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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맴도는 동그라미
- 맑은내 고국 방문기에서 -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형님이 태워다 준 차로 월요일인 12월 30일 낮, 부산역에서 다시 서울행 KTX를 기다렸다. 누님과 함께 내려온 자형도 치과 치료 중이라 평택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누님을 두고 나와 함께 부산역으로 왔다. 기차 시간이 사오십 분 남았기에 자형과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내가 홀로 자형께 음식이든 차든 대접하며 단둘이 마주 앉는 건 일생에 처음이다.
"요즘 뭐 하고 소일하시능교?"
맏이인 누님이 나보다 열 살 위니 자형은 열세 살쯤 위다.
"열두 유닛짜리 셋방 건물을 하나 사가아 관리하며 지내는데 그거도 바쁘다."
본래 젊은 시절부터 전축을 고치고 사진업을 하고 작은 공장을 차리는 등 기술로 사셨으니 그 정도 손재주는 아무 일도 아니시겠지.
"세입자는 잘 들오능교?"
"평택에도 학생이 많아 금방금방 방이 나간다. 한 번 들어온 아이들은 안 나갈라 그런다."
"잘 해 주시이꺼내 그렇겠지요."
"나는 뭐든지 연락 오면 밤이고 낮이고 제까닥 고쳐 주삐거등. 심심한데 미루면 뭐하노?"
스물세 살 누님이 족두리를 쓰고 시집가던 날이 생각난다. 그날은 마침 내가 면에 하나뿐인 중학교 입학시험 치는 날이었다. 아버님은 아침 일찍부터 마당을 쓸고 차일을 치고 탱주나무 울타리를 천으로 두르는 등 잔치 준비에 바쁘고 어머니는 부조로 들어온 여러 채반의 떡이며 동이동이 단술을 챙기는 등 식구 모두 바빠 내가 시험 치러 간다고 해도 엄마만 ‘오야’ 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며 잠깐 눈길을 줄 뿐 아무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들길을 가로질러 새로 들어갈 그 중학교의 교문이 보이는 언덕배기에 오르는데 갑자기 수험표를 안 가지고 온 것이 생각나 당황했다. 멀리서 보니 우리 집이 들판 너머 가물가물 보이고 어머니가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를 흔들며 울타리 앞을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오리는 넘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눈 하나는 좋다. 아무튼 이거 시험도 못 쳐서 중학교에도 못 가나 하고 도로 집으로 뛰어갔다. 시계도 없었으니 시간이 얼마나 남은지도 모르겠고, 뛰어가면서 비실비실 울었다. 울면서 마당에 들어서니 그때야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를 바로 쳐다보았다.
"와 우노?"
"수험표를…"
"긇다고 사나가 맹추맨제로!"
부랴부랴 내 사진이 붙고 도장이 찍힌 흰 종이쪽지를 찾아내어 방을 나오니 형님이 나를 자전거에 태웠다.
"안 오고 그냥 선생한테 말하면 들여보내 줄 낀데…. 개얀타, 인자 가도."
일곱 살 위의 한창 나이 형님이 힘차게 페달을 밟은 덕분에 가까스로 시험장에 입실하여 시험을 잘 치른 결과로 나는 삼년 내내 돈 한푼 안 내고 시골 중학, 한 학년 이백 명 남짓의 남녀공학에서 외로울만치, 속된 말로 제 혼자 잘 나갔다. 시골 아이들은 몇 사람만 빼고는 공부를 너무 등한시해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처럼 공부시간에도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거나 딴전을 피울 때도 많았다. 봄이나 가을 농번기가 되면 반에 여남은 명씩은 한 열흘 동안 아예 등교를 안 했다. 입학시험이란 것도 순번을 매기고 장학금을 주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고 입학후 몇 달 동안은 방과후 선생님들이 구석구석 마을을 찾아다니며 부모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당장 도회지로 식모살이를 보내는 것보다는 어쨌든 중학교는 시켜 놔야 앞길이 보인다고. 이리하여 뒤늦게 들어온 아이들 중에 몇몇은 나보다 서너 살이 많았고 그 중에 어떤 여학생들은 덩치가 말 만한 처녀애 같았다.
그런데 이솝이 몇 천 년 전 사람이라지만 이 그리스 친구가 빈 얘기를 한 게 아닌 것이, 그때 답답해 보이던 느림보 거북이들이 몇 십 년 지나고 보니 다 탄탄히 제 몫을 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는데 반하여 혼자 빠른 척 뛰쳐나가던 토끼들은 어디서 자빠져 자다 이제 돌아왔는지 제풀에 숨을 할딱이며 이윽고 남 쫓아가기도 바쁜 신세가 되어 있기 일쑤더라 이 말씀이다. 그리고 오늘 밤 서울에서, 나는 몇몇의 이 시골 동무들과 오랜만에 만나 흥해행 고향열차를 타고 한 자리에 앉아 오십 년, 육십 년 전 역전앞으로 곧바로 돌아가게끔 미리부터 약속이 돼 있는 것이다.
