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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마 8:23-27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마 8:24-27 /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일더니 물결이 배보다 높이 치솟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소리쳤다. `주님,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 것 같습니다' 26) 그제야 예수께서 일어나시며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그렇게도 겁을 내느냐?' 하며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폭풍이 그치고 사방이 잔잔해졌다. 27) 제자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순종하는가?' 하고 모두들 놀라워하였다.
본문은 10대 기적 중 네 번째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기적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신적 능력을 가지신 분인 것을 증거합니다.
풍랑 일어난 바다(23-24)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신 후 제자들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자 얼마후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파도가 덮쳐 왔습니다. 여기서 바다는 갈릴리 호수로서 그 규모가 바다라 여겨질 만큼 넓었기에 붙은 이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평안해야 할 바다가 큰 풍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여도 만사가 형통하고 대로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야 할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따라도 여전히 큰 놀이 일어나며 인생의 여정 속에 항상 문제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부르짖음(25) 제자들은 큰 풍랑이 일어나자 다급해졌습니다. 이에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호소합니다. 풍랑 일어난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과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큰 풍랑을 보자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가 뒤집혀 죽게 된다는 상황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믿는다면 큰 풍랑을 보고 두려워 떨며 불안해야 할 이유가 없겠지만 문제에 직면하면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비로소 예수를 찾게 합니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일은 신앙의 과정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심(26-27) 예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후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십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제자들이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말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창조주의 주권을 가지고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인 것을 나타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적 용 : 문제 앞에 두려워 떠는 믿음이 적은 모습입니까? 예수님만 신뢰하십니까?
도스토예프스키의 5분을 아시나요?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젊어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마지막 5분이 주어졌습니다. 모든 이들과 작별기도를 하는데 2분, 지금까지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에 2분, 1분은 자신을 품어준 아름다운 대지에 감사하며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기적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사형중지 명령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평생을 그 5분의 시간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다시 한번 다짐해 봅니다
< 설 교 >
인생 항로와 풍랑
풍랑 만난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났습니다. “놀”(seismov")이란 말은 “흔들림, 동요”를 의미하고, 신약성경에서 종종 “지진”이란 말로도 번역됩니다. 바다 가운데 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배가 함께 요동쳤습니다. 요동치는 바다와, 흔들리는 배, 그리고 거기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인생은 항해와 같습니다. 이 세상은 풍랑 이는 바다입니다. 우리는 이 바다를 건너야만 합니다. 인생 항로는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놀이 있고 파도가 있습니다. 순풍에 돛 단 듯이 즐겁게 가는 인생은 거의 없습니다. 예외 없이 풍랑 속을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사람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 풍파는 불행 그 자체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빠집니다. 낙심합니다. 좌절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왜 인생의 풍파를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풍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풍랑을 주실까요?
1. 연단, 혹은 성숙의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은 고난을 통해서 믿음이 커졌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고난을 통해서 젊은 나이에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성숙된 안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고난을 통해서 형제 우애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야곱 자신도 연단을 통해서 경건한 신자로 성숙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일 어린 시절을 평탄하고 풍요롭게 자랐다면 지금의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가난한 피난민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난을 이해합니다. 아버지 없이 유복자로 자랐기 때문에 결손 가정의 외로움을 압니다. 젊은 시절에 큰 병을 앓았기 때문에 병든 자의 고민을 이해합니다. 바다가 있고, 산이 있는 시골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의 풍요로움을 감상할 줄 압니다. 가난, 외로움, 병드는 것, 시골 생활...결코 좋아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없었다면 폭넓은 사색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을 겁니다. 고난은 성숙에 이르는 必要 不可缺한 방편입니다.
2.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아는 기회가 됩니다.
