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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13일 화요일 [(백)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터키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또한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품을 받고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유배 생활을 하다가 407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며, 저마다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내시자,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며 찬양한다(복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긴 과부를 만나십니다. 이 장면은 성모님이 십자가 앞에 서서 예수님의 죽음을 감내하는 모습과 교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슬픔과 고통을 미리 알고 과부를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과부의 슬픔과 고통이 예수님의 마음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죽음과 슬픔의 행렬’은 ‘생명과 기쁨의 행렬’로 바뀝니다. |
죽어가는 이웃을 살리는 강론
동료사제께서 농담반 진담반 이런 말을 하더군요. “본당사제로 보람도 크지만 때로 힘들 때도 많습니다. 신자들의 영성생활 증진을 위해 강론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참고도서까지 여러 권 봐가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성의 있게 준비해서 강론했더니, 신자들이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우리 신부님은 뭔 잔소리가 저렇게 많은지?” 미안한 마음에 강론을 간단하게 했더니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우리 신부님은 통 강론에 성의가 없으셔, 보아하니 강론준비 않하셨구먼!” 저희 같은 사제들에게 참으로 큰 기쁨이요 영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커다란 십자가요 부담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론입니다. 이런 우리 사제들이 눈여겨봐야 할 분이 한분 계십니다. 2천년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서 최고의 명설교가로 손꼽히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강론을 잘했으면 별명이 붙었는데 입에서 금실이 줄줄이 나오는 것 같다고 해서 금의 입, 금구였습니다. 정식 이름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입니다. 주교님께서 강론을 시작하면 강론이 자주 끊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강론에 너무 감동을 받아서 사람들이 울고불고, 박수를 치고 그래서 자주 강론이 중단되었답니다. 주교님이 강론을 하고 계시면 사람들은 속으로 ‘대체 이 강론 언제쯤 끝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제발 좀 더 오래 강론하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답니다. 주교님 강론으로 인해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심오한 삶의 이동과 변화, 다시 말해서 회개가 이루어지기도 했답니다. 요즘 세상, 참으로 강론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사람들의 넋을 ‘쏙’ 빼놓고 마는 갖은 첨단 매체들,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다양한 볼거리와 놀거리로 넘쳐나는 이 시대, 강론대 앞에 서기가 점점 부담스러워집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열심히 사제의 강론을 경청할 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강론을 기다립니다. 그뿐이 아니다. 강론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강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제들이 많습니다. 강론은 사제가 성경이란 보고(寶庫) 안에 가득 찬 보물들을 꺼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냥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잘 세공(細工)해서 나눠줘야 합니다. 세공 작업이란 사제가 성경 말씀을 오늘 이 시대 구체적인 상황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일입니다. 재해석 된 성경 말씀이 신자들의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강론의 역할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의 강론이 성경을 떠나서는 안 되며, 성경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제의 강론은 성경이 그러하듯이 오늘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구체적 삶의 현실과 깊은 연관을 맺어야 합니다.
강론은 다른 무엇에 앞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직접 찾아오셨다는 복된 메시지를 전하는 일입니다. 이토록 나약하고 허물투성이인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살리셨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강론은 사제가 신자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강론으로 인해 힘겨울 때마다 사제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한 마디 말씀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한 이웃을 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화려한 강론, 고상한 강론, 감동적인 A+의 강론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말씀이 말씀을 선포하는 강론이라면,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핵심진리를 빼놓지 않는 강론이라면, 방황하는 양떼를 향한 목자의 측은지심이 담긴 강론이라면 그 자체로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예수님의 약점 >
아무리 강한 사람도 약점 하나씩은 있다고 합니다. 사자 호랑이도 어른이 된 코끼리는 함부로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코끼리의 천적은 덩치 큰 사자, 하마나 곰이 아니고, 또 흔히 알려져 있는 쥐가 아니라, 바로 ‘벌’이라고 합니다.
코끼리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아프리카 남아공에서 최근 나온 연구결과입니다. 논문을 낸 연구가 루시 킹은 “코끼리가 벌떼를 만나면 저주파 경고음을 내는 게 과학적으로 확인됐다.”며 “벌을 이용하면 코끼리를 쉽게 쫓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코끼리가 벌을 천적(?)으로 여기는 벌집을 10m 간격으로 세워두면 코끼리가 농작물을 망치는 걸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선 수확기에 코끼리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 주민이 많습니다. 허기를 채우지 못한 코끼리가 밤에 농작물을 훔쳐 먹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여럿이 모여 밤샘 보초를 새다 코끼리가 나타나면 횃불을 켭니다. 아이들은 냄비를 두드리며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코끼리를 쫓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겁에 질린 코끼리는 대개 발걸음을 돌리지만 때로는 코끼리가 사람을 공격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한답니다. 주민이 목숨을 잃는 일도 있습니다. 반대로 주민들의 공격을 받은 코끼리가 쓰러지는 일도 많다고 합니다.