하룻밤 헤어졌던 아내를 다그쳐 지하철을 타고 강남 송파구의 가락시장 근처에서 내렸다. 동무가 알려 준 가락시장을 찾아가는데 길도 새로 닦았는지 넓으면서 반듯하고 주위에는 높은 건물들이 늘어섰는데 다 고급 아파트인 것 같다. ‘이런 데 수산시장이 있나?’ 아무튼 신호등을 건너고 좀 걸어가니 주차장이 나오고 점포들이 꽉 들어찬 가락시장이 나온다.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내 동무가 되어 중학교도 같이 다닌 광식이가 여기서 젓갈류 도매상을 하는데 네 해 전에 내가 서울에 들렀을 때 중학 졸업 후 처음으로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이 동무의 구구절절 고생담과 성공담을 다 들어주고는 다음에 오면 또 꼭 만나자는 신신당부를 내가 잊지 않는 것이 그나마 철없던 시절의 오만을 일부나마 갚는 길임을 짚으며 그 언질을 내 마음 한 구석에 메모지 붙여 놓듯 꼬옥 짓눌러 놓았었다.
"나는 니가 적어도 구케우워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아이가!"
동무는 헤어질 무렵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내뱉었었다.
"아이라도 좋다! 나는 원익이 니가 이래 날 안 잊아뿌고 미국에서 와가아 찾아준 게 너무너무 고맙아 눈물이 난다. 니 책도 눈물이 난다. 어예 그래 잘 썼노! 자, 또 한 잔!"
그랬던 동무가 이번엔 다른 두 동무도 불러 놨단다.
"상조도 오고 태민이도 올 끼다. 마누라도 다 오라 캤다."
견물생심이라, 아내는 우선 눈에 띄는 건어물 가게로 가더니 LA보다 값이 훨씬 싸고 질이 좋다며 당장 몇 봉지를 산다. 안 말렸으면 짐 때문에 동무들도 못 만날 뻔했다. 그러다 기둥에 붙은 상점 일련번호를 찾아 찾아 마침내 그리 크지 않은 광식이의 가게 앞에 왔다. 장사엔 젬병인 내가 봐도 한 눈에 가게 목이 좋고 돈이 모이는 기운이 느껴진다. 긴가민가 말을 걸었더니 광식이 안사람이다. 그러나 손님이 들이닥쳐 길게 인사를 나눌 수 없다.
좀 기다리니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연신 큰 소리로 통화를 하며 걸어오던 광식이가 다른 손을 번쩍 들며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차가 눈앞에 굴러 들어오며 내리는데 보니 알듯 말 듯한 모습이다.
"원익아, 태민이다! 나 모리겠나?"
혈색 좋은 둥근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며 아는 체한다. 저는 나를 금방 아는데 나는 저를 금방 모르는 경우가 내 일생에 드물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세상에 진 빚이 많은 것이겠지.
"아, 태민이! 오랜만이다."
중학 졸업 후 처음 본 태민이를 따라 부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상조가 반대편에서 나타난다. 혼자다. 마누라는 오늘 손자애 봐 줘야 된다고. 이 동무는 몇 달 전에 LA의 우리 집 근처, 한 호텔에서 본 적이 있다. 자기의 오랜 계꾼들과 미 서부 여행 중이랬었다. 온 김에 우리 집이 가까우니 가자고 했더니 지금 자기 방에서 일행과 술자리가 벌어져 있고 자기가 제일 나이 어린 쫄따구라 빠질 수가 없으니 같이 자기 방으로 올라가 잠깐 인사나 드리고 가랜다. 그래서 따라 올라갔더니 호텔 방에 의자와 탁자를 끌어당겨 놓고는 대여섯 쌍의 부부들이 함께 맥주며 소주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유쾌하게들 웃으며 반기고는 이 말 저 말 능란하게 받아치는데 남녀 간에 경상도 말투가 많다. 술을 권하기에 사양을 했더니 ‘햐~ 상조 친구가 술 안 먹는 사람도 다 있네!’ 하며 놀란다. 그런데 그 사람 옆에 앉은 건장한 초로가 불쑥 한 마디 한다.
"LA 살머 오늘 데모 안 갔소?"
좀 생뚱맞다.
"데모요?"
"여그서도 그눔아 끌어내려야 된다꼬 LA 교포가 마캐 나와 데모하고 난리 났다 카던데!"
