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6:16-23
‘16.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이 체통을 차리지 못한 것에 대한 비난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다윗과 미갈의 갈등 이야기입니다. 언약궤가 돌아 올 때 미갈은 다윗이 춤추는 것을 내다보고 업신여깁니다. 온 백성에게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고 돌아온 다윗을 미갈은 비난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녀는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다윗성으로 돌아오는 여호와의 궤, 다윗을 비난하는 미갈, 미갈에 대한 다윗의 반응, 미갈의 불임 등입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 왕이 체통 머리 없게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본 미갈의 반응으로, 다윗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는 말입니다. 원문에 의하면 다윗은 그 때 빙빙 돌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며 춤을 춥니다. 그 같은 모습을 본 미갈이 다윗을 천하게 본 것입니다. 미갈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여호와의 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아버지 사울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학자들은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미갈을 사울의 딸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 그런 미갈에게 다윗이 반응한 말입니다. 이는 미갈이 보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순수한 여호와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곧 개인적인 예배행위라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것에 대한 기쁨이고, 아울러 여호와께서 자신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은혜를 만끽하며 높이는, 지극히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 미갈에게 자녀가 없다는 기록입니다. 다윗의 아내들은 자녀들이 많지만, 미갈은 단 한 명의 자녀도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학자들의 여러 의견이 있는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은, 다윗이 그 후 그녀를 찾아가지 않아 생과부로 지냈다는 것이고, 다음은 여호와의 징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의 말 ‘그러므로’ 때문입니다. 곧 미갈이 법궤 앞에서 춤을 춘 다윗을 비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째 건 그녀는 불임입니다. 그녀의 언니인 메랍에게는 5명의 자식들이 거론되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기사가 전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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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 백성에게 축복을 하고 돌아온 다윗이 자기 가정에 들어오자마자 미갈에게 조롱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용사로 마음도 강한 사람입니다. 사울 왕에게 엄청 모욕적인 말을 들었지만, 그는 그런 폭언을 개념치 않았습니다. 왕의 저주에도 다윗은 요동할 줄 몰랐습니다. 사울 만 다윗에게 심한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10여 년 동안 도망자로, 거의 일 평생 전쟁터에서 살면서 수많은 적들과 사람들로부터 욕설과 모욕과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닫힐 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한 여인의 말에 그만 마음이 닫히고 맙니다. 미갈입니다. 그리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발설하지 말아야 할 처가집의 내력을 밝힙니다. ‘여호와께서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셨다!’ 짐승 같은 자들의 욕설에도 아랑곳 하지 않던 그가 이성이 허락할 수 없는 말을 해 버린 것입니다. 마음에 던져진 비수 때문입니다. 그 날은 다윗의 일생일대의 기쁜 날로, 그로선 최고의 희열을 구가하고 싶을 때입니다. 하필 그 때 미갈은 그를 업신여기며 조롱한 것입니다. 더구나 가족들을 축복하려 들어 온 가정에서 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닫힐 줄 몰랐던 그 마음이 사랑하는 여인의 말에 기어이 닫혀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 문은 다시 열릴 줄 모릅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과 마음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때와 장소도 중요합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욱 더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목동이며, 연주자이며, 시인이며, 군인이며, 왕인 영웅 다윗과 그를 사랑했던 미갈의 사랑은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물론 다윗도 잘한 것은 없습니다. 옹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단지 실수로 미갈이 자신의 불행을 그렇게 표현했을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매몰찬 폭언은 모자란 인품의 증거입니다. 어째 건 그 한 마디도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아름답게 피어야 할 그들의 사랑이 끝내 결렬되고 만 것입니다.
가장 기쁠 때 듣는 나쁜 말은, 가장 나쁠 때 들은 나쁜 말 이상의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대 한 만큼 그 이상으로 깨지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막말은 금물입니다. 특별히 부부지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금물 중의 금물은 시댁과 처가에 대한 발언입니다. 농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칫 오해가 천파만파 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아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가능한 한 최선의 말을 하면 좋겠습니다. 착한 마음, 선한 마음, 고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나가는 법입니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말을 잘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보다 더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마음을 잘 선택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