영적인 눈을 뜨는 계기가 됩니다. 욥은 중년에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수 천 마리의 가축이 다 죽었습니다. 열 명의 자식이 한 날에 죽었습니다. 살이 썩는 고약한 병이 들었습니다. 어느 하나 감당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 욥이 얻은 최대의 소득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사도 바울을 태우고 가던 알렉산드리아 배가 지중해에서 폭풍을 만났습니다. 276명의 승객들이 무려 14일 동안이나 파도에 휩쓸려 다녔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철저히 보여주신 겁니다. 바울은 폭풍 가운데 일어나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1-25) 요나는 풍랑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깨닫고 회개했습니다.(욘2장)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써 풍랑을 만났다면 당연히 좋을 결과를 기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절대로 주시지 않으십니다. 감당하는 것은 물론 좋은 결과를 주십니다. 성경은 풍랑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23-30) 하나님께서 소원의 항구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
어찌 되었든지 문제가 되는 것은 풍랑 자체가 아닙니다. 풍랑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제자들의 모습 속에는 풍랑 만난 성도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인생의 파도를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한 배에 타고 계신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풍랑을 해결하는 첫 번째 열쇠는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급히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가장 먼저 할 일은 주님을 찾는 일입니다. 주님을 찾는 일보다 다른 수단을 먼저 찾는다면 결단코 풍랑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병들어 병원을 찾기 전에 먼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세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직장을 구하기 전에 먼저 주님을 찾으세요. 시험을 보기 전에, 승진을 힘쓰기 전에 먼저 주님께 요청하세요. 사람과 다투기 전에, 논쟁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세요. 주님을 찾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주님을 찾지는 않습니다. 꼭 풍랑을 만나 다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한 배를 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님을 의식한 것은 풍랑 때문입니다. 적어도 풍랑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주님이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어느 시점에서 주님을 깨웠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마 분위기로 봐서, 한참 애를 쓰다가 배에 가득히 물이 차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니까 주님을 깨운 것 같습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 우리는 만사가 잘 되어갈 때에 주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배에 왜 선장이 필요한지, 선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요. 학생 시절에 제주에서 부산까지 카페리 호를 타고 밤중에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수 천 톤 급의 대형 여객선이기 때문에 흔들리지도 않고 평안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자유로이 얘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밤늦게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부산항에 도착하여 짐을 챙겼습니다. 배에서 내리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얗고 멋진 제복을 입은 선장과 승무원들이 내리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내 생명을 맡아서 인도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장과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인도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 항해에 예수님은 선장이십니다. 항해가 아무리 순조롭고 평탄해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 인생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 주님께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을 지나치게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입니다. 그들은 20년, 혹은 30 년을 갈릴리 호수에서 자랐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기후와 풍랑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일등 항해사들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조난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은 인생살이의 원동력입니다. 사업하는 데 대학에서 배운 경제원론이나 경영학을 의지하면 됩니다. 직장 일에 경험적 지식이 최고입니다. 굳이 직장 일이나 사업에 주님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문제는 풍랑입니다. 바람과 파도 앞에는 어떤 경험이나 지식도 무용지물입니다. 내가 가진 신념이나 결단도 재앙을 당할 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기꾼 앞에서 경제 원론이 도움이 됩니까? 불의의 사고 앞에서 최신 의술이 소용이 있습니까? 기상이변이나 천재지변 앞에서 항해술이 도움이 됩니까? 문제가 터지면 그 때서야 비로소 내게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평안한 항해에도 선장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아도 인생의 선장은 꼭 있어야만 됩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선장이십니다.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다 죽게 되어서 비로소 주님을 깨우지 마시고 일찌감치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님께 모든 삶을 맡기세요. 항상 도움을 요청하세요. 주님은 우리 길을 평탄케 해 주십니다.
3. 믿음을 크게 해야 합니다
풍랑에 대처하기 위해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믿음을 크게 키우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소동을 벌일 때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26절) 믿음이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크면 두려움이 줄어듭니다. 믿음이 줄어들면 모든 것이 다 두려워집니다. 예수님은 평안히 주무시는데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믿음의 차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이 적을 때에, 어린 하녀 앞에서도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충만할 때는 전혀 달랐습니다. 공회원들 앞에서 당당히 항변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그런가 하면, 감옥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쇠사슬에 묶여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군사 두 명이 곁에서 무장하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울 때까지 세상모르고 잤습니다. 엘리야는 믿음이 클 때에 아합이나 이세벨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850 명의 우상 선지자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해질 때에 아합과 이세벨이 두려워졌습니다. 외딴 곳으로 도망쳐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클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해질 때에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딴 소리를 했습니다.
세상만 바라보면 믿음은 졸아듭니다. 믿음이 졸아들면 세상일이 너무 크게 보입니다. 제자들의 눈에 풍랑은 크게 보이고, 자신들은 너무 작게 보였습니다. 요즘 自暴自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취직이 안 되어서, 공부를 못해서, 돈 떨어져서, 외모가 부족해서, 갈등 때문에... 이런 저런 사유로 삶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일들이 과연 우리 인생을 포기할 만큼 심각한 일입니까? 저는 어렸을 때에 머리에 흉터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갓난 아이 시절에 驚氣를 한다고 가마에다 뜸을 떴습니다. 그래서 정수리에 동그란 흉터가 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니니까 더 크게 드러났습니다. 사춘기 때는 너무나 고민이 됐어요. 이 상처 때문에 여자 애들이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장가를 못 가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머리를 기르면서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삼십 년이 넘도록 내 머리에 상처가 있는 것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최근에 머리를 짧게 깎으면서 비로소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왜 그렇게 고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만 바라보고, 환경만 바라보면 錯視 現狀이 일어납니다. 착시현상이 일어나면 큰 것이 작게 보이고, 작은 것이 크게 보입니다. 갈리버 여행기를 보세요. 갈리버의 몸이 갑자기 커지거나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몸은 항상 같은 크기였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나라에 가면 거인 대접을 받고, 어떤 나라에 가면 소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세상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커졌을 때, 우리는 세상 풍파를 이기는 거인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졌을 때, 우리는 풍파에 묻히는 소인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을 크게 할 수 있을까요? 유일하고 첫째 되는 방법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시야를 바꾸세요. 세상을 보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세요.
