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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29) 수원 화성 융·건릉
나라 빼앗기고 외롭게 버려진 정조와 사도세자 장조의 왕릉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화성 건릉 정자각’, 유리건판, 1911년 4월 2일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정조 때 조선에 가톨릭 신앙 들어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25세 나이에 조선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한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내린 첫 교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했던 정조가 임금이 되자마자 오랜 세월 응어리진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을 이젠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포였다. 그는 왕권을 키우기 위해 인재를 양성했고, 문화를 장려해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웠다. 가톨릭 신앙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정조 때였다.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관심이 깊었던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와 일행은 1911년 4월 2일 조선의 위대한 군주로 손꼽히는 정조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던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찾았다. 건릉(健陵)과 융릉(隆陵)이다.
건릉은 정조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 능이고, 융릉은 ‘사도세자’로 더 잘 알려진 정조의 아버지 장조와 부인 혜경궁 홍씨 곧 헌경왕후의 합장 능이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정조 이후 기울어진 국운을 회복하려는 뜻에서 장조부터 조선 왕조를 다시 수립한다는 의미로 이들을 ‘황제와 황후’로 추존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천주교인 박해
융·건릉은 화성 팔경 중 제1경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이다. 화성은 정조가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세운 성이자 고을이다. 기품있는 소나무와 단아한 참나무 숲길에 들어서면 곧장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에 건릉이, 오른편에 융릉이 있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먼저 건릉으로 향했다.
1800년 음력 6월 28일 정조가 49세 나이로 갑자기 승하했다. 그가 죽은 지 5일 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올랐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1801년 천주교인들을 박해했다. 바로 신유박해다.
정순왕후와 사도세자를 죽인 벽파 무리는 정조를 융릉 동편 옛 수원부 강무당 터 흉지에 묻었다. 이후 1821년 정조의 부인 효의왕후가 서거하자 융릉 서편 향교 터로 천장(遷葬), 정조와 효의황우를 합장해 건릉을 조성했다.
능지기가 베버 총아빠스 일행을 먼저 ‘건릉 정자각’으로 안내했다.<사진 1>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봉분 앞에 ‘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이다. 정자각 좌우로는 제례를 준비하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있다. “정자각은 비어 있었다. (⋯) 정자각은 선왕의 위패를 모셔 두고 해마다 제사를 봉행하는 곳이다. 향로가 제삿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상에는 밥과 술과 더불어 향로도 올린다. (⋯) 어두운 기와지붕을 떠받치는 서까래는 전부 엷은 푸른 바탕에 붉고 흰 단청으로 치장되었다. 청동 잡상들은 용마루 위에 웅크리고 앉아 수백 년 동안 파손 위기를 견뎌내었지만, 잡귀를 쫓으려고 기와지붕 위에 어렵사리 올려 둔 단철 사슬들은 녹슬어 가고 있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244쪽)
능은 그 자체로 조선 임금의 권위를 드러내기 충분하다. 건릉은 봉분의 흙과 사초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병풍석을 대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하지만 융릉과 달리 문·무인석과 석수 등 왕릉 형식에 맞게 봉분 주변 석물을 세웠다.<사진 2>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화성 건릉’, 유리건판, 1911년 4월 2일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정조, 아버지 장조의 묘 옮기고 자주 참배
정조는 생전에 아버지 장조의 묘를 배봉산에서 천장한 후 융릉을 자주 참배했다. 정조는 융릉을 옮긴 후 12차례나 화성행궁을 했다. 풍수에 능했던 그는 아버지 곁에 묻히고자 융릉 주변 산을 둘러보며 자신의 묫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건릉의 또 다른 주인은 효의왕후 김씨다. 김시묵의 딸로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안타깝게도 정조와 효의왕후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효의왕후는 육십이 넘어서도 정순왕후와 헌경왕후를 모셨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어서도 존호를 사양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나라가 망한 후 외롭게 버려진 왕릉을 보면서 자신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먹먹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래서 능지기를 “그가 지키는 무덤처럼 숲 속에서 잊히고 버려진 존재였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런 감정이 컸던지 베버 총아빠스는 건릉에서 직선 거리로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융릉에는 가지 않고 지나쳤다.
