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자국 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비우호국 기업들에 대한 퇴출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 모스크바 소재 고등경제대학(HSE) 통계연구·지식경제 연구소의 시장 조사센터(Центр конъюнктурных исследований Института статистических исследований и экономики знаний НИУ ВШЭ, 영어로는 ISIEZ)에 따르면 지난해 2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이후 러시아에서 자산을 보유한 외국 기업 1,400여개 중 10~15%는 완전히 철수했다.
그 결과, 러시아의 자동차 산업은 60~70% 붕괴됐다. 현대·기아차와 미쓰비시, 스텔란티스(푸조·시트로엥의 '그루프 PSA'와 피아트·크라이슬러 오토모빌스(FCA)가 50대 50으로 합병한 기업/편집자)가 러시아에 남아 있을 뿐이다. 서방 브랜드가 떠난 자리를 '지리 자동차' 등 중국 회사들이 장악했다.
러시아 고등경제대학의 ISIEZ 연구소/사진출처:홈페이지
독일의 가정용 생활용품 '헨켈'도, 가구 전문점 '이케아'도, 이케아와 유사한 프랑스의 DIY 전문점 '레놔 메를랭'(Leroy Merlin)도, 에너지 기업 BP와 쉘도, 맥도널드 햄버거도 적게는 수억 달러에서 많게는 수백억 달러를 손해를 감수하고 러시아를 떠났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아직도 1천여개 기업이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 중 프랑스 유제품 기업 '다농'과 덴마크 맥주브랜드 '칼스버그'의 러시아 법인 주식이 러시아 연방 국유재산관리청(Росимущество)으로 넘어갔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6일 '다농'과 '칼스버그' 러시아 법인의 외부 관리(внешнее управление, 우리의 '법정관리'와 유사)를 승인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다농 러시아의 홍보영상/vk 캡처
서방 측은 러시아의 이같은 조치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서방의 러시아 자산 동결에 대한 보복, 또는 서방 기업들에 대한 국유화(엄밀하게는 국유화 뒤 민영화 수순) 조치로 해석됐다.
러시아 언론매체 로시스카야 가제타(RGru)에 따르면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21일 "서방의 대러 제재조치와 공급망 붕괴, 브랜드 가치의 추락 등을 이유로 러시아에서 사업을 계속하고 싶지 않지만, 철수하지 못한 서방 기업들에 대한 '외부 관리'가 도입되고 있다"며 충격적이라고 보도했다. FT는 또 "데니스 만투로프 러시아 산업통상부 장관이 '외부 관리' 시스템은 다른 기업들에게도 확대 적용될 것이라고 경고했다"며 "대상 기업이 수천 개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러시아에서 자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공장 가동을 중단한 현대·기아차와 삼성, LG전자 등 국내 대기업들도 러시아의 '외부 관리' 대상에서 빠져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한국도 일찌감치 러시아 정부에 의해 '비우호 국가'로 지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투로프 산업통상부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많은 외국 기업들이 특수 군사작전 개시 직후 러시아 시장을 떠나기로 했으며,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이를 진행했다"며 "그들은 철수 계획을 공개하고, 러시아 정부와 기업들에게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생산 시설과 일자리를 보존하도록 배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에 남아 있으면서도 생산 등 비즈니스 활동을 중단하고, 투자 프로그램을 축소하는 회사들은 이익을 내지만, 기업은 망해간다"며 "이런 기업들은 '외부 관리'를 도입해서라도 살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외국인들의 러시아 투자는 2022년 2월 이후 지금까지 총 3,000억 달러로 크게 쪼그라들었다.
만투로프 러시아 산업통상부장관/사진출처:위키피디아
현지 언론은 만투로프 장관의 발언을 '파렴치한' 외국인 소유 기업에는 외부 경영진을 적극 참여시키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1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떠나지 않은 서방 기업은 러시아 경제에 '기생충'과 같은 존재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외부 관리'를 통해 회생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비우호국 기업들의 '퇴출 작업'을 크게 두 단계로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 기업이 뒤늦게 부랴부랴 러시아를 떠나는 것을 까다로운 절차로 일단 막은 뒤, 그 기업에 외부 관리를 도입해 '러시아 기업화' 하는 것이다.
러시아를 철수한 서방 기업들의 수에 대한 추정은 둘쭉날쭉하다. FT에 따르면 키예프(키이우) 경제스쿨(비즈니스 스쿨, 경영대학원)은 러시아에 자산을 소유한 3,350개 이상의 외국 대기업 중 300개 미만이 러시아를 떠났고, 약 500개는 철수하는 과정에 있다고 추정했다. 러시아측은 1,400여개 기업중 10~15%가 철수한 것으로 본다. 매각후 러시아 당국의 승인, 혹은 매각 협상 중에 있는 기업도 적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에 남은 기업들 중에서도 펩시콜라(PepsiCo)와 필립 모리스(Philip Morris), 식품 브랜드 Mars, 이탈리아 UniCredit 은행, 오스트리아의 라이프아이젠 은행(Raiffeisenbank) 등은 비즈니스 여건이 악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외국인 투자를 총괄하는 러시아 산업통상부 산하 '외국인 투자 소위원회'는 지난 7일 외국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할 때 준수해야 할 조건 10개를 확정했다.
현지 매체 rbc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 소위원회'는 이미 시행중인 여러 가지 조항(가격 인하, 시장 가격의 10% 헌납 등)에다 △기업 매각시 환매 옵션을 2년 이하로 하고, △인수자는 인수기업 주식의 최대 20%를 증권거래소에 내놓도록 하는 조건들을 덧붙였다. 매각한 외국 기업의 원 소유자(외국인)는 증시에 상장된 주식 20%만 소유하고, 빈손으로 출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외부 관리'(법정관리/편집자)의 도입이다.
RGru에 따르면, 러시아 현대개발연구소의 재무 분야 담당 니키타 마슬레니코프는 "외부 관리의 도입 대상은 자산이 매각되지 않았거나, 거래가 종료되지 않은 외국 기업들"이라며 "원 소유주들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러시아를 떠나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 기업을 국유화하는 게 아니라, 경영진만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고등경제대학(HSE) 통계연구·지식경제 연구소의 시장 조사센터 게오르기 오스탑코비치 소장은 "'외부 관리'의 도입은 자본 유출과 루블화 하락을 최소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본 유출은 현재 루블화 약세 요인 중 하나인데, '외부 관리'에 들어간 기업은 자본 유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업을 완전히 빼앗기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오스탑코비치 소장은 "기존 경영진이 러시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예로 독일 당국이 지난 2022년 에너지난으로 위기에 처한 러시아 가스프롬의 자회사인 '가스프롬 게르마니아(독일)'를 '신탁 관리'에 넣은 것을 들었다.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사진출처:현대차
기존 경영진의 복귀 조건은 향후 러시아 측에서 결정할 것으로 그는 전망했다. 그리고 '외부 관리'에 들어갈 수 있는, 자산을 보유한 외국인 회사는 약 1천 개가 넘는다고 했다. 거기에 한국 대기업도 들어가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