얼핏 알아차리기에 일부 LA 노인들의 태극기 데모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그 사람들이 즐겨 보는 매체에는 오늘 크게 부풀려 보도됐나 보다. 카톡인가 유튜븐가? 그러고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마구 일방적인 설교가 이어지며 답을 재촉한다. 다른 사람들도 살아있는 현지 동포의 생생한 목격담을 기다리는 눈치다. 하여튼 젊으나 나이 드나 한국 사람들의 지나친 정치적 열정과 편향은 예외가 드물다. 대꾸를 하다 보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아, 예~. 그런 거는 양쪽 얘기를 다 찬찬히 들어 봐야 판단이 서겠지요. LA 구경 잘 하시고 즐기다 가세요. 그럼 저는 이만.’ 하고 엉덩이를 들었다. 로비로 따라 나오며 상조가 좀 미안해했다.
"이분들카는 사업도 엮이고, 일년에 두어 차례씩 부부 동반하여 해외로 돌아다닌 지가 십년도 넘었다. 내가 제일 어린데도 같이 댕기머 참 재밌다. 고집이 씨이가아 모시느라 힘은 쫌 들지마는."
"다 건축 자재상인가 보네?"
상조가 손을 내밀었다
"아인 사람도 있고…. 또 연락하자."
오늘 광식이가 우리를 몰고 간 곳은 어느 일식집이었다. 어렵사리 주차하고 들어갔더니 오늘은 그런 예약이 안 돼 있고 내일로 돼 있단다. 그리고 지금은 빈 자리도 없단다.
"이런 젠장!"
너무 바쁘다 보니 아무래도 광식이가 날짜를 헷갈랐던 것 같다.
"다른 데 가지 뭐!"
결국 세 번째 집 이층에 자리를 잡아 앉는데 광식이가 전화를 받더니 미안해한다.
"마누라는 이 시간에도 손님 때문에 안된다꼬, 꼭 올라 캤는데…."
상조가 퉁긴다.
"야! 낮에만 벌고 고만 벌어라. 니 혼자 장사하나?"
아닌 게 아니라 광식이가 돈을 벌기는 꽤 벌었나 보다. 너무 바빠 상조같은 해외여행도 제대로 못해 봤단다. 광식이는 흥해에서 농사 짓다 장사에 뛰어들었고 몽땅 털어먹고는 무조건 서울로 튀었단다. 몇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있는 가락시장에 조수로 밀고 들어가 무조건 충성! 살 길은 이 길뿐이라고, 주군 모시듯 목숨 내놓고 몸으로 뛰었단다. 그러니 주인이 좋아하고 믿을 수밖에! 여러 해 지나 주인이 나이 든데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 가게를 넘기게 되었는데 마침 자식들은 다 엇나가 있고 가업에 흥미가 없었으니 차례가 자연히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라고. 파격적인 값에 인수를 받아 이를 성실히 갚으며 전 주인을 오래도록 챙겨 드렸다고. 그러면서 욕을 듣든 말든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가게를 열고 한 시간 늦게 닫으며 마누라에게 맡겨 두고 전국 해안을 새벽 일찌감치 첫차로 돌아다녔단다. 떼일 테면 떼이라며 어촌을 샅샅이 뒤져 일년 선불을 팍팍 지르며 최상의 젓갈류를 확보해 나갔다고. 남은 게 이 한 몸뿐인데 그 방법 아니면 어쩔 거냐고, 그나마 무쇠같은 마누라가 이때꺼정 따라와 주니 버텼다고.
"그러다 병 날라! 살만 해지면 골로 가는 수가 있다이? 놀러도 쫌 다니고!"
상조가 또 퉁겼다.
"안 그래도 인자 좀 쉴라 칸다. 큰 눔이 작년브텀 붙어 댕기면서 장사 배운다."
두 아들에게 아까 우리가 지나오며 보아 온 요 앞의 고급 아파트를 한 채씩 일찌감치 사 준 것도 모자라 이제 손자들이 늘어났다는 핑계로 더 큰 평수로 늘려서 아들들에게 또 사 줬다고 한다.
"이눔우 새끼들! 아부지 눈만 마주치머 다 빼앗아 묵는다카이! 작은 눔은 가리늦가 멫 달 유럽 연수 간다꼬 아부지자테 캐가아 까짓거 바람 쐬라꼬 식구 한꺼번에 내가 다 보내좃다."
그러면서 흐뭇하게 웃는 게 전혀 아깝지 않은 표정이다.
흔한 갈등과 시비와 궁핍의 얘기 대신 그리 흔치 않은 성취와 시혜와 풍요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옆자리의 태민이를 간간이 보니 비로소 어릴 때의 모습이 겹쳐 되살아난다. 맞다. 얌전하고 조용했지만 꾸준했던 그 자그마한 검정 교복 속의 아이. 이렇듯 무엇이 뚜렷하게 인상 깊지 않았거나, 별났던 아이가 아니면서 그 후 지난 일을 되살릴 일이 전혀 없었던 동무들에 대한 기억은 정말 우리의 잠재의식 저 아래에 가라앉아 있어서 오랜만에 만났을수록 겹겹이 발라진 세월의 장판을 걷어내기에는 얼마만큼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오늘처럼 이렇게 만나 그나마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려진 이들 외에 내 아뢰야의 물밑에 지금도 가라앉아 있는 이런 저런 인연의 남녀들은 또한 얼마나 많을까? 내 남은 생애에 그 가운데 누구라도 언젠가 어느 순간 오늘처럼 불려 올릴 기회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먼 훗날 다음 생에?