논문이 밝힌 대로 코끼리의 천적이 벌이라면 이런 유혈충돌은 피할 수 있게 됩니다. 논문을 낸 킹은 “10m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벌집을 단 후 기둥과 기둥을 얇은 철사로 묶어 놓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고 밝혔습니다. 코끼리가 농장에 들어갈 때 철사를 건드려 벌집이 흔들리면 벌들이 코끼리를 쫓아준다는 것입니다.
[참조: 손영식, 코끼리 천적은 쥐가 아니라 벌?, 서울신문, 2010-02-06]
누군가의 약점을 알 수 있으면 그 사람을 이기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혹은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할 때도 사람들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도 약점이 있을까요? 그것만 안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과부가 청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지나가시다가 느닷없이 그 과부에게 연민을 느껴서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 과부가 우는 것을 차마 못 본채 그냥 지나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좀 불공평해 보입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는 경우는 매우 많을 것인데 이 경우에만 살려주시는 것은 왜일까요?만약 예수님이 공정하시다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다 그렇게 도와주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그 과부가 예수님의 마음을 특별히 잡아 흔든 원인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과부가 바로 당신 어머니 마리아의 처지와 같기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당신이 조금 뒤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면 어머니는 그렇게 외아들을 잃은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당신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어찌 보면 불공평해 보일 수 있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약점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그만큼 어머니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어머니 때문에 첫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뜻을 따라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장 큰 약점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어머니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성모님을 통한 기도가 예수님께 직접 하는 기도보다 더 힘이 크다고도 말합니다.
에스델서에 나오는 에스델 왕비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페르시아 왕에게 간언을 합니다. 왕의 약점은 바로 에스델 왕비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에 가장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왕비는 왕의 사랑을 받는 덕분에 이스라엘 온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승천하신 이유도 바로 예수님 바로 옆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모님 옆에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맙시다. 예수님은 성모님 앞에서는 어떤 힘도 쓰실 수 없는 어린이처럼 되십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성모님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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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
349년경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후 수덕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제가 되어 설교직에 헌신했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선임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 관습을 개혁하는 데 힘씀으로써 참된 목자임을 보여 주었다. 왕실의 증오와 원수들의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두 차례나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고통에 짓눌린 채 407년 9월 14일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 신앙을 해설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을 독려하는 많은 설교와 저술들로 인해 "황금의 입" 즉 크리소스토모라는 별칭을 얻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강론에서
(Ante exsilium, nn. 1-3: PG 52,427-430)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며 죽는 것도 이득이 됩니다
숱한 파도와 험한 풍랑이 위협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우리를 삼켜 버릴까 하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성낸다 해도 그것은 바위를 쪼개 버릴 수 없습니다. 파도가 탑처럼 높이 치솟는다 해도 예수님의 배를 삼켜 버릴 수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죽음입니까?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혹 유배 생활입니까? "땅이며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하느님 것입니다." 혹 재산의 손실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나에겐 이 세상의 무서운 것들이 멸시할 만한 것이고 그 좋은 것들도 웃어넘길 만한 것들입니다. 나는 가난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재화를 탐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의 선익 때문이 아니라면 죽음도 겁내지 않고 살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일어나는 일을 여러분에게 단지 유의시키고 여러분이 확신을 가지도록 요구하는 바입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사랑으로 묶인 이 무수한 백성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 분의 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진정코 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성서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지팡이요 나의 보호이며 나의 잔잔한 항구입니다. 온 세상이 와중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이 성서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읽습니다. 그것은 내 성벽이요 내 보호체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파도가 나를 대항하여 일어서고, 바다와 통치자의 분노가 나를 거슬러 밀려와도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거미 한 마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나를 막지만 않았다면 오늘이라도 즉시 딴 데로 떠났을 것입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 할 뿐입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나의 뜻이 아니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것은 나의 보루이고 이것은 나의 움직임이 없는 바위이며 이것은 나의 흔들림이 없는 지팡이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나는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이 아무데라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정해 주신다면 그분께 감사 드릴 것입니다.