주님을 바라보면 인생이 제대로 보입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크고 소중합니까? 세상문제에 가로막혀서 중단 될 만큼 값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모든 피조물의 지배자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크고 가치 있는 인생들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내가 크게 생각하던 세상일이 그렇게 큰 일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내가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던 문제도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요즘 머리털이 자꾸 빠져서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머리가 큰 문제는 아닙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발소에 자주 가지 않아도 되고, 머리 감고 말리기도 좋고! 갱년기가 지나면서 건강도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남들이 아프다고 하면 나도 아픈 것 같습니다. 심장이 아픈 것 같기도 하고, 혈압이 오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까지도 느낄 만큼 예민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현대인들에게 특이한 마음의 병들이 있지요? 무슨 무슨 공포증이라고 하는 병명들입니다. 대인 공포증, 광장 공포증, 공황 장애, 우울증 등등. 병도 아닌 공포증도 많아요. 가난 공포증, 외모 공포증, 출세 공포증... 이런 병세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다 있어요. 이런 병을 이기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을 바라보면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곁에 계십니다. 그냥 계신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담대히 주님을 의지하세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세요. 그럴 때에 내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의 자리에 큰 믿음이 채워집니다.
4.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풍랑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즉, 풍랑을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됩니다. 본문은 자연계에 나타내신 주님의 이적입니다. 이 기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하게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주시요, 섭리의 주님이십니다. 내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내 인생을 설계하셨습니다. 내가 인생길을 지켜보십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내 삶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섭리하십니다. 내가 속한 가정, 내가 속한 이웃, 직장, 국가 사회를 주님이 주관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자연계의 복종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자연 환경까지도 다 주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 만물도 주님의 명령에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풍랑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바람과 바다는 생명이 없는 무생물입니다. 자연물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주님의 명령 앞에 복종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27절) 주님이 누구신지 올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을 단순히 인간으로 알고 믿는다면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알고 믿으십니까? 예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고 믿어야지 모르고 믿으면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이런 저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 때에 주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3년이나 주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은 주님을 누구로 알고 있었을까요? 베드로 사도가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복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신앙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복입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녔으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순히 모범을 보이신 도덕 선생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천국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도 없습니다. 껍데기 신앙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내게 어떤 분입니까? 도덕 선생입니까? 모범을 보이신 철학자이십니까? 다소간의 위로를 주는 교주입니까? 그것 가지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바람도 순종하는 예수! 어떤 병이든지 말씀 한 마디로 치료하시는 예수! 귀신이 놀라서 쫓겨가며 고꾸라지는 예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가지신 예수!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예수! 5000명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먹여 살리시는 예수! 창세 이후의 모든 인류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 분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나를 축복하시고 하나님 자녀로 부르신 구주십니다. 예수님의 신분을 가장 먼저, 가장 확실하게 알아차린 자들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사탄이요, 귀신들입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만난 귀신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하소연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 귀신들은 예수님을 잘 알아요. 참 제자들이 누군지 알고, 거짓 제자들도 알아요.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19:15)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으세요. 귀신들이 알아차린 예수를 제자들은 부활승천 하실 때까지도 제대로 몰랐어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처럼 “저가 과연 누구신가?”하면서 믿음 반 의심 반으로 따라가지 마세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따라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종교는 있으되 신앙은 없습니다. 인격 수양은 있으되 생명은 없습니다. 현세는 있어도 내세는 없습니다. 물질 축복은 있어도 영적 풍요로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믿는 사람과 모르고 믿는 사람은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의 구주십니다.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목자십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구해내십니다. 내 평생에 평안을 주시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내가 만난 풍랑, 고난과 시련이 오히려 주님을 깊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인생 행로에는 풍랑이 많습니다. 풍랑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행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오히려 유익한 기회입니다. 낙심치 말고 풍랑에 대처해야 됩니다. 첫째로, 한 배에 타고 계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됩니다. 둘째로, 믿음을 크게 해야 합니다. 풍랑 이는 세상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믿어야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이 복종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만난 풍랑을 통해서 오히려 주님을 깊이 알게 되고, 신령한 안목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