태민이는 학업을 마친 후 그나마 아버지 친구의 빽으로 흥해 면사무소에 말단 서기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단다. 그때는 다 철필로 잉크를 찍어 호적을 내리썼는데 자기는 마치 소사처럼 온갖 궂은일을 맡아한데다 다행히 글씨가 괜찮아 그나마 오래 붙어 있으면서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딴 생각 않고 열심히 한자를 익히며 착실히 일을 배우면서 마치 차분한 우등생처럼 근무하기를 삼년 가고 십년 가고 이십년 가고…. 면사무소에서 영일군청으로, 포항시청으로, 경북도청으로…, 그리고 마지막 십 몇 년을 경기도와 서울, 그러다 서울시 어느 구청의 기획처인가에서 무슨 국장으로 있다 얼마 전 은퇴했단다. 실무에 있을 때도 솔찮게 해외 연수도 다니고 하면서 견문도 꽤 넓힌 데다 지금도 공부를 쉬지 않는단다. 보아하니 은퇴 후에도 모나지 않고 탄탄한 삶이 이어지는 것이 수수하지만 천하지 않게, 그리고 세상의 헛된 바람에 까불리지 않는 연륜으로 부인의 얼굴에도 나타난다.
그밖에 이름이 떠오르는 국민학교 중학교 때의 남녀 고향 동무들의 근황을 묻는데
"가아는 중동 나간 뒤에 소식 없다카이."
"가아는 오래 전에 자살했다. 머시마한테 바람 맞아가아."
"찬국이? 도의원 다 됐는데 고마 심장마비로…"
"가아는 우리 동기 누구 마누라 됐다. 니 모리나?"
"가아는 요 동네 혼자 사는데 요새도 니 보고접다 카던데? 늦었지마는 전화해 보까?"
누가 누군지,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끼어들 자리를 잘 못 찾아 딴 나라 이야기처럼 넋 놓고 있던 옆자리의 아내가 이제야 쫑긋 귀를 기울이는 느낌이다.
이거 뭐 중학 동기 230 여명, 국민학교 동기 600 여명의 이름이 다 나오려면 밤새워야겠는데 광식이가 느닷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장내를 휘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친다.
"신사숙녀 여러분! 한 가지 알리겠심니더. 내 부랄 친구가 오늘 미국에서 왔심니더. 지가 오늘 너무 기분이 좋아 여기 기시는 손님들 몽땅, 맥주값 소주값은 지가 바로 쏘겠심니더! 너무 떠들어서 죄송함니더!"
손님들이 처음에는 의아해 멀뚱히 쳐다보다가 다함께 와~ 하고 박수를 쳤다. 그러자 상조가 광식이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이 친구 또 버릇 나왔네!"
정말 손님들 술값을 다 치르느라 그랬는지 뒤늦게 문 밖으로 나온 광식이가 제 차의 트렁크를 열더니 언제 마누라를 시켜 챙겨 놓은 것인지 몇 개의 비닐봉지 묶음이며 김칫병 같은 유리병을 꺼내 자루 달린 큰 비닐 들개에 넣는다.
"원익아, 이거 최고품 젓갈이다. 미국 가아 가가아 묵아 바라. 상조야, 태민아! 너그도 멜치젓 한 봉지씩 가아 가라."
"우리는 마이 묵았다 아이가. 원익이 다 조라!"
좀 걸어가서 지하철 타고 가겠다는데도 구태여 전화로 불러와 미리 결제까지 하며 태워 준 택시를 타고 아내와 나는 늦은 밤 한강변을 달렸다. ‘사진이나 좀 찍어 둘까?’
멀리서 다가와 옆으로 스자작 밑둥치가 비껴나는 몇 개의 한강 다리들, 그 교각 위로 가로 걸쳐져 명멸하는 색색의 불빛이 길고도 가지런하다. 건너편 빌딩 숲에도 층층이 점점이 불빛이 아롱지고 그 위 텅 빈 하늘에는 환하게 달이 떠 있다. 사진기를 차창에 대고 셔터를 누르려는데 차가 흔들리는 건지 내 깊은 바닥이 일렁이는지 풍경이며 불빛들이 각자 제자리에서 자꾸 조그맣게, 한 방향으로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맴돌기만 하고 초점이 모이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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