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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천 물소리에 마음을 놓아 주다
정자(亭子)의 고장 경북 봉화에서도 사미정(四未亭)은 운곡천(雲谷川)의 시원한 물소리와 뭇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스럽게 하는 너럭바위가 일품인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운곡천을 내려보며 들어 선 사미정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정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곳이다. 36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춘양삼거리를 지나 옥천3거리에서 좌측으로 난 울진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35번 국도를 따라 직진하여 안동방향으로 내려가다 조금 들어 가면 오른쪽으로 ‘사미정 1.2k’라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옥계(玉溪)를 건너 개울길을 따라 가다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사미정 마을에 이르게 된다. 차를 세우고 도로에서 운곡천을 바라보면 아름다운 정자 사미정의 뒷 모습이 봄 아지랑이 처럼 정겹게 눈에 들어 온다. 사미정으로 가는 시멘트 길을 따라 한 50m 내려가면 ‘사미정(四未亭)’이라는 표석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사미정은 여느 정자와 같이 주인의 발길은 끊기고 크지 않은 자물쇠만이 정자를 덩그라니 지키고 있었다. 사미정이 들어서 있는 사미정 계곡은 낙동강의 발원지인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Y자형의 계곡으로 사시사철 맑고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천석(天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울창한 송림과 기암괴석(奇岩怪石) 그리고 세상을 잊게하는 물소리는 찾는 이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자연과사람이 하나 되는 곳, 사미정
경북봉 화군 법전면 소천2리에 위치한 사미정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 , 1658 <효종 9>~1737<영조 13>)이 정미년(丁未年) 봄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소라의 별서뒤에 지은 정자로 처음에는 창주정(滄洲亭)이라 하였다. 옥천은 이미 1706년 12월 춘양의 소라 옥천산(玉川山)아래에 별서를 지은바 있다. 그는 아들에게 1727년(丁未年), 6월(丁未月), 22일(丁未日), 14시경(丁未時)에 사미정에 입주하게 하고 정자이름을 ‘사미정’이라 했다. 옥천은 ‘사미정기’에서 내가 종성(鐘城, 함경북도 국경지역의 고을 이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삼년만인 그 해가 정미년(丁未年)이고 그 해의 6월이 정미월(丁未月)이며 그 달의 22일이 정미일(丁未日)이고 그 날의 미시가 역시 정미시(丁未時)이니 이와 같은 날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했다. 내가 그 때에 중용(中庸)을 읽다가 공자(孔子)의 말씀이 「군자(君子)의 도(道)에 네 가지가 있으나 나는 하나도 능한 것이 없다」고 한 곳에 이르러서 책을 덮고 탄식을 하면서 성인(聖人)은 인륜(人倫)에 지극(至極)한데 오히려 능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마침이 시일(時日)을 만나 집 한 칸을 지어 사미(四美)라고 이름을 지으려 하였으나 죄를 짓고 귀양살이를 하는 몸으로 집을 지어 스스로 편안하고자 하는 것이 또한 마땅치 않아 삼천리밖에서 편지로 아들에게 부탁하여 이 시일에 소라(召羅 : 봉화 소천)에 4칸당(四間堂)을 짓게 하고 그 날을 기다려서 사미라고 이름하여 멀리서 회포를 부치려고 하였으나 나의 죄가 무겁고 나이는 많으니 어찌 능히 돌아 갈 수 있겠는가…….라며 회포를 달랬다. 또한 옥천은 ‘사미정기’에서 사미(四未)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또“군신과 부자와 형제와 친구와의 교제”이 네 가지는 본성에 근본하여 마음에서 구현되는 것이니 어찌 각각 상대를 해본 뒤에라야 그 도를 다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남을 책망하는데는 밝고, 자신을 용서하는데는 어두운 것은 인지상정이니 남에게서 구하고자 하는 바를 자신에게 돌려서 구하고, 능히 가까운 곳을 취해 살펴 보면 남의 정곡(正鵠 : 활을 쏠 때의 표적판)이 나의 정곡이며 저 사람을 자로 잰 것이 나를 그 자로 잰 것과 같으니 비록 성인이라도 제외(除外)가 될 수 없고 보통사람이라도 부족함이 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철두철미한 도이며 내외를 합하고 남과 나를 겸하여 하나로 한 것이다. 