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지,1747>는 “산정(山亭)수사(水사)는 경치가 좋고 주인의 당명(堂名)정호(亭號)가 있으면 모두 기록했다.”고
했음에도, 거기에 ‘사인亭’ 기록은 없다.
<정묘지>는 ‘사인岩’에 대해 “옛 이름은 성암(省岩)으로, 전체가 돌로 층립되고, 천반(天半)을 포(抱)하고 강빈(江濱)에
임(臨)하며 예양강을 역포(逆抱)하니, ‘한문화표(悍門華表)’ 풍수지세이다. 아래는 조대(釣臺)이고, ‘사인 김필’이 유(遊)했기에 ‘舍人’이라
명(名)했다. 5대손 ‘금호 김여준(汝埈)’이 지은 ‘정사’의 옛터가 온전히 남아있다”라 했는데, ‘사인亭’은 언급되지 않았다. ‘추강
남효온(1454 ~1492)’의 <조대기,1491>에도 ‘사인岩’만 등장한다. ‘장육재 문덕구(1667 ~1718)’의 예양2曲은
‘사인岩’이고 ‘사인亭’은 아니었다. ‘방호 김희조(1680~1752)’의 ‘사인岩’ 방문 때에도 ‘사인亭’은 함께 나오지 않았는데, 아마
당시에도 ‘사인亭’은 없었을 것 같다.
- “과(過) 사인岩 유감(有感)”, 방호 김희조. (설암祖父以舍人遊於此 後人仍稱舍人岩.
'설암'조부께서 舍人으로 이곳에서 소요하였기에 후인이 ‘사인岩’으로 칭했다) 湖上層岩號舍人 금호강 위에 층암, 號가
舍人. 遠惟吾祖退休痕 선조 머문 흔적 멀리 사모해도 孱孫不肖成何事 불초 후손 어떤 일도 못 이루고 白首棲遑困俗塵
백수로 속진(俗塵) 헤맬 뿐이네.
거슬러 보면, 사인岩에 '김여준(1583 ~1654)‘의 ‘금호정사’가 있었으며, ‘사인亭’ 자체는 ‘은암 김몽룡(1708
~1788)’의 <사인亭 상량문,1786>으로 본격화되었을 것. 후대의 '사인亭 차운詩'들은 '김몽룡 詩‘를 원운으로 삼고 있다.
‘사인亭’에는 1944년 중수가 있었다. 장흥의 ‘사인岩, 사인亭’은 장흥의 서쪽 풍광을 살려주는 대표적 정자다. ‘남파 이희석(1804
~1889)’은 그 무렵 예양강에 정립한 3정자로 거명했다. <정묘지>에 언급된 ‘한문화표(悍門華表)’ 풍수지세는 활달한 전망을
두고, 좌우 주변을 장악하는 관문지세를 말할 것. 부근에 ‘사인店, 사인암峙’도 있었다. 그리하여 장흥의 ‘사인岩 사인亭’은 영광金氏 집안의
구심점이요, 자긍심이 배어있는 곳이다.
여기서 되짚어볼 사정이 있다. 사인亭에 모셔진 ‘설암 김필(1426~1470)’ 선생은 과연
‘계유정난(1453)’을 맞아 27세 舍人으로 낙남 은퇴한 것인가? 정4품 舍人은거에서 유래한다는 ‘사인亭’에 왜 2품관 참판영정과 2품관력
신도비가 있단 말인가? 살펴본다. 김필 선생은 1447년에 소과대과 동년급제를 하고, 1453년 기사관, 이조좌랑을 거쳐, 1455년
부정(副正),경차관을 역임하고, 1457년 ‘문과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1458년에 출사를 명받고, 1466년 경기관찰사, 1470년
충청관찰사가 된다. 돌이켜 설암선생이 처음엔 낙남은거를 시도했을지언정, 세조시대 실무행정가로 내내 봉직했으며, 50세에 못 미쳐 타계하고
말았다. 그러니 “계유정란에 반대하고 舍人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다.”고 잘라 줄이거나, “舍人을 거쳐, 이조참판과 3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낙남하였다”고 뒤집어 단정하면 아니 된다. 만약 여기에 의문을 품는다면 <조선왕조실록>도 물론이지만, 그 사인亭에 내걸린 ‘만포
심환지(1730 ~1802)’의 <설암선생 정각기(亭閣記),1799>로 확인할 수 있다.
‘심환지’는 말했다. “옛(昔)
의정부 사인(舍人)이었던 金公은 간우(艱虞)한 시대를 만나 둔우황야(遯于荒野)하며 금호강상(錦湖江上)설암(雪岩)에 머물게(止)되었다. 雪岩을
자호(自號) 삼고, 이곳을 좋아하여 장차 약장(若將)종언(終焉)하려했다. (중략) 창상만겁(滄桑萬劫) 세월 앞에 불전불마(不轉不磨)한 것은
선생이 서성이며 거닐었던 괴석바위(盤桓一怪石)다. 선생에게 ‘한 의로움(事一之義)’이 절박했으나, 직무(公車)에 강취(强就)하여 소명(召命)에
따른 도보(圖報)를 하였다. 훌륭한 문장은 대제학(文衡)을 맡을 만하고, 제수한 관작은 이조참판(天官之亞)이고, 세 곳(三路) 관찰사(福星)를
거친 곳에 그 당년유풍이 남았는데, 나이 50이 못되어(未知命), 급류용퇴(勇退)하여 이곳(是地)에서 장차 노년을 마칠(將而終老) 예정이었으나,
영웅의 용사(龍蛇)년에 철인(哲人)은 떠나고 말았다. (중략) 公과 방불(彷彿)한 모습을 찾고자한다면 이 바위(是岩)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황차(況) 석면(石面)에 남겨진(遺) 진상(眞像)은 늠름함이 公의 평생 모습과 같다. (후략).” 위와 같이 ‘심환지’는 그 전후사정을 완곡하게
분별했다. 처음에는 아마 ‘단종’을 위한 ‘사일지의(事一之義)’로 은둔하려 했지만, 또 다른 ‘소명도보(召命圖報)’ 차원에서 출사했음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시절 ‘설암’선생이 어떤 훼절로 비난의 대상이 된 일은 없다. 여러 관력을 거치고서 知天命 50세 이전에 급류용퇴하려
했음에도 바로 타계한데서 아쉬움이 크다. 촉망받던 아들 ‘석정 김괴(1450 ~1482)’도 32세에 떠나고 말았다. 장흥의 영광김씨는 서울에
기반을 두고 소과 대과에 급제한 ‘김필, 김괴, 김물’ 3父子 말고도 장흥 출신의 대과 2인(김여원,김급)과 소과 5인(김광원, 김구명,
김여중, 김희조, 김몽룡)을 배출하면서 향촌사회의 바퀴 역할을 하였다.
덧붙인다. 장흥 사인岩 사인亭에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10여년 머물렀다함은 그 평생 행적이 정연한 김시습의
<연보(年譜)>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사인岩의 ‘제일강산(第一江山)’ 각자(刻字)는 전국의 여러 정자에서 보이는 ‘미불체,
第一江山’ 편액과 과연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일까? 장흥의 부춘정과 창랑정에도 그런 ‘미불체, 第一江山’이 걸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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