내가 있는 데에는 여러분도 나와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데에는 나도 역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한 몸이므로 몸은 머리에서 분리될 수 없고 머리는 몸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장소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사랑으로 말미암아 연합되어 있습니다. 죽음마저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육신이 죽는다 해도 계속 살아 남을 내 영혼은 내 백성을 기억에 남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동일한 나의 시민이요 나의 아버지요 나의 형제, 나의 자녀, 나의 지체, 나의 몸입니다. 여러분은 보통의 빛보다 더 소중한 나의 빛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나에게 비추어 주는 빛에 비교될 만한 빛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태양 빛은 나의 현세 생활에 유익한 것이지만 여러분의 사랑의 빛은 미래에 얻을 월계관을 나에게 엮어 줍니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0]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마태오 복음 강해’에서
본문
“성전을 장식하면서 고통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습니까? 그분이 헐벗은 것을 볼 때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바깥 거리에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당하시는 그분을 돌보지 않는 동안에는 이곳(성당)에서 비단옷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분과 같은 분입니다. 제대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비단으로 된」 제대보가 아닌 깨끗한 마음을 필요로 하시며, 거리에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식탁에 금잔들이 즐비하지만 그분 자신이 굶어 죽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먼저 배고픈 이를 먹여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로 식탁을 장식하십시오. 여러분은 금잔을 만들게 하면서 배고픈 이에게 물 한 잔을 주지 않습니다. 이로써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제대를 금으로 된 제대보로 꾸미면서 헐벗은 이에게 필요한 옷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
나그네로서 하루 밤을 묶을 곳을 찾으면서 헤매는 사람을 보면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나그네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성당의 바닥과 벽과 온 기둥을 장식합니다. 등경에다 은으로 된 사슬을 매달면서 감옥에서 사슬에 매여 있는 그분을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성당을 이런 물건들로 장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예물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예물을 바치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성당을 장식하는 데 협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고소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떨어지게 되고 악마들과 함께 고초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당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그는 돌로 된 다른 성당보다 훨씬 가치 있는 성전입니다.
「마태오 복음 강해」 50, 3~4
해설
“하느님 심판의 기준은 사랑 실천”
기원 후 313년 종교의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교는 급속히 성장하고, 성찬례와 세례의식을 포함하는 새로운 예식을 거행하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새로운 형식의 많은 건물을 지어야했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는 교회 축성에 대한 축제 연설에서 티루스의 주교 파울리누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들이 세운 이 성전,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 진실로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성전은 진실로 거룩한 장소이며, 거룩한 것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자들의 종교 생활은 성전에서 공식 예배에 참례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며 거룩한 장소이고, 전례와 미사를 드리는 곳으로 이해됐다.
그런데 동방교회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이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4/354~407년)는 성전을 장식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크리소스토무스는 381년 안티오키아 교구의 부제 당시,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동정녀, 어린이 교육을 위한 자선, 사회 복지 활동에 투신하였다. 그의 저서들은 항상 사목과 관련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요구에서 씌어졌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된 뒤에도 크리소스토무스는 황실과 같은 화려한 주교의 삶을 소박한 생활방식으로 바꾸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소유물과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여행자들을 위하여 팔았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가능한 한 더 완전하고 철저히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의 노력은 바로 「마태오 복음 강해」에서 드러난다.
『성당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그는 돌로 된 다른 성당보다 훨씬 가치 있는 성전입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분당 및 새로운 성전 건축, 리모델링 때문에 신부들도 신자들도 몸살을 앓고 있다. 사목자의 취향에 따라 성당 및 사제관의 구조가 때마다 바뀌어 본당 예산 가운데 건물관리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성전을 더 아름답게, 거룩하게 장식하려는 사목자들과 신자들의 마음은 이해되지만,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서울 강남에 자리한 개신교 영동교회는 교회건물의 관리비 및 재건축비에 쓰일 돈을 의료사업, 복지사업에 투자하는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고마울 뿐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이자 나의 구원관이다. 비록 내가 사제품을 받고 신부로서 평생 일을 했다 해도, 천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으로 이웃 사람을 얼마나 도와주었느냐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물론 나도 인간이기에 죄를 짓지만 그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뿐이다. 나의 믿음의 결실이 얼마 만큼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도움을 베풀었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느냐에 따라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곧 이웃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인생을 마무리 할 때 우리는 실천한 사랑을 근거로 심판받을 것이다.