누가 말하기를 이 네 가지는 일상생활에 자신과 밀접한 관계이며 그 법칙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가까운 주변에서 구해야 한다. 사미(四未)가 아니더라도 하학(下學 : 가까운데부터 배워 점차 깊은 학문에 들어감)의 공부를 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이 당(堂)이 아니라도 하학의 공부를 하는 곳이 없을 수 없으나 곧 시일이 우연히 합치하는 것을 기다려서 당을 짓고 이름을 지어 기문(記文)을 썼으니 “그대는 이 도를 기다리는가 기다리지 않는가” 나는 웃으면서 과연 그렇다. 내 어찌 이것을 기다릴까. 인생은 날마다 큰 변화를 몰고 가는데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 없어 갑자기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에 빠졌다가 각성을 하면 혹은 소반에다 계명(戒銘)을 새기고 혹은 당실(堂室)에 이름을 붙여서 거울을 삼고 경계하는 글을 저술하여 잊지 않으려고 하니 비록 성인도 역시 그러 하거늘 우리와 같은 소인이 감히 경계할 바를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당의 이름을 지어 놓고 적당히 포치(布置)를 한 것 같으나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 그러나 나는 네가지에서 하나도 남과 같은 것이 없고 하물며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도 현명하지 못해서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이미 귀양을 간 허물을 가히 추후로 보상할 수 없으나 장차 착한 일을 하도록 노력만 하면 능히 할 수 있다고는 말 할 수가 없으나 꼭 죽는 날까지 이제부터 계속하여 스스로를 책망하는데 마음을 다하면 소반에 새긴 계명(戒銘)은 오히려 쓸모가 없게 되고 사미(四未)의 이름은 한갖 메밀껍질과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공자도 그처럼 반성하였으니 옥천도 자신과 같은 범인(凡人)도 마땅히 그처럼 반성해야 된다는 것을 담아 연·월·일·시에 네개의 ‘미(未)’자가 들어간 날을 택하여 정자를 짓도록 하였다. 현재 사미정의 평면은 어간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좌측방과 마루방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우측방은 통칸으로 하였다. 가구는 5량가인데 대량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사미정은 도지정문화재자료 276호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촐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경사진 위치에 들어 선 사미정은 정자내 현판인 ‘마암재(磨巖齋)’는 정조 때의 명재상인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78세에 쓴 친필이다. 사미정 앞 운곡천에는 초서로된 ‘비파암(琵琶 )’과 ‘마암( 磨)’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암각되어 있다.
절의를지킨 학자 옥천 조덕린
옥천 조덕린의 관향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이요. 별호는 창주(滄洲)이다. 조군(趙 )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658년(효종 9)에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注谷洞)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양 주실마을 입향조인 조전(趙佺)의 증손자이다. 12세에 청량산에 들어가 한겨울을 독서하고 돌아왔다. 그는 어릴적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출중(出衆)하여 소년시절에 이미 풍부한 학식을 쌓아 15세에 <현량책(賢良策)>을 저술했을 때에 필력(筆力)이 줄기차고 사리(事理)가 통달하여 세인(世人)들이 감탄하였다. 수려한 용모에 빛나는 안광(眼光)이 쏘는 듯 했으며 기질과 언동이 영특(英特)하였다. 20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할 때에 학우(學友)중에 가장 연소하였으나 모두들 존중하였으니 반장(泮長)이 무슨 일이 있을적마다 불러서 의논하고 말하기를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지만 조덕린같은 인품을 처음 보았다”하고 칭찬하였다. 1691년(숙종 1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뽑혀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사국(史局)으로 옮길 때에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이 천거하여 말하기를 “당대(當代)에 재주는 조덕린의 앞에 설 자가 없다”라고 극찬하였다. 1708년(숙종 34)에 강원도사(江原都事)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 송정규(宋廷奎)가 전세(田稅)를 올리려 하므로 강원도의 지세(地勢)의 좋지 못함과 민정(民情)의 궁핍함을 들어서 이를 반대하여 사임(辭任)하고 돌아왔다. 