하지만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한국 사진 아카이브에는 1911년에 촬영한 융릉 사진이 보관돼 있다. 아마도 동행했던 카니시오 퀴겔겐 신부가 촬영하지 않았나 싶다. 그의 사진 다수가 베버 총아빠스의 1911년 조선 여행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융릉의 사진이 베버 총아빠스의 사진적 시각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구도를 제대로 잡지 않고 급하게 찍은 게 역력하다. 베버 총아빠스는 풍경에 인물을 넣어 촬영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융릉 사진에는 주제인 능조차 없고 문·무인석만 촬영돼 있다. 아마도 퀴겔겐 신부가 급하게 뛰어가 잽싸게 석물만 찍고 일행에 합류한 모양이다.<사진 3>
화성 융릉은 세종의 영릉 다음으로 명당이다. 정조는 비극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가 천하의 명당에서 안식을 누리길 원했다. 그래서 풍수에 능했던 남인 출신 윤선도가 효종의 영릉으로 추천했던 화산 수원부 객사 뒷산에 융릉을 조성했다. 윤선도는 ‘화산은 누워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으로 용·혈·지질·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워 천 리에 다시 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라고 했다. 정조는 융릉 천장을 시작으로 화성을 축조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후 대성통곡했다.
- <사진 3> 작가 미상, ‘화성 융릉’, 유리건판, 1911년 4월 2일 화성,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융릉 문·무인석, 조선 왕릉 대표하는 석물
융릉의 문·무인석은 영조가 조성한 인조 장릉의 석물과 함께 조선 왕릉을 대표하는 석물로 꼽힌다. 아마도 이 문·무인석이 너무 빼어나 융릉에서 이 석물만 중점적으로 촬영한 듯하다.
융릉의 또 다른 주인은 헌경왕후 곧 혜경궁 홍씨다. 그는 남편 장조의 참변을 소재로 한 자전 수필 「한중록」을 저술했다. 아들 정조마저 죽고 순조가 임금이 된 후 왕실 어른으로 조용히 생활하다 81세 나이로 서거했다.
복자 강완숙(골룸바)이 헌경왕후의 7촌 서질부이다. 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의 처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신유박해 때 강완숙과 함께 순교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초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방문하면서 조선 천주교회사를 간략하게 기술했다. 그중 정조 말기와 신유박해 초기 부분을 이렇게 서술한다. “작고 미약하게 출발한 조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4000명으로 불어나자, 1791년 잔불 속에 숨어 있던 증오의 불씨에서 돌연 첫 번째 박해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죽었다. 사제도 없이 신앙을 다져온 이 가련한 사람들이, 친지들의 눈물과 탄식으로 마음이 약해졌다 한들 그게 어디 놀랄 일이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웅들은 조선의 야만적 관례에 흔히 있는 고문의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그 믿음 하나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였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0쪽)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0) 서울 청량리 홍릉
일제에 의해 피살된 명성황후, 2년 만에 국장 치르고 안장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홍릉 능역을 둘러보고 있는 선교사들’, 유리건판, 1911년 2월 25일 청량리 홍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09년 남자 수도회 최초로 한국 교회 진출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연합회는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 요청으로 한국의 사범학교와 실업학교 운영을 위해 1909년 남자 수도회 최초로 한국 교회에 진출했다. 당시 한국은 일제에 완전히 침탈됐고, 이듬해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었다.
정교 분리를 앞세워 신앙 공동체를 유지해온 한국 교회는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의거로 더 이상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없게 됐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여러 법령을 통해 한국인들과 교회를 옥죄었고, 성 베네딕도회가 운영하려던 사범학교의 허가도 내주지 않았다.제국주의의 거친 바다에 한 척의 작은 조각배 같았던 한국의 사정이 염려스러웠던 상트 오틸리엔연합회의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서울 백동(지금의 혜화동)에 지은 수도원 축복을 위해 1911년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더 이상 먼발치에서 한국의 문화 세계를 관망하는 소심한 관찰자가 아니라 지금 한반도 곳곳을 탐사하며 우리 민족의 문화와 풍속 그리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했다.