심판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려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을 때 내가 느끼는 행복감,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쁨이다. 남을 도와주어 행복하다고 느끼는 기쁨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영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죽어서 천국을 가느냐, 아니면 지옥을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얼마나 하느님 나라의 영복을 미리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황치헌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수원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5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4]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티모테오 서간 강론’에서
진짜 아름다움
본 문
영혼과 육신 모두를 통해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찬미를 드립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겠지요. 『영혼이라면 몰라도, 육신으로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나요?』
그렇고말고요, 물론입니다. 육신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육신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고, 술고래나 음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외모만을 치장하는 데 안달하지 않고, 건강차원을 넘어서 육체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을 피하며, 음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여인들도 몸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꾸며주신 그대로 만족하여, 어떤 것도 바르거나 치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장품으로 도배를 하거나, 물감으로 얼굴을 찍어 바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완벽하게 만드신 것에 무엇인가 덧붙이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 하신 것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러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아름다움 자체이신 분께서 꾸미신 것을 보완할 수 있는 예술가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화장을 하고, 치장을 하여 자신을 뜯어 고치는 것은 창조주를 모욕하는 것일 뿐이며, 단지 그것을 보고 좋아하는 이들에게 유혹이 될 뿐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남정네들이 좋아 하니 안하고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답답하지만, 언뜻 보기에 수궁이 가는 변명입니다. 열렬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미 탄복할 만큼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화장으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정숙과 덕행으로 가꾸어지는 것입니다.
-중략-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여인도 있을 법 합니다. 『하지만, 못생긴 여인이 치장을 하고 화장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까?』
글쎄요! 치장하여 추함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자연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도, 못난 것이 죄가 아닌데 왜 못났다고 고민하고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서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외모가 훌륭하다고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외모가 볼품없다고 경멸하지 말아라』(집회 11, 2).
사실 얼굴이 잘났다고 구원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오히려 미모 때문에 더 많이 걱정하고 성가시게 되고, 때로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해 설
“외적인 것에 목숨 걸지 말자”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마법의 거울 앞에서 주절대는 동화 속의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마법 거울에 주문이 걸려버린 듯싶다. 요즈음 성형외과가 성업이란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는 이미 옛말이 되고, 이제는 『목숨 걸고』 다홍치마를 입으려 한다.
외모 콤플렉스, 외모지상주의, 요요현상, 닥터쇼핑, 성형중독, 살 빼는 약…. 아!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 외적 아름다움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 온 사회가 미인 신화의 수면상태에 떨어졌다. 아름다움을 파는 미용 산업이 날로 번창하여 종류를 셀 수도 없는 고가의 화장품들이 출시되고, 예전에는 일부 연예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성형 수술을 이제는 너도나도 감기약 먹듯 하고 있다. 이에 덩달아 대중매체는 미인을 상품화하여 신데렐라의 꿈을 팔아대고 있다. 무슨 놈의 미인대회가 그리도 많은지!
예뻐지려는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초대교회에 「여성 복장론」이라는 책이 있었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이 책에서 저자는 당시에도 유행하던 루주, 박하분, 염색약 등의 화장품과 장신구를 「악마의 발명품」(inventus daemonis)이라 부르며, 더불어 너무 옷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입는 것은 교만과 정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1700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너무 혹독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고리타분한 저자의 의도를 우리 시대에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것 말고는 그 어떠한 것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창조된 자연스러움을 꾸미는 것은 악마의 오염인 경우가 이따금 있기 때문이다. … (당시 박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예쁜 팔지를 낀 팔목이 어떻게 쇠사슬의 투박함을 견디어 낼지 모르겠습니다. 진주와 옥으로 둘러싸인 목에 순교의 칼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는지 의문입니다』(테르툴리아누스, 「여성 복장론」 13).
외적이건 내적이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제 때가 지나면 떨어지는 법이다. 너무 외적인 것에 목숨을 걸지 말자. 진정한 아름다움에 매료당하면 외적인 것은 덧없는 아름다움의 그림자일 뿐이리라.
『빛에겐 등을 돌리면서 비추이는 것들에만 얼굴을 마주하는 까닭에 그 빛깔만 보던 내 얼굴도 따라서 빛을 받지 못하나이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4, 16, 30).