선생은 황해도사와 충청도사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원년) 수찬(修撰) 및 필선(弼善)과 교리(郊理)를 배수(拜手)하고 여러 번 상소(上疏)하여 시기(時期)에 따라 긴요(緊要)하게 힘써야할 정사(政事)에 관하여 진술하였다. 다시 사간(司諫)을 배수하고 ‘십조소(十條疏)’를 써서 정치의 잘못된 점을 명쾌하고 날카롭게 비판하였으며, 당파싸움의 고질화(痼疾化)했음을 우려(憂慮)한 내용이었다. 이 십조소로 인해 지평(持平) 이의문(李椅文)의 농간(弄奸)을 받고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이 억울한 귀양살이에 동정한 여러 사대부(士大夫)들이 노자(路資)와 음식을 보내왔었다. 오광운 판서(吳光運 判書)의 증행시(贈行詩)에 “곧은 이를 용납하여 들인 종성고을은 커졌으며 이진이 나셨으니 새재(鳥嶺)는 더욱 높아졌도다. 나라사랑 일편단심에 북관의 달은 새삼 더 밝고 몸은 늙어도 뜻은 변방의 구름 위에 높고 멀어라(容直鍾城大 生賢鳥嶺高 丹心關月若 身老塞雲遙)” 나라사랑 붉은 충성과 구름 위에 우뚝한 높은 뜻을 흠앙(欽仰)한 오언절구(五言絶句)다. 종성은 본가에서 극북(極北)으로 2.000리이니 70노령에 길을 떠나 설한(雪寒)을 무릅쓰고 한 달 반 만에 종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문을 닫고 방안에 고요히 앉아 주역(周易)을 읽더니 1727년(영조 3)에 정미환국으로 귀양살이에서 풀려 돌아오는 중도에 집의(執義)와 응교(應敎)를 연이어 제수하되 받지 않았다. 유배당하는 곤욕을 겪었음에도 두려움 없이 연거푸 상소하여 행정의 폐단(弊端)을 지적(指摘)하니 영조(英祖)께서 모두 옳다 하시고 받아들였다. 선생이 도성(都城)밖에 이르렀을 때에 사간(司諫) 벼슬을 내리니, 생각컨대 여러 번 임금의 은혜를 받고도 나아가 받들지 않았는데 연이어 관직을 주니 송구(悚懼)스러워 배수(拜受)하였다. 그 후에 신병으로 귀향하였으나 9월에 교리(校理)를 제수하고 다시 수찬, 사간(修撰, 司諫)으로 옮기니 다시 행정의 폐단을 연거푸 상소하였다. 또한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에서 글이 오면 반드시 선생이 번역하여 한자도 틀리지 않아 조정의 선비들이 모두 탄복하고 기리었다. 1728년에 응교(應敎)로 옮기니 부임하지 아니하고 귀가(歸家)하였다. 그해 3월에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良)이 영남과 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영조가 이르기를 “응교 조덕린은 문학과 견식이 영남 안팎에 신망이 높건만 지금껏 적당한 처우(處遇)를 받지 못했음을 모든 사람이 애석해하는 터이라. 특히 영남상도호소사(嶺南上道號召使)를 명한다”하는 은명(恩命)이 내리었다. 선생이 명령을 받고 격문(檄文)을 써서 발론하자 경상도에 사는 충의지사가 모두 모여 장령(將領)을 선출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출전하려 하였으나 역적들이 항복하고 평란되어 의병을 해산하게 되었다. 그 후에 영조의 부름으로 입궐(入闕)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하고 다시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기니 몇 달 후에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후에 병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36년(영조 12) 가을에 대각(臺閣)의 문신 김한철(金漢喆)이 옥천 선생과의 전날의 사감(私感)으로 다시 을사년의 10조소를 문제 삼아 외따로 떨어진 섬에 유배시켜 가시울타리로 가두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에 풍원군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고 이르기를 10년이나 지난 일을 들추어 일사(一事)를 재벌(再罰)함은 형정(刑政)의 체통(體統)을 손상할 노릇이니 나문탐실(拿問探實)하라 하였으며, 영조가 이르기를 “조덕린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시고, “사건의 실체가 밝혀질 때까지는 가택수색 하지 말고 몸을 착고로 채우지 말고 매질하지 말라”하는 특명을 내리었다. 선생이 지체 없이 상경하여 감옥에 갇혔을 때 79세의 융로(隆老)였음에도 우울한 기색 없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하였다. 심문하는 대신에게 청하기를 구두(口頭)로 말할 수 없으니 필기로 대령(對令)하겠다 하여 승낙을 얻어 선생이 하는 말을 문사랑(問事郞)이 받아쓰는데 조목을 따라 변명하는 언론이 올바르고 정당(正當)하여 맡은 관원이 탄복하였다. 심문받기를 마치고 나니 한밤이 지난 4경이라 관원 김재로(金在魯)가 위로의 말을 하면서 “자칫 바른 사람을 억지로 해칠 뻔 하였다”고 말하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문초(問招)하는데 임금이 선생의 진술서를 읽어보고 대신과 대간(臺諫)을 불러 설명하고 “한 가지 사건으로 두 번 귀양 보내는 것은 형정의 그릇됨이니 속히 석방하라. 