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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민수기 제3강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말씀/민5:1-6:27
요절/민5:3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주하는 이스라엘 진영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장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나병환자, 유출증이 있는 자,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조직만 갖추고 역할만 부여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는 그들 공동체 내부에 있는 부정한 것과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나병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제의적인 의미에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결과로 생각했습니다. 또 유출증은 남자나 여자의 생식기에서 피나 고름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대부분 성적인 불결함에서 비롯됩니다. 또 생리적인 부분도 여기에 포함되었는데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제의적인 의미에서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왜냐면 피와 생리적인 유출액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로서는 피의 유출과 생리적인 유출이 곧 죄의 결과로 생명을 파괴시키는 것으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주검, 즉 시신은 죄의 삯으로 초래된 죽음의 현상적 결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는 부정한 자가 되고 죽은 자와 접촉한 자도 일주일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병, 유출증, 시신은 죄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병환자, 유출증이 있는 자, 주검과 더불어 주검과 접촉한 자를 부정하다고 말씀하셨고 부정하게 된 자를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내보내 이스라엘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진영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도 성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정결과 거룩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요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백성은 그 무엇보다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 건물이 아무리 크고 화려할지라도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모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 된 요소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는 죄에 대한 분명한 회개와 결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정결함과 거룩함으로 늘 회개하여 돌이킬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축복 받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성결하고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시편 119편 9절은 말씀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거룩과 경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거룩과 경건을 회복할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죄악들을 내보내고 늘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를 의지하고 주의 말씀을 지켜 따르므로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진영의 거룩성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고는 회개와 보상을 하지 않은 채 갈등과 다툼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범하는 죄’란 이웃에게 피해나 상해를 입힌 죄를 가리킵니다. 레위기 6장 1-7절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이웃에게 맡긴 물건이나 담보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이웃의 것을 강제로 빼앗거나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 감추거나 거짓 증언으로 손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는 오분의 일을 더해 보상한 후 하나님께 속건 제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속건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렇게 하신 데에는 회개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피해를 끼친 이웃에서 보상한 후 하나님께 속건 제물을 드려 죄 사함을 받게 하시는 것을 통해 무엇을 깨닫습니까? 첫째는 사람들에게 잘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 짓는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사람들에게 짓는 죄는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못했어도 하나님 앞에서만 회개하고 사람들에게는 침묵합니다. 반면 인간 중심적인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짓는 죄는 민감하지만 하나님께 짓는 죄는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 가지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잘못하면 그 사람과 나와의 문제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입혔어도 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면 모른척하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범하는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 합당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지은 죄를 자복하고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으면 먼저 그 지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해를 끼친 사람에게 찾아가 참회의 심정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잘못에 대한 진실한 고백과 반성 없이 물질적인 보상만 하는 것은 참다운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지은 죄를 자복한 후에는 죄 값을 온전히 갚아야 합니다. 피해액에 1/5을 더해 보상해야 합니다. 1/5은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한 물질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짓는 죄도 하나님께 짓는 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하듯 사람들을 대해야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도 온전함 속에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31절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의심의 문제를 다룹니다. 분량이 많고 내용이 상세한 것은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로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남편이나 아내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받고 의심할 때 어떻게 될까요? 서로 의심의 눈초리 가운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불륜은 상대가 있기 때문에 공동체 내에서도 서로 간에 의심이 쌓여갈 수 있습니다. 부부간이나 공동체 속에서 신뢰를 쌓지 못하고 의심 받고 의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불행 중에 불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해결 방안을 제시합니다. 혹시라도 배우자의 정절이 의심되면 제사장에게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경우 제사장은 저주의 쓴 물을 아내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유대인 학자들에 의하면 만약 이 경우 아내에게 불륜의 죄가 있다면 저주의 쓴 물이 독이 되어 낙태를 하거나 몸이 부어 죽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 여인에게 죄가 없으면 그 쓴 물은 오히려 약이 되어 여인의 몸을 강화시켜 아이를 잘 임신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들의 결과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이런 의심의 법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은 남편이든 아내든 탈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고 탈선할 때 하나님께서 그 가정과 공동체에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한편 남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는데도 남편의 의심 때문에 저주의 쓴 물을 마신 여인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오늘날 같으면 이런 고통을 준 남편을 무고죄로 고소할 것입니다. 의처증이 심하다며 정신 병동에 가두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백한 아내를 의심한 남편에 대해 무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의심의 법을 통해 숨겨진 죄를 드러내거나 또는 부당하게 의심 받고 정죄 받는 아내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남성 중심 사회였습니다. 아내가 불륜을 행했다고 의심 받으면 학대를 당하고 쫓겨나기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하나님은 의심의 법을 통해 결백한 여인을 보호하시고 부부간의 의심을 해소하여 신뢰 속에서 살아가게 도우신 것입니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신뢰입니다. 특히 부부간에 신뢰는 신앙생활의 기초요 가정의 뼈대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가장 고치기 힘든 문제가 의처증, 의부증이라고 합니다. 부부간에 의심이 생기면 신앙생활이 흔들리고 가정도 흔들립니다. 더 나아가 공동체도 흔들립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의심을 심어 신뢰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였습니다. 서로를 탓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가정들이 깨어져가고 있습니다. 하도 많다보니 돌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TV프로그램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한 깨어질 위기에 처한 가정들을 돕고 섬겨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행복과 기쁨의 동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가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에 ‘네’가 ‘나’이고 ‘내’가 ‘너’다는 한 몸 의식 속에 서로를 신뢰하고 아낄 때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심하고 서로를 탓할 때 한 몸 의식은 깨지고 가정의 위기와 불행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 사이에 서로를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한 몸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에 대해 신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잠언 5장 18-20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우리 하나님이 허락하신 배우자를 best로 여기고 사랑과 존경으로 서로에게 신실해야겠습니다. 또 싱글 형제자매들은 신뢰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믿음의 가정을 소망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요소들을 내보내고 신뢰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된 자세입니다. 6장은 나실인의 서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실인’은 '헌신된 자, 드려진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 몸을 구별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을 나실인이라고 부릅니다.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출생 때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기간을 정해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섬기는 일에는 남녀차별이 없습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자신을 구별하여 성막에서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원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가를 잘 말해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된 나실인에게는 3가지 금지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포도주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어떤 것도 입에 대서는 안 되었습니다. 포도주는 쾌락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사람의 흥을 돋우기 때문에 잔치할 때 많이 사용됩니다. 하지만 술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자제력을 잃고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때문에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생 포도나 건포도, 심지어 씨나 껍질도 먹지 말도록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사신 자들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에 기초해서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로 살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하는 일체의 것들을 멀리하고 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해야 합니다.