[이상규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대전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3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7]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참회에 관한 설교’에서
어머니 교회
본문
그대는 거리에서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지은 죄에 대해 참회하십시오. 또다시 죄를 지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새롭게 뉘우치십시오. 약속된 상급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입니다. 여기 교회에서는 그대의 죄를 셈하지 않고,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 따름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그대의 죄를 드러내십시오. 『오로지 당신께 죄를 지었나이다. 당신 눈에 악한 것을 제가 행하였나이다』(시편 50, 6). 그러면 그대의 죄는 용서받을 것입니다.
「참회에 관한 설교」 3장 4절
교회, 단죄가 아닌 치유하는 곳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은혜롭게 체험할 수 있게 현행 참회제도를 다듬어가는 일은 절박”
해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9~407년) 교부는 신구약성서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성서를 깊이 묵상하였다. 훗날 사제가 되어 행한 그의 강론은 신자들의 마음에 진한 감동을 남겨 「황금의 입」(金口)이라는 명예로운 덧이름을 얻기까지 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타락한 성직자와 수도자를 개혁하고 황실의 거짓과 불의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귀양길에서 객사했다.
우리 교회가 규정과 규율만을 강조한 채 허약하고 상처 입은 신자들을 어머니처럼 껴안지 못할 때, 교회 안에는 반복음적인 엄격주의와 엘리트주의가 독버섯처럼 자라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깨어진 가정으로 말미암아 힘겹게 살아가는 이혼자들을 더 큰 애정으로 끌어안기보다, 오히려 「장애」(=조당, impedimentum)에 걸어 교회 법정에 넘겨버리는 오늘의 현실은 엄격주의 교회론의 현대적인 부활처럼 느껴진다.
또 주일 미사에 빠지는 「대죄」를 지은 수많은 중죄인들(?)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성찬의 식탁에서 소외시킴으로써 성찬의 참뜻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성찬은 그야말로 사랑의 성사이며 용서의 성사이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더불어 나눈 식사는 하느님의 용서를 나타내는 명백한 징표였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성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또한 당신의 용서를 보증해 주시는 것이다. 최후만찬에 대한 마태오의 기록도 죄사함(『죄를 용서해 주려고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마태 26, 26).
우리는 이 사랑의 식탁에 나아가기 위하여 미사 첫머리에,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던 세리처럼(루가 18, 13) 가슴을 치며 죄의 용서를 청한다.
미사 중에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면 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며, 우리 죄를 헤아리기보다 당신 자비와 용서를 믿고 바라는 교회를 굽어보십사 기도한다.
영성체 직전에는 주님의 자비를 다시금 간청한 후, 비록 부당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이지만, 주님의 한 말씀으로 죄와 허물에 병든 우리 영혼이 당장 낫게 되리라는 믿음을 고백한다.
이토록 자비와 용서를 간청하는 당신 자녀를 하느님께서는 성찬의 식탁에서 내치실까?
성찬 식탁의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당신 자신을 식탁의 선물로 내어 주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그 식탁에 모여드는 사람이 죄인이라 하여 가로막는 일을 과연 그리스도께서 원하실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와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교회의 참회제도와 규정이 시대의 요청에 따라 서서히 등장하고 다양한 형태로 변천해 왔다면, 신자들이 더 이상 불필요한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고,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은혜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현행 참회제도를 다듬어가는 일은 절박하기 짝이 없다.
주님께서 불러 모으신 교회는 모든 이에게 열린 공동체였다. 죄인과 세리, 병자와 거지, 무식쟁이와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어우러진 공동체였다. 그들도 하느님의 소중한 아들딸이라는 기쁜 소식이 선포되는 자리였고,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는 곳이었으며, 넘쳐흐르는 새로움의 은총으로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부활의 장소였다.
죄인과 창녀의 벗이 되어주시고, 지치고 병든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되어주시며, 길 잃은 양들에게는 착한 목자가 되어주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마음이 살아 있는 곳이 바로 교회다.
교회란 인간을 단죄하고 벌주는 법정이 아니라,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곳이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교회를 『어머니』라고 불러왔다. 당신 자녀들을 밥해 먹이고, 똥오줌을 닦아 주고, 더럽혀 놓은 옷을 빨래해 주고, 때와 허물을 청소해 주는 고마운 어머니로 우리 교회를 여겨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뻐기고 벌주고 감독하고 훈계만 하는 팥쥐 어멈이 아니다. 우리가 비록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했다가도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나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어머니! 이 어머니가 바로 교부들이 우리에게 일러준 『자모(慈母)이신 교회』, 『어머니 교회』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24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1]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티모테오 1서 강해’에서
당신에게는 땅이 많은데 왜 당신의 이웃은 땅이 한평도 없단 말인가!