“인구 1800만의 작은 나라 한국은 아시아 거대 민족들의 틈바구니에서 존재감이 거의 희박해졌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점차적 영락의 길을 걸으면서도 고유의 독자성을 잃지는 않았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주권을 잃고 일본 제국에 병합되고 말았으니 이 격변기에는 자신을 지키기도 어렵게 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속국으로서 억지로라도 새 지배자에게 굴신해야 할 뿐 아니라, 겨레가 낯선 이민족에게 급속히 동화되는 모습까지 보아야 할 처지게 되었다. 한반도 병합 이후 속절없이 흐른 몇 년 사이에 숱한 한국 민속이 사라져 버렸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도 급격히 그 전철을 밟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0쪽)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청량리 홍릉 무인석’, 유리건판, 1911년 2월 25일 청량리 홍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시신 불 태워져 2년간 장례도 치르지 못해
1911년 2월 25일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비운의 죽음을 맞았던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을 찾았다.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 8일 일제에 의해 살해됐다.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 주도로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일본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역사는 이를 ‘을미사변’으로 기록한다.
“혼돈의 시대였다. 1894~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한국을 중국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켰으나 이는 한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의도적 방책이었을 뿐이다. (⋯) 1895년 10월 8일 60여 명의 자객이 궁궐을 범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시신을 밖으로 끌어내 멍석과 옷가지를 덮은 후 불을 질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자객들이 은밀히 잠입하여 일을 치른 후 탈출할 수 있도록 일본군 수비대가 사전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본에는 드라마의 종장을 서둘러 끝내 버릴 길이 열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종 황제의 폐위와 한일병합이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96~98쪽)
명성황후는 시신이 불태워져 2년간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다가 1897년 11월 21일 국장을 치른 후 황후가 입던 옷을 시신 삼아 겹이불과 겹옷을 입혀 청량리 홍릉에 안장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자신이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 가운데 한 명이었고 분명 조국을 사랑한 여인”이라고 표현한 명성황후의 홍릉에 수도자들과 함께 올랐다.<사진 1> “재실 바로 뒤에 솟은 것이 능이다. 약 10m 높이의 구릉에 지름 약 10m의 평지를 조성하여 그 한복판에 능을 꾸몄다. 봉분은 지면 위로 높이 돋우고 잔디로 덮었다. 묘혈은 그 아래 있었다. 능의 배후를 반원형 담장으로 둘러쳐 봉분을 보호했는데 봉분과 담장 사이의 공간은 사자나 양 같은 큼지막한 화강암 동물 상을 세워 두기에 충분했다. 동물 상의 머리는 담장 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 동물들은 명부에서 안식하는 왕비의 수호자로 힘과 권력을 상징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01~102쪽)
베버 총아빠스는 홍릉으로 가는 길에서 을미사변과 1896년 아관파천이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을 무거운 마음으로 되새겼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가 “러시아가 한국의 주인이 되면 가톨릭 선교 활동은 더 이상 없고 선교사들을 서서히 말살시킬 것입니다. 새 선교사도 더는 못 옵니다”라고 했다고 뮈텔 주교에게 직접 들었다. 그래서 베버 총아빠스는 “선교의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이 전혀 애석하지 않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청량리 홍릉과 아이들’, 유리건판, 1911년 2월 25일 청량리 홍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친일 세력에 의해 조성된 ‘음울한 장소’
홍릉의 검은 화강암 비석 앞에 선 베버 총아빠스는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1911년 한국을 바라본 베버 총아빠스의 감정은 이랬다. “밀어닥치는 이민족들에 맞서 국가로서의 자신을 지킬 희망이 그나마 남아 있었을 때는 철저한 학교 교육을 통해 서양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구할 희망의 닻에 절망의 힘으로 매달렸다. 적어도 백성들은 그랬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미 정치적· 경제적 정복이 진행되고 있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547쪽)
베버 총아빠스는 홍릉을 지키는 육중한 무인석을 보고선 그나마 위안을 느꼈을 것이다.<사진 2> “기골이 장대한 시종 무관 두 기가 보였다. 무거운 제복 차림의 석조 시종 무관들은 왕비의 공덕이 기록되어 있을 법한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손아귀가 억세 보였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02쪽)