둘째, 서원한 모든 날 동안에는 삭도로 머리털을 밀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나실인에게 있어 머리털은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서원 기간 중에는 머리털을 기르다가 서원이 끝나 희생 제물을 바칠 때 머리털을 밀어 화목 제물 밑에 타고 있는 불 위에 얹어 태웠습니다. 독특하게도 삼손은 나실인이었지만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고 블레셋 청년들과 술을 마시며 흥겹게 지냈습니다. 삼손이 살던 시대는 각자의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삼손에게서 나실인의 삶을 거두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 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들릴라에게 속아 머리털이 잘리게 되자 하나님께 받은 모든 힘과 능력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맷돌 돌리는 신세가 됩니다. 삼손이 머리털을 잘린 후 힘을 잃고 비참하게 된 것은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털이 잘렸기 때문입니다. 머리털을 잘랐다는 것은 더 이상 나실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실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은 힘과 능력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헌신된 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드리고 열정적으로 섬기고자 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는 것을 우리 또한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잔재미와 쾌락에만 빠져 살다보면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잃어버리고 맥없이 힘없이 은혜 없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힘과 능력을 잃어버리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자기 보기에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사사기 16장 22절에 보면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말씀합니다. 삼손은 머리털이 잘리고 비참한 신세가 되자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강하게 하셔서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빼앗았던 힘을 다시 공급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아무리 무너지고 힘없는 신앙이고 그런 삶일지라도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셋째, 어떤 경우에도 시체와 접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설사 그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죽었을 때에도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자와 접촉하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게 시신을 만지게 되면 부정하게 되어 7일 동안 진영 밖에 살아야 합니다. 7일째가 되면 머리털과 수염을 밀고 속죄 제물과 속건 제물을 드린 후 다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간 나실인의 생활은 무효가 되어 다시 서원한 기간 동안 나실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게 나실인을 구별하여 세우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엘가나의 아내 한나가 서원 기도를 합니다. 자식 없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셔서 자식을 주시면 평생 그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사무엘이 태어났을 때 사무엘을 데리고 제사장 엘리에게로 갑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함부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들을 본받지 않고 어려서부터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고 성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나실인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항상 성막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등불을 지켰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사무엘은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무엘을 기뻐하시고 말씀의 대언자로 세우셨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3:19)” 하나님은 이런 사무엘을 말씀의 통로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큰 위기 가운데 처했을 때 미스바에서 대대적인 회개 운동을 일으키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고 메시야 왕국의 기초를 놓게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 전국을 순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일생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께 헌신된 자였습니다. 나실인인 세례요한도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눅1:15-17).
오늘날은 이런 나실인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나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억대 연봉을 준다고 해도 안할 것 같습니다. 세상은 가면 갈수록 인본주의화되어 가고 신앙 또한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 우선이고 이 세대는 쾌락의 물결 속에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은 이런 시대 가운데 한 사람의 나실인, 하나님 앞에 헌신된 한 사람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99% 헌신하는 100명보다 100% 헌신하는 1명이 더 큰 일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적당히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철저하게 헌신되어 살아가는 한 사람의 나실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소수이지만 이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자로 헌신된 자로 드리기를 서원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불경건한 시대 속에 나실인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새겨듣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헌신된 자로 드려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장 22-2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하나님은 죄와 부정한 것들을 내보내고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나실인의 삶을 서원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 헌신하는 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복은 세상 사람들이 감히 누릴 수 없는 하늘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복입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을까요?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하나님 자신이 상 자체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복이요 가장 큰 상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복을 위해 기도하는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릴 통해 세상 만민이 가장 큰 복이요 가장 큰 상인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성결과 경건,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릴 통해 세상이 복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