본문
당신은 재산을 어떻게 모았는지 말해보시오. 조상들로부터 받았습니까? … 그렇다면 그 조상들이 재산을 정당하게 모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결코 증명할 수 없습니다. 부(富)의 시작과 뿌리에는 일종의 불의(不義)가 들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땅은 공동 소유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많은 땅을 갖고 있고, 당신의 이웃은 땅이 한 평도 없습니다. 당신은 그 땅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말하고 싶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아버지는 그 땅을 누구한테서 물려받았습니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조상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재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해봐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결코 도둑질을 하지 않고 재산을 정직하게 모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당신의 조상들이 갖고 있던 금이 땅 속에서 치솟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당신은 부는 선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부는 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겠지요. 그래요. 부는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부를 쌓아 두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면 말입니다. 나누어주지 않는 부는 결국 악의 올가미가 됩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항변하고 싶겠지요. 선행을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악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소유, 즉 공공 재산을 당신 혼자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악한 것 아닙니까? 혹시 당신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합니까?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 모두의 한 분이신 주님의 소유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를 포함한 주님의 모든 종들의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것은 무엇이나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디모테오 1서 강해」 12장 4절
해설
오늘은 땅 투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대한민국은 땅 투기와 아파트 투기 등으로 열병을 앓고 있다. 아니, 열병이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망국병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약 1500년 전에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경고한다. 부를 사유화하거나 독점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사회에 환원하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누구인지 잠시 알아보자.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러나 워낙 강론을 잘하자 사람들은 그에게 「황금의 입」(金口)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붙여주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갑자기 서거하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된다(398년). 그러나 총대주교좌를 수락하지 않자 아르카디우스 황제(395~408년)는 요한에게 콘스탄티노플로 출두하라는 소환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잘사는 도시, 부가 넘쳐나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게 화려하고 부자들이 넘쳐나는 도시였지만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 끼니를 때우기 위해 거리를 헤매면서 동냥을 하고 있었다. 선임 총대주교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신임 총대주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보다는 오히려 가난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성직자들을 개혁하고, 황실의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난하면서 부자들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러나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함과 황실의 미움으로 결국 요한은 총대주교좌에서 물러나 유배를 가게 된다(404년).
동.서방 교회의 교부들은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하라고 자주 권고하였다. 부자가 자신의 탐욕을 절제하지 못한 채 재산을 함부로 남용한다면, 부 자체가 부자들에게 악의 근원이 되고 불행의 씨앗이 된다고 말하면서 교부들은 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태양은 가난한 자와 부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두루 비춘다. 이런 공평한 자연의 모습을 통해서, 부자들은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교부들은 말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자선을 베푸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교부들은 강조한다.
어디가 개발지역이다 하면 벌떼처럼 몰려가 각종 투기를 조장하여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자식들에게 재산을 불법증여 해주는가 하면, 각종 편법을 다 동원해서 심지어 공적 자금까지 빼돌리는 사람들에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한다. 그런 모든 행위가 악행의 뿌리이고 우리를 하늘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자선을 베푸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많이 더 자주 베풀어야 한다고 교부들은 말한다. 재산은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청지기로서 잠시 그것을 보관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노성기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광주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8월 21일]
9월13일(화) 음8/13 聖 아 마 토 님 |
성 아마투스(Amatus) |
성 아마투스(또는 아마토)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의 어느 프랑스계
로마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아가우눔 수도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였고, 커서는 공동체의 수도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은수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땅을 일구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등 독수생활을 즐겼지만, 성 에우스타시우스(Eustasius)가 그를 뤽세이유(Luxeuil)로 인도하여 수도원 수도자로 만들었다. 메로빙거 귀족인 로마리쿠스(Romaricus)를 개종시킨 사실이다. 그의 개종은 아마투스가 식사에 초대받은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영성을 얻기 위하여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마투스는 은접시와 귀중한 집기들을 가리키면서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준 뒤에 나를 따라 오시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대답하였다. 로마리쿠스는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시행한 뒤 뤽세이유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620년경 그 개종자가 수도원을 세운 다음 아마투스를 원장으로 모셨다. 성 아마투스는 그 후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원장직을 사임하고 은둔소에서 독수생활을 하다가 선종하였다. 아메(Ame)로도 불린다. * 자료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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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뛰어난 영성으로 감화시켜 선교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성 아마투스 님이시여, 주위의 빛이 될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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