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서린 단장의 능선 전투
애를 끊는 아픔
중동부 전선에서 가장 큰 군사적인 역량을 지닌 아군의 부대는 미 10군단이었다. 바로 앞에서 소개한 ‘피의 능선 전투’에서도 미 10군단은 한국군 5사단 등과 함께 매우 고생스럽던 고지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피의 능선 전투와 함께 그 무렵의 대표적인 고지전으로 손꼽히는 것이 ‘단장의 능선’이라고 불렀던 싸움이다. 원래 당시 싸움을 부르던 호칭은 영어가 우선이었다. 미 10군단 예하의 미 2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를 마친 뒤 곧장 북상해 피의 능선으로부터 북방으로 11㎞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다시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그 역시 다른 고지전처럼 매우 많은 인명의 희생을 수반했다.
당시 전투의 참혹함을 목격했던 서방의 종군기자가 그 접전을 ‘Heart Break Ridgeline’이라고 적었다. 심장이 찢기는 듯 비통했던 능선이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이를 단장의 능선이라고 옮겼다. 맥락이 같은 말이고, 나름대로 우리식의 정서를 담은 번역이다. 단장(斷腸)이라는 말은 임진왜란의 구국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작품이라는 곳에서도 나온다. “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보이는 ‘애를 끊다’라는 말이 한자로는 단장(斷腸)이다. 창자가 끊기는 수준이니 그 고통과 비통함이 대단할 것이다.

1951년 9월 벌어진 단장의 능선 전투를 위해 기동 중인 미 2사단 9연대 장병들
지금의 휴전선은 이 단장의 능선을 확보하면서 동쪽의 펀치볼과 거의 같은 라인에 놓인다. 따라서 아군이 피의 능선에 진출하는 데 그쳤다면 동쪽의 펀치볼과 서쪽의 라인을 잇는 중간이 피의 능선을 향해 남쪽으로 10여㎞ 내려앉는다. 따라서 적의 입장에서 볼 때 이곳은 돌출부(突出部)에 해당한다. 그렇게 전선이 이뤄질 경우 아군은 적으로 하여금 돌출부에 머물면서 우리의 전선 양측을 공격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아군의 전선은 크게 불안정해진다. 그런 점 때문에 적의 돌출부 형성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판단에 따라 미 2사단은 피의 능선에서 전투를 막 마친 병력으로 하여금 다시 북상토록 한다. 미 2사단은 그런 임무를 예하 23연대에 부여한다. 1951년 9월 5일 피의 능선 983고지를 무혈점령한 2사단은 9월 12일까지 강원도 양구군 동면 사태리 인근에 있는 931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곧장 북상하는 길에 올랐다.
쫓기는 쪽은 북한군이었다. 그들은 피의 능선에서 상당한 인명의 희생을 냈다. 아울러 후방 차단의 위기를 느끼고서 피의 능선 983고지에서 벗어나 급히 북상한 참이었다. 따라서 그런 북한군이 11㎞ 북방에 있는 단장의 능선 일대에 견고한 방어막을 형성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1개 연대 앞세워 공격
그에 따라 선두에는 우선 사단 예하의 23연대가 섰다. 1개 연대의 병력으로도 우선 등을 보이고 쫓기면서 북상했던 북한군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봤던 것이다. 나머지 9연대와 38연대는 피의 능선 전투에서 격전을 치른 부대였던 터라 선공에는 나서지 않았다.
