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독재자는 '타유의 투사'로 선전하며 출발하지만,
결국에는 적으로 소문난 상대가 살해했을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자국민을 죽이는 폭군으로 막을 내린다.
인간의 마음은 도움 받지않고서는 지각과 본질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동화 속의 빨간 모자 역시 마찬기지였다.)
가령 팔루자 반군은 85로 측정되고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65로 측정된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온전한 '자유의 투사'로 출발하여 생애 초기는 400대로 측정되는 많은 지도자들(히트러, 아라파트, 카스트로, 나폴레옹)이,
그 다음에 타인에 대한 권력과 통제 행사의 유혹적 매력에 굴복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생애 후반에 자기 우울증(egomania)에 빠져들고, 100 이하로 측정된다.
이는 모든 독재 정권에서, 그리고 네로 등과 같은 역사 속의 군주 대부분에게 거의 확실한 것이다.
따라서 위의 그럴 듯한 밈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오늘의 자유 투사기 내일의 테러리스 폭군"(측정 수준 495)\
테러리즘은 전 역사에서 인간 사회의 풍토병이었고, 현재는 모든 국가에서 주된 위협이다.
에고의 아주 깊은 밑바다과 포로이트의 '이드(Id)'에는
원시적 살해 욕구가 있고 순전한 ㄴ살해의 쾌락에 대한 갈증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프레리도그의 머리를 날려 버리는 '죽이는 스포츠'안에서 본다.
우리는 그것이 로마 콜로세움(측정 수준 80)에 운집한 군중의 쾌락과 환호 속에서 공공연하게 표현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검투사의 싸움에 대한 흥분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고,
닭싸움과 개 싸움에서 맛보는 쾌락과 흥분에서 또 다시,
그리고 투우장에서, 공개 처형에 대한 끔찍한 만족감과 사형을 요구하는 불쾌한 외침에서 그 자체를 드러낸다.
대중의 참여는 개인적 죄책감을 줄여 주는데, 그것은 린치를 가하는 폭도에게서,
혹은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로 18,000명을 처헝하는 것을 지켜본 구경꾼들에게서,
혹은 2004년 11월 26일의 NBA난동에서 나타난 그대로이다.
개 무리의 살해열을 목격하는 것은 (저자에게는 그런 적이 있었다.) 상당히 오싹하고도 심란한 경험인데,
개들은 헛간 앞마당에서 동물들 사이를 뛰어다며 닭, 오리, 애완용 염소의 목덜미를 차례로 물어뜯는다.
개들은 배가 고픈 상태가 아니며 먹이를 먹지고 않지만, 엄청난 흥분 상태에 빠져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다른 동물을 한 마리씩 죽일 때마다 무리는 행동이 느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기가 고조되어 더 많은 살해로 치닫게 된다는 점이다. (예: 1930년대 남경과 만주에서의 일본인)
그러한 행동은 원시적으로 본능적인 것 같지만 종족 결합을 도울 수 있다.
피를 갈망하는 흥분은 진염성이 있으며 만족할 줄 모르는데,
그것의 인간적 표현에서 구경꾼들은 호기심 어린 흥분으로 하여 그것을 보고 환호한다.
권투 경기장의 규정은 실제로 죽이는 것을 금하는 대신 가능한 살해에 가장 근접한 것,
가령 의식 상실, 출혈, 찢어진 살, 쇼크 뇌친탕만을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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