홍릉은 고영희 등 친일 세력에 의해 조성됐다. 그래서인지 베버 총아빠스는 홍릉을 ‘음울한 장소’라고 표현했다.<사진 3> “이 음울한 장소 위로 나뭇가지들이 장중한 침묵 속에 드리우고, 초록의 벽이 되어 뭇사람의 아우성을 방파제처럼 든든히 막아 주었다. 노을빛 불타는 먼 산봉우리만 이곳을 굽어보며 무덤 속에 잠든 왕비의 권력을 지켜주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기가 여느 무덤과 달랐다. 공기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능의 안식을 방해할까 두려웠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02쪽)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1) 일손 돕는 아이들
척박한 환경에서도 일손 도우며 신앙 키워가는 교우촌 아이들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아기를 업은 소년과 종이 우산을 든 아이’, 랜턴 슬라이드, 1911년 5월 황해도 해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들음’과 ‘봄’은 신앙 성장시키는 자양분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랑’이라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완전한 사랑에 대한 신앙이며, 그 사랑의 결정적인 힘, 곧 세상을 변모시키며 시간을 비추어 주는 사랑의 능력에 대한 신앙입니다.”(「신앙의 빛」 15항)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믿게 됨으로써 예수님 안에 계시된 하느님 사랑 안에서 신앙을 성숙시켜 간다. 요한 복음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우리 삶 안에 맞아들이고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 안에서 그분과 결합되어 그분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걸을 때 비로소 그분의 존재를 믿게 된다고 가르친다.(요한 2,11; 6,47; 12,44 참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대물림한다는 것이다. 가족 간 사랑 안에서 믿음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가르친다.(로마 10,17) 조부모와 부모가 자녀에게 들려주는 성경 말씀을 통해 신앙의 순종을 전수한다. 또 믿음은 ‘봄’으로써 성장한다. 어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봄으로써 자녀들은 신앙에 젖어든다. 따라서 ‘들음’과 ‘봄’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산속 깊은 골짜기에서 교우촌을 이루며 신앙을 지켜온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 환경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교우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특히 황량한 산중 고독 속에 조부모·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을 대견해했다. “그들은 고통과 궁핍 속에 자랐고 일용할 양식을 척박한 대지에서 힘겹게 얻었다. (⋯) 뜨거운 믿음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저 눈동자들! 이 산골짜기에서 신앙을 구했고, 신앙은 그들의 전부였으니 그들이 이 산골짜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 191~193쪽)
이번 호에는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가족을 도우며 신앙을 키워가던 교우촌 아이들의 모습, 그중에 일손 돕는 아이들 모습을 살펴본다.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담뱃대에 담뱃잎을 담고 있는 프란치스코와 체칠리아’, 랜턴 슬라이드,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능숙하게 담뱃잎 재워주는 두 어린아이
1911년 5월 16일 황해도 청계동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카메라 셔터가 고장 날 정도로 신나게 촬영했다. 그는 이날 점심 식사를 막 마쳤을 때 두 어린아이가 자신과 일행들에게 담뱃대에 담뱃잎을 재워주는 걸 촬영했다.<사진 1>
“우리의 멋들어진 여름 식당은 해가 어디 걸려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침은 주로 제의실 입구에서 함께 먹고, 점심은 성당문 옆 마루에서, 저녁은 아예 밖으로 나가서 먹는다. 최고의 명당자리는 역시 야외에 있다. 그곳에는 봄날의 훈풍이 불고,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활기 넘치는 아이들과 진중한 남자들끼리 넉넉히 함께할 수 있다. 그들은 묵묵히 지켜보는 것으로 우리의 식사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한다. 사제가 기꺼이 그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기에 기쁘고, 종일토록 책임과 압박에 시달리다가 한때나마 사제 곁에 머무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기에 기쁜 것이다. 점심 식사가 끝났다. 빌렘 신부 복사의 아들 프란치스코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 마치 평생 담배를 피운 사람처럼 능숙하게 우리 담뱃대에 담배를 담아 주었다. 그때 불청객이 나타났다. 사리원에서 온 순사들인데, 하나는 일본인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인 통역이었다. 빌렘 신부를 만나러 왔다지만 우리 때문에 온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우리 신원을 확인하려 들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 421~422쪽)
능숙하게 담배를 재우는 두 아이는 ‘프란치스코와 체칠리아’다. 사내는 빌렘 신부의 복사 안봉근(요한 세례자)의 다섯 살배기 ‘창익’이다. 세례명이 체칠리아인 여아는 누구의 자녀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 안봉근 일가의 친족일 것이다. 베버 총아빠스가 놀라워할 만큼 아이들이 능숙하게 담뱃잎을 재우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담배 시중을 든 모양이다.