사태리 일대에 있는 단장의 능선은 남에서 북을 향해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로 이어진 곳이었다. 미군은 공격을 벌이기 전 이곳에 대한 관측을 통해 고지 일부에만 북한군이 들어서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따라서 그곳이 주 방어선이 아니라 전초(前哨)에 해당하는 진지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런 미군의 관측과 판단이 사실이었다면 그곳 일대에서는 격전이 벌어질 수 없었다. 미군은 여전히 북한군을 압도하고도 남을 강력한 화력과 장비를 보유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군의 관측 및 판단과는 영 다른 현실이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이곳 역시 피의 능선 못지않은 인명의 희생이 나왔던 곳이다. 전투 기간으로 볼 때는 오히려 한 달 정도 접전을 벌여야 했던 진지였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미군은 역시 오판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북한군은 그곳에 피의 능선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방어망을 이어 놓은 뒤 아군의 북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선의 지휘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실수였다. 들어오는 정보와 관측 자료 등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해도 그 안에는 적의 기만과 은닉에 의한 내용의 오류 등이 들어있을 수 있다. 지휘관은 그런 점을 감안해 늘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내 판단이 맞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방책 또한 많이 품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무튼 미군은 북한군의 방어망이 대단치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급히 23연대를 북상시켜 사태리 일대에 있던 험악한 산악 고지인 단장의 능선을 향하도록 했다. 북한군은 9월 5일 피의 능선 983고지에서 몰래 빠져 나온 뒤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켜 단장의 능선 일대에 방어망을 이루도록 했다
미군을 상대로 850 고지에서 완강하게 버텨낸 북한군
북한군 병력은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들은 단장의 능선 894고지와 931고지 일대에 5군단 예하 6사단을 배치했다. 나머지 지역에는 2군단 예하 13사단이 늘어섰다. 포진(布陣)의 방식은 피의 능선에서와 거의 같았다. 전투 지역을 두 부분으로 나눠 각 한 쪽을 1개 군단이 맡도록 한 모습이었다. 피의 능선과 그 북쪽에 있는 단장의 능선은 지형이 비슷했다. 높고 험준한 산악이 거듭 이어지는 곳이다. 따라서 미군의 대규모 기동에는 불리했다. 단장의 능선 전투는 크게 보면 두 단계로 나뉘어서 펼쳐진다. 1단계 공세에서 미군은 고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약 한 달을 끌어 2차 단계 작전이 펼쳐지면서 마침내 931고지를 확보함으로써 단장의 능선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1단계의 작전 개념은 병력을 축차적으로 투입하는 식이었다. 단장의 능선을 이루는 몇 고지에 순차적으로 아군의 병력을 접근시켜 하나씩 점령함으로써 종국에는 일대 고지를 모두 손에 넣겠다는 계산이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던 작전 그러나 미군의 장점은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는 좀체 잘 발휘되기가 어려웠다. 세계 최강의 화력과 장비를 좁고 험한 산악지대에서 수월하게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미 2사단 23연대가 먼저 나서 단장의 능선 동쪽에 있던 북한군 엄호 진지를 공격했다. 이어 단장의 능선 중앙부에 있던 850고지를 공격해 점령한 뒤 차츰 북상하면서 나머지 고지를 빼앗겠다는 계획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9월 12일 미 23연대는 단장의 능선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사태리 일대의 북한군 엄호 진지를 공격해 바로 이곳을 점령했다.

산악 지형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미 24사단 부대원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엄호진지는 소수의 병력만 머무는 곳이어서 쉽게 빼앗을 수 있었으나 능선 중심부에 해당하는 850고지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북한군은 이곳에서 완강한 저항을 펼쳤다. 결국 23연대의 발걸음은 850고지를 눈앞에 두고 멈췄다. 그에 따라 미 2사단은 9연대 1개 대대를 동원해 협격을 펼쳤다. 단장의 능선 남쪽 894고지를 이들로 하여금 공격케 함으로써 적의 방어력 분산을 노린 뒤 23연대로 하여금 850고지에 다가서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결사적으로 덤볐다. 23연대의 병력 희생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졌다.
공격 7일째인 9월 18일에 이르러서야 23연대는 850고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로써 능선의 중간 영역에 간신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후방에 있는 거점지역인 문등리로부터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충 받을 수 있었다. 미군도 쉬지 않고 공격을 벌였지만, 북한군 또한 이에 간단없이 나서면서 죽거나 부상당한 인원의 대체병력을 후방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었다. 역시 피의 능선 전투와 흡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군으로서는 그런 방식의 싸움을 이어가기가 힘에 겨웠다. 병력의 희생이 나날이 커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약 2주 동안의 작전에서 23연대의 인원손실은 950여 명에 달했다. 이 정도면 1개 연대로서는 공세의 한계에 봉착한 셈이었다.
그 무렵에 2사단장으로 새로 부임했던 로버트 영(Robert N. Young) 소장은 이런 방식의 공세 지속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일정한 전기(轉機)를 마련하지 못한 채 그냥 고지에 다가선다면 인명희생만 클 뿐 작전성공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봤던 것이다. 그로써 1단계 작전은 끝을 맺는다. 다른 방식에 의한, 양상이 전혀 다른 싸움을 벌여야 고지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본 신임 2사단장의 판단은 옳았다. 그는 피의 능선 때와 같은 새 접근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전면압박과 우회를 통한 후방의 차단이 큰 지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