조덕린은 공·맹(孔孟)의 성현서(聖賢書)를 읽은 대로 행하는 사람이라. 양식 쌀과 말(馬)을 주어 호송(護送)하라” 명령하였다. 그 후에도 김한철(金漢喆), 정언섭(鄭彦燮), 민택수(閔宅洙) 등이 연이어 모략 상소하였지만 영조는 곧이 듣지 않았으나 1737년 5월에 영남 유생(儒生)들이 선배 스승의 원통함을 풀어달라는 소(先師訟寃疏)를 올리니 영조가 크게 노하여 유생들을 국문하라 명령하니 김정윤(金挺潤)이라는 자가 좋은 기회라 여겨 옥천 선생의 을사소(乙巳疏)를 또다시 거론하고 조 아무개가 모두 주동(主動)하였으니 유생들의 소를 모를 리 없으리라 하여 임금의 의목을 현혹(眩惑)케 하였으므로 끝내 탐라가극령(耽羅加棘令)이 내렸다. 탐라도(耽羅島 곧 제주도)에 귀양 가서 가시울타리 안에 갇히도록 하라는 형벌이다. 이때에 선생의 말이 “나의 운명(運命)이라” 그해 가뭄이 심하여 유난히 더운 여름날 80노령으로서 며칠 계속하여 말을 타고 쉼 없이 달리다가 강진의 후풍관(候風館)에 이르러 숨이 가쁘고 병에 걸려 위중(危重)해졌다. 이에 붓을 잡고 자손들에게 유서를 썼다. 이때에 부사(府使) 홍중기(洪仲基)는 옥천 선생과 잘 아는 터라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에 1자 1손이 운명(殞命)하게 된 아버지, 할아버지 곁에서 흐느껴 우니 선생은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이르기를 “울지 말아라. 인생에는 천명(天命)이 있으니 천명을 거역할 수 없느니라” 말을 마치고 조용히 서거(逝去)하였다. 1737년(英祖 13) 향년 80세이다. 선생의 문집인 ≪옥천집(玉川集)≫ 9권이 있다.
사미정과 운곡천 뜨락에 봄이 내린다
올해는 겨울가뭄이 예에 비해 심했다. 하지만 봄을 알리는 나무들의 기지개는 여느해보다 일찍인것 같다. 몇일째 오락가락 짓궂던 봄비가 지나가더니 여기 저기서 하루가 다르게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사미정 도로변에 늘어선 어린 산수유 나무들도 노오란 눈망울들을 내밀고 있고 운곡천도 물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운곡천 뜨락 억새는 들이치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머리를 말리고 버들강아지의 부푼 가슴같은 봄은 올해에도 어김없이 오고 있다. 돌(石)은사람들의 불완전성이나 변절성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대상으로 옛부터 선비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이는 수천년동안 겪어 온 사람들의 심미적 자연관의 발로일 것이다. 사람들은 옛 돌로부터 인격수양과 유교적 가치관을 배웠다. 돌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과시하지 않고 향기로운 꽃처럼 향기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항상 적막하게 한 곳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찌기 고려 때 이곡은 ‘석문(石門)’이라는 글에서 ‘바위는 견고 불변하여 천지와 함께 종식되는 것, 두터운 땅에 우뚝하게 박히고 위엄있게 솟아서 진압하며 만길의 높이에 서서 흔들어 움직일 수 없는 것, 깊은 땅속에 깊숙이 잠겨서 아무도 침노하거나 제압할 수 없는 존재’라 하였다. 삼라만상의 모든 자연물들이 변화와 진화를 거듭해 가지만 바위만은 그 모습을 바꾸거나 변화시키지 않는다. 사람으로 말한다면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의인을 떠올릴 수 있다. 오죽하면 송나라의 미불은 바위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바위를 형님이라 부르며 절을 했을까. 사미정이 그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는 것은 운곡천의 옥빛물과 바위들의 조화로운 형상 때문일 것이다. 사미정은 갖출 것을 다 갖춘 정자이다. 특히 사시사철 흘러 내리는 운곡천의 맑은 물과 넓게 펼쳐진 너럭바위는 자연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성이 녹아 있다. 운곡천엔 오락가락 하던 봄비가 잠시 멈춘 시간을 틈타 햇살이 언듯 고개를 내밀더니 어둠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오는지 마는지 빗줄기는 가끔씩 사미정을 적시고 봄비는 밤이 되자 소록소록 소리를 내며 내리더니 언땅의 풀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게 한다. 사미정에도 봄이 내리고 있다.
《참고문헌》 봉화군,<봉화군사>,대구경부인쇄협동조합, 2002 봉화군,<봉화의 촌락과 지명>, 구일출판사, 1987 봉화군,<봉화의 정자>, 매일원색정판사, 1989 허균,<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 다른세상, 2002 이병한,<솔바람이 타는 악보없는 가락>, 역락, 2002 안동문화연구소,<영양 주실 마을>, 예문서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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