오늘날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성당 마당에서 사제들과 선교사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가 담배를 권해드리는 어린아이들이 천진하기만 하다. 이 아이들이 집안에서 얼마나 가정교육과 신앙교육을 잘 배웠는지 유추할 수 있다. 아마 담뱃잎을 재워주는 것이 아이들에겐 성직자·수도자들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벌멍덕을 든 아이들과 벌통’,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집안 일 돕는 어린아이들의 봉사는 겸손
베버 총아빠스는 황해도 청계동 한 가정 뒷마당에서 벌멍덕을 든 아이들을 촬영했다.<사진 2> 양봉은 수도자들의 주요 노동 중 하나여서 자연히 관심이 갔을 것이다. 베버 총아빠스와 동행하며 한국의 풍물을 촬영한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는 1918년 서양 양봉 기술을 한국인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양봉요지」를 저술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봉 교육교재다.
벌멍덕은 주로 우리나라 토종 꿀벌을 키울 때 쓰는 도구다. 분봉해서 벌통을 옮길 때 멍덕 안에 꿀을 발라 벌들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들어가 자리 잡도록 하는 데 쓰인다. 지푸라기를 꼬아 고깔 모양으로 만든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아이들은 담장 앞 짚 주저리를 씌운 나무 벌통 곁에 서 있다. 오랫동안 양봉을 해본 탓인지 벌통 옆에서도 겁을 내지 않는다. 짚 주저리 속 벌통 위에는 벌이 꿀을 저장하고 새끼를 칠 수 있도록 뚜껑을 덮어뒀다. 벌멍덕을 손에 쥔 아이가 아마도 책임지고 벌을 키우는 모양이다.
집안 일을 돕는 어린아이들의 봉사는 겸손하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가장 단순한 일을 맡기지만 아이들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의 정신과 의지, 정서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교감한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청계동을 방문하기에 앞서 1911년 5월 11일 황해도 해주의 명망 있고 유복한 한 교우 집에서 묵었다. 집 주인은 집 일부를 경당으로 꾸몄고, 사제관으로 방 2개를 증축해 놓았다. 베버 총아빠스는 이곳에서 ‘아기를 업고 있는 아이와 종이 우산을 들고 있는 아이’를 촬영했다.<사진 3> 아마 신심 깊은 이 집 주인의 자녀일 것이다. 맏이로 보이는 앳된 소년이 막내를 들춰 업고 우산을 든 동생을 돌보고 있다. 베버 총아빠스가 든 카메라에 호기심을 보이는 둘째와 달리 형은 무심하다.
어쩌면 베버 총아빠스는 이 사진으로 형제 간 신뢰를 표현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신뢰는 찰나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충실을 기반으로 한다. ‘큰 형이 우리를 돌보고 있구나’ 하는 절대적 확신이 있어야만 그 자리가 평안해진다. 신뢰는 형제애의 품위를 드높인다.
- <사진 4> 작가 미상, ‘장작 패는 소년’, 유리건판, 1920년대,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늠름하고 당당하게 장작을 패는 소년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는 ‘장작 패는 소년’ 사진이 보관돼 있다.<사진 4> 누가 어디서 촬영했는지는 기록이 없고, 1920년대 사진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사진 속 도끼를 든 소년은 늠름하다. 눈매도 나이에 비해 예사롭지 않다. 소년 뒤로 수북이 쌓인 생소나무를 보아 아마도 겨울나기 땔감을 준비하는 듯하다. 한 가족의 따뜻한 겨울나기가 이 소년의 도끼질에 달려 있다. 소년의 얼굴에 알듯 모를 듯 행복감과 자신감이 피어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도끼를 든 당당함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낸다.
당당함은 자신이 충만할 때만 드러나는 기품이다. 대물림으로 켜켜이 쌓인 신앙의 확고함은 세상 안에서 당당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 부모와 함께 실천하며 성숙한 아이들의 신앙은 교회뿐 아니라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생명을 불어넣는 활력이다. 그래서 교회는 아이들을 ‘보화’라며 소중히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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