한국인 신부들과 신자들의 반발을 고려한 결정이었음을 감안할 때, 일제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치였다. 또한 노기남 대주교와 교회의 관심사는 오로지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뿐 아니라 발전"시키는 것이며, 이 차원에서 대신학교 역시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할뿐, 나머지 영역에서는 철저히 일제 순응적 태도를 유지했음에도, 이장우 실장은 이를 두고 "교회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로 간주하고 있다. 여기서 교회 정체성이란 교회정신이나 복음과는 상관없이 교회체제와 재산을 유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인지 의문이 든다.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장우 실장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국체'(國體)를 부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죽음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파괴를 각오하지 않는 한 그렇게 할수 없었을 것"이라고 변호했다.
조선 천주교회는 1926년 11월 15일 <천주교요리>를 공식문답으로 반포하여 신사참배 불가를 공식 선언하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국체명징'(國體明徵)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에서도 신사참배가 본격적으로 강요되면서 1935년 연례교구장 회의에서 신사참배를 허용키로 하고, 1936년 4월 <경향잡지>를 통해 신사참배를 공식 허용했다. 그해 5월 26일에는 신사참배는 종교행사가 아니라 애국적 행사이므로 허용한다는 포교성 훈련이 발표되고, 6월 12일에는 <한국교회 공동지도서>의 내용을 수정해 신사참배를 허용했다.
신사참배 허용, 풍전등화 위기 속 현실적인 타협일 뿐
한편 신사참배 허용은 일제에 대한 투항과 친일을 약속하는 상징적 행위였으며, 조선 총독부의 신사(神社)정책을 수용하면서 천주교회는 그 정체성을 상실해 갔다는 윤선자 교수 등의 지적에 대해, 이장우 실장은 "과연 그 당시 현실 속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할 힘이나 명분이 있었을까" 물으며 "만일 이를 거부한다면, 교회의 존립은 순식간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그런 까닭에 '애국'을 내세운 국가의례일 뿐이라는 일본 정부의 명분을 받아들여 현실적인 차원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으리라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어 천주교회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여서 '교회의 정체성'이 상실되어 간 것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며, 오히려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봐야 하며, "그렇다 하더라도 신사참배가 과연 그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얼마나 상실시켰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 했다. 사실 별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말미에 이장우 실장은 신사참배 허용 문제를 그 무렵 사실상 허용된 조상제사 문제와 연결시켜, 이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니냐는 뉘앙스를 풍겼다.
이어 이장우 실장은 노기남 대주교 등이 일제의 경찰과 충돌을 피하고 종교행사를 순조롭게 치르기 위해, 불가피하게 먼저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경찰서장이니 군수를 예방하고, 국민의례를 하고, 황국신민화 운동에 대한 훈화라는 "귀찮고 까다로운, 또 마음에 없는 형식적 절차"를 거쳤으며, 노기남 대주교는 일본말을 못해서 동성상업고 교장이던 장면이 대신해 주었다는 말과 함께 "비록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로 그들의 황국신민화정책에 표면상으로는 충실히 부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진정한 협력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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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천주교회>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60명 여명의 참석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제를 이어갔다. (사진/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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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총독부의 전시동원체제에서 천주교회는 1939년 5월 14일 종교단체로서는 가장 먼저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조직했으며, 노기남 신부(당시 종현[명동]성당 보좌)는 이사장인 원 라리보 주교를 대신해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서울교구의 40여 개 본당을 순회하며 시국강연을 했지만 "천주교회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모든 종교단체가 총독부의 강압적인 총동원정책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종교가 일제에 협력했다... 천주교도 그중에 하나일 뿐
1940년 11월 10일에는 노기남 신부를 이사장으로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하였는데, 23일 회의에서 각 지방교회 연맹 조직, 성탄 때 시국강연회나 영화회 주최, 매월 첫번째 일요일을 '교회 애국일'로 정하여 예식 거행, 신사참배 실시, '국민서사'의 보급 등을 결의했다. 1942년부터는 노기남 신부가 서울교구장이 되면서 남상철이 경성교구연맹의 새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노기남 주교는 회장으로 대내적인 사무를 총괄하고, 남상철이 대외적인 사무를 보게 되었다. 이 시기 <경향잡지>는 1941년 2월부터 <국민총력>란을 신설해 정기적으로 매달 총력연맹의 실천사항을 게재하고, 경성교구연맹은 군기 헌납을 위해 매월 1인 1전씩 납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장우 실장은 이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반복하며 "말하자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력'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에 의한 '타율적인 협력'이었다"고 강변했다.
발제를 마무리하면서 이장우 실장은 "조선 천주교회가 조선 총독부의 정책을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이행하였던 것은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한 도움'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천주교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협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는 노골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던 '식민 조선인'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의 강요에 어떻게 '굴욕적인 타협'을 하였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이장우 실장은 교회의 친일행적뿐 아니라 일제 식민강점하 친일분자들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생존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호한 결과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처신했던 많은 종교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말인가? 게다가 천주교회가 '발전을 위한 도움'을 기대해서 친일한 것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노기남 대주교가 서품식 답사에서 "우리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은 빈말이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노 대주교에 협조한 엄창섭, 남상철과 장면 등 친일전력자의 공로도 다시 평가해야..
이날 이장우 실장의 발제에 대한 논평을 맡은 노용필 교수(한국사학연구소)는 이장우 실장의 발제문을 "교회사 연구의 수준을 한층 드높였다"고 칭송하며, 노기남 대주교의 <대조봉대와 교구장 취임에 제하야>라는 서품식 답사 내용을 두고, 노기남 대주교는 "이제 우리 손으로 우리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을 강하게 말하고, 그 다음으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신자가 되고.."라는 말을 강조하였고, "교우들도 그것을 가장 또렷이 들었을 것"이라며, 나머지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기억에도 없었을 것처럼 현장을 본 사람인 양 소설같은 논평을 가했다. 즉, 공식문서만 보지 말고 그 이면을 살피라고 강권하며 노기남 대주교가 회고록에서 "마음에도 없는 대동아 전쟁 필승을 강조하고, 황당무계한 황국신민화운동을 역설해야 하는, 실로 연극적인 답사"라고 말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도 부족한듯, 노용필 교수는 "노기남 대주교의 성무수행에 대한 협조자로서 기꺼이 살았던 이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눈길을 줄 때가 되었다"며, 1945년 대신학교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게 해준 학무국장 엄창섭, 1942년부터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의 이사장이 되어주었던 남상철, 그리고 노기남 대주교의 입장을 보호해준 박규철 신부의 협조와 희생을 충분히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노기남 대주교의 수족이 되어 준 장면 박사를 두둔했다. 게중에 남상철과 장면은 노기남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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